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밸브는 원유 및 천연가스 시추장비의 파이프라인에
서 개폐 작용을 하는 데 쓰인다. 한번 설치하면 10년
이상 사용하는 만큼 무엇보다도 제조회사에 대한 신뢰
가 중요하다. 그래서 한번 좋은 평가를 받으면 꾸준히
수출이 늘어날 수 있는 반면 신뢰를 얻는 데는 그만큼
시간이 걸리는 품목이기도 하다. (주)금강밸브는 1980
년 창업 이래 볼밸브 한 제품만 생산하고 있다. 최경식
회장이 30년 이상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파온 덕분이다.
고시생에서 철공소 사원으로
대구 출신인 그는 영남대를 졸업하고 고시공부를 시작
했다.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돼 시험을 치렀는데 낙
방하고 말았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싶지도 않고 그
렇다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 방황이 시작됐다.
“술 마시고 당구 치면서 허송세월을 하다 문득 대신동
집을 수리하고 싶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말씀드렸더니
그거라도 해보라고 하셨어요. 워낙 방황하니까 허락
해준 겁니다.”
최경식 (주)금강밸브 회장
법정관리 딛고
볼밸브 5천만불 수출탑
고시공부를 하다 주물공장에 취직해 금속과 연을 맺고 작은 볼밸브 공장을 차렸다.
볼밸브를 수출하면서 해외에서도 꽤 유명세를 탔지만 KIKO 돌풍에 속절없이 법정관
리(기업회생 절차)의 나락으로 빠졌다. 졸업하는 데 걸린 시간은 만 2년. 이런 어려움
을 딛고 올해 무역의날에 볼밸브 하나로 5천만불 수출탑을 받게 됐다. 최경식 (주)금
강밸브 회장(60)의 30여 년에 걸친 역전의 스토리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editor 이영주 기자 yrlee1109@naver.com photographer 송영철
집수리를 하면서 스테인리스 섀시를 처음 접했다. 법학과 출신이라 금속 쪽에는 문외한이
었지만 왠지 확 끌렸다. “이걸로 사업을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그 길로 그는 돈 한 푼 없이 무작정 상경했다. 문래동 근처의 철공소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혹시 취업이 안 될까봐 고등학교 졸업이라고 거짓말까지 했다. 일요일이면 청계천에 나가
가게 이름과 업종을 적으면서 돌아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4달 동안 용접 일을 했더니
더 이상 배울 게 없었다. 스테인리스 제조업체를 소개해달라고 해서 자리를 옮겨 일을 하
던 중 주물공장을 하던 친구가 공장 운영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1년간 그 일을 하면서 스테인리스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공장을 그만둔 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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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히 황동으로 만든 가정용 가스밸브를 보고 사업성을 고민해봤지만 소
자본으로는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주물로 스테인리스 볼밸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대구시 노원동의 조그만 가내수공업 공장에 금강밸브공업사라는 간판
을 내걸고 3명의 직원과 함께 소형 볼밸브를 제작해 내다팔았다. 쇠붙
이 종류를 다루는 사업이라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감(感)만 가지고
무조건 시작한 것이었다. “뭐든지 용감하게 시작하면 다 됐던 시절이었
다”고 그는 회상한다.
창업 3년 만에 독일 수출 성공
기름때를 묻혀가면서 오로지 밸브 생산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러자 몇
달 만에 소형 볼밸브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다. 조금 더 큰 밸브를 만들려
니 카탈로그가 필요했다. 당시 회사 자금이 300만 원밖에 없었는데 150
만 원을 털어 ‘회사보다 수준이 훨씬 높은’ 카탈로그를 만들었다. 이것을
여천석유화학단지 등에 대량으로 뿌렸고 카탈로그만으로 1,600만 원어
치의 볼밸브를 수주했다.
