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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혜동산 JESUS - KOREA 원문보기 글쓴이: 죤.웨슬리
시사리뷰 2010/01/30 10:34 Posted by 김삼
머릿글
미국인들에게 2월은 흔히 '대통령의 달'이다. 특히 애국적인 미국인들에겐 그렇다.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그들이 가장 존중하는 1대 조지 워싱턴과 16대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일이 나란히 2월에 있기 때문이다. 2월 12일이 링컨의 생일이다. 지난 해는 링컨의 탄생 200돌이기도 했다.
2월 11일도 링컨의 삶에서 의미 있는 날이었다. 1861년 그 날 대통령직을 수행하려고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의 친지들을 두고 워싱턴DC로 떠났기 때문에.
그 얼마 후..뉴욬주 오번시, 카유가 카운티의 포트 바이런에 살던 농부 에이머스(아모스) 스캍 킹 씨가 링컨의 고별 연설에 감동을 받고 성경책 한 권을 증정했다. 가죽 장정에다 안에 삽화도 있는 이 케임브리지 성경책은 오는 2월 4일, 149년만에 처음 포트 바이런 고등학교에서 전시된다고 한다. 지난 세월 버몬트 주 맨체스터에 있는 링컨 패밀리 홈 '힐딘'의 영구 콜렠션으로 소장돼 있다가 잠시 '나들이' 온 것이다.
맨체스터의 저택은 링컨과 메리 타드 사이의 아들인 라벝 타드 링컨이 1903년 여름 별장으로 건립해 그후 링컨 가문이 3대에 걸쳐 살던 집. 링컨의 직계 가족은 몇해 전 대가 끊겼다고 한다.
버랔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해 취임식 때 쓴 성경책은 1821년 링컨이 자신의 취임식 때 썼던 또 다른 성경책으로, 좀 더 작은 휴대형이다. 이 역시 링컨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당시 대법원장이 누군가를 시켜 갖고 오게 한 것이다.
흥미로운 아이러니 하나는..링컨은 성경을 거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아마도 독자는 "엉? 헑~! 아니, 무슨 그런 망언을..? 링컨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할 것이다. 필자도 그런 신념을 지닌 독자를 일순에 실망시키고 싶진 않다. 나 자신도 과거 링컨이 성경적 신자였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진실은 진실되게 해야 하는 법. 내가 그렇게 믿고 싶다고 해서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잖나.
한 가지 필자로서 미리 밝혀 두는 것은, 링컨을 폄하하거나 비하할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링컨을 명사로서 특히나 기독교계 명사로서 떠받들어 오다 보니 그를 무조건 참 신자로 보는 관점이 분명 잘못됐기에, 이를 시정하고, 단지 링컨을 역사적인 한 인간으로서 보자는 것이다.
링컨이 참 신자였냐 아니냐는 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문제다. 까닭은 워낙 링컨의 종교생활 기복이 심했는 데다 링컨의 기독교관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음주의 기독교 역사학자 마크 놀 박사의 '링컨의 헷갈리는 신앙'이라는 글 제목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놀은 아무런 "딱 부러진" 답변을 해 주질 않는다. 그래서 독자의 헷갈림만 더 불어나 버린다. "독자가 알아서 판단해라"로 끝낸 글이기에.
"그럼 그가 통나무 집에서 어머니의 무릎에서 듣던 성경 이야기는 뭐냐??"고 물을 수 있겠다. 링컨은 물론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는 성경학도였다. 그런데 단지 인류의 문학적 소산이라고 믿고 평생 자주 읽은 것이다. 링컨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국민들의 신앙을 존중한다고 말했지만 자신은 그렇게 믿지를 않았다.
링컨의 친구들 가운데 특히 자슈아 스피드는 링컨이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에 관해 많은 말을 했지만, 결코 신앙고백을 한 적은 없다고 후대에 전해 준다. 20댓적의 한 친구도 링컨은 늘 예수님이 기독교계가 이해하는 대로의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했고, 신구약 성경을 공격하거나 조롱했다고 밝혔다.
링컨의 삶은 대체로..
1. 켄터키, 인디애나에서의 어릴 적 삶
2. 일리노이에서 가출한 뒤의 청소년/청년기 삶
3. 변호사/주의원으로서의 삶
4. 대통령으로서 워싱턴DC 백악관에서의 삶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신자들 대부분과 미국 크리스천들 다수의 생각은..링컨이 대체로 (위의) 1-4 내내,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평생 기독교인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역사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그 자신의 어록으로보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으로보나 그럴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1-3의 삶은 오히려 대부분 회의론자 내지 이신론자(deist)적 삶을 살았다고 봐야 옳다. 다만 4의 경우, 그가 정기적으로 장로교회 출석을 했고(출석만 했음), 최소한 표면 상으로는 모종의 몇몇 '변화'가 있었기에 충분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링컨의 신앙생활 속에서 몇 가지 분명한 것을 밝혀 둔다.
첫째로, 링컨은 일반 개념의(conventional) 크리스천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크리스천이었다. 성경적인 크리스천이었다고는 더구나 말하기 어렵다. 보다 정확한 의미는 글이 진행되면서 밝혀진다.
둘째로, 링컨은 온 생애에 걸쳐 '예수님' 또는 '예수 크리스토'라는 말은 거의 써 본 적이 없다. '주'(Lord)는 자주, '크리스토'나 '구(세)주'라는 말은 여러 번 썼고. 'God'이란 말은 매우 자주 썼지만, 아다시피 흔히 영어에서 'God'이란 말은 굳이 기독교의 주/예호봐(야웨)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 '성령'(Holy Spirit)이란 말을 한 두 번 썼지만 의도는 불분명하다.
셋째로, 링컨은 성경과 성경 속의 하나님,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한 적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거의 전무하다. 거듭난 흔적이 거의 전무하다는 뜻이다. ('거의'라는 낱말의 뜻은 나중 밝혀진다.)
넷째로, 위에서도 비쳤다시피 링컨은 대통령 시절 잠시 외에는 평생 교회에 거의 다니지도 않았을 뿐더러 특정 교파/교단/교회에 소속됐거나 공식 등록한 적이 전혀 없다. 출석만 했을 뿐이다.
크리스천이란, 예수 크리스토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속에 영접함으로써 거듭나 성령님을 모신 사람을 가리킨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또 성경을 읽기만 할 뿐더러 그 말씀대로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기에 함께 모이기에 힘쓰고 다른 신자들과 친교하는 사람들을 뜻하기도 한다.
링컨 연구학자들 가운데 링컨의 삶을 기독교적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보려는 사람들은 링컨의 생애가 과거 부정적으로 비쳐보인 것이 특히 그의 동업자 윌리엄('빌리') 헌던이 쓴 전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링컨을 가장 많이 알았던 사람"으로 정평이 있던 헌던은 링컨과 함께 변호사 개업을 했기에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30대를 중심/주축으로 삼아 링컨의 삶을 본 전기를 썼다. 자신이 비신자에다 무신론자 또는 이신론자에 가까웠기에, 링컨을 최대한 그렇게 보기를 원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증언을 깡그리 무시할 순 없고, 특히 링컨 사후 그가 각지에서 링컨의 발자취를 더듬어 현장조사를 했던 부분들은 그렇다.
한 사람의 생애는 특히 어릴 때 경험에 크게 좌우된다. 그러므로 링컨의 삶도 그랬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부모는 마땅히 어린 자녀의 삶 환경을 행복하게 해 줄 의무가 있다. 링컨은 이 점에서 그다지 행복하진 못했던 것 같다. 어릴 적 가정은 무척 빈곤했고,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목수 겸 농부에다 개척자였지만, 자녀를 위한 교육열과 미래 개척의 꿈이 결여돼 있었다. 그 점은 개척시대의 공통된 아이러니이기도 했다.
링컨의 삶에 주된 영향을 미친 사람은 9살 때까지 생존했던 친모 Nancy Hanks(이하 '낸시' 또는 '낸시 행ㅋ스'로 표기)와 링컨의 10살 때 그의 가족과 합류한 계모, 새러 부쉬 잔스턴 - 두 어머니다.
