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는 학교다
1. TV 경연
최근 모 방송사의 음악 경연 프로그램을 보며 연속으로 눈살을 찌푸렸던 기억이 있다. 참가자들이 3명이 팀을 이뤄 노래를 하고 그 중 한 명을 탈락시키는 방식이었다. 우선 심사위원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높은 순위의 참가자가 만만한 참가자를 선택하고, 그 만만한 참가자가 다시 다른 만만한 참가자를 선택해 한 팀을 이룬다. 그렇게 모인 팀은 협력해 곡을 선정하고 편곡해 공연하는 미션이다. 팀 공연을 위해 팀원들과 협력하고, 동료를 이기기 위해 경쟁하는 모순된 상황이었다.
내 눈에 거슬렸던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높은 음역과 능숙한 테크닉을 가진 참가자였다. 그는 자기에 맞게 옥타브를 높여 곡을 편곡하고 나머지 두 명이 따라야했다. 그 중 한 명은 소화하기 어려운 높은 음 때문에 음정 이탈할 위험을 안고 경연에 참가해야 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은 현란한 테크닉을 가진 친구의 의도에 대해 지적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남을 배려하지 않고 곤경에 처하게 했기 때문이다.
또 한 팀도 그야말로 그 분야에 인정받는 실력자로 자신감이 넘쳐 오만해 보였다. 자기 본위로 이끌어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나머지 두 명은 그 참가자의 온갖 어려운 용어에 주눅이 들고 그의 적극적인 리드를 자연스럽게 맞추며 받아들였다. 하지만 실력자가 마지막 리허설과 실제 공연에서 자신의 파트를 즉석에서 바꿔 부르며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현란을 떨자 둘은 당항하고 배신감을 느꼈다. 이를 항의하자 오히려 실력자로 인정받던 참가자는 이런 항의에 자존심이 상해하며 이들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결국 오만한 실력자들은 심사위원의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살아남아 다음 라운드에 올라갔고, 다른 참가자가 탈락되었다. 인간적이었던 사람이 탈락되고 경쟁심과 이기심으로 충만한 다소 비인간적으로 보였던 참가자들이 통과되어 씁쓸했다.
요즘 TV의 대세인 경연프로그램에서 목격되는 장면이다.
작년 겨울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라는 요리경연 프로그램도 그랬다. 흑수저와 금수저의 계급장 뗀 경쟁이 기본 구도였다. 그런데 최종 결승경연에서 우승자와 준우승자의 태도가 상반되어 보였다. 상대를 존중하고 자신의 독창적이 해석과 스토리를 담으려던 경연자는 지고, 상대방을 씹어먹겠다며 오만과 패기를 보였던 청년요리사가 우승했다.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승부를 걸고 화려하고 섬세한 맛으로 우승을 했다. 경쟁심이 충만해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종종해 거슬리곤 했다. 문화의 세대차가 느껴졌다.
텔레비전에 온통 경연프로그램이 휩쓸기 시작한 것은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부터였다. 시즌1에서 이소라는 사회자이며 경연에 참가자였다. 방심한 듯 여유와 익살을 부리던 김건모가 탈락했다. 김건모 자신도 충격을 받았지만 다른 참가자들의 충격도 컸다. 우승자를 정하는 1회성 경연은 있었지만 탈락자를 정하는 무한반복의 경연은 없었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문화 속에 살았던 이들에게 이 방식은 너무나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이소라는 예술을 비교하고 인기(시청자들 선택)에 따라 탈락시키는 방식이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해 중도하차 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타협에 의해 김건모가 구제되고 이소라도 복귀하여 프로그램은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며 마무리 될 수 있었다. 경연프로그램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텔레비전으로 보는 러시안 룰렛 같았다. 생존을 위해 가수들은 필사적으로 기예를 선보였다. 관객을 사로잡는 고음 위주의 지르기 창법이 음악계의 정석처럼 자리 잡았다. 시청자들의 선택에 의한 오직 한 명의 영광, 그리고 모두의 탈락! 생존게임 덕분일까? 한국 음악가들의 실력도 최고에 도달했다. K-POP으로 알려진 아이돌 시스템과 같은 구조다.
한마디로 무한 경쟁 속에 소비자에 의해 선택되는 상품과 생산자만이 살아남는 극단적 자유시장이 미디어에 포맷으로 자리 잡았다. 경쟁의 경쟁에 의한 경쟁을 위한 자본주의자들이 찬양을 받고 있다.
우리 시대의 거부들 모두 그렇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 일론 머스크. 예술도 그렇다.
물론 고전인 소포클레스의 비극작품들이 고대 그리스의 연극경연 우승 작품이고 셰익스피어의 비극작품들 또한 대중의 인기를 끈 작품이었다. 분명히 경쟁을 통해 우승자를 선발하는 방식은 막강한 동기부여가 된다. 대중에 의한 검증 방법으로 공동체 문화를 크게 향상시키는 면이 있다. 하지만 독점적 방식은 옳지 않다. 여전히. 사실이다. 독점이 횡횡한다면 다양성이 사라지고, 약자와 소수자들은 희생된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존재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은 자연뿐만 아니라 문화도 마찬가지다. 상품이 문화가 될 수 있지만, 문화가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자들은 경쟁과 독식의 자유시장 체제를 옹호한다. 어떤 면에서 자본주의자들은 진화론적으로 경쟁과 도태의 생태계 안에서 적자생존한 인간들이다. 그런 사고방식이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힘이 법이고 진리였다. 규모의 경제, 독점!
트럼프도 그런 자본주의자다. 한심한 유아독존과 이기심은 창피를 모른다. 노골적인 미국 우선주의가 미국인에게 먹혔다. 파시즘적으로. 세계는 다시 제국주의 시대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듯 강대국의 갑질에 쩔쩔 매고 있다. 러시아에 대해 유럽이 그렇듯, 이스라엘에 대해 이슬람이 그렇듯,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회하기 어렵다. 독점한 힘은 배타적이고 절대적이다. 비인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