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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시인선 12 / 김성수 시집
<짚불곰장어>
해설
초월의 길,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박 윤 배 | 시인
1.
시인의 자서 혹은 시인의 말이 한 시인의 시를 들여다보는 유일한 지름길일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난해한 현대시의 시 읽기에 있어서 이해의 통로를 찾기 어려울 때 시인의 시작노트를 읽어보거나 시인이 쓴 아포리즘을 먼저 탐색하다 보면 닫혀있던 감상의 입구를 쉽게 찾을 뿐만 아니라 한 시인의 시 세계가 품고 있는 상징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도 있다.
김성수 시인의 시집 서두의 <시인의 말>에서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말하고 싶었다.”는 고백 또한 시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말’의 방법으로 시라는 형식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인다. 또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차가운 이성을 녹이고/ 데워진 가슴을 어루만져 길을 내어주는 시를/ 만난 것은 어쩌면 필연일지 모른다.”는 진솔한 고백은 아마도 자신의 삶에 주는 어떤 가치 있는 변화와 함께 말할 수 없음을 말할 수 있음으로 해서 얻어지는 치유의 길을 시에서 찾을 수 있었다는 고백 혹은 암시이기도 하다. 지나온 여러 삶의 회억과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된 것도 시의 힘일 것이다. 감각의 깨어남과 정서의 환기는 곧 사랑의 에너지가 되고 성찰의 피를 원활하게 돌리는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후문학파(문학도를 꿈꾸었지만 생활전선에 떠밀려 인생의 전반부를 보내고 생의 후반부에 새롭게 꿈에 도전하는 문학인)에 해당하는 대개의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첫 시집을 상재하는 김성수 시인 또한 버릴 수 없는 유산처럼 유년의 기억과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사적인 시들을 첫 시집에 포함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과거에의 회억이 시를 써야겠다는 첫 시발점이 되는 경우는 많은 늦깎이 시인들에게서 나타난다. 어쩌면 그런 시들이 자신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상상력의 창고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창고는 함부로 헐어내다 보면 금방 바닥이 난다. 이때 시인이 새 물을 어떻게 받느냐가 결국 과거에 머물지 않는 창조의 문 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광기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시인이 되는 관건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서 끌어올려야 할 것은 어쩌면 기억이 아니라 느낌이어야 할 것이다. 기억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유리한 쪽으로 편집되는 것이며 현재의 오감을 어떻게 깨워서 과거의 경험이 주는 느낌을 미래로 버무려 낼 것인가를 고민할 때가 되었음을 첫 시집 이후에야 시인은 알게 되는 것이다. 비로소 자신의 세계를 가진 시인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2.
김성수 시인은 이제야 시집을 세상에 내어 놓지만 시력이 만만찮아 보이는 시인이다. 이는 위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시인이 꼭 시집 안에 담고 싶었던 과거 반추형의 시들 몇 편과 가족사적인 시들을 제외하고 보면 시인의 세계가 극명할 뿐만 아니라 사유의 깊이와 조탁된 시어 구사력, 비유의 활달함과 종교적인 성찰로 이미 오랜 밤을 시라는 무형의 예술과 오랜 씨름의 시간을 겪었음을 이번 상재하는 시집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오늘도
시커먼 구렁이를 배에 두르고
깊은 오수午睡에 빠져 있는가
- 「절벽 도라지」 마지막 3행
절벽이라는 현실 상황에 대한 암시적 묘사를 시작으로 시집 첫 장을 열면 만나게 되는 그의 시 「절벽 도라지」는 도라지가 어떻게 하루를 건너 오랜 세월을 살아내고 있는지를 잘 묘사함은 물론, 진술 중 “나는 편안하다”라고 말하는 시인의 역설이 놀랍다. 하늘을 창백한 화선지로 비유함은 물론 “힘찬 한 획 그어 놓고/ 아 한 조각 우주에 비껴선 경허의 넋이여”까지 상상력의 극점을 끌고 올라간 뒤 위의 마지막 3행으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 마지막 3행을 앞서 전제한 객관적 묘사가 없다면 선시다. 아니 선시풍이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이 마지막 3행이 시로서 놀랍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앞에서
