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남종화 도입의 주역이자 조선식의 정착을 가져온 대가가 심사정이다. 하지만 그의 역할에 비해 기록이 너무 적어 아쉬울 정도이다. 그런 가운데 그가 이미 20대 중반에 이름을 날리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가 있다. 조선후기의 문인 남태응(南泰膺 1687-1740)의 미간행 문집인 『청죽만록(聽竹漫錄)』에 들어있는 화사관련 기록이다.
『청죽만록』에는 「화사(畵史)」「삼화가유평(三畵家喩評)」「화사보록(畵史補錄) 상」「화사보록 하」등 네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 문집은 1989년무렵 유홍준 前문화재청장이 발굴해 학계에 보고함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부터는 이들 글만 가리켜 편의상 『청죽화사』라 불리게 됐다.
이 『청죽화사』에 심사정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잠깐 언급돼있다. 「화사보록 상」에는 정유점(鄭維漸, 심사정 외조부)에 대한 얘기를 하며 그 속에서 ‘심정주의 아들(심사정) 또한 산수와 인물을 열심히 하여 (요즘) 새롭게 유명해지고 있다. 대개 정선에게서 배우는데 그 거친 자취를 얻어볼만한 것이 없다(廷周之子亦攻山水人物新有名, 盖學於鄭敾而得其麤跡, 盖無足觀也)’라고 했다.
남태응이 이 글을 쓸 무렵이 1732년이었으므로 이 때 심사정은 26살이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는 벌써 20대 중반에 인물과 산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던 것이다. 남태응이 다음 구절에서 겸재 정선(1676-1759)에 대해 인색한 말한 것은 비슷한 연배인 윤두서(1668-1715)를 대호평한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남태응은 윤두서의 화품을 묘품(妙品)이라 일컬으며 김명국, 이징과 나란히 3대가로 손꼽았다. 반면 글 속에서 겸재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는데 다분히 노론 주류였던 겸재에 대한 반발심 외에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는 듯하다.
심사정 <주유관폭> 1740년 견본담채 131.0x70.8cm 간송
어쨌든 이 글이 화가 심사정에 대한 첫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전하는 현재 그림의 기년작은 훨씬 뒤인 34살 때 그린 <주유관폭>(1740년)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이는 그의 남종화 수련의 한 뿌리라 할 수 있는 『개자원화전』에 나오는 관동의 산법을 바탕으로 해 그린 것이다. 먹을 거칠게 쓰는 중기의 절파풍 바위묘사를 벗어나 부드러운 필치의 반복으로 산석을 그려 바야흐로 남종화풍 표현이 손에 익어가는 시대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 다음으로 알려진 기년작은 앞서도 소개된 <와룡암소집도>이다. 이때 그는 38살이었다.(1744년) 그리고 그 다음이 1747년(41살)때 그린이 이 <강상야박도>이다. 이 그림은 남종화풍의 묘사 외에도 그가 그린 시의도 중 연대가 밝혀진 그림 중 가장 빠른 것이기도 하다. 이 그림에는 새로운 사조의 도입 초기에 보이는 진지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후기의 남종화가 소략하고 간략하게 멋만 내는 것에 비하면 중후하고 묵직한 깊이감이 충만해있다. 그림 속 강가의 저녁 풍경을 그린 것으로 전경과 중경 그리고 원경이 사행하는 구도 속에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다.
심사정 <강상야박도> 1747년 견본담채 153.6x61.2cm 국립중앙박물관
앞쪽 언덕 위에 몇 그루 나무는 『개자원화전』에 나오는 황자구 기법을 따른 것이다. 오른쪽으로 꺽인 방죽을 따라 가다보면 만나는 버드나무는 선으로만 묘사한 것으로 역시『개자원화전』에서 송나라 사람들이 많이 썼다는 고수류(高垂柳) 기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버드나무 아래에 배 한 척이 묶여 있고 사공 하나가 무릎을 끼고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
멀리 원산 옆에 ‘野逕雲俱黑 江船火獨明(야경운구흑 강선화독명)’이라고 쓴 시구가 보인다.‘들길은 구름과 더불어 어둡고 강가 배의 불빛만 홀로 빛나네’이다. 이 시는 방랑의 시인 두보가 유일하게 평온한 생활을 누렸던 성도 시절에 지은 「춘야희우(春夜喜雨)」라는 명시의 한 구절이다.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好雨知時節 희우지시절
當春及發生 당춘급발생
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
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野徑雲倶黒 야경운구흑
江船火獨明 강선화독명
曉看紅濕處 효간홍습처
花重錦官城 화중금관성
고마운 비 시절을 알아
봄을 맞아 모든 것을 피워내고
바람 따라 살며시 밤에 들어와
만물을 적시나 가늘어 소리가 없네
들길은 구름과 함께 어두운데
강가 배에는 등불 홀로 반짝이네
새벽에 붉게 물드는 곳을 바라보니
금관성 꽃송이 이슬 머금고 다소곳 숙여있네
