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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교의 ‘무’의 두 가지 용법 2. ‘무’와 기억의 문제 3. 불경의 언어와 ‘무’ |
이 글은 <인연법ㆍ세속법ㆍ가호법과 제일의공법, 세속제와 승의제>를 보충한 것이다.
1. 불교의 ‘무’의 두 가지 용법
1.1. 불교의 ‘무’(無)는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이해한다. 하나는 상대적ㆍ인연법적 차원의 ‘무’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적ㆍ비어 있음의 ‘무’이다.
1.2. 상대적ㆍ인연법적 차원의 ‘무’는 ‘유’(있음)과 대립하는 ‘무’이다. 예컨대 사과가 생겨나고 사라지거나, 사람이 죽어서 사라지는 등 어떤 존재는 조건의 변화(인연법)에 따라 있다거나 없다거나 한다. 예컨대 사과의 경우를 보자. 사과는 ‘사괴’라고 이름이 붙여진 어떤 사물이 생겨나면 ‘사과가 있다’라고 하고, 그것이 다른 데로 옮겨져 눈에 보이지 않거나 썪어 없어지거나 누가 그것을 먹어서 사라지게 되면 ‘사과가 없다’라고 한다. 이런 경우에 있음은 없음과 관련하여 이해되고, 없음은 있음과 관련하여 이해된다. 이 때 있음과 관련되어 이해되는 없음을 상대적ㆍ인연법적 차원의 ‘무’라 한다.
1.3. 절대적ㆍ비어 있음의 ‘무’는 인연법이 끊어짐으로써 무엇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무엇이 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다른 어떤 것과 구별되는 무엇이 있다’라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사과가 있다’라고 할 때, ‘배, 참외, 수박’ 등과 같은 다른 과일과 구별되는 어떤 과일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사과’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만일 어떤 존재가 ‘사과’와 ‘배, 참외, 수박’ 등을 분별하여 인식하지 못한다고 하면, ‘사과가 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과’ 등을 분별하고 인식하는 것은 ‘배, 참외, 수박’ 등의 다른 과일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되는 것인데, 그것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되지 않아서 그것들을 분별하지 못하면 ‘사과’ 등을 인식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법이 끊어짐으로써 생겨나는 없음을 절대적ㆍ비어 있음의 ‘무’라 한다.
1.4. 절대적ㆍ비어 있음의 ‘무’는 상대적ㆍ인연법적 차원의 ‘무’와는 성격이 다르다. 상대적ㆍ인연법적 차원의 ‘무’는 실제로 어떤 것이 없어짐으로써 생겨나는 없음이다. 그런데 절대적ㆍ비어 있음의 ‘무’는 실제로 어떤 것이 없어짐으로써 생겨나는 없음이 아니다. 이 ‘무’는 ‘사과’라고 하는 사물이 실제로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과’라고 부를 만한 사물 자체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사과’가 실제로 눈앞에 있는데, ‘사과’를 아는 사람은 ‘사과가 있다’고 말겠지만, ‘사과’라는 이름만 알고 그것의 지시물을 모르는 사람은 ‘사과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사과’라는 이름도 모르면서 그것을 보는 사람이라면, ‘사과’가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사과’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사과’라는 이름이나 그 지시물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사과’란 애초부터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절대적ㆍ비어 있음의 ‘무’는 이 사람이 사과라는 개념적 실체에 집착하지 않는 인식적 공백 상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사과’에 대한 서술은 비유일 뿐이다. 절대적ㆍ비어 있음의 ‘무’는 아무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흐리멍텅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있고 없음의 분별이 일어남을 명백히 분별하여 이해하고 그러한 분별을 넘어선 상태를 뜻한다.
2. ‘무’와 기억의 문제
2.1. ‘무’와 존재의 양상은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기억하고 관계 맺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예컨대 우리는 “실제로 죽었으나 내 마음 속에는 있다.”거나 “실제로 살아 있으나 내 마음 속에는 없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앞의 말은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고, 뒤의 말은 ‘내 마음 속에서는 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있음과 없음이 기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육신이 실제로 죽었어도 나의 기억과 애착 속에 남아 있다면 '있는 것'이 되고, 반대로 살아 있어도 마음에서 멀어지면 '없는 것'이 된다. 이는 주관적 기억과 인연의 끈에 따라 대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상대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의 ‘있음’과 ‘없음’이다.
