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문학](2011.1~2월호)<격월평>서지월-'역동적인 힘의 시편들'
역동적인 힘의 시편들
서 지 월
한 해가 다 가고 새해를 맞았다. 이 땅에 수 많은 시인이 존재하는 이상 하늘은 더 푸를 것이며 땅위엔 꽃들도 변함없이 피어나리라 믿는다. 그러나 잡풀이 많으면 제대로 향기를 피우지 못하고 져버리거나 아예 봉오리도 맺지 못하고 저버리는 꽃도 없지 않다는 우려도 해 보는 것이다,
시를 쓰는 몇 사람이 내게 전해준 말을 빌면 이렇다. 왜 등단을 마구 시키며 많이 등단 시키느냐는 말에 시를 쓰는 사람이 많으면 이 사회가 풍요롭고 좀 덜 된 시를 써더라도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로 등단 후 열심히 갈고 닦으면 되는 개인의 몫이지 시인이 많이 배출된다는 것은 자랑스런 일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내게 이렇게 말을 전해주었다. 시를 잘 쓰는 사람만이 시인이 아니라 시를 좀 못 써더라도 시인으로 많이 배출되면 시를 쓰는 사람의 수효가 늘어나 더욱 활성화 된다는 것이었다. 다 그럴 듯한 말임엔 분명하다. 그리고 속아넘어가기에 딱 맞는 보편타당한 듯한 언변 같다. 이 모두가 마구잡이 시인등단을 부추기는 잡지사 편집인의 의도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앞이 캄캄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냥 시만 쓰며 살아온 전업시인을 넘어서서 20년 세월을 시창작강의를 전문으로 해 온 시인으로서 그건 아니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마구잡이 등단으로 시인렛델 붙여주고 심사위원이라는 시인은 문학단체장 출마 포석으로 선거에 동원시키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떻게 해답을 내려야 수긍이 갈지 모르나 나로서는 암담함과 참담함을 느낀다.
대학입시이든 자격증 취득이든 합리적이어야 하며 자타가 공인하는 공신력이 있어야 입지가 바로 서며 이 사회 또한 바로 선다고 보는 견해다. 어느 정도 작품이 되어있고 수련이 되었을 때 통과과정이라는게 있는데 누구나 주목하고 공신력 있는 그 통과절차를 거쳤을 때 비로소 어미닭 항문에서 달걀이 탄생되듯이(강문숙시인 시「따뜻한 종이컵」에서) 신인탄생이 되며 그 기쁨도 남다른 것이다.
위에서 밝혔듯이 문단의 이러한 전횡에 비애를 느끼며 그나마 대구시단을 짊어지고 갈 『 대구문학 』(2010년 11~12월호)에 발표된 시인들의 작품을 탐색해 보기로 한다. 헤어보니 이번에는 51명의 시인들 작품이 수록돼 있었다. 아마 『 대구문학』 사상 최대의 배려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작품 발표시인 수효에 상관 없이 시는 읽혀지는 것이라 찬찬히 탐독해 보았다.
먼저 김영근시인의 시 <가을에>가 눈에 띄었다.
마냥 푸를 줄만 알았는데
부풀어 터질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끊어지는 것이다
사정없이 등 떠미는 것이다
들어 봐
네 과즙의 낮은 흐느낌을
아무 것도 태울 수 없는 저 햇살의
마른 몸 비벼대는 소리를
오를 땐 유혹했지만
떨어지는 길
마음 한번 받은 적도
온전히 줄 수도 없는
지금은 집중할 순간
네 차례야
썩기 전
시퍼렇게 눈 뜨고 몸 던질 차례
ㅡ김영근 시 <가을에>전문.
힘 있게 와 닿았다. 기을에 떨어지는 낙과를 잘 포착한 작품으로 읽혔는데 힘 있게 와 닿았다는 말은 그만큼 어휘가 평범하지 않다는 뜻이며 형상화가 세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냥 푸를 줄만 알았는데.....' 여기에 '끊어지는 것'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집중할 순간 / 네 차례야 / 썩기 전 / 시퍼렇게 눈 뜨고 몸 던질 차례' 라 했는데 이 역시 뭇 생명의 이치를 자연의 섭리에 비유해 놀라운 시각적 효과를 주고 있다. '사정없이 등 떠미는 것이다' 이런 예지적 표현도 한몫 하고 있는 것이다.
김환식시인의 시 <가시연꽃>을 보면,
꽃 한 송이 때문에
온몸에
수천 개의 바늘을 꽂아놓고 살았다
지나친 사랑은 집착일 뿐인데
애증의 무게 중심이
이미 한 쪽으로 옮겨 앉은 것이다
첫눈에
사유의 중심을 잃어버린 까닭에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버려야 할 삶의 앙금들도
뒤주에 숨겨놓고 살아온 것이다
일탈을 꿈꾼 나는
우포늪에 뿌리가 갇힌
가시연꽃 같은 사람이다
오늘도 그의 곁을 서먹서먹 지나갔다
사유의 그림자가 완고할 뿐이다
서녘하늘에 화염이 번졌다
첫사랑도 그렇게 불탔을 것이다
가시연도 삶이 답답할 때면
가슴속 불씨를 살려 모닥불을 피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시연꽃을 사랑했다
ㅡ김환식 시 <가시연꽃> 전문.
