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자동차에 요구되는 조건이란 무엇일까? 고급스러움이나 파워풀함, 다양한 기능 등 여러 조건이 있겠지만 라이드매거진이 생각하는 중요한 요구 사항은 아래 두 가지 정도가 아닌가 싶다. 첫 번째는 자동차 하드웨어가 프리미엄이란 이름에 어울려야 하고, 내외장 디자인은 세련되고 소재의 퀄리티도 높아야 하며, 실내 공간은 넓고 조용해야 한다. 승차감은 좋고, 동력 성능에 여유가 있어야 할뿐더러 최근에는 환경 성능도 갖추어야 한다.
두 번째는 자동차 자체보다는 자동차가 가진 사회적 메시지와 지위와 관련이 있다. 자동차는 의도적이든 그게 아니든 한눈에 소유자의 취향과 사회적 지위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 메시지가 올바른지는 논외로 하고, "저 사람은 저런 차를 타고 있구나”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줄 수도 있고, "과연 저 사람이 선택한 자동차구나"라는 긍정적인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더 현실적으로 이야기해 보면, 호텔에 들어갈 때 자동차를 취급하는 호텔의 반응이 달라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누구나가 인정하는 고급차를 타는 당신의 럭셔리 라이프가 보다 충실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기아차의 플래그십 세단 K9가 2014년을 맞이해 페이스리프트를 진행했다. 이번 변화는 북미시장에 투입되는 K900을 개발하면서 얻어진 결과를 충실히 반영한 것이 특징이다. 거기에 가격 정책의 변화도 따라왔다.
K9 디자인을 처음 봤을 때, 개인적으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근 수년 동안 기아가 구축해온 디자인 아이덴티티의 희박해졌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는데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K9은 이제 눈에 들어온다. 아주 조금 손댔을 뿐인데 묘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전장 (5,095)×전폭(1,900)×전고(1,490)mm의 크기는 럭셔리 자동차 클래스에서는 표준적이다. 긴 휠베이스, 액센트가 있는 캐릭터라인, 큰 사이즈의 휠 등 각 요소의 비율과 우아한 자세가 조화롭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 페이스리프트 모델의 목적은 구매연령의 상향조정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전 모델의 디자인이 30대 후반, 40대 초반부터를 타겟으로 했지만 실제 구매층이 4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개선된 것이라 한다. 실제로 그러한 디자인 개선 덕분에 이번 K9은 신형 제네시스 출시라는 악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월 판매량에서 상당한 선전을 기록했다고 하니 연령대가 약간 올라간 디자인 전략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좋은 자동차의 꼭 그래야만 하는 비율(Proportion)을 자신감 있게 다듬어서 탄탄한 존재감을 만들어 낸 것 같다. 럭셔리 세단의 요소를 잘 갖추었다. 온라인을 둘러보다 보면 가끔 K9을 두고 제네시스와 비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사실 휠베이스의 길이로 보자면 제네시스보다는 에쿠스와 비교를 하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K9의 설계방향도 제네시스보다는 에쿠스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프론트의 인상이 강렬하다. 프론트 그릴이 바뀌니 입체적으로 조형된 보넷과 더욱 잘 어울린다. 커진 프론트 그릴에서 강한 인상을 주는 라인을 따라가면 헤드라이트를 만난다. 당연히 LED 라이트다. 강렬한 눈빛의 새로운 LED 헤드램프는 임팩트가 크다. 디자인에 강렬한 임팩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뛰어나다. 찬찬히 외관을 바라보는 동안 새로움이 서서히 전해져 온다.
인테리어는 실용성을 중시한 수평 기조의 레이아웃이다. 블랙 하이그로시 재질로 마감된 센터페시아를 보면, 우드그레인이 많이 사용되는 에쿠스나 체어맨의 철학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 전달된다. 우아한 선과 면의 구성이나 상하가 교차되는 형태의 스타일리시한 인스트루먼트 패널은 기아차가 말하고자 하는 젊은 플래그쉽이란 것이 무엇인지 느껴진다.