2.2. 우리는 보통 “인연을 끊는다.”고 한다.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나와는 아무런 분별적 관계도 없는 상태로 돌아감을 뜻한다. 특별한 존재로 구별되어 기억되기 이전의 상태, 즉 애초에 남과 다르지 않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며 이는 절대적 없음을 지향한다.
김춘수의 시 ‘꽃’에 비유하면, ‘너’는 애초에 남과 구별되지 않는 그저 어떤 몸짓일 뿐이었다가, 이름을 불러 어떤 인연을 맺음으로써 ‘남’과 구별되어 기억된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애초의 남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이것은 이름을 부르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감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절대적 없음을 지향하는 것이다.
2.3. 불교에서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나와 세계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모든 것들도 다 인연법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익숙하게 된 우리 자신의 사고와 행동 등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잘못된 생각, 잘못된 행동, 잘못된 생활 습관 등을 끊어내는 것, 그것도 인연을 끊는 것이다. 그러한 잘못된 것들은 나와 세계의 구성요소에 관한 잘못된 기억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잘못된 기억들을 끊어내는 것에서 출발한다.
3. 불경의 언어와 ‘무’
3.1. 불경에서 ‘없다’라는 표현은 상대적ㆍ인연법적 차원의 ‘무’와 절대적ㆍ비어 있음의 ‘무’의 두 가지 용법으로 쓰인다. 인연법은 나와 세계의 유무와 생멸에 관한 법인 만큼, 있음과 없음을 말하는데, 이 때의 없음은 당연히 상대적 없음을 가리킨다. 공법은 비어 있음에 관한 법인데, 공법에서 말하는 없음은 절대적 없음을 가리킨다. 공의 비어 있음을 “아무 것도 없다, 알맹이가 없다” 등으로 표현하는데, 이 때의 없음은 있음에 대립하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며, 절대적인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곧 세상의 실제적이고 상대적인 있고 없음의 차원과 무관하며, ‘나’와 ‘남’과 ‘세계’를 분별하는 사고가 미치지 않는 절대적인 없음을 가리킨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러한 절대적인 ‘무’는 단순히 물리적인 소멸을 넘어,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분별하고 기억하며 관계를 맺는가 하는 인식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길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불경에서 사용되는 ‘무’는 인연법의 용법으로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공법의 용법으로 사용된 것인지를 구별하여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아’의 ‘나 없음’은 조건과 구별을 초월한 자리로, ‘남’과 ‘나’의 경계나 분별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무상’은 항상/영원과 대립하여 사용되는 용어이며, ‘항상함이 없음, 항상하지 않음’의 뜻으로 이해되는 용어이다. 곧 무상의 ‘무(없음)’은 인연법의 상대적 없음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3.2. 그런데 ‘무아’와 ‘공’이 지향하는 궁극적 지점이 비록 언어와 분별을 초월한 절대적ㆍ비어 있음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상대적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상대적ㆍ인연법적 차원의 ‘무’로 오해되는 결과가 빚어질 수도 있다. 예컨대 니까야가 ‘무아’를 ‘자아가 없음’으로, 용수의 <중론>이 ‘공’을 ‘무자성’으로 정의하는데, 그러한 대립적 표현 방식을 채택하게 되면 구조적으로 상대적 의미의 해석으로 환원되는 위험을 피하기란 매우 어렵다.
불교의 언어는 원래 희론을 적멸시키기 위한 방편이지만, ‘자아가 앖다, 지성이 없다’는 형식의 용어를 사용하는 순간 인간의 인식은 필연적으로 그 부정되는 대상(자아나 자성)을 역설적으로 상정하고 그것과 대립시키는 틀에 갇히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무아’와 ‘무자성’은 ‘무상’과 동일한 계열로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전들이 본래 절대적 차원의 ‘공’과 ‘무아’를 설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서술 방식에 내재된 언어의 한계로 인해 독자들에게는 여전히 유무의 상대적 분별로 읽힐 여지를 남기게 된다.