'가시연꽃'을 통해 본 시인의 삶이 설득력 있게 와 닿았다. 평볌하지 않은 표현으로 '꽃 한 송이 때문에 / 온몸에 / 수천 개의 바늘을 꽂아놓고 살았다'라 했는데 이는 비단 가시연꽃 뿐이겠는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데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는 말이다. '애증의 무게 중심이 / 이미 한 쪽으로 옮겨 앉은 것', 또는 '사유의 중심을 잃어버린 까닭에 /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든지 '버려야 할 삶의 앙금들도 / 뒤주에 숨겨놓고 살아온 것'이라는 가시연꽃의 가시에 대한 이런 형용들은 인간사가 그와 다름 아니라는 변증법적인 접근으로 보인다. 여기서 시인은 가시연꽃을 대상으로 하면서, 서녘하늘의 노을을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화염'의 세계로 인식함과 동시에 누구나 그러하듯 과거시간들 중에 가장 불탔던 '첫사랑'을 떠올려 본 것이다. 시적 효과를 절정에 이르게 하는 이런 대비가 역동적임엔 두말 할 나위없다. 가시연이 '가슴속 불씨를 살려 모닥불' 즉 꽃을 피우듯 인간도 자신의 내면의 꽃을 피우지만 변명이나 사변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혼신을 힘으로 가시를 돋게 하는 '가시연꽃'에 대한 치밀한 내면세계가 시인의 자화상으로 그려진다.
김설아(본명 김임백)시인의 시 <나목 위로 내리는 흰눈>을 보자.
살갗에 닿는 흰눈
오신다는 기별도 없이 오셨나요
몸단장하고 기다리는 마음 아시는지
찬바람 부는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나목 위로
이불이 되어 주었네요
옷 벗은 살갗 당신에게로 다가갑니다
마주 보는 눈동자 속
긴 밤 도란도란 알밤같은 속삭임
가지마다 송이송이 맺은 눈망울
오래오래 머물 수 없을까요
저 햇살 때문에 녹아내리는 흰눈
누가 막아 줄 수 없나요
긴 밤의 사랑 잊을 수 없어
이별의 가슴앓이만
눈물이 되어 흘러내려요
ㅡ김설아 시 <나목 위로 내리는 흰눈>전문.
이 시는 흰눈이 내리는 기쁨을 노래한 동시에 이별의 슬픔을 동반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흰눈이 오는 것은 기쁜 일이나 떠날 때는 슬프듯이 1930년대 시문학파의 일원이었던 박용철시인이「시적 변용」에 대해 한 말이 떠오른다. 흰눈을 사랑하는 이에 비유했다면 사랑시로 읽힐 수도 있으며 사랑의 대상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며 기다림이나 그리움의 대상을 희구하고 살아가듯 모든 갈망 또는 희구의 대상으로「시적 변용」에 성공한 작품으로 읽혔다. 그러나 보라, '저 햇살 때문에 녹아내리는 흰눈 / 누가 막아 줄 수 없나요'라 읊었듯이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히 곁에 존재하는게 아닌 것임을 어쩌랴. 흰눈이 찾아와서 시인 자신은 나목이 되어 그 흰눈을 온몸으로 받으며 밤을 함께 하는데 날이 새면 햇살 때문에 떠나야 하는 흰눈이 안타까운 것이다. 정제된 한 편의 서정시로 손색없이 읽혔다.
류인서시인의 시 <장마전선>을 주의 깊게 보자.
