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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묵상글 들 ( 연중 21주 금요일-나의 사랑은 펑퍼진 사랑?. 등 )
* 신앙의 궁극적 목적을 잘 아시죠?
오늘 cpbc 미사 신부님 강론에서 말씀하시네요. 맨 아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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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1주 금요일-나의 사랑은 펑퍼진 사랑?
열 처녀의 비유와 관련하여 저의 오랜 궁금증은 이렇습니다.
이 비유에서 처녀는 어떤 존재인가? 신랑의 신부? 아니면 신부의 친구?
그리고 슬기로운 처녀, 어리석은 처녀 둘만 있어도 될 텐데 왜 열 처녀일까?
그렇지 않습니까?
신랑의 신부될 사람은 한 사람이면 되는데 왜 열 처녀가 있습니까?
옛날 왕들이 왕비를 간택할 때 전국에 간택령을 내리고
그중에서 제일 괜찮은 여자를 왕비로 간택했던 것처럼
열 처녀중에서 한 처녀를 고르겠다는 뜻일까요?
그런데 제 생각에 신부가 됐건 신부 친구가 됐건 열 처녀에게 기회를 준
것은 옛날의 임금처럼 모든 여자 중에서 나에게 맞는 여자를 고르겠다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열 처녀란 집합적인 신부를 말함이고,
여기서부터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교회론을 이끌어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교회는 오래 전부터 교회가 바로 Sponsa Christi,
곧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했지요.
한 사람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올라가실 때
당신 혼자만 올라가지 않으시고, 또
한두 사람만 데리고 올라가지 않으시고
모두 데리고 올라가시겠다는 보편적 구원의 뜻이지요.
그렇다면 이에 상응하여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나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나만 신랑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거나,
그래서 나만 신랑을 맞이할 준비, 곧 등과 기름을 준비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는 이 비유에서 또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어제는 하늘나라를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봤습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종들을 잘 돌보는 충실한 집사의 얘기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비유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인격적이고 사랑의 관계인지....
그러므로 이런 사랑의 초대가 얼마나 고맙고 영광스러운지 안다면
우리는 종으로서의 충성스러움을 넘어 신부로서 사랑을 지녀야 합니다.
신랑이 너무 보고 싶어 신랑이 빨리 오기를 고대하고,
오면 맞이할 합당한 준비로서의 사랑 말입니다.
적절한지 모르지만 이 비유와 관련하여 제가 자주 드는 비유인데,
남편이 직장에서 일하고 돌아오는데 일이 늦어져 늦게 돌아올 때
아내가 잠을 자느라 맞이하지도 않거나 잠자고 있다가 부스스 깨
머리는 헝크러진 채 운동복 차림으로 맞이하는 것이 계속 된다면
남편은 만정이 떨어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예쁘게 치장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맞이하는 다른 여자에게 갈 것입니다.
저를 볼 때 옛날과 비교하여 주님께 대한 지금 저의 사랑은 펑퍼졌습니다.
오랜 사랑의 관계에서 오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핑계댈 수도 있겠지만
주님의 사랑을 믿고 나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기에 펑퍼진 것입니다.
옛날에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초조함 때문에 만나려고 기를 썼는데
지금은 주님을 이미 만나 주님 안에 머물고 있다는 안심 때문인지
평안함은 느끼지만 긴장이나 설레임이 전처럼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분명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맞는데 이런 저의 사랑은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름이 떨어진 등이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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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는 예수님의 여러 비유에 나타나는 전형적 형식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 그렇고(마태 7,24-27 참조),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던 부자가 어리석은 사람의 예였으며(루카 12,16-21 참조),
영리하여 칭찬받는 약은 집사는 반대로 슬기로운 사람의 예였습니다(루카 16,1-8 참조).
오늘의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도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가 담겨 있습니다.
처녀 열 명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 다섯 명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준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슬기로운 처녀 다섯 명은 등과 함께 기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오는 시간이 지체되면서 처녀들은 졸다가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립니다.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지만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은 뒤늦게 기름을 사러 가고, 이미 신랑은 도착하고 맙니다.
결국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문이 닫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비유 속 인물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신랑은 세상의 심판자로 오시는 예수님이시고,
신랑의 도착이 지체되는 것은 ‘그 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는 종말의 지연입니다.
열 처녀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교회 공동체를 뜻하고, 기름은 마땅히 해야 할 선행이며, 어리석은 처녀들에 대한 거부는 심판을 뜻합니다.