바람 타고 나비처럼 하늘거리다
번개가 허공을 가르던 어느 날
절벽 바위 속으로 빨려들어 왔다
바위 한 덩어리 품에 안고
그날의 붉은 해를 먹고
비릿한 바다 내음에 취해
저녁노을 타고 거닐다
달빛을 덮고 새벽을 기다린다
때로는 가파르고 외롭게 보일지라도
나는 이대로 편안하다
오래전부터 시간은 멈추고
고독과 두려움은 그대의 몫이다
늘 깨어 있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우리의 인연은
하늘만이 알고 있다
- 「절벽 도라지」 전반부
라는 전제가 뒤의 3행이 주는 의미와 사유의 깊이를 더하여 선시풍이지만 절심함으로 와닿게 읽힌다. 그냥 일상 혹은 잘 갈아엎은 밭에 심어진 도라지가 아닌, 절벽을 붙들고 있는 도라지, 도라지를 붙들고 있는 것이 절벽인지는 알 수 없지만, 80년대 딱히 선시라고는 말할 수 없는 어떤 깨달음의 목소리를 닮아가려던 시집 『애린』 김지하, 『남해금산』 이성복, 『하늘이불』 조정권 등의 시적 시도를 보는 듯하다. 역사로부터 계시를 찾거나 끊임없는 자기부정으로 세속적 욕망에 저항하려는 노력과 우주와 나의 합일을 통해 자아의 희열을 찾으려는 각각의 노력들이 결국 선시가 아닌 선시풍의 시를 낳지 않았던가. 아마도 시인은 시에서도 언급했지만 경허 선사의 불교사상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어떤 자세를 시에서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선시풍의 시를 쓰려는 시인들이 우리 시단에는 분명히 우후죽순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껏 작은 깨달음으로 큰 깨달음의 환상을 시로 쓰려고들 하지만 거의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명 이러한 시에 이름을 붙이면 깨달음과 초월의 시라고 할 수 있겠다. 부정적인 견해를 예로 들면 가공의 초현실을 즐겨 창조해온 거짓 낭만주의자들에 대한 칸트kant의 경고가 떠오른다. 결국 진여眞如의 세계를 노래한다고 다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을 시인은 언어적 형상화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에게도 현실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초월의 시적 장치로 김성수 시인은 자신의 시에서 활달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한국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남성적 이미지를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 불교적 냄새가 물씬한 윤회라는 제하의 시를 보면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숲속을 산책하던 칸트의 영혼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을 안고
비명을 지르다가 눈 덮인 히말라야 정상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빙하수 따라 바닷속 깊숙이
용왕을 배알한 후
거대한 고래로 환생還生하니
검푸른 창해滄海는 고래가 내뿜는
물기둥의 파편으로 비가 내리고
칸트의 숨결이 깃든 비는
뜨거운 사바나를 적셔 임팔라는 살찐다
야심한 보름달 밤 광막한 초원 한가운데
죽은 고목 등걸 위 걸터앉은 표범은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허연 송곳니를 드러내고
임팔라를 씹고 있다
고독한 표범의 송곳니가 반사하는 달빛을
한 줌 모아 나는 홀로 시를 쓰고 있다
- 「윤회輪回」 전문
위 시는 윤회의 과정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시인은 고독하다. 송곳니에 반사하는 달빛이 시인의 고독을 이야기하는 주 매개물이다. 시인은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읽으려 한다. 즉 갈고 닦는 자로서의 시 쓰는 자신을 윤회의 한 장면에 놓고 있다. 위 시에서 칸트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히말라야에서 창해로 사바나로 건너가면서 고래, 임팔라, 표범 등은 윤회의 과정이 된다. 몸이 바뀌는 동물들은 상상력의 산물일 뿐 달빛 아래 송곳니라는 작은 매개물 하나가 세밀하게 관찰되고 있는데, 그 작은 이빨 하나에 온 우주의 질서를 담아내듯, 아마도 그가 꿈꾸는 것은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보려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존재의 근본은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벗어나고자 하는 현재도 욕망의 한 표현일 수 있다. 시인이 말하는 윤회도 따지고 보면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우리에게는 죽음이 있음으로써 아름다움을 욕구하며 존재의 신비로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인이 윤회라고 흔한 시제를 붙인 것 같지만 밋밋한 삶에 상상의 충격을 주면서 자신의 시를 향한 열정을 고백하고 있다.