링컨은 자신의 외조부가 교양 넘친 버지니아의 농장주였다고 밝힌 적이 있다. 또 이미 세상을 뜬 낸시에 대해 "하나님이 내 어머니를 복 주시길. 나의 현재와 희망이 모두 어머니 덕분이다"고 애정을 고백한 바 있다.
낸시 행ㅋ스와 토머스 링컨은 1806년 6월 12일 켄터키 주 워싱턴 카운티 일리저벹타운의 리처드 베리의 집에서 제시 헤드 목사(감리교 직위상 '디콘' 즉 목회집사의 주례로 결혼했다. 베리는 낸시의 법적 후견인이었다.
낸시가 토머스를 만난 것은 자신은 주로 수공 봉제사로, 토머스가 이곳 타운에서 목수 겸 농부로 일하던 시절이었고, 둘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토머스는 1802년 하딘 카운티로 이사를 와서 이듬해 238 에이커의 농장을 구입했다.
낸시는 본래 어릴 때부터 바느질/뜨개질에 능숙해 훗날 뛰어난 침모(seamstress)가 됐다. 여러 3개 카운티 등의 동네를 거치면서 웨딩 가운부터 장례식 의상까지 두루 맡아 제작했고 노동윤리에 밝은 정신, 단정하고 깔끔함, 명랑함, 지성 등으로 주위에 잘 알려져 있었다. 사촌 잔 행ㅋ스는 그녀를 아는 사람 누구나로부터 총애와 존중을 받았다고 말했다. 검은 머리, 푸른 눈동자에다 섬세한 몸매였던 낸시의 사진은 없고, 다만 측근의 묘사와 링컨의 용모를 참조하여 로이드 오스텐돌프가 그린 상상화가 있다.
결혼한 둘은 일리저벹타운의 한 오두막집에서 살았고 토머스는 장롱/문짝/관 등 목제품을 만들어 살림이 보탰다. 링컨네는 인근 리틀마운트침례교회 교인이었다. 이 교회는 노예 문제로 기존 교단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였다.
둘의 결혼 약 9개월만인 1807년 2월 10일에 첫 아이인 딸 새러가 태어났다. 놀린 크맄의 싱킹스프링팜으로 이사를 가서 1809년 2월12일 일요일 해 뜰 시각에 사내아기가 태어났는데, 그가 에이브였다. '에이브러햄'이라는 이름은 (1786년 원주민에게 살해된) 친조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811년엔 놉크맄으로 이사를 가서 셋째 아이 '토머스'를 낳았지만 어릴 때 숨졌다.
1816년엔 인디애나주 남부로 이사를 가서 페리카운티(훗날의 스펜서 카운티) 리틀피전크맄들판에 자리잡았다. 이때 낸시의 숙모 부부인 토머스/일리저벹 스패로가 이사를 들어와 잠시 살다 인근에 자신들의 캐빈을 지었다.
낸시는 자식들을 사랑했고 늘 다정했다. 미래의 꿈을 키우면서 자신과 토머스가 갖지 못했던 삶의 좋은 기회들을 아이들이 갖기를 원했다. 그래서 새러와 에이브에게 링컨가족성경을 읽어주곤 했다.
그러던 1818년 이 지역에 닥친 독초(white snakeroot)를 먹은 소의 우유를 마신 후유증으로 사람들이 죽어갈 동안 먼저 스패로우 부부가 숨진 몇 주 만에 낸시도 앓기 시작했다. 임종이 가까울 무렵 아이들을 침상머리에 불러 아빠와 서로에게, 세상에 대해 착하고 친절하게 지내라고 타이른 뒤, 10월 5일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스패로우 부부를 위해서도 관을 지었던 토머스는 푸른 소나무로 아내의 관을 제작했고, 어린 링컨은 관에 박을 나무쐐기못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고 훗날 링컨이 회고했다. 링컨은 이미 여덟 살 무렵에 도끼질을 배워 숲나무를 찍어 땅을 트고 장작을 쪼개고 울타리감을 만들었다.
토머스는 낸시의 관을 썰매에다 실어 숲 언덕으로 끌고 올라가 아무 장례 절차도 없이 묻었다. 몇 달 후, 데이빗 엘킨스 목사가 무덤에서 기념 설교를 했다.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는 체구가 큰 편에다 탄탄하고 매우 건강한 체질이었다. 음주벽이 있었지만 절제했고 대체로 악의 없는 성품이었다. 자기 할 일을 다하고 때로는 배심, 카운티 죄수 감시 등도 맡아했던 모범시민이었다. 그는 말을 잘했고 이웃에게 인기도 있었다.
토머스는 낸시가 죽은 이듬해인 1819년, 다시 일리저벹타운으로 돌아가 거기 사는 과부 새러 부쉬 잔스턴에게 청혼했고, 그 해 12월 2일 결혼했다. 당시는 개척시대여서 배우자 없이는 잠시도 살기가 힘들었다. 새러 부쉬는 과거 몇 년 간 젊은 시절의 토머스를 알던 사이였으나 처음에 잔스턴과 결혼해 3남매를 두었다. 이 3남매는 링컨네 가족과 무난히 합류했다. 1823년 즈음엔 온 가족이 리틀피전침례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1827년 토머스는 100에이커의 농장주가 됐고 1829년엔 좀 더 나은 집을 짓던 중 처사촌 잔 행ㅋ스로부터 낸시가 죽었던 땅에서 독초병이 물러가고 회복됐다는 말을 듣자 짓던 집을 놔둔 채 땅을 팔아 이듬 해인 1830년 다시 일리노이로 이사를 한다. 1831년엔 다시 한 차례 이사를 해서 여생을 거기서 보낸다.
토머스는 세 군데 농장을 보유했고 구즈네스트 프레리에 큰 방 두 개짜리 집을 지어, 1845년 무렵, 결혼한 의붓자식의 자녀까지 모두 18명이 살았다. 농장에서는 옥수수/귀리/밀 등을 생산했고, 닭/말/돼지/젖소/양/거위 등을 사육했다.
토머스는 1841년 보유했던 120에이커 중 3분의 1은 재정형편 상 훗날 같은 주 스프링필드에서 성공적으로 개업 중이던 아들 에이브러햄에게 팔았다. 1848년엔 강매위기였던 나머지 땅을 링컨에게 받은 돈 20달러로 간신히 지킬 수 있었다.
토머스는 1851년 1월 17일 73세로 별세했다. 아버지와 친근하지 않았던 링컨은 당시 이복 형으로부터 부고를 들었으나 장례식 참석을 거부했다. 링컨의 다른 얘기들을 보면, 토머스는 술을 마신 뒤 아내를 구타하고 자식들을 학대한 일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링컨의 의붓어머니 새러 부쉬 잔스턴은 1788년 일리노이의 부쉬 가문에 태어났다. 새러는 본래 켄터키 하딘 카운티에 있던 집에 살다 일리저벹타운으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자랐다. 당시 젊은 토머스 링컨을 알고 있었으나, 1806년 대니얼 잔스턴과 결혼했다. 토머스가 낸시와 결혼한 것은 그보다 약 석달 후였다. 새러의 전남편 잔스턴은 10년 후 죽었다.
어린 에이브 링컨은 새 엄마에게 금방 적응했다. 새러가 가져온 책들 중엔 '웹스터 스펠러', '로빈슨 크루소' 등이 있어 링컨의 애독서가 됐다. 새러는 남편처럼 문맹이었지만 토머스의 자녀들에게 한결 새로운 분위기와 환경을 제공했고, 특히 에이브의 학구열을 칭찬하고 적극 격려했다. 또 남편에게 에이브의 독서열을 긍정적으로 보도록 타이르곤 했다. 새러는 훗날 전기를 쓰러 온 윌리엄(빌리) 헌던에게 어릴 적 에이브는 "내가 본 가장 뛰어난 소년"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새러와 링컨은 자연스럽게 애정을 나누게 됐다.
