[그 사람의 집]작가 표성흠 거창 ‘풀과 나무의 집’ |
작년 여름에 집 한 칸을 지었다. 대패질을 할 줄 몰라 그냥 나무 껍질도 벗기지 않은
통나무에다 흙을 발라 지었다. 그런데 그걸 사람들은 오히려 멋지다고 한다.
“어머나, 표시인 이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네?”
해마다 한 칸씩 집을 달아내다 보니 방마다 그
높이가 다르다. 터를 고르지 않고 땅 생긴 대로 집을 늘여나가다 보니 방이나 지붕이 층층이 되었다. 그런데 이 또한 신기한 모양으로 누가 설계를
했냐고 묻는다.
“집을 짓는데도 설계가 필요하냐?”
설계도 없이 짓다 보니 벽은 꾸불꾸불하고 방바닥도 울퉁불퉁한 집이
되었다. 그런데도 곡선미가 있단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이 집을 칠년에 걸쳐 짓고 있다. 무슨 거창한 고대광실 비싼 집을 짓는가?
그렇지 않다. 돈이 없으니까 어쩌다 원고료가 들어올 때마다 한 칸씩 달아내다 보니 그렇다.
작년에 지은 방값(이 방은 손님용
차방이다)을 한번 계산해보자. 통유리 4개 4만원(폐차장에 가서 대형버스 유리를 떼어왔다). 제 손으로 떼어가면 1장 1만원, 떼어 주면
2만원이래서 아들과 함께 우리 손으로 떼었다. 땀 뻘뻘 흘리며 유리창을 떼내는 게 안쓰러웠던지 봉고차 창문 3개를 덤으로 주었다. 지붕값
20만원, 출입문 18만원, 꺾쇠·못 1만5천원, 제재소 나무값 15만원… 또 있나? 있다. 전깃줄 값과 전구 바닥재로 쓴 자갈값, 기타 등등.
막걸리값까지 쳐서 1백만원 미만이다. 그래도 벽난로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벽난로는 아무래도 다시 만들어야겠다. 벽난로 전문가이신 서양화가 무영
선생께서 와 보시고는 왈 ‘이거는 영 아닌데요’라는 진단을 내렸다. 벽난로의 기본이요 생명인 ‘부너미’가 없다는 것이다.
“구성도
안하고 소설 쓰나요?”
된통 걸렸다. 이런 벽난로가 또 다른 방에도 있기 때문이다. 어쩐지 연기가 밖으로 나온다
했더니.
처음 이 집을 짓게 된 사연은 이렇다.
“아버지 고향집에 가 보니까 전에 살던 집이
허물어졌던데요.”
해병대 제대를 한 아들이 고향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었다. 십 년쯤 전 일이었다. 복학을 기다리는 동안 할 일도
없고 하니까 가서 집이라도 짓겠다는 것이었다. “임마, 네가 어떻게 집을 지어?” 군대에서 그것보다 더한 집도 지어봤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오십만원만 있으면 짓는데.”
‘이게 뭘 몰라도 한참 모르지. 오십만원에 집을 지어?’ 초등학교 다닐 때는 우리 동네
사장님이 타던 차를 오십만원에 내놨다며, 흥정하는 걸 봤다고 그걸 사라더니-그래서 나는 20년 전에 차를 샀었고 그 덕에 드라이브 코스 써가지고
돈도 벌었었다-이제는 오십만원짜리 집이라니.
허물어졌다는 그 집은 우리가 신접살림을 차렸던 70년도 원두막의 한쪽 벽에 돌을 붙여
지은 흙집으로 애들이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마침 거금 2백만원이 인세로 들어와 있던 때라 현금카드를 주며 무제한 쓰라고
내려보냈더니 한 여름 내내 새까맣게 고생만 하고 와서는 ‘그 집짓기가 쉽지 않더라’고만 하고는 휑하니 사라져버렸다.
이왕 옛집을 헐었으니 그 자리를 비워 둘 수는 없었다. 마침 조카사위가 학교 선생을 집어치우고 그런 일을
하겠다고 사업을 벌인다기에 그에게 방 한 칸을 부탁했다. 한 겨울 내 뚝딱거려 집을 지었다는데 내려가보니 통나무집 지으라고 돈 줬는데 H빔으로
기둥을 세운 쇠나무집을 지어놓았다. 그것도 그래놓고는 사업에 실패해 미국으로 날라버렸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것은 미니 2층으로
다락방을 하나 넣어놓은 점이다. 여기서 내려다 보면 읍내 제일 높은 집도 눈 아래 들어와 천상의 방 한 칸을 가진 기분이 된다. 내려다보면 저
아래로 달내강이 흐르고 그 너머 푸른 들판 사이로 3번국도가 이어진다. 내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 옛날의 원두막과 똑같은 풍경이 그대로
펼쳐진다.
나는 이 다락방을 너무 좋아한다. 이곳은 아무나 못 올라오게 한다. 다락방 책꽂이엔 일제 때 일본 유학을 갔던 삼촌들의
책과 문학청년 때 읽던 빛바랜 문학지들이 있다. 밤이면 별이고 달이고 그대로 쏟아져 들어온다. 아침이면 안개가 산자락을 휘감아 오르고 아침이슬이
보석이 된다.