맛 찾아 파고든 뒷골목에서
용암이 구운 공룡 고기는 구수했고
천둥이 고아낸 용꼬리 탕은 얼큰했다
자작나무 껍질 두르고 용궁을 지키는
민어 아가미 살도 샅샅이 발라먹고
아득한 봉황 알은
번개에 튀겨져 매끄러웠다
하늘 목로주점에서 만난 북극성과
수억 년 묵은 김치를 씹으며
신선주 한 사발 들이켜고
이윽고 다다른 양념 볶은
자갈치 곰장어를 마주하니
온몸을 불사른 볏짚의 맛이
어머니 같고
칼칼한 소주가 스며들수록
보인다
힘차게 요동치며 깊은 바다
모래 속을 파고드는 장어와
볏짚 속에서 잠자던 곰팡이까지
다 아른거린다
태양을 먹고 바다를 마신 나는
봉인된 가슴이 열리고 희뿌연 시야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얼굴 지야 진이
이제야 나는 안다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맨 것이
사랑이었음을
- 「짚불곰장어」 전문
앞서 시 「윤회」가 죽음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는 시라면 이 시는 일상의 체험을 체험답지 않게 바꾸어 놓은 전반부 “용암이 구운 공룡 고기는 구수했고/ 천둥이 고아낸 용꼬리 탕은 얼큰했다/ 자작나무 껍질 두르고 용궁을 지키는/ 민어 아가미 살도 샅샅이 발라먹고/ 아득한 봉황 알은/ 번개에 튀겨져 매끄러웠다/ 하늘 목로주점에서 만난 북극성과/ 수억 년 묵은 김치를 씹으며/ 신선주 한 사발 들이켜고” 여기까지는 과장된 표현이다. 본 음식(짚불곰장어)이 나오기 전의 곁들인 안주쯤일 것이다. 그다음 나온 본 음식에 대한 묘사는 과장되지 않았다. 어머니를 연상하는 정도다. “이윽고 다다른 양념 볶은/ 자갈치 곰장어를 마주하니/ 온몸을 불사른 볏짚의 맛이/ 어머니 같고/ 칼칼한 소주가 스며들수록/ 보인다/ 힘차게 요동치며 깊은 바다/ 모래 속을 파고드는 장어와 볏짚 속에서 잠자던 곰팡이까지/ 다 아른거린다” 여기까지는 무난한 묘사일 뿐이다. 2연으로 첫 행에서 “태양을 먹고 바다를 마신 나는”은 곰장어와 아마도 곁들인 술로 봉인된 가슴이 열렸고 의문의 지야, 진이는 누구일까? 첫사랑일 수도 아닐 수도 현실의 가족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체성은 띠지 않아도 그 이름이 주는 정감은 충분히 느껴진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고백한다, 사랑이었음을.
길게 눈을 찢는다고
세상이 잘 보이는 것은 아니다
칼날로 콧날을 오뚝하게 세운다고
당신의 자존이 우뚝 서는 것도 아니다
립스틱으로 아무리 붉게 바른다 해도
그대의 작은 불씨가 타올라
마그마가 될 수는 없다
어느 날 바람결에
환갑 아내의 흔들리는 어금니 앞에서
나는 잠시 주춤거린다
둥글게 닳은 뿌리 끝에 투영되는 청춘의 꽃 잔영
녹아내린 뼛속에서 아이들 얼굴이 반짝이고
찰나의 순간 흔들리는 빈자리를 스치는
아린 슬픔 하나
평생을 지탱해온 꽃 뿌리를
이제는 서서히 내려놓을 때
그리움이 이별한 허공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펄떡이는 내 심장에 묻는다
- 「아내의 어금니가 흔들리네」
“어느 날 바람결에/ 환갑 아내의 흔들리는 어금니 앞에서/ 나는 잠시 주춤거린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이 시 또한 사랑의 마음이 자신의 아내의 어금니를 통해서 확인된다. 그러면서 “평생을 지탱해온 꽃 뿌리를/ 이제는 서서히 내려놓을 때/ 그리움이 이별한 허공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펄떡이는 내 심장에 묻는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주름진 외모 등은 인위적 성형으로 얼마간 고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늙음 앞에서 무력해지는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둥글게 닳은 어금니의 뿌리에 대해서 시인의 눈은 과거 김춘수 시인의 시 「처서 지나고」에서 한 번 멎었다가 가랑비가 태산목 커다란 나뭇잎을 적시고 새벽에는 할 수 없이 “귀뚜라미 무릎도 젖는다.”고 표현한 그 세밀한 눈 그 이상의 관찰력을 보여준다. 흔들림은 곧 빠질 것을 암시하고 빠지려 하는 이빨에서 청춘의 꽃 잔영을 만나고 녹아내린 뼛속에서 얼굴 반짝이는 아이들까지 만난다는 진술은 탁월한 상상이다. 또한 빠지고 나면 남을 빈자리의 허전함을 아린 슬픔이라 노래하는 걸로 보아서 시인은 사랑의 그릇이 큰 시인인 것이다.