9.2인치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정보를 보기에 충분하고, UVO 시스템은 사용해보면 금방 익숙해지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다만 영어와 한글일 때 기능이 서로 상이한 부분도 옥에 티처럼 존재한다. 차량속도와 엔진회전수를 보여주는 계기판은 윤곽이 분명하다. 두 게이지 사이에는 운행정보 디스플레이가 자리하고 있는데, 가독성이 좋다. 메뉴는 스티어링횔에 위치한 버튼으로 선택할 수 있다. K9도 다른 럭셔리 자동차들처럼 버튼들이 많지만, 큰 불만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잘 배치되어 있는 편이다.
하지만 버튼이나 스위치들의 클릭감이나 고급감은 살짝 아쉽다. 경쟁차와 느낌이 다르다. 시비를 거는 말이 아니다. 좀 더 타이트하고 단단하게 느껴지게 만들면 좋겠다. 이런 사소한 것의 완성도까지 더 높여야 진정한 럭셔리 자동차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프 중앙과 좌우 도어트림의 조명은 세련되고 은은한 화장을 한 것처럼 보인다. 파노라마 선루프는 개방감이 크고 고급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K9의 이런 스타일은 모던함을 통합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그제큐티브카 이면서도 운전자가 운전해도 좋은 느낌이 든다.
착석 위치를 낮게 설정해도 전방 시야는 좋은 편이다. 이런 시야감은 만족스럽다. 입체적인 조형으로 특별한 느낌을 더한 씨트는 장시간 앉아 있어도 피곤을 느끼지 않게 한다. 계절에 따라 시원하거나 따뜻하게 운전자를 배려한다. 몸을 잘 잡아 주는 시트는 편안해서 5미터 이상의 대형 세단을 운전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게 한다. 그래서 편안한 운전이 가능하다. 운전을 하건 동승자로 탑승을 하건 자동차에 타면, 사적인 공간이 유지된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중요한데, K9의 넓은 공간과 각 요소들의 레이아웃은 잘 믹스되어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만들어낸다.
솔직히 말하면 주행성능에 대한 기대치는 크지 않았다. 막상 시승해보니 아쉬운 점도 있지만 특정 영역에서의 드라이빙 재미도 독특한 면이 있다. 럭셔리 세단의 우아함에 부드러운 동력성능이 절묘하게 융합된 것 같다. 334마력을 발휘하는 3.8리터 V6엔진은 반응성이 좋다. 엔진과 배기계의 소리는 매력적이지 않지만 귀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엔진의 힘은 큰 파도에 실려오는 듯한 가속감을 끊김 없이 전해주니 마음에 든다. 엔진의 파워는 넉넉하지만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160km/h 이상의 고속에서는 가속이 탄력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K9으로 그런 정도의 속도를 낼만한 소비자는 많지 않을 것이라 본다.
8단 자동변속기 덕분에 엔진 회전수는 낮은 영역에 있으며, 발진도 유연하고 기분이 좋다. 8단 자동변속기는 매끈하다라는 말이 바로 이런 느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이다. 발진시에는 약간 무게를 느끼게 하지만, 가속은 부드럽다. 직진 안정성도 뛰어나다. 달리기 시작하면 자동차의 크기는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가벼움이 전면으로 도드라지는 느낌은 아니지만, 촉촉한 움직임은 무게를 의식하지 않게 한다. 고급 차량으로 확실히 발전한 것이다.
