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희 시집 {소금의 밑바닥} 출간
이선희 시인은 충남 공주에서 출생했고, 2007년 {시와 경계}로 등단했으며, 첫 시집 {우린 서로 난간이다}(2014년 세종도서 선정) 를 출간한 바가 있다.
이선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소금의 밑바닥}은 각각의 시작품이 만들어낸 시집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작품들이 유기적으로 연결고리를 형성하여 빚어낸 소중한 의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시집의 출발은 자서에서 시작해서 자서로 결말을 짓는다. 그리고 익숙한 것에서 더 익숙한 것으로 변형을 추적하는 단독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이선희만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소금을 녹이니/ 바닥에 가라앉은 뻘이 보인다/ 순백색 소금의 몸에 뻘이 들어있었다니/ 짜디짠 정신으로/ 까칠하게 각을 세우고/ 세상의 간을 맞추던/ 그 정신의 기둥이 뻘이었을까// 뻘을 품고/ 더 단단한 결정이 되어갔을 소금은/ 한번도 뻘을 인식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뻘과의 관계를 조금은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른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뻘처럼/ 어느 날 치매 병동에서 본 얌전하고 곱던 할머니/ 세상의 온갖 욕을 종일 읊조리고 있었는데// 내가 녹아버렸을 때/ 나를 지탱하던 그 무엇의 모습이/ 문득 궁금하고 두려워지는 것이다/
----이선희 시집 {소금의 밑바닥}에서
이선희 시인은 상징주의자이며, 은유적인 기법을 매우 아름답고 탁월하게 사용하는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기호는 사물을 지시하고, 상징은 인간의 정신을 지시한다. 은유는 할머니(어머니)를 뻘로 표현하는 것처럼 유사성 법칙에 의한 최고급의 수사법이며, 이 은유적인 기법을 통해서 아주 일상적인 것이 낯선 것으로 변용되며, 그 결과, 전인미답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도 한다. “소금을 녹이니/ 바닥에 가라앉은 뻘이” 보이고, 이 순백의 소금에 뻘이 들어 있었다는 것은 이선희 시인의 마비된 의식에 충격을 가한다.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의 토대가 마사분과 점토가 혼합된 뻘밭이었던 것이고, 따라서 소금의 결정체에는 어느 정도의 불순물(뻘)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자그마한 놀라움과 충격은 “짜디짠 정신으로/ 까칠하게 각을 세우고/ 세상의 간을 맞추던/ 그 정신의 기둥이 뻘이었을까”라는 역사 철학적인 인식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그렇다. 짜디짠 정신으로 까칠하게 각을 세우고 세상의 간을 맞추던 그 정신의 기둥이 뻘이었던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한평생을 살아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좀 더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자기 자신의 부모님과 집안의 형편을 숨긴 채 소위 ‘성공신화’를 연출해낸 어느 유명 인사처럼 “어쩌면 뻘과의 관계를 조금은 부끄러워”했고, 또, 그것을 숨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금에서 뻘을 발견하고 그 충격으로 뻘과 나와의 관계를 밝힌 첫 번째 반전 이후, 제3연과 제4연에서는 두 번째의 반전이 일어난다. 소금과 뻘의 관계가 나와 어머니(할머니)의 관계로 확대되며,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치매 병동에서 본 얌전하고 곱던 할머니”는 “밑바닥에 가라앉은 뻘”이 된 것이고, 그 불순물답게 “세상의 온갖 욕을 종일 읊조리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으로, 온몸으로 모진 불볕과 바람을 견디며 지극 정성으로 가르쳤던 아들과 딸들이 버린 어머니, 천하제일의 영양분이 다 빠져나간 불순물의 신세일 수밖에 없는 어머니----. 그렇다,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영양만점의 소금으로 왔다가 더없이 더럽고 추한 불순물(뻘)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녹아버렸을 때/ 나를 지탱하던 그 무엇의 모습”은 더 이상 궁금할 것도 없고,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도 이전에 우리들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선희 시인의 [소금의 밑바닥]은 소금과 뻘의 관계를 딸과 어머니의 관계로 변주시킨 인간존재론이며, 그의 ‘상징주의 시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가 있다. 