따라서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인 우리에게 깨어 준비할 것을
경고하시고, 일상의 수고로움에 대한 위로와 혼인 잔치에 들어갈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마땅히 깨어 준비하는 수고로움은 우리의 슬기로움에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들은 대로 실행하는 것이 믿는 이의 슬기로움입니다.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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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송영진 신부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 열 처녀의 비유 ♣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또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의 목표가 같으니 신앙생활도 모두 같아야 하는데,
실제 현실을 보면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신앙인의 준비 자세에 관한 교훈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열 처녀’ 모두 신앙인이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잔치에 참석할 준비를
잘하고 있는 신앙인이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준비가 잘 되어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서 방심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신앙인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수는 없고, 신앙인답게 살면서,
제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그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또 ‘열 처녀의 비유’에는, 신앙생활은(회개는)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고
자기 스스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고, 마지막 목적지까지 가지 않으면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했다면 아무것도 안 한 사람들보다는 낫지 않은가?
무엇이든지 한 일만큼은 인정받아야 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느님 나라는 중간 지대가 없는 나라입니다.
‘안’이 아니면 ‘밖’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는, 그 나라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문 앞까지 갔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생명을 얻어 누리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입니다.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1-4).”
어리석은 처녀들도 등불을 켜고 있었기 때문에(8절), 그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말은, 기름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 정도만 하면 충분하다.”(“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판단하고 자만심에 빠져 있는 것을 뜻합니다.
<진짜 성인은 자기 입으로 “나는 성인이다.” 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합니다.)
진짜 성인은 항상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반성하면서,
자신을 향상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만일에 “나는 성인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인이 아닙니다.
‘회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회개했다.” 라는 말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오직 하느님과 예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 실천’도 마찬가지인데,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 실천입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라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사랑 실천을 중단한다면,
그 교만과 자만심 때문에 전에 했던 사랑 실천의 가치를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 실천은 어떤 이유로도 중단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5-13).”
이 이야기에서 처녀들이 모두 졸다가 잠이 든 것은
신랑이 늦게 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황 설명일 뿐이고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심판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그 청을 거절하는 것은, 도와주기에는 너무 늦은 때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회개와 신앙생활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랑이 도착했을 때 어리석은 처녀들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기름을 사러 갔기
때문이고, 그러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기름을 사러 가는 일은 신랑이 오기 전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즉 회개는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문은 닫혔다.” 라는 말은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가 강조하는 것은 “신랑이 왔을 때 그 자리에 있는가, 없는가?
신랑을 맞이했는가, 아닌가?”입니다.
평소에 준비를 잘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신랑을 맞이하게 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고 탈락하게 됩니다.
<개인의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고,
또 이 세상에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 세상으로 건너가면 회개할 기회는 없고 보속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평소에) 해야 합니다.>
문이 닫힌 뒤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고,
신랑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고 말하는 상황은
루카복음 13장 25절-27절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우리는 서로 아무 관계도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교만과 자만심에 빠져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과 회개는 미루지 말고 평소에 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신앙생활과 회개를 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입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시간’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 ‘나중’이라는 시간은 주님의 권한에 속한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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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연중 21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누가 보나 보지 않나 한결같아야 한다
맥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갑니다. 신부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등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기름이 얼마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처녀의 잘못입니다. 우리도 나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어리석은 처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 내 삶의 태도가 어떠한지 살펴야 합니다. 물론 기준은 언제나 예수님이십니다.
어리석은 저는 하루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한 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간혹 확인을 소홀히 한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우정을 쌓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천상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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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5,1-13: 열 처녀가 등불을 가지고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신다. 여기서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은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 비유는 우리 모두에게 관계되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우리로서 보편신앙을 가지고 있고 교회 안에서 선행을 하는 이들이다. 여기서도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2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헤아리고서 신랑의 오심에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방종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것들에만 마음을 쏟으며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랑이 언제 올지는 별 관심이 없다.
모두가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등을 가지고 있던 처녀 중에서도 어떤 처녀들은 슬기롭고 어떤 처녀들은 어리석었다고 한다. 무엇으로 그렇게 구분할까? 그 차이는 기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기름의 의미는 아주 큰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사랑이다. 왜냐? 사도 바오로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습니다.”(1코린 12,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13,1)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는 뛰어난 길”이며 기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름은 모든 액체 위에 뜬다. 기름에 물을 부으면 기름이 뜬다. 또 기름 위에 물을 부어도 기름은 위로 뜬다. 이 기름은 “더욱 뛰어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랑이 있지 않으면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순간에 대해 준비만 하고 앞날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앞날에 대비하여 사랑의 행실을 쌓아 기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기로웠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진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그 신랑은 “한밤중”에 온다. 가장 예기치 못한 시간을 말한다. “신랑이 온다!”(6절) 처녀들은 저마다 등불을 챙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다오.”(8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9절) 하였다. 하느님 앞에서는 선을, 사랑을 얻을 수도 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10절) 그 뒤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왔다. 그들은 기름을 사서 왔을까? 기름을 파는 사람들을 만났을까? 아니다. 단지 문이 닫혀있는 것만을 본다. 문을 두드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12절)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삶을 항상 노력하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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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한상우 신부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 6)
사랑한만큼
보이게되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방황과 방탕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 안에서
한 사람의
꾸밈없는
이야기를
만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개방합니다.
