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이달의 훈화
연중 제16-19주간, 성모승천대축일
김영진 바르나바 신부
김영진 바르나바 신부는 1980년 원주교구에서 서품을 받고 현재 도계성당 주임신부로 재직 중이다.
연중 제16주간(7월 19-25일)
낮고 낮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꾸미시네(시편 149장)
세례자요한은 “그분은 날로 커지셔야하고 나는 날로 작아져야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저마다 남보다 높아지고 으스대고 많이 갖고 누리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날로 커지셔야하고 세례자요한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는 날로 작아지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말씀이지만 영성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만나는 우리 이웃들은 날로 커지고 나는 날로 작아지고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교훈도 내포되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웃이 커지고 내가 작아져야한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웃이 커지고 내가 작아져야 된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작아지는 것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이다. 시편 149장에도 하느님은 낮고 낮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꾸미신다고 되어있다. 낮고 낮은 곳에서 나오는 향기가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다. 낮아지고 작아지는 것 그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좁은 문이다.
둘째, 이웃은 하느님을 만나는 또 하나의 성사이기 때문이다. 천주교 교리에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일곱 가지 성사가 있다. 영성적 의미에서 이웃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도구요 통로이기에 또 하나의 성사라고 볼 수 있다. 혼자서 결혼할 수 없듯이 이웃 없이 하느님의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웃은 하느님만큼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섬겨야 될 대상이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3,40)라는 말씀을 주시지 않았는가!
높은 산 낮은 산이 함께 어울리고 높은 나무는 낮은 나무가 잎을 먼저 피울 수 있도록 배려해주며, 새로 움터오는 초목들과 오래 살아 쓰러져 썩어가는 고목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듯해도 서로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많이 느낀다. 어찌하여 사람만이 패를 나누고 힘자랑하며 싸울 준비를 하는가. 어찌하여 사람만이 서로 배려해주고 이해하여주며 어울려 함께 지내기가 어려운 것인가.
연중 제17주간(7월 26일-8월1일)
두려워하지 마라
성경에는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있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다. 두려워하라는 말씀은 영적인 죽음 즉 하느님을 외면하고 하느님을 떠나서 사는 삶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에선 어떤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일까. 나는 평생 하느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으로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육적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수없이 육적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다.(이사 41.10 43,1-5 44, 2, 여호수아 8,1, 마태 10,26-31, 루카 1,30 12, 4-7, 요한 14,27) 그러나 육적인 죽음은 여전히 두렵다. 평생을 사제로 살고자 애썼던 나도 암수술을 받고 투병하면서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있었고 회복된 지금도 그 두려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죽음을 자처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신앙인에게는 의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죽어야 될 상황이라면 의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또 자신의 세상살이가 의학적으로 마쳐야 할 때라면 불안해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시간과 생명을 잘 썼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떠나야할 사명이 있다.
둘째, 순명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순명은 하느님 말씀에 순명이지만 교회를 통하여 오는 순명도 포함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눈에 보이는 교회 즉 교계제도 안에 있는 성직자들께 대한 순명을 통하여 일하신다. 사제인 나는 주교에게 순명하고 교우들은 사제에게 순명하는 그 순명을 통하여 주교도 신부도 모르는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셋째,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귀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거나 약한 이들을 공격하며 특히 마귀에게 공포감을 갖는 이를 더 만만하게 보며 괴로움을 준다. 마귀를 쫓기 위해서는 어떤 마귀도 하느님의 힘을 이길 수 없기에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마귀의 힘에 굴복하여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끈질기게 맞서면 마귀는 물러간다. 대부분의 마귀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성호경과 주모경 묵주기도만 인내심을 갖고 열심히 바쳐도 떨어져 나가는데 어떤 마귀는 공동체가 힘을 합쳐 오랜 기간 끈질기게 기도를 해야 떨어져 나간다.
연중 제18주간(8월 2-8일)
밀과 가라지
내가 살고 있는 도계에서 30~40분 나가면 동해바다다. 산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품어주지만 바다역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품어준다. 어떤 물이던 자기를 찾아오는 물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 바다의 힘이다. 맑은 물이건 지저분한 물이건 구분하지 않는다. 구분하지 않고 끌어안을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다의 힘이요. 우리 인간이 배워야할 힘이다.
사람은 편을 가르며 살고 있다. 자기편이라 생각되면 사랑도 정의도 후하지만 내편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깎아내리는 습성에 매몰되어 살아간다. 내편이 아니면 타인의 장점도 무조건 단점으로 쉽게 결정 짓기도 한다. 이러한 인간의 실상은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에게 희망을 잃지 않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배려하고 기다려주며 살아야 한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태 13장)
밀밭에 밀씨를 집주인이 뿌렸는데 원수(마귀)가 몰래 와 가라지 풀씨를 뿌리고 갔다. 머슴들이 주인에게 가라지 풀들을 다 뽑아버릴까요? 물으니 주인이 가만히 두어라. 가라지 풀을 뽑다가 밀 이삭이 뽑혀지면 어떻게 하겠느냐 마지막 날 추수 때에 집주인이 알아서 밀은 곳간에 가라지 풀은 불속에 넣겠다는 것이다.