키가 크고 자세가 곧았던 새러는 매우 바지런했고 동네 사람들에게 늘 다정했다. 링컨은 1831년 출세를 위해 집을 떠난 후에도 수시로 계모를 방문했고, 아버지 별세 후 자신의 명의로 된 40에이커 땅을 어머니 생시에 쓸 수 있게 배려했다. [ 이 점에서 링컨은 부모를 편애했다고 할 수 있겠다. ] 새러 자신의(전남편과의 사이의) 자녀들은 모두 최소 7명의 자녀를 낳아 1850년대에 20여 손자손녀들을 두었다. 새러는 죽기까지 활기찬 삶을 살다 1869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토머스 곁에 묻혔다.
링컨 가문의 숨은 내력
링컨을 깊이 아는 데는 표면상의 생애보다는 링컨 가문의 "숨은 내력"이 더 도움된다고 생각한다. 수박 겉 핥기 식 명사추종주의는 사람을 바로 아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 링컨에 관한 최신 한글 도서를 일부 참조해 보고 하는 소리다. 한결 같은 명사추종적 결론은 한심하다는 게 필자의 소감이다.
낸시는 백인/흑인/원주민 3인종 혼혈족인 멜런전(Melungeons)계 혈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생아였다. 그녀의 어머니 루시는 이 집안을 찾은 버지니아 정착촌의 한 남성과 잠시 사랑에 빠졌다가 낸시를 배어 낳은 뒤, 숙모 부부에게 맡기고 다른 남성과 결혼했다고 한다. 당시 법 관련 기록에 따르면, 루시는 '통간' 혐의를 받은 바 있으나 재판까지 간 적은 없다. 훗날 정치무대에 나선 링컨이 가족의 이런 배경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 없다.
링컨의 다소 검은 피부와 굵고 거친 검은 머리털, 회색 눈동자 등은 전형적인 멜런전 형과 일치한다. 링컨은 아버지 토머스보다는 어머니를 빼 닮았으며, 어머니처럼 색맹이었다.
일리저벹 헐쉬먼과 다널드 팬터 예이츠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한편 링컨은 유대계 선조를 두었다는 일설이 가능하다고 한다. 토머스와 낸시가 결혼한 장소였던 (교회가 아닌) '베리'네의 집안은 DNA 조사결과 유대계인 것으로 나타났다. 베리는 토머스-낸시의 결혼 당시 낸시의 혼인증명에 후견인으로 서명했다(중간 사진 1. 참조). 북미주로 초기 이주한 영국인 다수가 유대계 혈통을 지녔다.
링컨의 선대는 퀘이커(일명 Friends/'형제회') 배경을 갖고 있었다[각주:1]. 그래서 링컨은 대통령이 된 이후까지 평생 퀘이커 교도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곤 했다. 링컨은 한 친척에 보낸 서신에서, 자신의 선조 혈통에 관한 희미한 기억을 더듬은 바 있다.
"나의 조부는 버지니아 라킹엄 카운티에서 1782년 경 켄터키로 이주했다가 2년 뒤 원주민들에게 암살됐다...나의 증조부는 펜실베이니아에서 버지니아로 왔다. 그는 퀘이커 교도였다." (펜실베이니아라는 주 이름 자체가 건국 선조의 한 명인 초기 퀘이커 교도 윌리엄 펜-William Penn에서 왔다.)
한편, 링컨의 첫 선조는 1640년 이전에 신대륙으로 온 '새뮤얼 링컨'으로, 청교도로 추정된다.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는 자신이 여섯 살 때 아버지 에이브러햄이 피살했기에 일찍이 고아가 되어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이 점에서 동정의 여지가 있으나 에이브러햄은 아버지에 대해 대체로 차가웠다. 그가 아버지를 경제적으로 도우면서도 장례식까지 외면했던 사실은 그가 아버지를 내심 깊이 혐오했거나 경원했음이 입증된다. 링컨에겐 적어도 이 당시 크리스토의 사랑이 없었다.
링컨 가문의 배경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고, 엇갈리는 다양한 학설들이 제기돼 왔다. 링컨 가문 배경을 아예 뒤집을 만한 설도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사생아'였다는 설. 물론 낸시와 토머스의 결혼을 알려진 역사대로 아는 사람들에겐 어처구니 없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무시 못할 증언들과 그럴 듯한 주장들이 있다.
링컨의 사생아 설엔 크게- 잔 캘훈(John C. Calhoun)의 아들 설, 엔로(Enroe)의 아들 설, 두 가지가 있다. 양측 다 강하게 내세우는 많은 '증거'들이 있으니 혼동스럽다. 그러나 여전히 링컨은 사생아가 아닐 가능성, 사생아일 가능성이 각각 50%씩이라고 보는 게 안전선이다. 만약 그가 사생아였다면, 그의 생애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링컨을 국부로, 명사로, 크리스천으로 열광하는 사람들은 그럴 가능성조차 부정하거나 조직적/논리적으로 반박한다. 당연한 행동이요 향방일 것이다.
부모의 신앙적 영향
링컨은 부모로부터 과연 어떤 신앙적 영향을 얼마나 받았을까?
우선, 링컨이 평생 간직한 성경 애독 습관은 어린 에이브가 일찍 떠난 어머니 낸시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 거의 틀림 없다. 링컨은 성경을 부분적으로 자주 인용할 수 있을 만큼 밝았다. 그러나 링컨이 성경을 진리로서 100% 다 받아 들이지 않은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오히려 신관과 '동정녀 탄생' 등 성경의 주요 교리를 불신했고, 다수가 '조작'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30대엔 본격적으로, 내심 기독교를 "황당하고 우스꽝스런 종교" 정도로 여기게 된다. 이것은 링컨이 독서로 접한 바, 당대에 발달한 소위 '계몽'(enlightenment) 정신의 영향이기도 했다. 특히 젊은 시절의 링컨에게 이성주의/이신론 등은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링컨은 성경을 주관적으로 믿고 받아들이기보다 객관적으로 하나의 철학적/문학적 진리로 받아 들인 거 같다. 이것은 다음 셐션에서 소개할 그의 십대 시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즉 링컨은 퍽 일찍부터 성경에 대한 애정과 동시에 뿌리 깊은 회의를 가졌다. 이것은 일종의 양극적 모순이며 특히 훗날 그의 정치 생에 속에서 위선과 다름 없는 이중성으로 나타난다.
링컨은 자신의 출신배경에 관련된 비밀에 관해 입이 무거운 편이었으나, 빌리 헌던 등에게 '사생아' 얘기를 몇 번 했다. 어머니 낸시가 분명히 사생아였고, 헌던에 따르면, 자신 역시 '사생아'임 또는 그럴 가능성을 한 두 번 비친 적이 있다. 그래선지는 몰라도 그는 예수님 역시 '사생아'였다고 일찌감치 결론 짓는다. 이것은 정치 초년병 시절 그를 '무신론자'로 몰아, 위경에 빠트릴 뻔하기도 했다.
예수님을 '사생아'로 본 일종의 동일화/동질화 의식은 예수님에 대한 동료감/친근감으로 발전하진 않았다. 그가 사생아 뿌리 탓에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동시에 자주 자살충동을 느낀 점도 과거의 혼외적 배경에 대한 도덕적 수치감 등 강한 부정적 의식이 더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그는 20대 시절 정욕에 불타 혼외정사를 여러 번 갖는다.
링컨네는 특히 아버지 토머스를 따라 다닌 개척자 가정의 고달픈 생활이라, 이사를 퍽 자주 했고, 따라서 한 교회나 특정 교파 교리에 대한 신앙이 깊이 자리 잡힐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릴 때 주로 침례교회 배경이었으나 선대의 퀘이커 신앙에 더 깊은 동경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 침례교회에서 칼뱅주의 예정론에 기초한 소위 '숙명론'(fatalism)을 배웠지만, 숙명론이 링컨의 삶 속에서 한 역할에 대해선 긍정론/적극론, 부정론/소극론의 양극적인 논란이 있다. 즉 한 쪽에서는 숙명론이 그의 삶을 좌우했다는 설, 한 쪽에서는 숙명론에 거부감을 가졌다는 설 등이다.