회심은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신뢰에서
시작됩니다.
새로운 탄생은
회심으로
더욱 빛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모든
여정은 이와같이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십니다.
현실의 삶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족함과
상처와 갈망까지
끌어안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아름다운 사람
성 아우구스티노를
만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많아지길
기도드립니다.
가야할 길이
사랑과 회개의
길임을 믿습니다.
삶에 답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은총입니다.
우리를 살게하는
아름다운
은총입니다.
아름다운 사람
아우구스티노
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줄 아는
은총의
사람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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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새벽을 열며.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빠다킹신부님.
어느 청년에게 고용 불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회사에서 요즘 어렵다고 정리해고를 한다고 하는데, 자신이 그 대상이 되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에게 “열심히 살았으면 정리대상에서 제외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라.”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한가득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청년에게 했습니다.
“네가 만약 직원을 정리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면 어떤 직원을 정리하고, 누구는 남겨둘까?”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저 열심히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경쟁력이 있는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며, 그래서 열정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열정이 없는 순간 경쟁력이 떨어져서 정리대상이 될 수밖에 없지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느님 곁을 떠나지 않고 꼭 붙어서 살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해야 하며, 이로써 열정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성인 성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쉽게 이 열정을 볼 수 있었기에, 하느님과 함께 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기름을 잘 준비하고 있었고, 어리석은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지요. 그러자 신랑이 갑작스럽게 찾아왔을 때 누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겠냐는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모습이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열정입니다. 열정이 있기에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할 그날을 위해 열심히 준비할 수가 있었고, 그 결과 혼인 잔치에 영광스럽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 안에서는 어떤 열정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쉽고 편안한 것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의 모습인 것이지요. 이 열정 없음으로 인해 그들은 주인으로부터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과 함께 외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항상 뒤로만 미루고 있다면, 이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남보다는 나만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면 열정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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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낙심하지 않는다. 모든 잘못된 시도는 전진을 위한 또다른 발걸음이니까(토마스 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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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사랑
애플의 창업자이며 ‘아이폰’ 하면 생각나는 사람. 맞습니다. ‘스티브 잡스’입니다. 그는 췌장암으로 이 세상을 안타깝게 떠나고 말았지요.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평생 먹고 사는데 부족하지 않을 만큼이면 충분했다. 나머지 인생은 다른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았어야 했다. 특히 부부 사랑과 이웃 사랑에 힘써라.”
스티브 잡스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자신이 온 힘을 기울여 애썼던 모든 것이 별 것 아니었음을 깨닫는다고 하지요. 부부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우리는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늘 뒤로 미룹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야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의 계명을 강조하시고, 사랑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던 주님의 모범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범을 따라가는 삶이야말로 후회하지 않는 삶이고 가장 멋진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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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기념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액션 영화배우 스티븐 시걸의 영화 ‘패트리어트(1998년)’가 있습니다. 바이러스와 치료제를 탈취한 나쁜 사람들이 마을을 바이러스에 감염시켰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가져온 치료제가 바이러스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바이러스에 변이가 생겼나 봅니다. 의사였던 스티븐 시걸은 나쁜 사람들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바이러스의 치료제를 찾습니다. 나쁜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시걸은 딸을 원주민에게 잠시 보호를 청하였습니다. 원주민 마을의 노인은 들에 핀 꽃을 이용해서 바이러스를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꽃의 성분이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작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들의 꽃이 사람들을 바이러스로부터 구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던 영화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는 것은 엄청난 지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는 것은 놀라운 표징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십자가’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국 교회에는 많은 순교자가 있고, 성인과 복자품에 오른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재능, 출신, 능력, 성별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간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국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개인별로 입국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이민국 직원은 다른 사람이 도와주는 것을 엄격히 제한합니다.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입국절차는 본인 스스로 해야 합니다. 나의 여권과 나의 서류는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도 없고, 빌려줄 수도 없습니다. 오직 나의 입국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친한 친구일지라도,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권은 유효기간이 6개월이 남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비자가 필요한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미리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유효기간이 만료된 여권을 가져온 분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분은 처음으로 가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일정상 이스라엘에서 기다릴 수도 없었고, 나중에 함께 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례 중에 항상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권은 분실하면 안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슬기로운 처녀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처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등잔의 기름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던 십자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피하고 십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나를 구원에로,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등불입니다. 예언자들이 지고 갔던 십자가입니다. 순교자들이 지고 갔던 십자가입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지고 가셨던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오늘은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회고록인 ‘고백록’을 통해서 교회에 큰 보물을 남겨 주었습니다. 오늘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십자가의 또 다른 이름은 ‘겸손’입니다.