1
구름의 추적을 따돌리느라 음지에서 음지로 발목이 붓도록 걸었으니
우리는 구름의 숨은 인질, 구름은 우리들 오래고 익숙한 감정의 은닉처
푹푹 발이 빠지는 공기 속에서 너는 마음을 빼내지 못하고
젖은 옷에 갇힌 몸 꺼내지 못하고 나는 신발에 갇힌 닳은 발을 풀어주지 못하고
간신히 문지방 같은 꿈을 벗어났을 때 시가(市街)엔 전위대처럼 먼저 와있는 구름덩이
구름의 바리케이드
물러설 땅이 없어! 꺾은선그래프로 지고 있는 화단의 푸나무들 구름에 빠진 뿌리 뽑아내지
못하고 꽃잎들은 뜯어먹던 어린구름 내려놓지 못하고
2
백년 전의 기우제가 이제야 먹히는 거라! 구름사냥꾼 청소할머니 타다만 몽당빗자루로 쓸어내고 또 쓸어내시지 비 끝에 붙은 구름알갱이까지 야무지게도 털어내시지
빗자루서 떨어진 풀씨에 검은 싹 돋아 출발한 진흙침대 첫자리서 한걸음도 달아나지 못했네 우린
키 낮춰 우산 아래로 숨는 애인들, 예쁘구나 초록이끼가 돋는 지붕, 속으로 물러터진 비
3
구름에 최면을 걸자
(그는 사장님의 쥘부채 바람에 쓸려 다니는 솜구름송이죠)
휴일은 비밀 없는 새들의 땅 쥐들의 하늘, 그러니 비밀을 만들어도 좋은 곳
떠나, 폭죽처럼 달아나 돌아보지 말자, 뒤집어 보인 내 지갑에서 쏟아지는 바람 사이 백지장보다 말갛게 얇아진 주말
구름의 행낭이 텅 비었으니
이것은 또 다른 가뭄의 시작
버린 꽃밭들 버린 구름의 목록으로 떠서 끝내 허공의 열점 얼룩인 구름들
ㅡ류인서 시 <장마전선>전문.
장마전선을 형상화 하는데 참으로 내공이 많이 들어간 시로 읽혔다. 이만한 내공의 시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그게 시가 되기까지 장마전선이 형성되기까지 불러와야 할 것들 다 마음의 편린들인 것이다. 조각보를 만들 듯 그 편린들을 생각으로 바꾸는데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언어들을 보라. 익숙한 언어를 낯설게 하고 무의미한 언어들을 조합해 새로운 의미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게 시인의 사명인지도 모른다. 밤낮 깨어있는 류인서시인을 보는 듯하다.
박윤배시인의 시 <꽃핀 산딸나무> 를 눈여겨 보자
어디 한 군데 나비 머리핀
찔러 넣고 싶지 않은 갈래머리
그대로 둔다 한들
문화 예술회관 예련관 뜰은
환하겠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한들
우르르 함부로 뛰어내리지 않는 꽃들
몰래 예절 배워버린 산의 딸 같아서
벌어진 젖꼭지 둘러싼 돌기들
젖배 곤 아이 여럿 먹이고도
나 까지 매달려 빨아도
넉넉하겠다
저 유모를 불러들여서
무료급식소 차려도 좋겠다
차마 내 카메라 들이댈 수 없는 수줍음에
‘서 하’라 필명 쓰는 여류시인더러
찍어 전송해 달라 부탁한 꽃핀 산딸나무
분 바를 곳 없는 저 민얼굴에
한동안 내 아랫도리는
얌전하겠다
ㅡ박윤배 시 <꽃핀 산딸나무>전문.
역시, 시를 확실히 알고 쓰는 시인의 시는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고 짜집기 흔적이 없고 매끄럽다는 말을 이 시에 와서 비로소 말하게 된게 기쁘다. 박윤배시인은 구석본 강현국 서종택 서정윤 그리고 필자 5명이 대구시인협회를 창립할 때 그래서 권기호시인을 초대회장으로 추대했을 때 창림멤버 5인에는 못 끼었지만 바로 그 아래 후배시인으로 오랜동안 잘 알고 지내온 시인인데 위 시를 보니 생각키는 상들도 있어 반갑게 여겨졌다. 당시 아주 괜찮게 시를 잘 쓰는 후배 남자시인은 딱 둘이 있었는데 바로 박윤배 한상권시인이었다. 다들 나와 함께 <낭만시> 동인활동을 좀 했는데 한상권시인은 여태 보이지 않고 그나마 박윤배시인이 지지난 해든가 대구시인협회상도 수상하고 해서 사라지지 않아 다행스러웠었다.
백석시인이 시 <남신의주 유동박시봉방>에서 왜 낯설은 '갈매나무'인가 했던 적이 있었는데 한때 박승일이라는 필명을 쓴 바 있는 박윤배시인은 왜 하필이면 '산딸기'도 아니고 '꽃핀 산딸나무'인가 싶었더니 그게 문화예술회관 예련관 뜰에 피었는 것을 시인이 발견한 것이고 그 이미저리가 갈래머리, 산의 딸, 젖꼭지 돌기, 아랫도리 등으로 연결고리를 형성하면서 시의 긴장력과 매력까지를 잘 분출하고 있다는데 아주 호감이 갔다. 거기다가, 내가 그 당시 돈 안 받고 무료로 지어준 ‘서하’라 필명 쓰는 여류시인'까지 동원해 시적 현장감과 담론까지 섞어가며 감칠맛을 더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작품에서 보듯 산딸나무의 꽃을 두고 끝까지 끌고가는 힘이 조금도 서투르거나 풀어지거나 쓸데 없거나 하는 상들이 없어 보인다. 특히, '젖배 곤 아이 여럿 먹이고도 / 나까지 매달려 빨아도 / 넉넉하겠다'든지, '저 유모를 불러들여서 / 무료급식소 차려도 좋겠다' 든지, '분 바를 곳 없는 저 민얼굴에 / 한동안 내 아랫도리는 / 얌전하겠다'는 익살도 한몫하며 한 편의 시를 아주 윤기있게 다루었음을 말해둔다.