어린 링컨이 숙명론을 진리로 받아 들였다면, 그것은 자신의 출신 배경 탓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며, 내심 부정했다면 역설적인 거부감 탓이기가 쉽다. 아무튼 숙명론이 그의 삶에 끼친 영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보다 상세히 논할 기회를 가져 보련다.
결국 링컨은 친어머니 낸시로부터는 평생 그의 삶을 지배한 독경벽(讀經癖)을, 계모인 새러 부쉬로부터는 애독 습관과 자기교육열을 전수받은 것 외에 신앙적으로 별 강한 영향을 받지 못한 거 같다. 즉 성경을 사회에서 인용할 만한 그리스적인 철학적 보편 진리로 받아들인 반면, 히브리적 절대진리로 받을 동기와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링컨이 절대진리로서의 성경에 그나마 부분적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훨씬 훗날인 대통령 재임 당시 아들의 죽음 때문이었다.
링컨이 애초에 위그당(Whiggers, 공화당의 전신)에 가입했던 주된 이유는 개척시대 특징인 열정주의와 방관적인 비 교육열에 대한 강한 반발의식 때문이다. 링컨은 자기 부모들이 모두 문맹이었고 따라서 자녀들에게 교육적으로 해 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개탄하고, 자기의지에 의한 자립과 교육을 강력히 부르짖은 것이 위그당의 개혁의지나 분위기와 맞물려 주효했다. (참고 http://www.historycooperative.org/journals/jala/16.1/howe.html)
링컨의 위그당은 열정보다는 지성과 냉철, 막연한 개척보다는 안정적인 교육, 과격한 노예철폐나 노예유지보다는 중도주의를 지향했다.
젊은 정치인 시절,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지에 대한 이러한 링컨의 강한 의존감과 확신은 뉴에이지 핵심사상의 하나인 자조(self-help)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어린 시절 하나님과 부모에 대한 회의 감정과 의식이 젊은 시절의 이성주의, 자기의존, 자기성취주의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건 링컨의 실제 삶으로 입증되는 역사적 사실이니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링컨을 명사로 추정하기에 그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보려는 "무작정 오케이" 내지 검증불요(不要)주의는 위험하다. 바람직한 인생관과 가치관이 아니다.
시리즈 다음 회에서는 링컨의 청소년 시절을 조명해 보련다.
시사리뷰 2010/02/10 12:00 Posted by 김삼
십대의 링컨의 생활 배경에 대해 동정을 금할 길이 없지만, 아직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한계성 속에서, 주변 환경과 사회에 대하여 주로 부정적이었던 그의 반응에서는 철학적 윤리성은 몰라도 어떤 기독교성은 느끼기 힘들다. 물론 독자에 따라 보는 견해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옆그림: 울타리 나무를 쪼개는 십대의 링컨. 훗날 선거 캠페인 당시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울타리나무 쪼개는 링컨'(Lincoln, Rail Splitter)으로 부각시켰다.
십대의 링컨도 기독교인이라기보다 세속적 타인과 크게 별 다름 없는 젊은 개척자의 한 명으로 비쳐진다. 그에게 기독교가 상대적 영향은 몰라도, 절대적 영향은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서열이 대단했던 그에게, 어쩌면 성경도, 훗날 성경에 대한 그의 상찬과는 달리 하나의 '애독서' 이상의 의미나 가치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십대의 링컨 역시, 희노애락 속에서 고뇌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고, 당대 상황 속의 제도적 기독교에 대한 반항아적 감정과 성경에 대한 존중이 충돌 내지 대비되는 모순이 엿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십대의 링컨도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다고 느껴진다.
독자들의 슬기로운 통찰과 판단을 기대한다.
십대의 문 앞에서
앞서와 일부 중복되지만..1816년 토머스 링컨은 켄터키를 포기하고 인디애나로 이주했다. 한 가지 원인은 노예제가 싫어서였다.
에이브 링컨은 어릴 적부터 얼굴과 생각이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다. 그래선지 에이브는 표정부터가 쉽사리 우울해 지곤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토머스가 더 많은 자녀를 원치 않았는지(?), 갖기가 불가능(?)했는지, 아무튼 당시로서는 가족 수가 너무 적어서 다른 집 아이들보다 훨씬 일을 많이 해야 하는 데다 대화나 질문, 공부 때문에 매 맞기가 일쑤였다.
특히 개척자 생활이었기에 엄마 낸시는 아들을 위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엄마와 누나 새러는 요리에다 우유 짜기/젓기, 복잡다단한 빨래, 옥수수 밭갈이, 콩 말리기, 야간조명용 양초수지 마련, 흙 램프 만들기 등에 바빴다. 여가마저도 가족 의복, 담요/침대보의 봉제 등 끝 없는 노동으로 점철됐다.
따라서 꼬마 링컨이 할 일도 그만큼 많았다. 개척자들의 필수인 온갖 도끼일은 물론, 약 1마일 밖에서 큰 양동이로 물 기르기 등 자기보다 훨씬 웃 또래 아이들에게나 걸맞는 일들도 그에게 맡겨졌다.
죽음의 위기와 엄마
에이브는 어릴 때 두 번 죽다 살았다. 이 두 사건은 엄마 낸시와 간접적인 연관이 있다.
한 번은 동네 친구 어스틴 골래어와 들꿩 사냥을 나섰다가 좁은 통나무다리를 건너던 중 그만 미끌어져 깊은 물에 빠졌다. 둘 다 수영을 못하는지라, 물 밖의 골래어가 부랴부랴 긴 막대기를 찾아 내밀었고, 필사적으로 물 위에 떠 있던 링컨은 간신히 막대기 끝을 잡고 물가로 나왔지만 엎어졌다.
골래어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당시 링컨이 거의 죽은 줄만 알고 겁먹은 채 링컨을 이리저리 뒹굴리며 두들기고, 두 팔을 잡고 흔들어 물을 토하게 했다. 옷이 잔뜩 젖은 두 소년은 각각 엄마를 두려워 하며 걱정했다. 엄마가 자주 매질을 했기 때문이다. 골래어는 아빠보다 엄마를 더 무서워 하는 링컨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둘은 부랴부랴 햇볕 아래다 옷을 말렸다.
1818년 가을. 에이브가 곡식을 빻으러 방앗간에 심부름을 갔을 때였다. 늙은 암말이 제분기를 돌려 속도가 느렸다. 날이 어둑해져 안달이 난 링컨은 말이 한 바퀴 돌 때마다 채찍으로 후려 갈기며, "빨리 해라, 이 늙은 말괄량이.."라고 소리쳤다. 신경질이 바짝 난 암말은 급기야 링컨의 이마빡을 냅다 걷어차 버렸다.
에이브는 그 자리에 나동그라져 의식을 잃었고, 이마엔 선혈이 낭자했다. 제분소 주인은 급히 사람을 보내어 링컨의 아빠 토머스를 불렀고, 토머스는 이미 숨진 것으로 뵈는 아이를 마차에 태워 돌아왔다. 에이브는 밤새 의식이 없었다가 이튿날 동틀 무렵에야 깨어나 중얼거린 첫 마디는, 어제 방앗간에서 미처 못 끝낸, "이 늙은 말괄량이 년아!"였다.
엄마 낸시는 이때 링컨의 부상에 크게 개의치 않은 듯 하다. 그녀로서는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낸시는 아들이 천만다행으로 죽지 않은 것을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이며, 에이브를 위한 신적 섭리(divine Providence)의 또 다른 계획 때문이라고 풀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교계 일각에서 크게 유행하던 이른 바 '숙명론'의 영향이다.
"아무 것도 섭리의 계획과 실행을 막을 수 없단다. 될 일이면 되는 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라고 낸시는 아들에게 설명했다.
링컨의 전기 '링컨의 숙녀들-제16대 대통령 삶 속의 여성들'의 저자 다널드 윙클러는 다음과 같이 타인의 말을 인용했다:
"낸시 링컨의 이 덤덤한 반응은 놀라운 신앙의 표현인가, 아니면 아들에 대한 관심의 결핍인가?"