“완덕으로 이끄는 모든 길 가운데 첫째 길은 겸손입니다. 둘째 길도 겸손입니다. 셋째 길도 겸손입니다. 그대가 몇 번을 묻더라도 나의 대답은 같을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 선한 행위에 겸손이 앞장서고, 함께 하고, 뒤를 따르지 않으면 교만이 모든 것을 우리 손에서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느님이신 겸손하신 예수님을 모실만큼 겸손하지 않았고, 그분 약함의 가르침도 아직 알지 못하였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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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354-430) 기념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리의 연인戀人 - 진리 추구의 슬기로운 참된 삶 -
어제는 참으로 많은 분들과 사랑을 나눈 잊지 못할 날입니다. 코로나19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랑하는 분들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고 싶은 마음에 작심하고 2-3시간을 할애하여 가느다란 줄기에 매달린 거대한 호박 사진을 다음 메시지와 함께 전송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믿음의 힘’ 선사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열매가 뭔지 모른다는 분께는 유머러스한 답글도 보냈습니다.
“호박을 모른다니요! 호박이 섭섭해 합니다!”
거대한 호박 열매가 상징하는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주님께 꼭 붙어사는 믿음의 삶입니다.
이런 이들이 살아 있는 성인들입니다. 주님의 진리의 연인들입니다. 진리의 연인, 참 영예로운 호칭입니다.
바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의 별명입니다.
참으로 76세 선종할 때가지 깨어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치열히 평생 진리의 탐구자로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입니다. 어제 성인의 모친 성녀 모니카 축일에 이어 오늘은 그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누스 축일입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모자母子 성인들입니다. 제가 평생 소지하고 있는 성인의 ‘고백록’입니다.
기념, 기억할뿐 아니라 각자 고유의 성인이 되라 부단히 우리를 자극 분발케 하는 영원한 희망의 표징,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가톨릭 교회의 보물들인 성인들입니다.
어제 저녁 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에 이어 아침 성무일도 즈카르야 노래 후렴, 성인의 고백이
참 좋았습니다. 둘 다 길이 회자되는 성인의 대표적 고백입니다.
“옛것이나 항상 새로운 주님의 아름다움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주님은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게 하셨나이다.”
“주여, 당신을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게 하시나이다.
당신 안에 쉬게 될 때까지는 우리 마음이 평온치 못하리이다.”
참으로 깊고 아름다운 전례가 우리의 신앙에 큰 활력소가 됩니다.
성인의 삶을 압축 요약하는 아침 성무일도 찬미가는 얼마나 깊고 아름답고 풍요롭던지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하늘에 빛나시는 위대한 사제/찬란한 학자의 별 눈부시도다
광채를 뿜으시며 신앙의 빛을/순수히 온누리에 밝혀 주시네
성인은 견고하게 신앙지키고/오류의 유혹들을 힘차게 눌러
더럽고 낡은습관 말끔히 씻고/밝혀진 지혜로써 멀리하셨네
당신은 이승에서 관상하셨고/이제는 하늘에서 밝은빛으로
그얼굴 마주보고 즐기시옵는/복되신 성삼위께 영광있으라”-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들인 성인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사랑을 그대로 반영하는 성인들입니다.
우리 삶의 좌표가 되는, 인생 무지와 무의미와 허무에 대한 답이 바로 성인들입니다.
우리의 비극은 성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요 참 행복의 길입니다.
어떻게 하면 진리의 연인, 성인이 되어 살 수 있겠는지요.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바로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깨어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하느님의 힘이자 지혜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막연히 깨어 있는 삶이 아닙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기쁘게 깨어 기도하게 되고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주님 진리의 말씀을 실천하며 주어진 책무에 최선을 다하며 준비합니다.