“당시만 해도 외제 볼밸브가 대부분일 때였습니다. 국산 볼밸브고 가격
도 싸고 하니까 금방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때 카탈로그로 배팅하기를
정말 잘했던 거지요. 허허~”
창업 초기부터 수출을 염두에 두고 무역회보를 받아보면서 밸브 관련
회사가 나오면 모두 스크랩해 두었다. 독일 업체는 그렇게 해서 연결됐
다. 상공회의소까지 찾아가 독일 업체와 영어로 텔렉스를 주고받은 끝
에 독일로 날아갔다.
타이항공을 타고 대만, 이집트를 거쳐 간신히 프랑크푸르트로, 다시 함
부르크로 날아갔지만 그쪽 회사에서는 왠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너무
젊다(too young)’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의 도면에서 볼밸브 핵심기술
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독일 업체 사장은 그때부터 최 회장의 실력을 인
정했다. 결국 보름간의 줄다리기 끝에 30만 달러의 계약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1984년도의 일이었다. 신생업체가 독일에서 볼밸브라는 신시
장을 개척했다는 게 입소문을 타면서 그해 중소기업 육성을 주제로 열린
청와대 월례 경제회의에서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독일과 일본에 수출하면 세계 어디라도 수출할 수 있다”는 신념하에 일
본을 타깃으로 수출에 힘을 쓴 결과 간접수출에도 성공했다. 일본 제1
의 볼밸브 회사에 납품하는 등 1980년대 국내 볼밸브 시장에서 첫손가
락에 꼽힐 정도로 성장했다.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자’는 전략으로
볼밸브가 잘나간다는 소문이 돌자 후발주자들이 추격해오기 시작했다.
금강밸브는 치열한 가격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엄청난 수난을 겪어야 했
다. 최 회장은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고 회상한다.
당시 삼성의 회장이 했다는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자’라는 말이 유행할
때였다. 전면적인 구조조정에 나선 최 회장은 회사 내 가공라인을 모두
없애고 제품 생산을 아웃소싱으로 돌렸다. 각기 다른 사양의 제품을 주
문받아 제작하던 업무 프로세스를 모든 사양에 적합한 표준품 개발로 바
꾸었다. 표준품 전략은 업무를 단순화, 효율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공
장 경영보다는 수출시장 개척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했다.
“결과적으로는 표준품 전략이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고 최 회장
은 강조했다.
2002년 기름 값이 오르기 시작하자 최 회장은 ‘업스트림(upstream)
시장에 진출하기로 결심한다. 원유나 가스를 시추해 파
이프라인으로 운송하는 분야를 업스트림이라고 하는데 엑손모
빌, 세브론, 토탈 등 글로벌 업체 대부분이 여기에 포진해 있다.
“이전까지는 석유화학 쪽, 이른바 다운스트림(downstream)에
서 밸브를 생산해오다 석유, 가스 쪽으로 진입하려니 정말 힘들
었습니다. 제품도 다르고 관련 규정도 다른 만큼 사실상 별개의
시장이어서 시간도 많이 걸리고 장벽도 많았지요.”
A급 납품업체에 끼여 자투리 물량을 납품하면서 몇 년간 신뢰를
쌓아 엑손모빌의 등록업체가 됐고 쉘, 세브론, 가즈프롬, 아람
코 등에도 잇따라 납품할 수 있었다. 수출실적도 2004년 1천만
불 수출탑을 수상한 데 이어 2006년에 2천만 달러, 2007년 3천
만 달러를 넘기면서 승승장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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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12 / International Trade 19
KIKO 돌풍에 날개 꺾여
그러다 2008년, 5천만 달러 수출을 예상하던 최 회장에게 엄청난 시련이
덮쳤다. KIKO였다. 매출의 90% 이상을 해외로 수출했었기 때문에 환위
험 헤지 목적으로 KIKO에 가입했다가 환율이 급등하면서 손실이 눈덩
이처럼 커졌다. 당시 KIKO로 입은 피해금액만 600억 원이 넘는다.