물론 숙명론이 참된 형태의 신앙이라면 전자일 수도 있겠으나, (후자의) 관심보다는 사랑 표현이 부족한 게 아닐까? 본 필자 자신의 어릴 적 경험으로 미뤄 볼 때 그렇게 생각된다.
개척 사회의 미신
낸시 행ㅋ스 링컨이 자녀들에게 전해 준 신앙은 바른 형태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개척시대의 다양한 미신을 성경 말씀으로 극복하지 못한 채 사로잡혀(haunted) 있었던 것으로도 드러난다.
링컨에겐 평생 꿈과 미신에 대한 두려움과 집착이 따라다녔다. 아홉 살 때까지 끼친 엄마의 영향이 아들의 일생을 좌우한 흔적이다.
창문 속을 날아다니는 새, 아이 머리 위에 내뿜은 말의 숨결, 사냥꾼의 앞길을 가로지르는 개 등은 모두 낸시 링컨과 그녀의 개척자 이웃에겐 '불길한 조짐'이었다.
특히 하늘의 달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울타리용 나무를 쪼갤 때는 반드시 달빛 아래서 해야 했고, 감자는 달빛이 가려질 때 심었다. 지면에다 열매를 내는 나무와 식물 심기는 만월 때만 했다. 비누는 꼭 달빛 아래 제작됐고, 반드시 정해진 한 사람이 한 방향으로 저어야 했다.
어떤 일을 금요일에 시작하는 것은 "끝 없는 재앙의 연속"을 의미했기에, 금요 착수는 절대 금물이었다. 출산을 앞둔 임신부들은 침대 아래 도끼 한 자루를, 베개 아래는 칼 하나를 두면 진통이 덜하다고 믿었다.
어린 맘에 엄마로부터 이런 얘기들을 놀라움 속에 전해 들은 링컨은 꿈/미신/비전/조짐의 의미를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그는 한평생 꿈 탓에 당혹하고 혼미스러워 했고, 자신의 제어력을 초월한 어떤 세력의 통제를 받아 이끌려 다닌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낸시는 아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기도 했다. 링컨의 어릴 적 가장 정든 추억거리의 하나는 엄마가 겨울에 벽난로 주변에서 식구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읽어 주던 때였다. 훗날 링컨의 주장으로는 자신의 개인 가치관이 성경에서 나왔다고 한다.
"4복음서에 기록된 근본 진리들..내 어머니의 입술로부터 내가 처음 들은 그것들은 나에게 도덕개념으로 자리 매김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근본 진리들은 생애 후반까지 가치관/철학적인 영향이라면 모를까, 그의 성경적 믿음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조용한 서러움과 눈물
학자/전기작가들에 따르면, 낸시는 남편이 어린 에이브에게 가하는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막지 않았거나 막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시리즈 전회에서 비쳤듯, 토머스가 모종의 동기로 필시 아내의 정절을 의심했고, 따라서 에이브가 친자식이 아닐 수 있다는 의혹을 품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아울러 당시 이웃에 나돌던 루머에 따르면, 토머스 자신, 후기에 성불능자가 됐을 가능성이 추론되기도 한다. 그는 나중 재혼 후 젊은 후처(샐리 즉 새러 조운즈)와의 사이에 자녀가 생겼을 만도 하건만, 전혀 없었다.
토머스는 이웃에 대한 아들의 아이다운 궁금증과 질문에 답하긴커녕 심한 매질을 가해, 때로는 땅바닥에 쓰러뜨리기도 했다. 사촌 데니스 행ㅋ스에 따르면, 이 때 에이브는 소리 내어 울지 않고 다만 "조용한 눈물을 흘려 감정 표현을" 했다. 데니스는 1817년 링컨의 이웃에 이사를 온 당시 18세의 "말 많고 호감이 가는 외사촌형"이었다.
최악의 슬픔은 1818년 가을, 엄마 낸시의 죽음으로써 찾아 왔다. 먼저 외숙 탐과 엘리저벹 부부가 죽고, 그들을 마지막까지 간호하던 엄마도 뒤를 따랐다. 에이브와 새러는 엄마를 간호하며 성경을 읽어 주기도 했다. 엄마는 링컨의 머리 위에 가냘픈 손을 얹고 아버지를 잘 대해 드릴 것, 하나님을 경배할 것 등을 유언으로 남긴 그날 저녁 숨졌다.
아홉 살 소년이 끝까지 지켜 본 엄마의 임종 모습은, 훗날 차례로 이어지는 여러 측근의 죽음들과 함께 평생 차마 감당키 어려운 트로마(trauma)를 안겨 줬다. 더욱이 여태 엄마와 함께 먹고 자고 지내던 방안에서 아빠/외사촌 형과 함께 셋이서 엄마의 관을 짜야 했던 상황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데니스 행ㅋ스는 훗날 회고했다:
"..에이브는 엄마가 죽어간 비참한 모습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자신도 부모를 다 잃어 갈 곳 없던 데니스는 이때부터 한 집안 식구로 링컨의 형이 되어 함께 살아갔다.
그 해 겨울은 링컨네 아이들에겐 유난히 혹독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에겐 용기를 위한 위로와 격려, 따스한 온정이 절대 필요했건만, 토머스는 그럴 맘도 능력도 없었다. 당시 11세인 새러가 이때부터 엄마 대신 주부 노릇을 했지만, 식구들이 일터로 나가고 나면 혼자 외로웠다. 데니스와 에이브는 누이를 위로하느라 새끼 너구리(라쿤)와 거북이 등을 갖다 줬고, 어린 사슴도 한 마리 잡아 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필자가 추가로 발견한 사실은, 죽은 엄마 낸시를 위한 추모 의식을 뒤늦게나마 치른 것은 9세였던 어린 에이브의 편지 때문이었다는 것. 그는 고향 켄터키 시절 옛 교회의 담임목사 데이빋 엘킨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추모식 집전을 부탁했고, 엘킨스는 이듬해인 1819년 봄, 약 100마일 길을 말을 타고 와, 낸시의 무덤가에서 몇 달 늦게나마 의식을 치렀다. 맑은 주일날 아침 치러진 이 장례식엔 놀랍게도 약 200명의 조객들이 참석했다. 목사가 마무리 기도를 할 때, 참석자 전원은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어린 에이브의 소원은 성취됐다.
'심리전기'를 활용, 링컨의 태도와 감정을 분석한 역사가 마이클 벌링에임은 어머니 낸시와의 관계로 볼 때, 링컨은 엄마에게 "버림 받았다"는 느낌 탓에 "여성들은 신뢰하거나 의존할 수 없는 대상으로 확신했을지 모른다"고 주장했으나 지나친 상상적 비약일 듯 싶다. 아무튼 링컨은 앞으로도 젊은 시절에 연이어 여성의 죽음을 대하게 된다.
그 해 여름, 에이브와 새러는 아빠 토머스가 켄터키로 새 아내를 찾아 떠날 때, 다시 한 번 버려진 느낌을 맛 봤을 수 있다. 더욱이 자녀를 도무지 다독일 줄 모르는 토머스였기에,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토머스가 무려 6개월이나 출타해 있자, 결국 아이들은 아빠마저 잃은 줄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실로 그들은 배고프고, 지치고,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내버려져 있었다. 에이브는 자기네가 곧 죽을 줄로 생각하고 두려워 하기도 했다.
계모에게 첫 인간 대우를 받다
이윽고, 아버지 토머스는 켄터키 엘리저벹타운에서 당시 31세인 새 엄마-새러(애칭 '샐리'. 이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샐리'로 통칭) 부쉬 잔스턴-과 세 식구를 데리고 돌아왔다. 전 남편 잔스턴과의 사이에 낳은 마틸다, 잔, 새러 엘리저벹 등이었다. 샐리는 우선 그동안 가히 거지 꼴이었던 링컨네 아이들을 비누칠을 하고 부벼 주고 해서 깨끗하고 말끔히 씻겨 줬다. 옷도 바느질로 수선을 해서 "다시 인간답게 보이도록" 해 줬다.