바로 오늘 슬기로운 다섯처녀들이 이의 모범입니다. 이와 대조되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입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바로 성녀 젤투르다의 임종어이기도 합니다.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닫혔습니다. 나중에 등에 기름을 담아 허겁지겁 늦게 도착한 처녀들은 문을 두드리지만 주님의 대답은 냉냉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가슴 철렁한 참 서늘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생 주님을 섬겨 왔는데 주님은 ‘나를 모른다니요!’
말 그대로 멘붕입니다. 기름이 상징하는 바 참으로 깊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의 말씀을 지켜온 축적된 삶이 바로 내 기름입니다.
주님과 사랑 깊이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과연 내 삶의 기름은 충분한지 묻게 됩니다. 과연 날로 주님 진리의 말씀을 지키며 깊어가는 주님과 사랑의 관계, 앎의 관계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그러니 몇날에 마련되는 삶의 기름도 아니요 누구한테 빌려 올 수도,
빌려 줄 수도 없는 각자가 평생 마련해야할 삶의 기름, 신망애信望愛의 기름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 말씀이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에 깨어 사는 이들입니다. 언제 주님이, 죽음이 올지 모르니 깨어 오늘 지금 여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해 살 때 미래는 걱정 안해도 됩니다. 사실 이보다 더 좋은 죽음 준비도 없습니다.
참으로 깨어 살 때 복된 주님과의 만남의 죽음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흡사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둘다 참으로 치열히 진리이신 주님의 연인이 되어 평생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여 찾았던 분들입니다. 주님의 평생 학인, 평생 전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참으로 치열히 사랑하며 깨어 살았던 분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주님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이처럼 사랑할 때 지칠줄 모르는 사랑에 깨어있는 삶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바로 우리가 사랑하고 찾는 분은 이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힘이시며 지혜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성인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의 영원한 연인이신 진리이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해주시어 우리 모두 진리의 연인이 되어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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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을 일러 주십니다.
"저마다 등을 들고"(마태 25,1)
신랑을 맞으러 나간 처녀들이 "저마다" 등을 들고 있습니다. 등은 각자가 지닌 자기만의 것입니다. 등에 불을 켜는 일도 각자에게 달려 있지요.
"신랑이 늦어지자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마태 25,5)
다섯을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기본적으로 다들 동일한 인간적 조건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체적 한계와 나약함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지요.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마태 25,7)
이윽고 신랑이 오자 처녀들은 일어나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제일 먼저 챙겨야 할 것이 바로 각자 자기의 등입니다. 복음 사가는 "등"을 언급하면서 "저마다"라고 반복하지요. 이 "등"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노력은 함께 공유하거나 차용할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한 무엇입니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마태 15,10)
기름이 떨어져 등이 꺼져가던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오고, 혼인 잔치의 문은 닫힙니다. 여기서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나눔이나 희사의 정신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말씀의 줄기를 놓치는 실수일 겁니다. "등"을 밝히는 기름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공유나 차용이 불가능한 저마다의 무엇이니까요.
오늘 복음 대목에서 구원의 공동체성과 개별성을 묵상해 봅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세례를 받고 계명을 지키며 하느님 자녀로서 살아가도록 초대받은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저마다 기본적으로 지녀야 하는 "등"을 선물로 받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비유 속 처녀들처럼 슬기롭건 어리석건 저마다 "등"을 지니고 천상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 신랑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기름"은 신랑이신 주님과 신부인 "나"의 만남과 결합을 상징하는 "불"을 지피고 꺼지지 않게 유지하는 소중한 자원입니다. 그런데 내 등불은 온전히 내 기름, 내가 마련한 기름으로만 타올라야 하지요. 아무리 급해도 얻거나 빌릴 수 없습니다. 온 생애를 통과하며 차곡차곡 쌓아 간직해 온, 오로지 나만이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선물입니다.
"우리 문간에는 온갖 맛깔스런 과일들이 있는데 햇것도 있고 묵은 것도 있어요. 이 모두 내가 당신을 위하여 간직해온 것이랍니다."(아가 7,14)
아가의 저자는 연인을 위해 그동안 간직해 온 것들을 펼쳐보이는 신부의 수줍고도 벅찬 사랑을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 속 "기름"처럼 고유하고 독점적인 사랑의 징표와도 같을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사랑하고 따르는 그리스도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 1,23)
당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형틀에 달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사형수를 믿고 따르는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스캔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보여 주는 이웃 사랑이나 나눔, 희생, 순교 등의 모습은 세상 논리와 결도 다르고 방향도 다른 "어리석음"에 불과했지요.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4-25)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돈과 물질과 편리함과 쾌락이 우상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내세에 펼쳐질 영원한 생명에 희망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세속 사람들 눈에는 걸림돌이고 어리석음입니다. 돈과 인맥과 스펙을 모으느라 영혼의 등불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테니까요.