박재희 시 <논, 텅 비우다>를 보자.
비워보니 어떻습니까?
텅텅텅 비워보니 날아갈 것 같지요?
비운 공간에 잉잉거리는 바람과 햇살 가을 하늘이 내려와 놀고 있습니다
한마당 자연으로 푸닥거리합니다
비우기 전까지 얼마나 시끄러웠습니까
당신 몸에 썰렁한 물이 차오르고 금속성 기계의 묵직한 쟁깃날이 상처내고 헤집고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아버지의 마음 쥐어짜듯 아팠다 웃었다 했었지요
때론 왜가리가 위문 왔지만 당신도 그것을 차마 쳐다보기 안타까웠지요
알몸에 밤낮으로 분주한 아버지의 손과 발길이 굳은살 박았고
어린모가 젖을 빨며 키득키득 자랄 때 게구리란 놈은 시끄럽게 밤낮을 울었다지요
고놈들 키우는 재미는 있었지만 한편으로 얼마나 가슴 조아렸습니까
논에 갇힌 물은 아버지의 땀과 눈물이었습니다
시시 때때로 일렁이던 바람은 어머니의 한숨이었습니다
200여 일간 누렇게 벼를 알차게 영그느라 바빴던 당신
비우니 새로운 세상이 보이지요
멀리 눈 돌려 보세요
욕망의 빌딩으로 꽉 채워 굳어있는 문명이라는 저 곳이 천국일까요
텅텅 비우고 한시름 놓은 논바닥
이제 늦가을 하늘바다에 노을을 풀어 딩굴딩굴 몸 말리세요
쩍쩍 갈라져 한껏 심호흡을 하세요
ㅡ박재희 시 <논, 텅 비우다> 전문.
가을논이 텅 비어있음을 찰지게 읊은 흔적들이 군데군데 확이 되었다. '한마당 자연으로 푸닥거리합니다'에서는 '자연으로'는 당연한 말이니 삭제하고 그대로 '한마당 푸닥거리합니다'로 하면 문장이 유연할 줄로 안다. 어쨋든 이 작품은 가을논 즉 대자연의 비워짐을 무거웠던 짐 내려놓듯 중후하게 읊고 있는데 주목하였다. 가을논은 농부와 같이 고된 삶의 나날이었을 것이며 결실 뒤의 허무의식을 넘어서서 이제는 탈속한 몸이 되어 원시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그게 '늦가을 하늘바다에 노을을 풀어 딩굴딩굴 몸 말리세요 / 쩍쩍 갈라져 한껏 심호흡을 하세요'라 했듯 넉넉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성운사시인의 시 <종이비행기 날리기>는 안정 톤으로 읽혔다.
나의 일과는
종이비행기 날리기
하늘 높이 던진 것이
홱 뒤집어져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앞으로 힘주어 던져도
빙글 돌아 옆으로 빠져버리는가 하면
슬쩍 가볍게 밀어 보낸 것이
뜻밖에 멀리 날아가기도 한다
내가 날리는 종이비행기
내 마음 같지 않은 종이비행기
그래도 나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기에
오늘도 나는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높이
멀리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낸다
ㅡ성운사 시 <종이비행기 날리기>전문.
현란한 수사나 기교에 물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풀어내며 공감을 주는 작품이 <종이비행기 날리기>가 아닌기 한다. 먼저 시인은 '나의 일과는 / 종이비행기 날리기'라 했는데 '뒤집어져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빙글 돌아 옆으로 빠져버리는가 하면', '뜻밖에 멀리 날아가기도' 하며, 시인은 '내 마음 같지 않은 종이비행기'라 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지 않기에 / 오늘도 나는 종이비행기를 날린다'라 하면서 끝부분에 가서는 '높이/ 멀리 / 종이비행기를 날려 보낸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무슨 의미인가.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회고와 앞으로 살아갈 삶에 대한 당당함이 흔들림 없이 배어있는 힘 있는 작품으로 읽혔음을 말해둔다. 역시 시인이란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강인한 의지로 살아가는 존재이고 보면 속물적인 근성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시인의 품격이 여기 있는 것이다. 좌절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비관하지 않고 굳굳하게 살아가는 것이리라.
손남주시인 시 <빈병>을 보자.
나를 부어
너를 데운다,
나팔을 불어다오 통째로
남은 한 방울까지.
잡은 손 놓고 행여,
빈 병으로 풀숲에 버려져도
거기 네 눈빛 같은
작은 풀꽃은 피어 있으리.
풀잎에 맺힌 별빛을 지우며
아침 햇살이 풀숲을 지날 때
투명한 내 몸은 반짝 한번 빛을 되쏘리.