샐리는 가히 집안에 혁명을 일으켰다. 집안 전체를 깨끗이 정돈하고 새 남편에게 바닥에 새 마루를 깔게 했고, 새 문과 창문을 달게 했다. 에이브로서 더 바랄 수 없는 좋은 엄마였다. 상인인 잔 B. 헤엄은 "그(샐리)는 의심할 나위 없이 그(에이브)를 인간답게 대우해 준 첫번째 사람이었다."라고 전했다.
새 엄마는 또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에이브의 옥수수껍질 침대를 부드러운 새털 매트리스로 바꿔줌으로써, 링컨의 마음을 단번에 확 사로잡았다. 샐리는 에이브에게 자주 미소 짓고, 껴안아 주고, 다정한 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빠로부터는 들어보지도, 받아보지도 못한 그 무엇이었다.
샐리는 훗날 자신의 회고에서, "나는 그(에이브)에게 섭섭한 말 한 마디 한 일이 없었고, 그는 내 앞에서든 내가 아는 다른 사람 앞에서든 거짓말을 하거나 다투거나 욕하거나 불경스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링컨은 이 시절을 "즐겁고 행복한 소년시절"로 묘사했다. 링컨은 어머니로서의 부드러움을 보여 준 계모를 '마마'라고 불렀다.
샐리의 장려로, 링컨 부부는 아이들을 모두 당시 갓 개교한 동네 학교에 보냈다. 교실이 하나 뿐인 이 학교는 거칠고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은 아이들에게 반복교육을 주로 시켰다.
에이브는 과거 켄터키 시절 짧은 두 학기를, 그나마 누나를 위한 동행에 가깝게 학교에 다녔다. 이제 그에겐 학업의 길이 좀 더 넓게 열렸으나, 아버지 토머스는 여전히, 그를 집에 되도록 머물러 두어 밭일과 가축 돌보기를 시키고 싶어 했다.
일 년 뒤 더 가까운 곳에 학교가 개교되자, 샐리의 적극적인 권유로 에이브는 6개월을 다녔다. 당시 에이브는 열 다섯 살이 됐다. 링컨은 훗날, 자신이 학교를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다녀서, 학교교육을 다 합해 봐야 고작 1년이 못됐다고 회고했다.
링컨은 주로 (아마도) 계모의 영향으로 창의적이고 민감한 사고력을 갖추게 됐다. 특히 개척사회에 공통된 악습과 불공정을 눈여겨 봤다. 동네 남자아이들이 살아 있는 식용거북의 잔등에다 뜨거운 숯불을 얹는 것도 못마땅히 여겨 꾸짖고, 거기 관해 글을 쓰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링컨의 독서열과 독학
샐리는 링컨이 최대한 독학과 자수성가를 하길 바라, 글 읽기와 공부를 격려했다. 반면 토머스는 교육을 계속 경시했다. "사내아이란 일을 열심히 하고 튼튼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샐리는 켄터키에서 올 당시 가져온 여러 권의 책을 에이브에게 읽으라고 권했다. 존 버니언의 '순례자의 여정'(=천로역정), 대니얼 포우의 '로빈손 크루소', '벤저민 프랭클린의 삶', 메이슨 윔즈의 '워싱턴의 생애' 등이었다. 특히 자신과 비슷한 배경에서 자라 성공한 벤 프랭클린 전기는 링컨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전에도 링컨은 '이솦 이야기' 등을 읽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특히 애독서였다. 링컨은 벽난로 곁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아라비안 나이트'를 형제자매들에게 큰 소리로 낭송하곤 해 주위를 웃겼다. 같은 책을 10여 회 읽어, 아이들이 내용을 줄줄 외우게 될 정도였다. 에이브는 자신의 다락 통나무 틈에 책을 한 권씩 끼어두었다가 아침이면 읽곤 했다.
밭일을 할 때도 한 고랑씩 끝내고 나면 말을 잠시 쉬게 하고 자신은 울타리에 기대어 책을 읽었다. 유난히 눈에 띄는 구절은 널빤지에 써서, 종이를 구해 써 둘 때까지 보관했다. 그런 구절은 다시 쓰고 다시 보기를 반복하면서 스크랲붘에 메모하는 습관을 유지했다.
데니스는, "나는 에이브의 열 두 살 이후 손이나 주머니에 한 권의 책을 갖고 있지 않는 때를 본 적이 없다"면서 "사내아이가 그렇게 읽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링컨은 "나의 최고 친구는 내가 읽은 적이 없는 책을 내게 건네는 사람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샐리는 실로, 어린 링컨의 상상력과 독학열, 비평적 사고를 일깨워 결국 나라 지도자가 되게끔 길을 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에 눈 뜨다
다른 사춘기 소년들처럼 링컨도 십대로 접어들면서 이성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면, 구약의 연가인 '노래들의노래'(아가) 등 성경에 나타난 성적 행위에 관해 생각을 나누곤 했다. 이성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집안에 있는 세 소녀들의 존재 때문에 더욱 강화돼 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네 소녀들은 비쩍 마르고 훌쭉하고 수수해 뵈는 그에게 이렇다 할 매력을 못 느꼈다. 십대의 링컨은 '폴리'(리처슨)라는 소녀를 교회와 철자경연(스펠링 비)에 데려가기도 하고 심지어 청혼까지 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폴리는 훗날 십대의 링컨에 대한 회상에서 그를 "촌스럽고 인기 없는" 소년으로 묘사했다. 소녀들은 심지어 링컨 면전에다 대 놓고 조소했다. 그의 녹비(사슴가죽) 바지는 늘 짧아 다리뼈 아래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런저런 동네 소녀들을 데리고 데이트를 시도했지만, 매번 '쫑크'를 먹었다. 너무 키 크고 볼 품 없어서였다.
훗날 링컨의 고용주였던 동네 최고부자 젠트리 가문의 예쁘고 상냥한 해너 젠트리는 "그(링컨)가 양파를 너무나 좋아하기에 역겨워" 사귀길 거부했다. 또 한 소녀는 링컨이 "조용하고 어색하고 검소해서 소녀들이 그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새러 러킨스는 말했다. "에이브는 날 한 번 교회에서 집으로 바래다 줬고, 내가 원했다면 그의 아내가 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너무 별스러웠다"고.
링컨은 또, 집에서 약 1마일 반 북쪽에 떨어진 '우드 농장'의 예쁜 아가씨, 엘리저벹 우드를 사귈 기회가 있었다. 아버지 토머스가 우드네에서 사온 황소 '버크'가 줄을 풀고 본집으로 도망친 사건 때문이었다. 우드 씨가 소몰이용 밧줄을 내밀자 링컨은 엘리저벹을 의식하여 짐짓 "아녜요. 괜찮습니다. 녀석에게 본때를 보이러 집까지 타고 가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우드 부녀가 지켜 볼 동안 링컨이 소 잔등 위에 훌쩍 올라타 양옆을 발로 툭툭 차 대자, 버크가 후다닥 질주하는 통에 오로지 떨어지지 않으려고 진땀을 흘리며 집으로 향하는 링컨의 비쩍 마른 뒷모습이 우스꽝스러웠는지 우드 부녀는 뒤에서, 배꼽을 잡았다.
링컨은 용케도 안 떨어지고 집에 도착해, "제가 녀석을 길들였어요, 아빠" 했지만, 그의 이 용감한 도전은 엘리저벹에게 이렇다 할 인상을 심지 못했다. 엘리저벹은 훗날 "그가 나랑 가까이 지내고 싶어 했던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관심이 없었지요. 너무 촌스러운 데다 발도 너무나 컸어요."라고 회고했다.
엘리저벹 털리는 처음으로 링컨과 몇 달간 사귀며 제대로 가까워진 사이였으나, 하도 친구들이 주위에서 "무자비하게" 링컨 흉을 보는 통에 그녀가 포기해 버렸다.