오늘 비유 속 슬기로운 처녀들은 저마다의 삶에서 사랑의 기름을 차곡차곡 모아온 이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들은 세상이 뭐라 하든 기도와 자선과 단식으로, 희생과 나눔과 사랑으로 자기 등에 불을 밝히며 살아온 이들일 겁니다. 신랑을 기다리다 비록 육신의 나약함으로 졸기도 하고 잠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분을 위해 일생을 걸쳐 마련한 소중한 선물을 꼬옥 간직하고 설레며 기다리는 사랑에 빠진 신부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하느님의 어리석음과 하느님의 약함에 매료되어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기름을 저마다 준비해 등불을 켜들고 신랑을 마중하는 우리에게 이 기다림은 설레고 행복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어리석음을 따르기에 진정 슬기롭고, 하느님의 약함을 받아안기에 세상 무엇보다 강한 사랑을 소유합니다.
복음은 닫힌 문 밖의 실랑이로 끝을 맺지만 우리는 문 안쪽에서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 관심이 있지요. 마침내 주님과 함께 들어선 혼인 잔치상에서 나의 사랑의 등불은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 빛이 그분과 나의 얼굴을 더욱 아름답고 찬연히 비추며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타오를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이 사랑에 잠겨 행복한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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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다."(마태25,1)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열 처녀 중에서 다섯은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잘 되어있는 '슬기로운 처녀들'이었고, 또 다른 다섯은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등과 함께 기름을 잘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우리도 언제 오실지 모를 주님을 '지금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기름)과 나의 삶(등)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아우구스티노!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삽나이다." 라고 참회와 기쁨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아우구스티노!
그는 어제 기억한 어머니 모니카의 끊임없는 기도와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도움을 받아 방탕의 옷과 이단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보면, 언제나 오늘(지금) 회개하는 사람들이 첫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늦었다고 고백하지만,
늦게 하느님을 사랑했다고 고백하지만, 회개를 통해 첫째가 되신 분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1,18)
아마도 성 아우구스티노가 깊이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사랑이고, 이토록 먼저 자신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먼저 나를 사랑하신 하느님!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느님!
우리가 돌아가야 할 원천이자 본질입니다.
오늘도 첫째가 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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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1코린토 1,17-25
마태오 25,1-13
감정은 내가 사는 지구다.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지구입니다.
지구에서 생명의 양식과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이 통제되지 않으면 인간이 지구에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지구도 자신이 살려고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것들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이 지구를 통제하지 못하면 지구가 인간을 통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지구와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마음입니다. 혹은 마음에서 나오는 기분, 즉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지구처럼 감정이 인간을 통제하게 됩니다.
분노 조절 장애와 같은 것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사냥꾼들이 곰을 잡는 방법 중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곰이 잘 다니는 길목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러면 그곳을 지나던 곰이 돌덩이에 머리를 부딪치게 됩니다.
머리를 부딪친 곰은 자기가 가는 길을 막은 돌에 화가 나서 그 돌덩이를 이마로 들이받습니다.
그러면 돌덩이는 저만큼 밀려갔다가 다시 곰을 향하여 밀려와 곰을 들이받습니다.
그러다 더 많이 화가 난 곰이 더 세게 돌덩이를 들이받습니다.
곰의 반복되는 무차별한 공격은 점점 그 도가 더 심해집니다.
결국, 곰은 그 어리석은 힘겨루기로 머리가 터지고 녹초가 되어 힘을 다 소모해버립니다.
그때 지켜보던 사냥꾼들이 와서 곰을 끌고 가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 싶을 정도로 미련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인간은 안 그런가요?
한 가지 생각에 집착하여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리는 일은 없나요?
자기를 모함하거나 돈을 떼먹은 사람을 굳이 떠올리며 스스로 감정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지는 않습니까?
예전에 중국 북부 산시성 산젠 마을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버린 부인에 대한 복수로 결혼식장에서 폭탄을 터뜨려 3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전직 석탄 광산 폭발물 전문가인 이 남자는 마차에 50kg짜리 폭탄을 싣고 마을 대로에서 열리는 결혼식장에 도착해 폭탄을 터뜨렸으며 자신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지난해부터 부인이 자신을 버리고 아들을 데려간 후 질투심과 분노에 가득 차 ‘최악의 사고’를 낼 것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1년이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의 노예가 되어버렸고, 결국 수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정작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범인의 부인과 세 자녀(아들과 두 딸)는 결혼식장에 없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분 나쁜 것을 외적인 요인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지구가 망가지는 것이 태양 때문일까요? 인간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지구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기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기분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행복의 기술입니다.