기다려주어도 가라지 풀이 밀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자라면서 가라지 풀은 밀이 먹어야 할 자양분을 빼앗아 먹기에 밀이 자라고 열매 맺는 것도 어려움이 따른다. 그런데도 주인은 가라지 풀을 뽑아내지 말고 가만히 두라고 한다. 잘못된 것을 보고 가만히 두고 기다리는 것은 가라지 풀을 뽑아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러나 주인은 어려운 것을 선택한다. 이유는 딱한가지다. 가라지 풀을 뽑아내려다가 귀한 밀 이삭을 뽑으면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다른 사람에게서 가라지를 뽑아내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이라는 밭에 있는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것도 기준이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자기편에 있는 사람이라면 가라지도 밀로 판단하고, 자기마음에 들지 않는 이라면 밀도 가라지로 쉽게 판단해 버린다. 자기기준으로 볼 때 보이는 다른 사람의 단점을 뽑아내려 하지마라. 설령 그것이 예수님 보시기에도 단점이라면 그 일은 세상마칠 때에 예수님이 하실 일이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뽑아내는 것도 안 되지만 예수님의 역할을 본인이 주제넘게 하는 것은 더더욱 건방진 일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 밭에 있다고 생각되는 가라지를 뽑으려하기보다는 자기 마음 밭에 어쩌면 타인보다 더 무성할지도 모르는 가라지 풀들을 뽑아내는데 집중하라.
연중 제19주간, 성모승천대축일(8월 9-15일)
참 좋은 동네
내가 사는 도계는 참 좋은 동네이다. 석탄먼지가 날리는 탄광촌이요.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마을 골목길에 연탄가스 냄새가 풀풀 나는 곳이지만 정을 주고 정이 들 수밖에 없는 동네이기 때문에 참 좋은 동네이다. 좋은 동네란 교황 베네딕토 16세와의 대담집 ‘세상(신)의 빛’에 있듯 내적균형 즉 정신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곳을 생각해야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질과 외적능력의 성장만으로는 행복해 질 수 없고 오히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인간내면의 정신적 잠재력의 성장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계는 어찌하여 내적균형 즉 정신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좋은 동네인가?
첫째로 자연환경이다. 도계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에 있는 마을이다. 성당 앞에 솟은 대덕산만 해도 해발 700미터이고 사시사철 다양한 정원을 만들어준다. 성당 뒷산은 해발 1244미터의 육백산이고 성당좌우에는 해발 1072미터의 덕향산과 1200미터의 백병산 응봉산 속에 숨겨져 있는 마을이 도계다. 마치 거인의 호주머니 속에 있는 호두알처럼 커다란 산속에 숨겨져 있는 도계에서의 삶은 처음엔 앞뒤 좌우의 높은 산들 때문에 숨이 막히는 듯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산들이 정든 친구, 정든 이웃, 정든 스승이 되어 주었다.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산을 보면 황홀하고 산골짜기 마을 사람들을 보면 아름답고, 산 밑 일터를 생각하면 애잔함이 흐른다. 그것이 탄광촌 사목을 하는 신부의 마음이다. 산들이 주는 황홀함과 마을 사람들이 주는 아름다움 그리고 산 아래 광부들의 지하 일터가 주는 애잔함이 내안에서 교차되며 이곳이 정이 들고 참 좋은 동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는 서로 좋은 이웃이 되고자하는 사람들의 소박한 삶이다. 사람들의 소박한 삶이 마음의 벽을 허물게 하고 편안하게 해준다. 손바닥만 한 땅에 채소를 심어 한 움큼씩이라도 나누어 먹고 싶은 마음, 물김치 한 사발 담그고 청국장 한 그릇 끓여 나누며 사는 마음, 그 마음들이 너무 아름답고 향기롭다. 서로서로 좋은 이웃이 되어주려는 마음들이 모인 곳이니 어찌 참 좋은 동네가 아니겠는가! 가진 것이 많아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없다면 아직도 배가 고프고 목마르고 마음의 궁핍이 크기 때문인데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여기 사는 이들이야말로 넉넉한 삶을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동네를 참 좋은 동네로 만드는 것은 우리자신들의 일이다. 참 좋은 동네를 만들려고 나무도 심고 산책길도 만들고 인공호수도 만들지만 이웃과 정을 주고받으며 소박하게 살아갈 줄 모른다면 참 좋은 동네가 될 수 없다. 먼저 정을 주고 참 좋은 이웃이 되어주라. 크리스천은 참 좋은 이웃을 찾는 이들이 아니요 먼저 참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