더러는
외로운 바람 한 줄기 불어 와
메마른 입술 스쳐 가면
내 텅 빈 가슴에도 어느 부둣가
뱃고동 소리 같은 거 떠오르곤 하리.
ㅡ손남주시인 시 <빈병> 전문.
역시 안정된 톤으로 읽혀 호감이 갔다. 신동집시인의 명시 <빈 콜라병>이 있으나 변별적으로 보였다. 빈병을 1인칭으로 병의 술을 마신 사람을 2인칭으로 설정해 면밀한 구도로 긴장력이 있어 좋았다. '나팔을 불어다오 통째로 / 남은 한 방울까지'나. '빈 병으로 풀숲에 버려져도 / 거기 네 눈빛 같은 / 작은 풀꽃은 피어 있으리', 또는 '아침 햇살이 풀숲을 지날 때 / 투명한 내 몸은 반짝 한번 빛을 되쏘리'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의 치밀한 존재의식이 눈에 번쩍 뜨인다.
안용태 시 <독백>을 음미해 보자.
당신 것 아닌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거울 속 늙은 사내마저 내 것 아닌 아침,
치약을 짜면서, 비누 샴푸 면도기까지
슈트를 걸치고 구두를 신으면서
내 것인 줄로만 여겨 왔던 모든 것 들이
내 손으로 만든 게 아무 것도 없구나
어느 날 아침,
소낙비가 당신 흔적 지우는 아침
우산을 펼치다 문득
내가 당신 영원한 우산인 줄 알았었는데
이마저도 어쩌면 당신 것이었구나
ㅡ안용태 시 <독백> 전문.
평범한 일상을 이토록 맛나게 표현한 시도 드물 것이다. 조금도 머리 아프지 않으면서 의미를 되받으면서 모처럼 문장구가를 찰지게 표현한 작품을 만난 기쁨이 여기 있을 줄이야. 거기다가 인생이란 물음에 대한 성찰의 자세도 돋보였다. 바로 '내 것인 줄로만 여겨 왔던 모든 것 들이 / 내 손으로 만든 게 아무 것도 없구나'이다. 이쯤 되어야 인생의 참의미를 아는 자 아니겠는가. 끝마무리에 가서 '소낙비가 당신 흔적 지우는 아침'이라는 표현도 아주 좋은데 '우산을 펼치다 문득 / 내가 당신 영원한 우산인 줄 알았었는데 / 이마저도 어쩌면 당신 것이었구나'에서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인 깨달음이라는 세계에 이르렀다고 할까. 그냥 일고 스쳐지나갈 작품이 아니었음을 밝혀둔다.
엄원태시인 시 <마음 박물관>을 보자.
선교사들의 집은 이제
챔니스, 블레어, 스윗처 같은 이름들로만 남아
뜰아래 무덤들을 끼고 있는 박물관들로 변했다
백주년기념종탑 앞엔 백년 세월 함께한 사과나무가
몸통을 깁스에 의지해 가까스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언덕에 핀 백합을 보진 못했지만
‘동무생각’에 얽힌 얘기를 뒤늦게 전해 들으며
묵은 아까시나무처럼 울울하고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마음이란 것도 그렇다
한 백년 묵으면, 청라언덕처럼
추억의 박물관들을 따로 똑 같이 차려도 좋을 것이다
푸른 담쟁이는 우리들 발치에서 가슴께를 향해서도
전면적으로, 덮어 오르기 시작하는 거였다
ㅡ엄원태 시 <마음 박물관> 전문.
얼른 보기엔 평범하게 읽힐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시를 쓰는 시인들 제나름대로 수법이 있듯이 문체활용이 그것이다. 문체활용이란 오래 시를 쓰면서 두루 섭렵한 재간에서 유연하게 나오는 법이다. 서정시에서도 찬찬히 훑어보면 시인들 제나름대로 수법이 있듯이 문체활용에서 진가가 드러나는 법인 것이다. 이 시에서 보면 '선교사들의 집'이 오래 되어 '박물관'으로 변해 있는가 하면 사과나무도 오래 되어 '몸통을 깁스에 의지해 가까스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따위는 시인이 말하고 있듯이 '언덕에 핀 백합을 보진 못'한 것처럼 '묵은 아까시나무처럼 울울하고 막막한 심정'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인은 마음이라는 것도 '박물관들을 똑 같이 차려도 좋을 것이'라 했는데 이 행간에서 삶에 대한 허무의식이 내재해 있음이 확인된다. 인간의 '마음 박물관'은 건축물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러나 상상의 '푸른 담쟁이는 우리들 발치에서 가슴께를 향해서도 / 전면적으로, 덮어 오르'는 <마음 박물관>은 시인에겐 깊이 내재된 공간으로 인식된다.