이 원룸의 뒷벽을 이용해 다시 방 한 칸을 넣었다. 그리고 또 거기에 화장실이 딸린 방을 하나 덧붙였다. 어머님이
암진단을 받고 ‘두 달밖에 못산다’는 사형선고를 받아 간병을 할 며느리와 환자가 서로 한 방처럼 통할 수 있는 방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집이 있긴 했지만 재래식 화장실이 바깥에 있어 대소변을 받아내기가 힘들어 화장실 딸린 방을 새로 넣고 거처를 옮겼다.
이 방 두
개는 목사인 처남과 아들이 며칠만에 뚝딱뚝딱 만들었다. 이 방들 역시 제 맘대로 만든 방이라 그 높이가 각기 다르고 빗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빗소리만 들리면 괜찮은데 소나기가 오면 어디서 새는지 아주 장중한 빗방울 소리를 동반한다. 그렇지만 아주 실용적이고 창을 크게 내 바깥이 한
눈에 들어온다. 두 달밖에 못산다던 어머님은 이 방에서 구들장 지고 사년이나 더 살아계셨다. 그동안 서울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차츰 살림살이도
하나씩 늘어났다.
“그만 여기 눌러앉아 버릴까?”
서울만 올라가면 골머리가 띵하다는 아내 역시 시골생활에 반대하지
않았다. 한 번 올라가면 여간해서 내려오기 힘든 귀향을 우리는 이렇듯 쉽게 해버렸다. 과수원 나무를 캐어내고 잔디를 심고 정원수를 심기
시작했다.
나는 지구촌 오대양육대주를 다 돌아보는 행운을 얻은 사람이다. 일이 곧 여행인 직업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신문·방송 등에
레저기사 쓰는 일을 했고 나중에는 그런 원고 쓰는 기획사를 운영하기도 했고 지금은 남은 사진자료로 단행본을 만든다. 그 덕에 좋다는 곳은 다
다녀봤는데 집 짓고 살기에 이곳만한 명당자리는 없다는 생각이다.
대저 명당자리는 어떤 곳인가? ‘좌청룡 우백호 현무주작’을 거론하는
풍수지리설을 논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곳에 앉아 마음이 편안해야 명당자리다. 나는 여기 앉아 하루종일 멍청하게 앞산을 바라보거나 먼산을 바라보며
지낼 때가 있다. 먼산은 지리산이요 앞산은 덕유산 줄기다. 그러니까 백두대간 품 안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우리집을
‘풀과나무의집’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풀(艸)과 나무(木)가 사는 집(人)은 합해서 차(茶)라는 말 이 된다. 차는 마셔도 되고 안마셔도 된다.
밥은 꼭 필요한 음식물이지만 차는 아니다. 기호식품이다. 그렇지만 밥이 몸을 살찌우는 대신 차는 정신을 살린다. 무슨 말인가? 차 마시듯
쉬엄쉬엄 쉬어가며 살자는 뜻이다.
당호를 붙이고 제일 먼저 도서실을 지었다. 책장을 짜놓으니까 책꽂이는 저절로 채워졌다. 작가들과
출판사들이 책들을 보내준 덕분인데 아직 집 지은 돈은 빚으로 남아 있다. 설계된 집을 지었기 때문인가.
풀과나무의집에는 몇 년째
전국 유일의 어린이시비공원이 조성되고 있는 중이다. 문학비라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내
생각은 다르다. 이미 죽은 자들의 문학비를 세워 뭣하자는 것인가? 이제 자라는 새싹들에게 마음의 고향을 하나씩 만들어주자는 게 그
목적이다.
“늬네들은 앞으로 지구촌 식구들과 살아야 할 거다. 살다가 고달프거든 꼭 여기를 들려 네가 세운 시비를 한번
봐라.”
풀과 나무의 집은 이제 내 혼자만 사는 살림집이 아니다. 그 때문에 누구나 언제라도 와서 쉬엄쉬엄 쉬면서 차라도 마시는
방이 필요하게 된 것인데 아직 미완성이다. 언제 또 돈이 생기면 다른 방 한 칸을 달아낼 생각이다. 아이들이 별을 볼 수 있는 그런 방을.
▲작가 표성흠씨는 1946년 거창에서 태어났으며 1970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세번째 겨울’이 당선돼 등단했다. 한국일보, 일요신문사 등에서 레저기사 기자로 활동했다. 시집 ‘농부의 집’, 창작집 ‘선창잡이’ ‘열목어를
찾아서’, 장편소설 ‘토우’, 여행서 ‘길따라 발길따라’ 등이 있다.
〈글·사진
표성흠(작가)〉 |
첫댓글 어제 저녁 서울서 한의사 한분이 제 집에 오셨다가, 홀연 가지산으로 사라져부리던데.. 흘
가지산이라면 우리 앞산인데......앞에 두고도 못가봤는데 나도 언제 홀연 가봐야 될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