지구가 인간에게 생존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듯, 감정도 우리에게 그런 에너지를 줍니다.
감정이 무너지면 삶의 에너지도 잃게 되어 살고 싶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기분을 어떻게 좋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기분은 지구와 같습니다. 지구를 보존하는 방법과 같은 것입니다.
괴롭히지 말고 내버려 두면 됩니다.
쉬게 해 주면 자연은 자연적으로 회복됩니다.
주님은 이를 위해 낮엔 일하고 밤엔 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 칠 년에 일 년은 쉬도록 하셨습니다.
농사를 짓더라도 칠 년에 일 년은 휴면기로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은 스스로 회복합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휴식을 시켜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휴식을 시켜주어야 하는지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감정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생각’입니다.
생각은 지구의 인간들과 같습니다.
생각할 때는 감정의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그렇다면 주기적으로 생각을 멈추어주면 좋습니다.
생각을 멈추면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감정이 회복됩니다.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사랑과 기쁨의 감정을 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미련한 처녀들은 기분이 나빠지고 나서야
이것을 회복하려 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지구가 다 망가진 후에야 부랴부랴 회복시키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규칙적인 기도를 하며 감정이 나빠지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 기후협약을 탈퇴하였습니다.
금성이 지구와 가장 비슷하지만, 인간이 살 수 없는 이유는 표면 온도가 450도나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산화탄소가 더 많은 온실효과 때문입니다.
지구도 최근 몇 년간 이산화탄소 수치가 지나치게 상승하였습니다.
인간이 지구를 쉬게 하지 못하게 한 이유 때문입니다.
망가진 다음에 고치려고 하면 소용없습니다.
감정도 망가지기 전에 규칙적으로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현명한 처녀와 같습니다.
‘규칙적인 기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기분을 잘 조절할 줄 아는 사람들이 어쩌면 지구를 살릴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규칙적인 쉼의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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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1코린토 1,17-25
마태오 25장 1-13절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지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하고 청하였다.”
사랑의 가장 큰 표현, 잘 준비하는 것
신학생 시절 설교학 교수님 말씀께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부디, 미리 미리 강론 준비 잘 하십시오.
혹시라도 강론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차라리 강론대에 서지 마십시오.”
곰곰이 생각해보니 교수님 말씀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강론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을 때, 이것 저것 잡다하고 엉뚱한 말을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말실수도 하게 되고, 괜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 싸잡아 야단치게 되고, 그러다보면 강론이 강론이 아니요 언어폭력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제로서 강론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강론을 듣는 신자들에 대한 예의이자 교회와 하느님을 향한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비단 강론뿐이 아니라 미리 미리 잘 준비한다는 것은 서로 서로에 대한 예의이자 배려입니다.
한 가정의 어머니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데, 미리 생각하고, 미리 챙겨놓고, 미리 계획해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정성껏 밥상을 준비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이자 배려입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친구들과 떠들다가 식사시간 10분전에 도착해서, 찬밥에, 어제 먹다 남은 찌개에, 대충대충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요.
마찬가지로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학생들이 시험을 잘 준비하는 것은 선생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도리요 예의, 배려, 존경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무부 직원이 회사 창립기념 행사를 정성껏 준비하는 것은 그 회사와 경영자를 위한 가장 큰 애정의 표현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처럼 미리 미리 잘 준비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향한 가장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잘 준비하기 위해 갖춰야 할 한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깨어있음’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잠이 덜 깬 흐리멍텅한 얼굴이 아니라,
세상 다 산 것 같은 무기력한 표정이 아니라,
갓 낚아 올린 싱싱한 은갈치 눈동자처럼 살아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롱초롱하고 맑은 정신으로 잘 준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자세, 언제든 뛰어들 수 있는 적극성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깨어있다는 것, 이 세상에만 시선을 두지 않고 이 세상 너머의 또 다른 세상, 영적인 세상,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지속적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찾음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깨어있다는 것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 자신에 대한 사랑, 하느님의 모상인 이웃들에 대한 사랑...
우리 영혼은 성찰이 부족하면 쇠락되기 마련입니다.
오늘의 나에 결코 만족하지 말고 부단히 나를 돌아보고, 나를 갈고 닦으며, 이웃을 살펴보고, 세상을 직시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가는 노력이야말로 깨어있음의 중요한 표현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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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이영근 신부님.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고 올리브 산으로 가시자, 제자들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태 24,3)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마태 24,4) 하시면서, ‘가장 큰 재난’(마태 24,15-26)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마태 24,29-31)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을 때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4)라고 두 가지 곧 ‘깨어있음’과 ‘준비함’을 명령하시면서, 세 개의 비유, 곧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 비유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이요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를 밝혀주십니다.