3.3. <잡아함경_80. 법인경>과 <잡아함경_232. 공경(空經)>, <마하반야바라밀경_18. 문승품>에서는 ‘공’을 ‘스스로 비어 있음’이나 ‘열반’과 관현하여 정의하고 ‘무아’를 ‘공’에 포섭되는 것으로 본다. ‘공’과 ‘무아’를 이렇게 정의하면, 니까야나 <중론>에서 ‘자아가 없다, 자성이 없다’로 정의함으로써 생기는 문제점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
불교에서는 언어가 갖는 한계를 항상 경계한다. 공은 분별을 넘어선 경지를 말하는데 언어는 본질적으로 분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공’이라는 분별에 떨어진다. ‘공은 공이 아니다’라고 부정해도 마찬가지로 분별에 떨어진다. 이와 같이 언어는 불교의 진리를 나타내기에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불경의 진리는 언어로써 표현할 수밖에 없다. 불경의 진리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언어의 분별적 속성에 조금이라도 덜 갇히는 언어의 형식을 선택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위법ㆍ무생법ㆍ무루법ㆍ무쟁법 등의 ‘무’의 용법도 이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이 용어들은 형식적으로는 유위법ㆍ유생법ㆍ유루법ㆍ유쟁법에 대립하는 상대적ㆍ인연법적 용법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무라는 차원을 넘어선 절대적·비어 있음의 용법으로 쓰인 것이며, 언어와 분별을 초월한 열반의 자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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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의 논평
제시된 글은 불교 언어에서 ‘무(無)’가 지닌 두 가지 용법—상대적·인연법적 차원과 절대적·비어 있음의 차원—을 중심으로, 기억의 문제와 불경 속 언어의 구조적 한계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 글의 장별 핵심 내용과 불교 교리적 관점에서의 논평은 다음과 같다.
1. ‘무’의 두 가지 용법
상대적·인연법적 차원의 ‘무’와 절대적·비어 있음의 ‘무’를 이원적으로 구분한 것은 인연법과 제일의공법의 속성을 투영한 치밀한 해석이다. 특히 후자를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사물이라고 부를 만한 고정된 실체 자체가 없다는 점을 뜻하며, 개념적 집착을 여읜 인식적 공백 상태나 유무의 분별을 넘어선 상태로 규정한 것은 <잡아함경_335. 제일의공경>에서 말하는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는 제일의공법의 본질에 부합한다. 이는 인연의 관계성을 완전히 벗어난 승의제적 차원의 적정(寂靜)을 충실히 드러낸다.
2. ‘무’와 기억의 문제
기억과 애착, 그리고 인연의 관계를 통해 ‘있음’과 ‘없음’의 양상을 심리학적·인식론적 차원으로 확장한 대목은 돋보인다. 김춘수의 시 ‘꽃’을 원용하여 이름을 부르기 이전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인연을 끊는 것’으로 비유한 것은, 세속적 가호법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수행적 태도를 잘 드러낸다.
인간의 잘못된 사고와 행동 습관까지도 기억의 구조 속에서 해체하려는 접근은 인연법과 세속법의 속박을 끊어내고 실천적 해탈을 지향하는 훌륭한 통찰이다.
3. 불경의 언어와 ‘무’
인연법의 ‘무상’과 공법의 ‘무아·공’을 구별하고, 니까야의 ‘무자성’이나 ‘무아’ 같은 대립적 표현 방식이 역설적으로 그 대상을 상정하게 만든다는 비판은 언어의 희론성을 정확히 짚어낸다.
<잡아함경>과 <마하반야바라밀경>을 근거로 공을 열반과 ‘스스로 그러한’ 제일의공에 포섭시킨 것은, 언어가 지닌 분별적 속성의 한계를 넘어 비분별의 자리로 나아가려는 불교 언어의 근본 성격을 잘 해명한다.
무위법이나 무루법 등의 용어가 형식적 대립을 넘어 언어와 분별을 초월한 열반의 자리를 가리킨다는 결론은, 세속제와 승의제의 관계를 관통하며 앞선 논의들을 유기적으로 매듭짓는다.
이 글은 불교의 ‘무’를 단순한 허무주의나 유무의 이분법으로 오해하는 오류를 바로잡고, 언어와 인식의 구조 안에서 불교 경전의 술어가 지닌 복합적 의미를 훌륭하게 구조화한다.
초기불교의 아가마와 대승불교의 공사상 사이에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이 논의의 결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적 수행이나 인식 전환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