이규리시인의 시 <빙하>를 주목해 보자.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이별이 내 것이라 짐작하지 않는 그런 나이였다
우리가 녹아내릴 거라곤 아무도 생각 못했을 거다
시를 쓴다고 했나
르포 사진을 찍는다고 했나
조금씩 흘러내릴 때에도 삶에 그만큼의 대가對價는 있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너는 꼭 그 정도로 다가오거나 피우거나 침묵했으므로
어제 소식에는 네가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건 오늘 피는 꽃 뿐,
인과는 1mm의 오차도 없다는데
현장에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ㅡ이규리 시 <빙하> 전문.
빙하현상을 지적(知的)으로 처리한 일련의 견고한 작품으로 읽혔다. 빙하란 글자 그대로 얼음덩어리가 녹아 흐르는 현상을 말한다. 거기에 무슨 의미가 담겨져 있단 말인가. 이별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별은 글자 그대로 이별이 아니라 원형이 녹아내리니까 이별이란 녹아내리며 떨어져나오는 물의 몸이 되는 것이다. '이별이 내 것이라 짐작하지 않는 그런 나이'라는 고급적인 표현도 눈에 띄는데 빙산이 녹아내린다는 것은 상상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게 기후변화에 의해 녹아내리니 지구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는 현실을 맞은 것이다. '시를 쓴다고 했나 / 르포 사진을 찍는다고 했나' 이런 난데없는 상들을 불러와 앉힌 것 같은데 알고보면 난데없는 상들이 아니라 빙하현상에 대한 목격의 현장성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흘러내릴 때에도 삶에 그만큼의 대가(對價)는 있어야 한다'는 너스레는 다름 아닌 지구와 인간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빙산이 그만큼 큰 덩어리이기에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듯이 흘러내리는 빙하는 빙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왔던 것이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는게 확실하다. 시인은 '믿을 수 있는 건 오늘 피는 꽃 뿐'이라고 참 좋은 표현을 가지고 왔는데, 아직 확연한 영향은 미치지 않고 있는 현실임을 넌지시 말해주고 있다. 정제된 스타일, 견고한 상상력, 점철된 치밀한 내면의식 등 티끌을 찾아보기 힘든 작품으로 읽혔다.
이재석시인의 시 <펭귄 사랑>이 재미있게 읽혔음을 말해둔다.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
비실대던 사랑아
세월 훌쩍 지나도
옛 모습 그대로
비틀거리는 사랑아
따스한 사랑의 입김이
눈사람에 봄볕 되어
더욱 힘에 겨운 사랑아
어딜 갔다
시린 사랑 호호 불며
지팡이도 없이 왔느냐
빙하 속 사랑방엔
함께 쉬어 지저귈
자리 한 켠 없는데
봄여름이 무색토록
발 동상 아려 뒤뚱대는
절름발이 사랑아!
ㅡ이재석 시 <펭귄 사랑>전문.
이 작품을 대하는 순간 조금도 부담 없이 읽혔으며 절로 가슴에 와 닿는 이런 시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너무나 평범한 펭귄의 행위를 놓치지 않고 '사랑'에 비유했다는 것도 쉬이 되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도 '이제 왔느냐'고 자연스레 말문을 트면서 '비실대던 사랑아', '비틀거리는 사랑아', '더욱 힘에 겨운 사랑아', '절름발이 사랑아' 이렇게 반복의 효과로 고조시키면서 말이다. '지팡이도 없이 왔느냐'라는 대목에서는 더욱 절절하게 안겨들며 감칠맛 있게 느껴졌다. 자연스런 발상이 자연스럽지 않고 격조를 지닐 때 보다 나은 시가 되는 것이다.
이문곡(이세진)시인의 시 <낮에 나온 반달>을 보면,
굽이 돌려놓은 강기슭
외로운 나룻배 한 척
출렁이는
비단물결 이랑 사이
서성이던 소슬바람
버드나무가
누런 이파리 한 장씩 따서 던지면
목줄 붙잡혀 있던 나룻배
이파리 세며 고이 받아안는다
나그네 강 건너려 하는데
뱃사공은 없고
빈 배는 떠날 의향 없다며
온몸 흔들어댄다
기러기 날아간 하늘엔
반달 한 척 말없이 떠간다
ㅡ이문곡 시 <낮에 나온 반달>전문.
