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수난사
9반 전명수
안동김씨의 60년 세도정치는 왕권을 극도로 약화시켰으며 그것은 곧 사회의 혼란과 불안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과 서구 열강들이 조선을 향하여 압박해 오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12살 어린나이로 왕위에 올라 몰락해 가는 조선왕조와 풍전등화 같은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지만 고통 속에서 외세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되고 말았다. 고종은 1852년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하여 익선군에 봉해지고 1863.12월에 조선 제26대왕으로 등극하였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의 조정은 안동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는 안동김씨의 권력구도를 깨뜨리기 위하여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게 되었다. 1863년12월에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수렴청정을 하다가 섭정의 대권을 흥선대원군에게 위임시켰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10년간 권력을 잡고 자신의 의사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되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분쇄하여 쇠락한 왕권을 되찾고 외세의 압박에 대적하기 위하여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의 재정을 확립하고 경제, 행정개혁 등으로 세도정치의 폐해를 완전히 일소하였다. 그러나 세계정세를 바로 읽어내지 못하여 쇄국정책을 편일이나 천주교도의 지나친 박해로 혼란스러운 사회와 국제문제를 발생하게 되었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간 8천여 명의 천주교신자들을 학살하였으니 이 사건이 ‘병인박해’라 한다. 이때 프랑스 신부9명이 함께 죽자 1866.10월에 프랑스는 군함7척과 병력1천 명이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이에 제주목사 양헌수의 전략으로 정족산성에서 싸워 격퇴하였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 한다. 그리고 미국상선 제너럴 샤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군민의 화공으로 불타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를 ‘신미양요’라 한다. 미국은 1871.5월 군함5척, 병력 1천2백여 명, 함포 85문 등으로 무장하고 강화도 해협으로 침입해 들어 왔다. 이에 조선군이 대항하였으니 ‘손돌목 포격사건’으로 조·미간의 최초충돌이었다. 미국은 강화도를 완전히 장악하다가 강력한 쇄국정책에 밀려 한 달 만에 물러갔다.
1873년에 드디어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민비의 친정세력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들은 쇄국정책과 달리 개발정책을 펴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을 맺고 제물포, 부산, 원산항이 개항하였다. 1882년에 구식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 소속 군인에 의하여 임오군란이 발생 하였고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발생하였다. 민씨 정권과 고종은 급변해가는 동북아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여 혼란은 가중되고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이어지게 되었다. 1894년에 동학혁명으로 폭발한 민중봉기를 제압할 수 없어 지원 요청한 러시아군대가 들어 왔고 일본 역시 그들과의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농민봉기가 중단되었음에도 이들은 돌아가지 않았고 일본은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정권을 탄생시켰다. 1894.7월에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내정개혁이 단행되었는데 이를 ‘갑오경장’이라 한다. 1894.12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때부터 조선 정복을 위하여 본격적으로 내정간섭을 시작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배일친러(排日親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몰아내려하였지만 위협을 느낀 일본은 1895.8월에 명성왕후를 시해하고 친일 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을미사변 후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1896.2월에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옮겼다가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정국은 불안하였고 수차례에 걸쳐 고종 양위모의, 독살계획, 황제 폐립음모사건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일본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통하여 한일협약을 강요하였으며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이 조약은 일본의 강제적으로 맺은 것이라 무효라 선언하였지만 미국의 호응을 받지 못하여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에 의하여 외교권이 박탈된 상황이었고 이러한 사정을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이상설, 이준을 헤이그에서 개최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미국은 필리핀에 주둔하는 대신에 일본은 대한제국의 지배를 용인하는 ‘가쓰라· 테프트 협정’을 체결한 상태였었고 특사의 활동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 특사를 지원 요청을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고종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세력과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고종은 재위 43년7개월만인 1907.7.20 강제 퇴위하게 되었다. 1910.8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강제 합병하였고 이런 상황을 9년간이나 지켜보다가 1919.정월에 69세의 일기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고종은 명성왕후 민씨를 비롯하여 7명의 부인과 6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능은 홍릉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리에 있다.
첫댓글 고종은 불행한 임금이네요. 재임기간에 여러가지 변을 겪었네요. 결국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임금이 되었군요. 잘 읽고 나갑니다. 송하님 행복하세요.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안동김씨의 천하였으며 그후 친정을 하게대엇으며 친정세력이 득세하고 이들은 쇄국정책을 달리하고 개발정책을편 계기가 대엇군요
그후 민씨와 고종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하지 못하고 끝내 일본이 우리나라을 무력으로 점령하게 대었군요. 역사 기록 잘읽고 갑니다.늘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