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별궁(別宮) 연못인 궁남지(宮南池)는 부소산성 맞은편에 있다.
현존하는 우리 나라 연못 중에서 최초의 인공조원(造苑)인 궁남지는 사비도성에 위치한 것으로서
백제 무왕 35년(634)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내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몇 개의 초석이 남아 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가 있으나 초라하고 퇴락하였다.
연못 동쪽의 초석과 기와파편을 보면 그곳이 별궁의 건물터였음을 알 수 있다.
궁남지 유적은 원래 3만평 규모로 1964년에 국가 사적 제135호로 지정되었으나 1965년∼1967년에 약 1만3천 평 규모의 현재의 모습으로 축소 복원되었고 주변 일대는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27 백제 본기 무왕조에 의하면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여 주위 물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물 속에 섬을 쌓아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시켰다.'고 설명해놓았다.
이러한 규모 때문에 궁남지가 풍류의 장소뿐 아니라 적을 막기 위한 외호(外濠)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현재의 유적을 살펴볼 때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곡선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 연못은 자연형의 곡지(曲池)였던 것으로 고증된다. 섬은 30여년 전에도 못의 중앙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이것을 뜬섬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며 그 주변으로부터는 토기와 가와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었다. 이 섬이 바로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판단된다.
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 한가운데에 신선이 사는 세 개의 섬 즉 봉래(蓬萊)·방장·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하여 정원의 연못 속에 세 개의 섬을 꾸며 불로장수를 희원했다고 하는데 궁남지의 방장선산은 이것을 본뜬 것으로서 이러한 꾸밈새의 정원을 신선정원(神仙庭園)이라고 부른다.
궁남지 동편에는 화지산(花枝山)이라는 낮은 산이 있다.
그 서쪽 기슭 즉 궁남지로 면하는 완만한 경사지에는 대리석으로 바닥으로부터 팔각형으로 쌓아올린 우물이 남아 있고 그 주위 일대에는 많은 기와조각이 산재한다. 이 자리는 백제의 사비정궁의 남쪽에 설치되었다고하는 이궁터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것으로 보아 궁남지는 이궁의 궁원지로 꾸며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궁남지는 신라의 안압지와는 달리 고유한 이름은 아니었던 것 같다. 『三國史記』백제 본기 비유왕 21년(447)조에 ’궁남지 가운데에 화재가 있었다(宮南池中有火)’라고 기록되어 있어 한성시대 도읍지에도 궁남지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 ’궁전 남쪽에 연못을 팠다(穿池於宮南)’라는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궁남지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였던 것 같다. 三國遺事 무왕조에 궁남지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실려 있다.
무왕의 부왕인 법왕(法王)의 시녀였던 여인이 못 가에서 홀로 살다 용신(龍神)과 통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이가 신라 진평왕 (眞平王)의 셋째딸인 선화공주(善化公主)와 결혼한 서동(薯童)이며 아들이 없던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바로 이 서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이곳이 별궁터였고 궁남지가 백제 무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별궁의 연못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궁남지는 백제의 조경수준을 엿볼 수 있는 사적으로 『日本書紀』에는 궁남지의 조경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무왕 35년(634)에“궁성의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나 되 는 곳에서 물을 끌어 들여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한가운데에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선산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현재의 연못은 1965~67년 에 복원한 것으로, 원래 자연늪지의 1/3정도의 규모이다.
* 이 연못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무왕조(武王條)에 "3월에 궁성(宮城)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 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라고 되어 있다.
사실,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이미 한성시대(漢城時代)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한성시대에 조영된 왕궁에 딸린 연못은 아직 발굴된 바 없어서 그 실체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에 비해 웅진(熊津)시대의 왕궁이었던 공산성(公山城) 안에서는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연못 이 왕궁지(王宮址)로 추정되는 건물지(建物址)와 함께 발굴되었다. 공산성에서 발굴된 이 연못은 바닥이 좁고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원형의 연못인데 직경 7.3m, 바닥직경 4.8m 그리고 깊이 3m의 크기를 보이고 있다. 이로써 보면 백제에서 왕궁 근처에 연못을 만드는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성시대와 웅진시대의 연못은 그 자체만 확인될 뿐 여기에서와 같은 삼신산(三神山)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서동은 과부인 어머니와 지룡(池龍) 사이에서 태어나 마를 캐서 팔며 살았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선화공주가 서동과 사랑하여 밤이면 남몰래 서동의 방으로 안겨간다는 노래를 퍼뜨려 공주를 곤경에 빠지게 했다.
선화공주가 궁중에서 쫓겨나자 서동은 공주와 백제에서 혼인했다. 서동은 공주로 인해 마를 캐던 곳에 쌓여 있던 것이 금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금을 지명법사(知命法師)의 신통력으로 신라 궁중에 보냈다.
진평왕에게 인정을 받게 된 서동은 왕이 되었다. 서동과 선화공주가 사자사(獅子寺)에 가는데 큰 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났다. 서동은 공주의 부탁에 따라 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미륵삼존을 기려 미륵사를 세웠다.
첫댓글 궁남지 다녀왔읍니다..밤연꽃도괜찬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