오늘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는 이를 잘 드러내줍니다.
이 비유는 혼인잔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열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입니다.
신부는 당연히 신랑께 깨어있어야 하고, 신랑을 고대하고 기다림으로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신랑이 오면 마중 나가 맞이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냥 마중 나갈 뿐 아니라, 신랑이 자신을 잘 찾아오도록 ‘등’을 밝혀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등’을 밝혀들기 위해서는 ‘기름’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 이가 바로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준비해야 할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일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등’을 ‘선행’으로 등에 불을 타오르게 하는 ‘기름’을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의 ‘세상의 빛과 소금’의 가르침에서 말씀하십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5-16)
그러니 ‘등’은 ‘착한 행실’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을 밝히는 데 꼭 필요한 ‘기름’은 ‘신랑에 대한 사랑’, 곧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자세’이며, 성령의 기름부음에 도유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습니다.”(마태 25,6). 여기서, “한밤중”은 가장 예기치 않은 때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등불을 챙겼습니다.”(마태 25,6-7)
여기서 ‘챙기다’(코스메오, κοσμεω)는 ‘심지를 자르다’라는 뜻으로, 다 타버린 심지 끝을 잘라서 그을음이 나지 않고 환하게 타오르도록 정돈하는 행동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곧 불꽃이 잘 타오르도록 그래서 환하게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 심지가 기름에 닿아있는지 기름은 충분한지, 그리고 심지가 타버리지는 않았는지 보고 잘라내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기름에 몸을 담그고 있는지, 성령에 젖어 있는지, 그 사랑의 기름에 도유되어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행실인 선한 행동의 등을 밝히고 있는지, 그래서 신랑이 나를 금방 알아보고 찾을 수 있게 빛나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신랑이신 주님’께 깨어있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인 사랑의 착한 행실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나는 ‘슬기로운 처녀’인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마태 7,24-26).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깨어 있어라.”(마태 25,13)
주님!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되, 신랑인 당신을 향해 깨어있게 하소서.
당신을 희망하고 기다리며, 더더욱 갈망하게 하소서.
빛 속에서 은총을 볼 줄 알게 하소서.
그 은총이 얼마나 큰지, 경이로워하고 놀라워할 줄 알게 하소서.
임을 보게 하소서. 임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기름칠 되게 하소서. 사랑의 등불을 켜들게 하소서.
당신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깨어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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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성 아구그스티노는 354년 북아프리카누미디아의 타가스테(현재 알제리의 수크아리스)에서 모니카 성녀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방만(放漫), 방탕(放宕)한 생활, 종교적으로 마니교에 깊이 빠졌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끊임없는 노력과 눈물어린 기도가 있었고, 마침내 이탈리아의 밀라노 성 암브로시오 주교를 만게 되고, 그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가톨릭 입교하였습니다. 391년 사제가 5년 뒤 히포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단을 물리치고 교회를 수호하였으며, 고백록 등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430년에 선종한 그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주님 앞에서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난 이들과의 대화, 일, 사건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생활, 허물과 그릇됨.. 복음적 생활도 묵상합니다. 회개함과 나의 개선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멸망알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1코린 1,17-25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25,1-13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아우구스티노는 비신자인 아버지와 신자인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자랐습니다. 똑똑하고 영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청년 때부터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그는 인간의 정서, 사상적, 종교적, 문화적, 학문적인 가치 사이에서 갈증과 함께 방황하였으며, 마니교에 심취, 정신적 종교사상적 혼동과 방황 속에 살았습니다. 그
가톨릭 세례와 하느님의 만남은 그의 근원적 변환과 쇄신을 가져왔으며, 모든 방황과 혼돈의 삶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가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되었으며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특히 어머니 모니카의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그를 일으켜 세우고,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서 살게 하였습니다. '교회 학자'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앎은 그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에 들게 합니다.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갑니다. 슬기로운 처녀들 처럼 등에 기름을 마련합시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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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8일 금요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매일미사
_김홍주 베드로 신부 집전
https://youtu.be/4mDpFnBsNxs (29:25)
•2020. 8. 28.
***** 신부님 강론 10:00 부터 15:17 까지입니다. *****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0년 8월 28일 금요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매일미사
Memorial of Saint Augustine, Bishop and Doctor of the Church
김홍주 베드로 신부 (서울대교구 동성고등학교 지도신부)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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