멋진 풍경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도 그냥의 강기슭이 아니라 '굽이 돌려놓은' 강기슭이며 거기 '외로운 나룻배 한 척'이 놓여있다. 소슬바람이 불어 '비단물결'이 츨렁이는가 하면, 서 있는 버드나무가 '목줄 붙잡혀 있던 나룻배'에 노란 이파리 한 장씩 따서 던지면, 나룻배는 '이파리 세며 (이파리를) 고이 받아안'는 풍경이 그것이다. 게다가 소슬바람은 멈추지 않고 '빈 배'를 흔들고 있는데 '떠날 의향 없다며 / 온몸 흔들어댄다' 고 실감나게 잘 표현해 내고 있다. 마지막에 가서는 '기러기 날아간 하늘엔 / 반달 한 척 말없이 떠간다'고 읊고 있다. 묶인 빈 배와 빈 배엔 뱃사공마저 없으니 나그네는 강을 건너지 못하는 현실인데 비해, 기러기는 날아가고 반달 한 척이 유유히 떠가고 있는 것이다. 반달이 '나룻배 한 척'과 절묘하게 비유되고 있는데 자유로운 존재와 자유롭지 못하는 존재 사이의 괴리가 그것들이다. 멋진 대비를 연출해 주고 있는 작품으로 읽혔다. '버드나무가 / 누런 이파리 한 장씩 따서 던지면 / 목줄 붙잡혀 있던 나룻배 / 이파리 세며 고이 받아안는다'라는 이런 표현에서 풍성한 서정성을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 인간존재에 대한 허무의식을, 나아가서는 나룻배 즉 빈 배는 더 이상의 욕심을 비운 넉넉함을 지닌 존재로 해석된다. '나룻배 한 척'과 '버드나무 누런 이파리'와 하늘에 떠가는 '반달 한 척'이 연출해 내는 이 장면은 탈속의 세계, 무욕의 세계로 인식되는 것이다. 선명한 이미지, 명징한 표현, 땅에서 일어나는 것들과 하늘에서 일어나는 것들의 멋진 대비가 치밀한 상관관계를 이루면서 서정시의 영역을 한 차원 높혀주고 있는 작품으로 음미되었다.
이해리시인의 시 <새장>을 면밀히 보자.
옹심이 칼국수집 수저통 위로
한 마리 새 날아 들었다
초록깃털로 고운 드레스 지어 입은 새
뺑 돌아앉아 먼 곳을 본다
옹심이 칼국수는 그 새를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 새의 먼 곳이 되고 싶어
초록이라 이름 지어주며 날마다 눈을 맞춘다
무화과 가지를 꺾어 횃대를 만들어 준다
무화과 가지를 발판 삼아 포르릉포르릉
기계체조를 하던 맨발의 새
똥 치워주려고 잠시 문 연 틈 타 날아가 버렸다
우연히 왔던 새가 우연히 가버렸다
원래 없었던 것이 없어져 제 자리로 왔을 뿐인데
마음에는 자꾸 무화과 그늘이 진다
휑한 바람이 분다
ㅡ이해리 시 <새장>전문.
수성못 아래 먹자길에 '옹심이 칼국수집'을 지나치면서 본 적이 있다. 아마 그런 곳에서 시인은 '초록깃털로 고운 드레스 지어 입은 새'를 만난 듯하다. 시인에게 있어서 새로운 인연이 된 대상을 한 마리 새로 설정한 것 같으다. '나는 그 새의 먼 곳이 되고 싶어', '마음에는 자꾸 무화과 그늘이 진다' 이런 표현이 의미있게 읽혔음도 사실이다. 시인은 '초록이라 이름 지어주며 날마다 눈을 맞추는가 하면 무화과 가지를 꺾어 횃대를 만들어 주고 했으나 '무화과 가지를 발판 삼아 포르릉포르릉 / 기계체조를 하던 맨발의 새'는 시인이 똥 치워주려고 잠시 문을 연 틈을 타서 그만 날아가 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원래 없었던 것이 없어져 제 자리로 왔을 뿐'이라고 독백처럼 말하고 있는데 '마음에는 자꾸 무화과 그늘이 진다'고 피력했다. 세상에는 자신의 것이 없음을 말해주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새장'이라는 의미기 소유 또는 구속일진데 그건 착각에 지나지 않음을 넌지시 말해주는 듯도 하다. 그러나 잠시 머물렀거나 스쳐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휑한 바람이 부'는 것임을 어찌하겠는가. 상징적으로 와닿는 '한 마리 새'와 '옹심이 칼국수집'이 공간적이미지를 제공해 주고 있고 보면 인간사 자신 마음 같은 사람 어디 있으며 유구한 것 또한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정숙시인 시 <통조림, 그 한 편의 시>를 보자.
-유배지 시편 9
작은 깡통에 유배당한 저, 꽁치
제 지느러미로 가시 칼날 다시
곧추세운다
쉽사리 잡히지 않으려 하늘 그림자에
피 말리며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잡혔다
지금 간절한 풍경이다
땡, 땡 하늘을 깨우다가
쨍그랑 유리잔을 깬다
절명의 한 순간 퍼뜩! 깨닫는다
산다는 것은 어차피 누구에게 먹이가 되는
길 찾는 일인 것을
이제 제 몸뚱어리 허공에 다 내주었다
저 한 편의 시
맨가슴으로 읽으면 될 것이다
ㅡ정숙 시 <통조림, 그 한 편의 시> 전문.