“2008년에 1달에 100억 원씩 손실이 나는 겁니다. 법정관리(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더 큰 피해는 글로벌 기업과의
거래가 모두 끊어지게 된 것이었어요.” 엑손모빌, 세브론 등 글로벌 원유
회사의 승인을 모두 잃어 납품을 위한 몇 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 토탈 사 정도만이 현재까지 거래를 유지하고 있다.
최 회장은 KIKO에 대해 누구보다 할 말이 많다. 국내 경제 관계자들이
미국의 모기지론 사태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예측 못했던
것에 대해서도 그렇다.
“제가 국내 와튼MBA에서 공부할 땝니다. 2007년의 일이었어요. 유명
경제연구소장이 특강을 하는데 미국 모기지론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했
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었습니
다. 국내 경제에 대한 조금만 더 깊은 안목이 있었으면 알 수 있었을 텐
데 아무도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거죠. 이기(이게) 내가 너무 답답한
거라.” 2009년 3월 금강밸브는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2009년 12월에야
법정관리 절차에 들어갔다.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최 회장은 “미칠 만큼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법정관리 신청 이후 그는 대표이
사 자리를 내놓은 것은 물론 일체의 모임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은둔
생활(?)을 한 셈이다. “경영자로서 법정관리를 신청한 게 너무나 부끄러
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행히도 불과 2년여 만인 2011년 2월 법정관리 절차가
종결됐고 그때부터 올해 5월까지 남아 있던 모든 빚을 다
갚았다. 최 회장은 기자와의 인터뷰가 법정관리 이후 처
음으로 나서는 공식적인 자리라고 말했다.
“우리 회사는 법정관리라는 제도를 통해 살아났습니다.
어찌 보면 나라의 큰 은혜를 입은 셈이니 수출로 보답해야
지요. 수출에 주력하고, 기술개발에 매진하고, 품질관리
도 철저히 하고, 여력이 남으면 사회에 봉사하면서 남은
인생을 보낼 계획입니다.”
올해 매출은 지난해의 3배에 달해
KIKO 사태가 준 교훈은 있다. 기업을 가장 간단하게 경영하는 것이다.
부채와 자산을 늘려 복잡해지지 않도록 무차입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물품대금은 현금으로 지급하며 어음은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효율성뿐
아니라 검토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경영전략을 짜고
있다. 법정관리에서 졸업한 후 금강밸브의 매출은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다. 법정관리 이전에 탄탄하게 다져놓은 기술과 해외시장 개척이 다
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덕분이다. 올해 매출은 지난해 3천만 달러에서
3배 가까이 늘어난 9천만 달러로 예상한다. 앞으로 매년 30%씩 매출 목
표를 늘려나가는 한편 내년에는 연구소를 만들어 자체적인 연구도 본격
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이번 무역의날에 수상하는 5천만불 수출탑은 우리 회사 임직원들이 자
신감을 회복해 더욱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초가 되어줄 것”이
라고 최 회장은 강조했다.
“30년 이상 몸과 마음을 바쳐 일했는데 다른 사업을 했더라면 더 많이
키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도 있습니다. 볼밸브는 시장 규모도 제
한적이고, 고객사도 찾기 어렵고, 지속적인 기술개발도 해야 하기 때문
입니다. 그렇지만 저희가 볼밸브 사업을 접는다면 우리나라 수요업체들
이 외국산 밸브를 비싸게 사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큰
보람도 느껴집니다.”
최 회장은 창업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업종 전환을 고려한 적이 있다. 그
리고 모 대기업에 기계 관련 부품을 납품하던 중 문득 그는 ‘볼밸브 한 우
물만 파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기업
에 수금조차 하러 가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서야 다른 납품업체에서 납
품대금을 대신 받아줬을 정도다. 초창기 자신과의 약속을 30년 이상 지
켜온 최 회장의 굳은 심지가 5천만불 수출탑을 수상하게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