줄리아 이밴스도 매력적인 소녀였다. 어느 날 링컨이 소모기(梳毛機)로 털의 보풀을 세우려고 인디애나 프린스턴을 방문했던 길에 초면인데도 공손히 인사하는 그녀를 본 순간 한 눈에 반해, 가슴을 두근대며 오매불망하면서 거기에 영주하고 싶을 정도였으나, 재회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
누나 새러는 함께 놀고 있는 소녀들을 에이브가 성가시게 군다고 분개한 적이 있다.
"너, 부끄러워 해야 돼, 에이브. 넌 도대체 이 담에 뭐가 되려고 그러냐?"
링컨이 잽싸게 대꾸했다. "나, 미 합중국의 대통령이 될래."
때때로 이성에 관한 관심은 링컨의 독서욕과 맞물리기도 했다. 학교 교장이 15세의 매력적인 애너 로비 양에게 'defied'란 낱말의 철자를 묻자, 로비는 'd-e-f'까지는 댔지만, 그 뒤에 'i'가 오는지 'y'가 오는지 헷갈려 망서렸다. 그러나 링컨이 넌지시 집게손가락을 눈 앞에 대며 미소 짓는 모습을 힐끗 곁눈질 하고, 'i-e-d'라고 마저 대답했다.
애나는 "그는 배움이 덜 떨어진 우리들 가운데 유식한 소년이었다"고 추억했다. 그러나 링컨의 낭만점수가 당시로서는 빵점이었다. 어느 저녁, 애나와 함께 나란히 둑에 앉아 강물 속에 발을 담근 채 대화를 나누던 중 달이 서서히 떠올랐다. 링컨은 이 낭만스런 기회를 무시한 채, 우주천체에 관한 일대 강의를 시작했다.
애나는 세상을 영 모르는 에이브가 그런 천문학 지식에 넘친 줄은 미처 몰랐다. 그는 달이 지는 게 전혀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며, 지구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회전한다고 해설을 이어갔다.
"지는 쪽은 달이 아니라 우리야. 달이 지는 것은 단지 환각일 뿐이지."
애나는 지식욕구가 충족됐지만, 분위기도 파악하지 않은 채 남의 기분을 영 무시하는 링컨에게 참다 못해 소리질렀다.
"넌 밥통이야, 에이브!"
둘의 관계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이러다 보니 링컨은 나이가 더 들면서 여자 애들을 경원하기 시작했고 자연히 데이트 상대도 찾지 않게 됐다. 공부에 바쁘기도 했지만, 소녀들에게 자꾸 홀대와 모욕을 당하다 보니 그들에게 불편을 느꼈다고 계모도 추억했다.
대신, 그의 현란한 유머와 '농장 헛간 스토리'는 동네 농장 소년들에겐 인기 '짱'이었다. 더욱이 고기잡이, 씨름, 달리기는 물론 경마, 여우쫓기, 설탕끓이기, 양털깎기 등에서 선두를 내 준 적이 없어 실로 추종을 불허하는 1인자였다.
남자 성인들과 소년들이 두 팀으로 나눠서 하는 옥수수 껍질 벗기기 대회에서도 단연코 1위였다. 그러나 대회 끝에 하는 밤샘 댄스에서 링컨은 으레 파트너가 없었다.
속 붉은 옥수수 껍질을 벗긴 사람은 자기가 선호하는 소녀와 키스할 특권이 주어졌다. 동네 친구, 그린 테일러와 겨루다 이긴 링컨은 알아서 잘 헤아리기보다는 너무 솔직한 나머지 테일러의 여자친구에게 키스를 해 버렸다. 격분한 테일러가 주먹을 휘두르자, 둘이 얽혀 치고 받다 테일러가 옥수수자루로 링컨의 몸에 깊은 상처를 낸 뒤에야 끝이 났다.
딴 소년들의 여자친구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체득한 사건이었다.
집안의 '연정'
링컨은 심지어 자기 이복누이 틸다(마틸다의 애칭)와 서로 연애 감정을 나누기도 했다. 에이브가 숲속에서 벌목 일을 할 때 틸다의 잔심부름 하나가 링컨의 점심도시락 날라 주기였다. 그러나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가십이 동네에 나돌자, 계모 샐리는 에이브가 일터로 가기 전 틸다에게 점심준비를 시켰다.
하지만 틸다는 어느 날 몰래 에이브의 뒤를 따라가, "긴 얘기를 나누며 와일드한 뜀박질"을 즐겼다. 그녀가 짐짓 도망하는 에이브를 바짝 따라 붙어 그의 등에 정면으로 돌진하면서 둘 다 나동그라졌다. 순간 그녀의 발이 에이브의 날카로운 도낏날에 닿아 피가 콸콸 솟구쳤다. 공포에 휩싸인 에이브는 부랴부랴 자신의 속옷을 찢어 그녀의 상처를 둘둘 감아 싸맸다.
"틸다, 엄마한테 뭐라고 말하지?"
"내가 실수로 베였다고 말할게. 사실 아냐?"
"맞긴 맞아. 하지만 그게 이실직고는 아니잖아, 틸다? 자초지종을 다 말씀드려. 그 나머지는 네 좋은 엄마께 맡기고."
엄마 샐리는 이실직고한 틸다를 힐책한 뒤 두 번 다시는 에이브를 따라가지 말도록 경고했고, 딸은 복종해야 했다.
한편, 에이브의 외사촌형 데니스 행ㅋ스는 링컨의 또 다른 이복누이 새러 엘리저벹에게 열정적인 관심을 갖던 끝에 그녀 나이 15세 때 둘이 결혼, 링컨 농장에서 약 반 마일 떨어진 곳에다 농장이 딸린 거처를 마련했다.
악화되는 부자지간
그 결과 일손이 줄어 들자, 당시 시력이 약해진 토머스는 의붓아들 잔을 에이브보다 더 아끼고, 에이브에겐 주로 경작과 괭이질, 울타리 세우기, 식육 마련 등 농장일과 벌목을 맡겼다. 토머스는 또, 이웃 농장에다 하루 25센트 씩 품삯을 받고 에이브를 그의 도끼와 함께 '대여'하기도 했다.
당시 법으로는, 자식이 21세가 되기까지 모든 품삯을 가장이 챙길 수 있었기에, 토머스가 그렇게 했지만, 링컨은 훗날 법률가가 된 뒤, 그런 제도를 "조직적인 강도질"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한 사람이 뙤약볕 아래 종일 나가 강제로 일할 동안 한 명은 모든 이득을 챙긴다는 개념에 여생 동안 분노를 금치 못했다. 아버지에 대하여 쌓여 간 링컨의 이 원망과 적개감은 사라질 줄 몰랐다.
둘 사이는 나날이 악화돼 갔다. 에이브도, 토머스 링컨이 과연 친아버지일까 라는 의혹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에이브는 아버지 토머스가 어떤 사고나 우연한 계기로 성불능자가 됐다는 루머를 동네서 어렴풋이 들었다. 토머스는 밭에서 일 대신 독서를 하는 에이브를 매질한 적도 있었다. 적어도 토머스의 사전에는, 적어도 에이브만큼에겐, '휴식시간'이란 글자가 없었다.
토머스는 링컨의 책을 자주 감추거나 멀리 던져 버려 아내와 아들을 황당하게 만들곤 했다. 링컨의 사촌형제 A.H. 채프먼은 "토머스는 소년으로서의 에이브러햄을 배려해 준 적이 거의 없었다"고 전한다. 부자 간의 성미와 가치관, 능력과 동기, 야망은 모두 정반대였고, 상호신뢰감이라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부자지간의 갈등은 교회출석 문제로 비화됐다. 아버지/어머니가 다니는 리틀 피전 크맄('작은 비둘기 골짝'이라는 뜻) 침례교회 출석을 에이브가 거부하자, 부자 간의 날카로운 대립 상황이 불거진 것.
계모 샐리는 말한다: "에이브에겐 특정 종교란 게 없었다."
에이브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예방하는 차원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사찰(관리인)의 한 명으로서 마루를 쓸고 촛불을 켜고 했지만, 결코 교인이 되진 않았다.