앞의 시 <펭귄 사랑>이 있듯이 펭귄표 통조림이 있는데 정숙시인이 말하는 시 <통조림, 그 한 편의 시>에서 펭귄표 통조림이 아닌지 몰라. 개인적으로 나는 펭귄표 고등어통조림이라든지 꽁치통조림를 즐겨 사서 먹는데 그것은 김치를 곁들여 찌게를 해먹는 일이다. 시인은 통조림에 잡혀든 꽁치를 '제 몸뚱어리 허공에 다 내준' 것이 '한 편의 시' 와 다름 없다는 발상으로 건져낸 것이다. 그것도 '맨가슴으로 읽으면 되는' 한 편의 시와 다름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간절한 풍경' 역시 꽁치통조림이나 한 편의 시나 먹히고 읽히거나 하는 것은 매 한가지로 본 것이 아이디얼하게 와 닿았다.
정금옥시인의 시 <배터리>를 음미해 보면,
먼 길 떠날 준비라도 하는지
구월이 가방을 챙기고 있다
배추포기와 고무장갑 낀 손
전쟁은 시작되고
새끼들 몫까지 김장양은 부풀어지고
대소쿠리, 크고 작은 양푼들 있는 숫자대로 총동원
적군에 소금 뿌려 기선 제압해놓고
멸치젓, 새우젓, 마늘, 고춧가루 다시마 달인 물
뻘 같은 하루를 함께 넣어 섞는다
적군과의 전쟁은 피칠갑이고
조금 남은 배터리가 불안하다
가을비 오는 밤이면 도지는 병처럼
잠시 눕기라도 한다면
금세 하얗게 방전될 몸
쉼표에 걸터앉아 한숨 잠시 돌리는데
창밖 부스럭거리는 소리
내다보니 가을비가 가방을 풀고 있다
ㅡ정금옥 시 <배터리>전문,
나름대로 시를 새롭게 써 보려는 의도가 엿보인 작품으로 읽혔다. 상투적인 발상이나 생각을 접고 신선한 발상과 상상력으로 바꿔보려는 노력이 역역해 보였다. 김장하는 행위를 리얼하게 잘 표현했으며 문장구사도 능력을 발휘하여 확연한 이미지로 잘 그려낸 듯하다. '먼 길 떠날 준비라도 하는지 / 구월이 가방을 챙기고 있다'는 이런 의미있는 표현이라든지, '창밖 부스럭거리는 소리 / 내다보니 가을비가 가방을 풀고 있다' 이런 표현들로 볼 때도 한 편의 시를 구가하는 능력도 만만치 않음을 짐작할 수 았는 대목이었다. 김장하는 장면을 새롭게 본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관심있게 읽힌 작품이 정태일시인의 시 <성암산 보름달>이었다.
성암산 보름달은
빈 나뭇가지만 사랑하네
빈 가지에 걸터앉아
오렌지처럼 익네
심심하면 밑에 내려와
마른 잎새만 데리고 놀다가
배고픈 다람쥐에게 들키네
다람쥐는 둥근 호떡인 줄 알고
그것을 물고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리네
성암산 계곡이 갑자기 캄캄해지네
ㅡ정태일 시 <성암산 보름달> 전문.
무르익은 문장력으로 뛰어난 묘사력까지 겸한 서정시의 전형으로 와닿았다. 8.15 해방 이전, 대구가 낳은 고월 이장희시인이 있는데 일찌기 <봄은 고양이로다>라 읊었듯이 정태일시인이 그 맥을 이은 듯 <성암산 보름달>에서 확연한 이미지 구도가 실감을 더해 주었다. 박목월시인의 본명이 박영종인데 나뭇가지 사이로 달이 떠오른 풍경을 보고 <목월(木月)>이라는 필명을 지었듯이 '박목월'이라는 필명을 연상시켜주기도 한 작품으로 읽혔다. 특히 '빈 나뭇가지만 사랑하네', '오렌지처럼 익네' 의 정적인 표현과 '배고픈 다람쥐에게 들키네', '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리네'의 동적인 표현이 잘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룬 작품이었다.
이번 『 대구문학』(2010년 11, 12월호)에 수록되어 언급대상이 된 작품들은 여러 유형을 보여준 좋은 예였다. 현대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작품도 있었는가 하면 서정시의 본령을 고수하며 완성도를 보여준 시편도 눈에 띄었으며 시의 맛을 돋구어준 담론적인 시편도 풍요로움을 더해주었다. 필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1년 남짓 격월평을 써오면서 보람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되도록 완벽에 가까운 작품들, 좋은 시를 골라 읽는데 한몫 하는데 심혈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 대구가 <시의 도시>라 일컬어지고 있듯이 여기에 준해 부끄럽지 않는 작품을 골라 언급하는데 필자의 소명의식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언급에 제외된 시인들께는 개인적으로 송구스런 마음 그지 없다. 그러나 누구가 써도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음을 밝힌다. 모두의 건필을 빈다 <끝>
첫댓글 스스님!
『 대구문학 』(2010년 11~12월호)에 발표된 시를 보고 월평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부족한 제 시를 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