3.
김성수 시인이 상재하는 이번 시집의 시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과거의 반추를 통한 가족사적인 일상을 노래한 시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 곳곳에 등장하는 지상에서 하늘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 신성함의 영지라 할 수 있는 히말라야를 찾아가는 수행의 여정일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가만히 내려놓고 싶어 하는 곳이 어쩌면 상징의 거처로 그려낸 히말라야가 아닐까.
여러 시 속에서 앞서 아내를 노래한 「아내의 어금니가 흔들리네」도 인상적이지만 모성을 다룬 몇몇의 시편에서 시인의 인간적인 체험과 사실을 그대로 그려냄으로써 담백한 서정이 물씬 풍겨난다. 소개하면
바다제비의 꿈은
남태평양 해초에 피 같은 침 묻혀
동굴 천장에 동그마니 붙어있다
알 깨고 나온 새끼는 창공을 날아오르고
온기 남은 빈집은 허물어져
황제의 혀끝을 찌르니
매혹의 그 맛이
어미 새의 감미로운 사랑이라면
지나가는 바람이 알려준
파 뿌리의 물컹한 맛이 익어갈 즈음
주름진 어머니의 굵고 거친 손마디로
푸른 근대줄기 뚝뚝 끊어 넣고 끓인
그윽한 토장국이 마냥 그리운 것은
사랑의 아픔이런가
- 「모정 1」 전문
이 시는 토장국 같은 그런 사랑의 맛이 어머니의 손맛임을 노래한 시다. 어머니가 푸른 근대줄기를 뚝뚝 끊어 넣는 행위와 바다제비가 남태평양 해초에 피 같은 침 발라 지은 바다제비집의 그 맛은 아마도 동일할 거라는 시인의 추측이 시 속에 녹아 있다. 얼마나 신선한 대비인가. 시인에게 모성은 결국 어떤 고통도 편안하게 잠재워 줄 수 있는, 치열한 삶에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가면 언제나 토장국 끓여놓고 반겨줄 것 같은 그런 모성임을 시인은 알고 있다. 또 다른 시 「어머니의 왕벚꽃」 “꽃 속에 깊숙이 박힌 당신의 미소가/ 밤의 보문호수를 깨우고 있습니다” “왕벚나무 등걸만큼이나/ 굵은 당신의 손마디마다 탄생하는 맛들을 기억합니다” “이미 나는 이곳에 없지만/ 유독 왕벚꽃 한 송이/ 눈물에 젖어 있습니다”에서 벚꽃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심사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한편 문득 의문이 드는 한 귀절 “이미 나는 이곳에 없지만”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지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이곳에 없다니? 유체이탈의 화법인가? 현대시의 새로운 시도에서 가끔 만나기도 하는, 몇몇 시인들은 몸 밖으로 영혼을 탈출시켜 우주 허공에서 현실 속 자신의 유체를 관찰하며 시를 쓰기도 한다는 그런 기법의 시도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시간 뒤섞는 기법 즉 현재를 과거로 과거를 현재로 과거를 미래로 마구 뒤섞어 시간의 나열성을 거부하려는 일종의 몸짓으로 “이미 나는 이곳에 없지만”은 과거(어머니)를 여기 현재에 데려다 놓음으로써 나는 나를 미래에 두는 낯선 상상으로 평이한 시를 상당히 흥미롭게 한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를 쓴 시도 한 편 눈에 띈다. 또 다른 시 한 편은 아마도 은지라는 이름의 자녀의 코넬대학 박사 됨을 축하하는 축시다. 부모님을 향한 마음을 쓴 시는 왠지 무거운데 그에 비해 자녀를 축하하는 이 시에서 시인은 세속적 기쁨에 한껏 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이것이 아무런 가식도 없는 부모의 마음이라는 듯 시인은 훨훨 날고 훨훨 솟구치고 있다.