링컨의 황당한 복수극
1826년, 친누나 새러, 이복누이 틸다가 각각 결혼하자, 링컨의 외로움은 한층 배가됐다. 누나 새러는 명석한 데다 명랑하고 매력적인 여성이어서 더구나 아쉬웠다. 1828년 1월 20일 한 겨울에, 새러가 초산의 모진 진통을 겪지만, 둔한 남편(애런 그릭스비)은 처음에 통 종잡지를 못했다. 뒤늦게야 부랴부랴 눈길로 아버지 집으로 달려가 황소 두 마리가 끄는 썰매에다 사슴가죽으로 싸맨 새러를 태워, 장인 토머스의 집으로 향했다. 의사를 불러서 도착했지만, 만취 상태였다. 산파를 불렀지만, 너무 늦게 왔다. 결국 새러는 난산 끝에 숨지고 아기는 사산했다. 그녀 나이 불과 20세였다.
매형인 애런 그릭스비가 당시 훈제소 문간에 서 있던 에이브에게 다가갔다. 뭔가 불안을 느껴 무슨 일이냐고 묻는 처남에게 "누나가 방금 죽었어.."라고 전하자, 링컨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누나 새러는 팔에 아기를 껴안은 채 교회 묘원에 묻혔다. 누나의 조산 돕기에 매형이 소홀했던 자초지종을 알고 나자 링컨의 깊은 침울은 분노로 바뀌어, 매형에게 복수하려고 친구들과 음모를 꾸민다.
매형의 두 아우인 그릭스비 형제들-촬즈와 루벤-이 합동결혼식을 올렸을 때였다. 두 쌍의 신랑신부가 본가로 돌아오자, 형제의 아버지는 댄스파티가 곁들여진 화려한 개척시대형 피로연을 베풀었다. 파티의 그랜드 피날레는 신랑신부들을 직접 침실로 "들여 넣는" 것.
파티가 끝나 두 쌍의 신랑신부가 각각 자기네 침실로 끌려 갔고, 사방의 촛불들이 꺼지자 자기 아내를 침대로 끌어 들이기 전, 링컨은 미리 친구를 통해 둘의 방을 바꿔치기 해 버렸다. 아슬아슬한 순간, 진상을 발견한 형제의 어머니가 위층으로 서둘러 올라가 소리쳤다.
"맙소사, 루벤! 넌 지금 찰즈의 아내랑 침실에 들었어!"
형제는 깜짝 놀라 잠옷바람으로 방 밖으로 튀어 나왔고, 파티 끝은 엉망이 돼 버렸다.
정작 음모의 장본인인 링컨은 두 형제를 무지막지하게 조롱한 내용의 '루벤 일대기'라는 풍자시를 써서 동네에 돌렸다. 사건은 당일 '파티'로 끝나지 않고, 그릭스비 4형제의 막내인 빌리가 링컨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링컨은 자신이 상대보다 너무 커 불공평하니까 거절한다고 대답했다.
에이브의 이복동생 잔 잔스턴이 신청에 응해 치열한 격투를 벌인 끝에 잔이 수세에 몰려 크게 부상 당해 피를 흘리자, 링컨이 협공에 나서서 빌리를 번쩍 들어 저만큼 내던져 버렸다. 눈이 뒤집힌 양측 사람들이 가세해 일대 난투극을 연출했다. 개척시대에 흔한 와일드 상황이었다.
상류층 소녀와 교제하다
이성에 대한 집착을 아직 버리지 않은 링컨에게 이번엔 재색을 겸비한 17세의 요조숙녀가 근접해 왔다. 켄터키 행캌 카운티의 '일라이 트래셔' 농장에서 열리는 옥수수 껍질 벗기기 경연대회까지 동행해 달라고 요청해 온 것. 링컨은 황홀경에 잠겨 들었다. 대회 장소는 바로 오하이오 강 건너 편에 있었다.
고동색 곱슬머리에다 당대 숙녀의 면모를 고루 갖춘 소녀의 이름은 '캐럴라인 미커'였다. 미커는 강 언덕 위의 고급 저택에서 숙부인 치안판사 새뮤얼 페이트 네와 함께 살고 있었다.
캐럴라인이 링컨을 알게 된 것은 흥미롭게도, 링컨이 잔 딜즈의 페리(나룻배) 사업을 방해했다는 혐의로 페이트 판사 사저로 소환돼 심문을 받을 때였다. 당시 해당 지역에서 나룻배 운영권을 독점하고 있던 딜즈는, 링컨이 인디애나 쪽에서 강 한 가운데 있는 기선으로 한 고객을 나룻배에 태워 날랐다는 소문이 매우 불쾌했다.
켄터키 주정부가 당시 해당 지역을 자체 영역으로 지정해 놓고 있었기에, 링컨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당시 20세였던 링컨은, 자신이 한 일은 도움이 필요한 승객을 지나가던 기선으로 태워 준 것 뿐이라고 항변했다. 딜즈가 단지 그 자리에서 없다는 이유로 기선을 놓쳐야만 하는 승객의 안타까움을 앉아서 바라보기만 하는 건 불공정하다는 게 링컨의 자기 변론이었다. 훗날의 법률가 자질이 여기서 이미 나타난 셈이랄까.
페이트는 "자네가 옳아!" 하고는 소송을 기각해 버렸다. 링컨의 답변을 곁에서 듣고 있던 캐럴라인이 강까지 링컨을 바래다 주면서 그 다음 주의 옥수수 껍질 벗기기 대회를 언급하면서 "참가할 수 있으세요?"라고 미소로 묻자, 링컨은 긴장한 나머지 혀가 절반 굳어 버린 '예스'로 답했다.
이윽고 대회에 출전한 링컨은 캐럴라인과 키스할 기회를 노리면서, 오로지 붉은 옥수수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끝내 하나도 찾지 못하자, 대신 캐럴라인이 부랴부랴 하나를 찾아 몰래 건넸다. 링컨은 모두에게 이것 보란 듯 옥수수를 높이 쳐 들어 보이고, 캐럴라인에게 있는 점잔을 다 빼며 키스했다.
둘의 교제는 1829-30년 겨울까지 이어졌다.
다시 일리노이로
그러나 겨울이 지나자, 토머스 링컨은 죽은 아내 낸시의 사돈 댁으로부터 일리노이주의 풍부한 토지를 쉬운 조건에 구입할 수 있다는 소문에 다시 이사를 가기로 결심한다. 토머스는 결혼 이후 4번 이사를 다녔지만 아직도 작황은 여의치 못했다.
에이브가 작별 인사 차 연인을 방문했을 때, 캐럴라인 미크가 "날 데리러 돌아와요"라고 하소연했지만, 링컨은 아무 약속도 하지 않는다. 이 지체 높고 잘 나가는 상류층 가문의 아가씨가, 내 놓을 것 하나 없는 자신에겐 걸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830년 3월. 토머스는 현 토지와 가축, 옥수수 등을 팔고 두 필 씩의 황소가 끄는 두 대의 왜건(우마차)에 총13명의 식구를 태우고 얼마 안 되는 남은 가산을 싣고는, 일리노이까지 200마일 길을 떠났다. 물론 에이브는 한 대의 왜건을 몰고 갔다.
이윽고 목적지인 생어먼 강의 북쪽 강변에 도착했다. 모두들 일손을 모아 새 정착지 일구기에 바빴으나 기후가 좋지 못했다. 그 해 성탄절에 폭설이 내리기 시작해 12피트나 쌓였고, 영하 10-20도의 매서운 날씨가 9주나 지속됐다. 미처 겨울 준비를 못한 링컨네는 겨우내 캐빈 안에 꼼짝 없이 갇혀 지내면서 단지 옥수수죽과 빻은 밀가루 음식으로 연명했다.
봄이 되자 이번엔 눈 녹은 홍수가 온 땅에 범람했다. 링컨은 일리노이에 도착한지 일 년만에, 앞이 내다 보이지 않는 거칠고 암담한 농장 일에서 이젠 손을 털고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22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