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자료[939] 醉吃(취흘)류숙선생7언절구寶鏡寺偶吟
원문=한국문집총간 醉吃集卷之三 / 詩
寶鏡寺偶吟 보경사우음
醉吃(취흘)柳潚(류숙) 吃= '말더듬을 흘'이라는 한자로, '말을 더듬다', '머뭇거리다', '먹다', '받아들이다' 등을 뜻한다. 潚=빠를 숙.
穿盡楓林踏石苔。천진풍림답석태 山前山後飽看廻。산전산후포간회 高僧應笑不知足。고승응소부지족 昨日遊人今又來。작일유인금우래
단풍丹楓숲 헤치고 바위이끼 밟으며 앞뒤로 山을 배불리 보고 돌아왔다. 만족滿足을 모른다고 고승高僧은 웃으시겠지만 어제 놀러 온 사람 오늘 또 찾아 왔다오.
穿盡천진=다 지나니. 楓林풍림=단풍나무숲. 踏=밟을 답. 苔=이끼 태.
원문이미지=醉吃集卷之三 / 詩 류숙柳潚 출생-1564(명종 19),사망-미상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연숙(淵叔), 호는 취흘(醉吃). 아버지는 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 유몽표(柳夢彪)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예조참판 이택(李澤)의 딸이다. 가학으로 약관이 되기 이전에 학문이 성취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8년(선조 2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7년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승문원·예문관을 거쳐 김상헌(金尙憲)·홍서봉(洪瑞鳳) 등과 호당(湖堂)에 재직하였다. 그 뒤 사간원정언·사헌부집의를 거쳐 예조참의·대사간·대사성 등의 청직을 지냈다. 1616년(광해군 8)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상을 예대로 치른 다음 이이첨(李爾瞻)을 처벌하도록 주청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두문불출하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청하(淸河)로 귀양갔으나 곧은 선비라 하여 바로 방환되었고,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정구(李廷龜)와 같은 나이로 친분이 두터워 문학적 교유를 많이 하였다. 고산(高山) 삼현영당(三賢影堂)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취흘집(醉吃集)』이 있다.
취흘집(醉吃集) 5권 2책. 목활자본. 1882년(고종 19) 5대손 인한(寅漢)과 7대손 영보(榮輔)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신재식(申在植)의 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전북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4에 시 364수, 권5에 계사(啓辭) 1편, 표(表)·교서 2편, 서(序) 1편, 기우문 2편, 신도비명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임진왜란과 인조반정이라는 커다란 격변기에 살았기 때문에, 그의 높은 벼슬에 비하여 생애는 순탄하지 못하였다. 그의 호 취흘은 술이 있으면 마시고 마시면 양껏 마신다는 뜻으로, 이러한 생활상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문(文)에 비하여 시가 유독 많은데, 이 점 또한 당시 시류에 대한 울분의 발로라고 짐작할 수 있다. 시는 차운(次韻)한 것이나 증시(贈詩)가 많은데 국내 저명인사뿐 아니라 중국 사신과 주고받은 시도 많이 보인다. 저자가 만년에 이이첨(李爾瞻)을 지목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하고 당여(黨與)를 심어 나라를 그르치는 원흉이라 하자, 이정구(李廷龜)가 저자를 진회(秦檜)·왕륜(王倫) 등을 목베자고 주청한 송나라의 호전(胡銓)에 비유하여 읊은 것도 있다. 시는 표현은 섬려(纖麗)하고 전아(典雅)하면서도 그 뜻은 깊고 격앙한 면을 보이고 있다. 계사의 「논이이첨계(論李爾瞻啓)」에서는 이이첨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는 한편, 그의 당파인 허균(許筠)이 방조한 사실까지 열거하여 절도(絶島)에 안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교서는 명나라에 제주도 표류인을 쇄환(刷還)하여주기를 청한 것과, 경기도 관찰사에게 경기의 중요성을 들어 경기 백성의 곤궁함을 하나하나 구제하라는 내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