저녁상을 마주하고 턱받이를 걸어주는
엄마 손길에 반짝이던 아버지의 정수리
당신의 손에 이끌려간 유년의 한때
백발수염 한방도사가 맥을 짚고 하던 말
“그놈 참 불칼이네”
막내아들은 몸살을 앓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당신은 소리쳐 아들 부르고
철부지는 부끄러워 숨고 청춘의 공백은
당신의 정수리에 내려진 공터만큼이나 넓었지만
울타리 속 아픔과 갈등을 한 아름 안고
묘 터에 집착하던 나날에도
제사 때마다 잔디 캐어 오라던
엄동설한의 엄명을 거역 못 하던 아들들
민감하고 조급하게 직진해도
막내에겐 별로 맵지 않던 꼬치영감
할머니와 나 사이의 여백 같은 존재
오 의사 아들이 둘이면 무엇하랴
그날도 총총 걸음의 골목 어귀에서
아이의 세발자전거에 허무하게 무너져
하얀 병상에서 바싹 마른 턱수염의 기억을 남긴 채
아카시아 향기 아래 누워있는 분
이제 아들의 등 뒤에도 노을이 붉어지니
먹다가 흘리고 손끝이 미끄러워
소갈머리 빠진 어느 날
거울 속에 떡하니 서 있는 아버지
- 「아 아버지」 전문
승리의 감격에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너를 향해 우리가 날아가고 있다
아린 외로움이 새겨진 월계관을 쓰고
환하게 웃는 그 날
어느새 붉게 젖어오는 우리의 눈시울
오 신이여 천륜이란 무엇이며
이 벅찬 가슴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늘이 알을 낳고 땅이 품어 조상신이 현몽한 봉황
힘 오른 날갯죽지 크게 펼쳐 영롱한 눈빛으로
날아라 날아라 날아 올라라
영원을 흘러내린 빙하수
별의 심장에서 폭포로 내리꽂히니
바다는 덩실덩실 춤추고
깊숙이 유영하는 흰 고래가 쏘아 올린 거대한 물기둥
솟아라 솟아라 솟구쳐 올라라
질주하는 길섶의 핀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밤
때로는 달빛에 묻혀 잠 못 드는 밤
입술 적신 포도주로 설렘을 달래어
문득 눈 뜬 새벽의 적막 은은한 커피 향에
저 멀리 바람이 문을 열고 당도하면
죽어도 아니 죽는 사랑이 되자
- 「은지 코넬대학 박사 되다-축시」
삶의 일상에서 부딪치는 여러 기복의 감정을 나열한 기록으로서의 시에 비해 깨달음의 몸짓을 드러낸 몇 편의 시들을 보면 시 정신의 바탕에 불교의 여러 경전을 나름 해독하고 체득하려는 시인의 정신세계가 곳곳에 산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 속에 등장하는 각주들을 보면 시인인 그가 탐구한 세계는 실로 그 넓이와 깊이가 다양하다. 경허鏡虛의 사상과 *혜가:중국 남북조 시대의 승려, 달마의 법을 이은 2대 조사 *오유지족:스스로 오직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을 앎 *오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명리학:하늘이 내린 목숨과 자연의 이치 *조후:오행의 온열 상태를 알아보고 조정 하는 것 *중화:서로 다른 성질의 것이 섞여 조화를 이룬 상태 *창연:드높아 시원스럽다 *왕旺:왕성하다 *법령:관상에서 양쪽 광대뼈와 코 사이를 지나 입가로 내려오는 선 *고산:윤선도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 *밀운불우:주역 9번괘[小畜] ;짙은 구름이 있으나 비가 오지 않는다는 뜻 *自天佑之 吉無不利:주역 14번괘 (火天大有)의 上九에서 *주작酬酌:술잔을 서로 주고받음 *세한歲寒:심한 한겨울의 추위 *황야의 미친 코끼리~벌침:7세기 지나교 설화에서 *백일몽:한낮에 꾸는 꿈. 헛된 공상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등등은 시인의 시말을 빚어내는 바탕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시는 어쩌면 수도승의 해탈에서 얻어지는 일갈이 아니다. 어느 비평가의 말을 빌리면 시인을 정의함에 있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의무를 가진 시인의 깨달음은 현재를 바탕으로 한 현실 속의 초현실에 대한 깨달음이어야 하며, 그것은 현재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에게 초월이란 각질화된 현실의 벽을 깨는 것이다. 이름이 없이는 우리들의 의식 속으로 들어올 수 없는 현실의 알맹이에 언어의 집을 지어주는 것이다. 이런 각고의 산통을 시인은 현실에서 찾아내어 자신의 반성에 대상 혹은 그릇 같은 도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수면 아래 고니의 쉼 없는 갈퀴질은