어머니는 소금이 빠져나간 뻘이 되고, 딸은 뻘을 숨긴(품은) 소금이 된다. 어머니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상실한 뻘이 되고, 딸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닌 소금이 된다. 하지만, 그러나 인간과 비인간, 또는 상품과 불량품의 관계는 상호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인 관계인 것이다. 어머니와 딸도 하나이고, 소금과 불순물도 하나이며,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생물학적으로 한가족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뻘밭에서 태어나 뻘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금은 어머니의 초상(상징)이며, 딸의 초상이고, 우리 모두의 초상인 것이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주고, 더러는 아들과 딸들을 향해 욕설도 퍼부어대며, 또다시 뻘밭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육중한 장롱이 쓰러졌다/ 굳건하게 안방을 지키던 그가/ 아파트 공터에 아무렇게나 뒤집혀 있다// 쓸모를 다했다는 표시로 노란 딱지도 붙었다/ 누군가 그를 두드려 본다 뒤집어 본다// 목장갑 낀 손이 이리저리 쓰다듬는다/ 순간 그가 번쩍 빛을 발한다/ 폐품 딱지 붙은 장롱 어딘가로 실려 가며// 마지막 한 소식 전한다/ 덜컹!// 세상 참 좋아져서/ 막바지로 치닫던 관계도/ 끝이다 싶던 상황도// 덜컹덜컹/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 「덜컹」 전문
이선희는 시를 쓰는데 있어 참으로 다재다능하다. 시의 내용도 그렇지만 시를 끌고 가는 힘이라든가 주제의식을 맺는 방법에서도 남다르다. 아마도 이선희가 마주하는 일상의 모든 대상들이 시로 보이거나 시를 쓸 수밖에 없게 만드는 촉매의 덫에 빠지게 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가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도 없이 “덜컹”, 경계를 넘어 시로 빠르게 접속되었을 법도 하다. “털컹”이라는 시도 그렇게 만들어진 예가 아닌가 싶다. “덜컹”이라는 음악적 이미지에서 “마지막 한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덜컹”으로 가역을 함으로써 “다시 살아나”는 이미지로 이접시키고 있다. 이러한 데에는 아파트 공터에 버려진 장롱을 폐품 수거하는 사람이 어딘가로 싣고 가는 일상의 모습에서 기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전은 일상적인 말과 구별되는 점에서 시말과 다르지 않다. 경전이 구술로 전해지다 문자로 정착되기까지의 과정도 시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이선희에게 경전은 “물이 가득한 논”에 “한들한들 붓을” 갈기며 경전의 깨우침을 위한 “박히는 글자들”(「계절의 경전」)로 묘사가 된다. 글이 문장이라면 이선희가 시로 드러내는 경전 역시 자아와 대상 사이의 간극을 좁혀주는 시라 할 수 있다. 그에게 경전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닌 오직 화자에서 타자를 꿰뚫어내는 진실한 자아에 귀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을 통해 자서를 넓혀 궁극적으로 시의 심급을 확장시키고 있다 하겠다.
자신을 조이려 애쓰다 마모된 것인지
조여도 조여도 헛도는 마찰력
암나사의 나사산이 무너지는 순간
척추에 박힌 못이 헐거워진 것인지
- 「나사 조이기」부분
도시의 긴 건널목을 꿈틀꿈틀 기어가는 지렁이
건장한 어깨와 날씬한 정강이 사이에서
육중한 보행자의 구둣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다
- 「지렁이 건널목」 부분
작품「나사 조이기」에서 보이듯 헐거워지고 마모되는 나사의 속성을 경전의 문장처럼 빗대어 잘 내면화시켜 내거나 “육중한 보행자의 구둣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긴 건널목을 꿈틀꿈틀 기어가는 지렁이”를 사실적으로 드러낸 「지렁이 건널목」또한 시멘트 바닥을 기어가는 지렁이의 만행이자 천축을 향한 오체투지가 빚어낸 아슬한 경전에 다름이 아니다. 이러한 양상은 “순순히 쏟아지는 깨”를 보며 “소박하게 침묵으로 익어” 오면서 수난과 축복을 받은 계절을 통해 “참으로 이룩된 경전”이라고 파악해내는 「깨를 털며」에서도 나타난다. 이외에도 “실직”이라는 일반적인 대상에서 둥치가 잘려나간 가로수 플라타너스를 통해 “발을 빼지 못”하거나 “간격을 조절하기 위한 구조조정”(「실직」)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실직”에 대한 상황을 더 부각시켜내기도 한다.
----이선희 시집 {소금의 밑바닥}, 도서출판 지혜, 양장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