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세코에서 나오자 다시 마닐라의 고층 건물과 차들로 둘러싸였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 간극이 이해되지 않았다. 가난과 부(富). 그것이 어떻게 이렇게 가깝게 존재할 수 있는지. 사람의 삶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내가 뒤에 남겨놓고 온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기분이 좋지 않았고, 생각을 하고 싶었다. 바세코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공정여행 코디네이터는 바세코에 들어가기 전 여행자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행복의 조건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돈, 가족, 건강, 명예 등 뻔하지만 우리 삶을 흔들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교과서적으로, 물질적인 부는 행복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답은 쉽게 할 수 없었다.
내내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앞에서 나온 것처럼 돈, 가족, 건강, 명예를 다 가지고 있으면 정말 행복할까? 바세코에서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만난 주민조직의 대표, 주민조직의 총무 등 그럴듯한 직위를 가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직위가 있을 뿐이지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거나 생활이 넉넉하다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헌데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의 삶을 공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또 자신들의 삶을 비관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우리 앞에서 웃고 있었다.
거리에서 마주친 이들의 표정 역시 그랬다. 행복의 기준을 물질적인 것으로밖에 세울 수 없는 우리의 눈에는 그들의 삶이 무척 고단하고 암울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웃고 있었다. 심지어 노래 부르고 있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노래 부르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집에 노래방 기계를 설치해 놓고 부를 정도라는데, 마닐라도 끼앙안도 바나우에도 아닌 바세코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을 제일 많이 보았다. 허물어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판잣집 처마 밑에서, 구정물이 고인 골목길 위에서 사람들은 더러는 둘 셋씩 모여, 더러는 홀로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머라이어 캐리의 ‘Hero’를 부르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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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세코 지역 바로 옆에 위치한 고층빌딩
바세코 주민조직인 카발리캇의 대표 조지에게 한 여행자가 물었다. “이곳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나요?” 생활고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얘기가 우리 사회에는 만연해 있다. 그와 같은 눈으로 보자면 이곳의 자살률은 상당히 높을 것 같았다. 조지는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2년인가 3년 전쯤 자살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빈곤한 생활이 원인이 아니라 애인과의 문제 때문이었다고 한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여행 배낭을 쌀 때 참 고민을 많이 했다. 샴푸를 넣은 뒤 린스를 챙기자니 헤어 에센스도 필요할 것 같았다. 긴 바지와 짧은 바지를 넣고 나니 칠부 바지도 넣어야 할 것 같았다. 소설책과 시집을 뽑아드니 수필집이 읽고 싶어질 것도 같았다. 그렇게 몽땅 집어넣다보니 35ℓ 가방이 턱도 없이 작았다. 꾸역꾸역 넣을 수 있는 만큼 밀어 넣고 미리 지어보니 어깨가 뻐근하도록 무거웠다. 막상 여행을 와 쓴 것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가방에서 한 번 꺼내어 보지도 않고 도로 들고 온 것도 수두룩했다. 말 그대로 짊어지고 갔던 것 대부분은 그냥 짐일 뿐이었던 것이다. 행복도 이와 같지 않을까? 가볍게 가자면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것을 하나 둘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넣기 시작하면 배낭은 무거워지고 길은 고생길이 되고 만다.
행복의 기준이 무어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행복으로 가는 길에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많이 가질수록, 행복은 점점 짐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바세코를 행복한 동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필리핀 현지 오리엔테이션에서 아시안브릿지(Asian Bridge) 필리핀 지부의 성리혁수 국장이 이런 말을 했다. “필리핀의 빈곤 문제는 우리도 유심히 봐야 할 문제입니다.” 필리핀이 빈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외채의 문제다. 국가 예산의 1/3이 원금도 아닌 이자를 갚는 데 사용된다. 외채의 문제에서 파생되는 민영화 문제, 복지 악화 문제 등이 필리핀의 빈곤층을 더욱 두텁게 하고 있다. 우리가 필리핀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미래 한국 사회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빈곤이라는 말은 벌써 우리 사회에 넓게 퍼져 있는 그림자이다. 다만 그림자를 내 것으로 인식하지 못한 것일 뿐.
가난과 부로 행복과 불행을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빈부의 차를 개인의 노력으로 뛰어넘을 있는 사회 속에서, 물질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개인마다 다양한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슬럼, 지구를 뒤덮다》(마이크 데이비스, 돌베개)는 세계 도시의 빈곤화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저자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낸 글의 일부를 옮겨본다.
“고속 도시화, 고가 주택을 제외한 주택 물량 부족, 빈민이 도심에서 쫓겨나는 상황, 올림픽 등 대형 사업을 빌미로 한 도시재개발, 도시가 무질서하게 뻗어나가면서 발생하는 각종 병리적 현상들……. 이러한 이 책의 많은 주제들이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글ㆍ사진_이선희 가늘고 오래 공부한 끝에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다방면에서 부족함을 절감, 불꽃 튀는 경험을 원하던 중 공정여행에 반해 청년 소셜벤처 공감만세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북촌을 여행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동화를 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월간 토마토에서 어른이 읽는 동화를 연재중이다. ● E-mail: sunheemarch@gmail.com ● Facebook: www.facebook.com/sunheemarch
공감만세는 '자유롭게 고민하고 상상하며 길 위에서 배우는 청년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라는 구호 아래, 대전충남 지역에서 ‘최초’로 법인을 설립을 한 청년 사회적기업이다. 현재 필리핀, 태국, 제주도, 북촌, 공주 등지에서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있으며 공정한 여행이 필요한, 공정한 여행을 실현할 수 있는 지역을 넓혀갈 생각이다. 공정함에 감동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보자. ● 홈페이지: fairtravelkorea.com ● 카페: cafe.naver.com/riceter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