호우는 때맞춰 내리는 비를 말하고 금관성은 당시 두보가 있던 성도 성을 가리킨다. 때맞추어 내리는 봄비로 만물이 다시금 소생할 준비를 하는데 그 평화로운 움직임은 매우 조용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들길도 여전히 어둡다고 했다. 그런데 강가의 배에는 등불만이 홀로 빛을 발하고 있고 이슬비에 젖은 꽃은 동이 터오는 붉은 안개를 배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고 했다. 봄비에 젖어있는 어느 봄날 이른 새벽의 평화로운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소설『지리산』의 작가 이병주는 두보의 시와 삶을 정리한 『두보』에서 이 시에 대해 해설하면서 화(火)자와 독(獨)자에 주목하라고 했다. 캄캄한 밤에 유독 반짝이는 배의 등불(火)은 밝아서가 아니라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했다. 그래서 두보가 독(獨)자를 썼다는 것이다. 이병주의 책에는 이 지적 외에도 두보의 이 시는 이미 고려 때 유명해 정몽주도 이 구절의 뉘앙스를 가져다 쓴 것이 있다고 소개했다. 참고로 함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春雨細不滴 춘우세부적
夜中微有聲 야중미유성
雪盡南溪漲 설진남계창
草芽多少生 초아다소생
봄비라 보슬보슬 듣지 않더니
밤이자 나직나직 소리 나누나
앞시내 넘실넘시 눈도 다녹아
풀싹도 파릇파릇 돋아 나렸다(이병주 번역)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면 현재가 그린 봄밤의 강가 풍경은 시 그대로이다. 그런데 두보 시 전체를 보면 이 봄밤은 보통의 봄밤이 아니다. 때 맞춰 봄비가 조용히 내리며 만물을 포근히 적시고 있는 봄밤, 즉 비 나리는는 봄밤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 속에는 밤과 비라는 비정형적 실체가 어떻게 그려져 있는가. 옛 그림에는 나름대로 비 오는 날의 정경 또는 비온 뒤의 풍광을 나타내는 데 쓰는 기법이 따로 있었다. 안개 기법이다.
<강상야박도> 부분
이 그림의 중단을 보면 배가 매어져 있는 강 건너편에는 마을이 어렴풋이 보인다. 여기에 주변을 살짝 옅은 먹으로 칠하고 가운데를 희게 남겨두는 비안개 수법이 쓰이고 있다. 이 는 검게 보이는 산의 중턱에도 겹겹이 반복되고 있다. 밤을 나타낸 것은 담묵으로 처리한 수면 표현으로 대신했다.
이렇게 현재는 담묵과 선염 효과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비 오는 봄밤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현재 후기에 보는 거칠고 분방한 필치는 보이지 않지만 대신 40대의 성실함과 자신감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 수작의 하나라고 할 있다.
살며시 소리 없이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를 평화로운 눈길로 지켜본 두보의 이 시는 현재 이후에 남종화가 크게 유행하면서 자주 시의도의 테마가 됐다. 현재보다 두세대 쯤 뒤의 문인화가인 학산 윤제홍(鶴山 尹濟弘, 1764-1840 이후)도 이 시를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윤제홍이 자기보다 20살이나 적은 화원화가 초원 이수민(蕉園 李壽民, 1783-1839)이 그린 물가의 밤풍경 그림에 다시 이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이수민 <강선독조> 지본수묵 29.4x41.5cm 개인
그림부터 먼저 보면 짙은 숲에 이어진 강가에 배 한 척이 그려져 있는 모습이다. 갈대밭 사이로는 인가 몇 채도 보인다. 옅은 먹이 전체적으로 살짝 깔려 있어 밤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앞쪽 언덕의 숲과 인가 쪽의 갈대와 나무는 짙고 옅은 먹으로 구분해 가까운 것은 짙게 먼 것은 흐리게라는 원칙이 쓰이고 있다.
이처럼 여린 먹으로 분위기를 잡고 가는 먹선으로 사물의 형태를 어렴풋이 그리는 것은 김홍도가 흔히 쓰는 기법이다. 이수민 산수화는 단원풍을 따랐다고 하는데 여기에서도 단원풍의 맛을 느껴볼 수 있다. 그림 왼쪽에 학산의 글이 있다.
두보 시에‘들길은 구름과 함께 어둡고 강가 배의 등불은 홀로 빛나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그림에 비로소 그 진경이 보이니 그림인지 시인지 모르겠도다. 초원 늙은이가 그리고 학산이 쓰다.
杜老詩云 野徑雲俱黑 江船火獨明 此幅乃見其眞境 不知是畵哉詩哉. 蕉老寫鶴山題.
두노시운 야경운구흑 강선화독명 차폭내견존진경 부지시화재시재, 초노사학산제.
이 내용으로 보면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처음부터 두보 이 구절을 그림을 그리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만 느껴진다. 한 가지, 낙관에서 학산과 초원은 나이 차이가 한 세대가 나는데 어째서 초원호에 노(老)자를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초원의 나이가 40이 넘은 것으로 배려해 학산이 그렇게 불러준 것은 아닌가 하고 추측될 뿐이다.
그런데 학산은 이를 그리기 전에 시를 한 번 읊어주지 않았나. 그림 속은 어두운 밤만이 배경일뿐 비 내리는 모습은 선뜻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y)
첫댓글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