긴 목을 꼿꼿이 세우기 위함이고
긴 부리를 꽃술에 깊숙이 박고
붉고 푸른 날개가 하얗게 될 때까지
무수히 파닥이는 벌새는
꽃이 되고 싶은 거다
바람 타고 까마득한 허공을 빙빙 돌다
갑자기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검독수리는
붉은여우 목덜미에 날카로운 발톱이
박히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으스름 달빛 아래 모래 둥지를
필사적으로 탈출한 바다거북이
등짝에 우주를 새기고 평생을 눕지 않고
광활한 바다를 유영하는 것은
비록 그의 동굴에 백골로 남을지라도
알아보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함이다
나에게로 왔다 너에게로 멀어지는
파도의 무한 율동도
바다의 영원한 침묵을 위해서다
내 안의 나를 찾아 파고들수록
밤하늘을 흐르는 별똥별로
한없이 멀어지는
가없는 나의 백일몽白日夢
*백일몽; 한낮에 꾸는 꿈. 헛된 공상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 「머무름을 위하여」 전문
4.
첫 시집을 상재하는 김성수 시인은 자신의 색유리를 찾아 현실을 바라보는 안경을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불교정신을 시에 회통시키려는 노력은 이제 시작일 수도 있다. 시를 어렵게 쓰는 것은 진정성을 담보하기는 하나 독자를 떠나보내게 된다. 시의 중심소재를 가져오는 일 또한 가벼운 일상의 작은 깨달음이어야 한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넓고 큰 세계를 담으려 한 노력은 시집 도처에서 그 빛을 발한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경허의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시적 노력을 기울임에 있어서 시인은 보다 낮은 자세가 요구된다. 속세에서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쩌면 절간에서 수도하는 승려와 다르지 않음을 시의 거울로 비춰내면서 복잡한 성찰의 언어가 아닌, 보다 간결한 일상의 언어로 자신의 존재를 탐색해 낼 때 다음의 시집은 엄청난 시적 성과를 거둘 것으로 짐작된다. 시인의 가슴 바닥에는 따듯한 사랑이 흐르고 있고 생선 냄새가 물씬한 어촌 주막을 그려낼지라도 그 풍경 속에는 자신의 모습이 있음을 알게 되고 이름 없는 사물들에게도 시인이 명명해주는 이름이 있어 힘들게 현실을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시를 쓰기를 축하와 함께 다음의 시에 나타난 정신을 이어갈 시를 두 번째 시집에서 기대해 본다.
초저녁 서녘 하늘에
초승달과 샛별이 가지런히 붙어있다
심장을 벽 속에 넣고 돌아서는 철부지 에미
휑한 골목 어귀 까마귀 낮게 울고
남겨진 생명의 가슴팍에 비수처럼 꽂힌 인연
하얀 밤을 보낸 소녀
새카맣게 타버린 가슴을 쥐어짜고 있다
우주 영혼이 보랏빛 별에서 잠시 머문 곳이
뻐꾸기 둥지인들 어떠랴
불빛 따라 가는 혼
누더기 걸치고 검은 사막 걸어간들
외로울 리 있으랴
나는 새는 떠나온 둥지를 탓하지 않고
유영하는 물고기는 물속 산을 오르려 하지 않는 것
슬픔의 강을 건너
햇살 눈부신 초원에서 탄생한 푸른 별이여
- 「벽 속의 아이- 베이비박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