라이드는 노긋노긋한 편이다. 실내에서는 평온하다. 승차감 자체는 노면 감각을 차단한 것이 아니라 소음만을 차단한 듯한 느낌이다. 도심의 막히는 구간에서 엔진의 풀파워를 이용해서 쭉 빠져나올 때의 부드러움과 민첩함은 충분히 드라이빙의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하지만 K9은 다이나믹함에 포커스를 둔 것이 아니라 안락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튜닝되어 있다. 운전자는 노멀, 에코, 스포츠 운전 모드를 선택할 수 있고 겨울 드라이빙을 위한 스노 모드가 있다. 스포츠 모드를 주행하면 좀 낫지만, 큰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코너를 돌 때 부드럽게 탈출하는 듯한 느낌이라기 보다는 미끄러지듯 나간다. 조타감은 좀 둔한 편이다.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K9도 좋지만, 레이싱 DNA를 추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운전자가 차선을 벗어날 때 시트 좌우에서 햅틱(진동)으로 알려주니 졸음 운전을 방지하는 효과가 매우 컸다. 밤 늦게 돌아오면서 이 기능을 상당히 감사하면서 운전했다. 하지만 도심에서 차선을 바꾸면서 운전할 때는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면 기능을 재워두면 된다. 아주 편리하다. 특히 그 기능을 씨트 버튼쪽으로 빼둔 것은 좋은 인터페이스다. 자주 사용하는 기능은 아나로그 버튼으로 빼두면 좋은 것이다. 인포테인먼트 디스플레이가 커졌다고 거기에 기능을 넣어야 하는 강박관념을 버리는 게 소비자에게 도움이 된다. 최근 럭셔리 자동차에 그런 추세가 강해져서 하는 말이다.
전 세계적으로 판매대수, 시장점유율을 매년 안정적으로 높여가면서 점점 상승의 파도를 타고 있는 기아차지만, 그 약진은 엔트리와 중급 세그먼트에서의 성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기아차가 이제 프리미엄 브랜드로 포지셔닝하려면, 럭셔리 세그먼트에서의 도약은 필수적이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기아차가 지향하는 브랜드 에센스를 고급스럽게 드러내고, 첨단기술을 자랑하는 대상이 바로 플래그십이 중요해진다. K9은 내가 누구다, 기아차가 무엇이다,라고 당당히 선언해야 하는 것이다. 스타일 관점에서 보면 아주 명확하다. 그런데 주행성능을 보면 K9의 캐릭터가 다소 아쉽다. K9은 스포티한 느낌의 에쿠우스는 아니다. 외관 스타일링의 특징이 부족한 에쿠스와는 달리 시각적으로 확실히 구분되는 다이나믹한 모습이다.
뭉툭하면서도 세련된 기아의 타이거 노즈는 여전하며, 캐릭터 라인의 미묘한 디테일이나 전반적인 비율은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주행성능은 다이나믹보다 노긋노긋하다. 어쩌면 이그제큐티브와 스포티함의 경계선상에서 다른 중용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현재 시점은 기아차의 브랜드 아이덴티티 정착에 이르는 길의 중간쯤이라고 생각하면 이 정도의 변화가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 기아차는 프레스티지는 정량화할 수 없는 정성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만큼 시간이 지나야 하는 것이다.
K9 페이스리프트 모델은 웰메이드라고 말할 수 있다. 예상을 넘어서게 이모저모를 정감 있게 담아낸 것도 반갑다. 그러나 하드웨어 성능만으로 고객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새롭게 출시되는 럭셔리 모델들은 점점 더 고성능화되고 있다. 더 크고, 더 빠르고, 더 고급스럽게로 요약되는 이런 추세는 사실 소비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 뿐이며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의 폭만 좁힐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기업의 입장에서 고객을 위한 진정한 차별화 포인트를 다시 생각해볼 시점인 것 같다. 적절한 가격에 소비자가 필요한 성능과 옵션들을 제공하고, 자동차를 소유하고 일상의 반려로 삼을 만한 기쁨을 제공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K9은 균형을 이룬 것이 아닌가 싶다.
기아차가 K9을 통해 고객에게 제시하는 제안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남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중요한 디테일에 들인 공은 뛰어나다. 매일 자동차를 이용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K9의 나긋나긋함은 분명히 중독성이 있어 그 편안함을 한 번 기억하면 엔진 시동을 걸 때마다 그 느낌을 기대하게 만들 정도다. 페이스리프트를 통해서 남과 다른 느낌을 만들어 내는 방식을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계속해서 그 방향성을 지켜보고 싶은 게 지금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