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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델의 죄목
당시는 군대해산, 헤이그 밀사사건, 고종양위 등으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이에 연일 계속되는 의병의 출몰과 소요로 한국민과 통감부와의 대결이 최고조에 이른 때다. 통감부 서기관 미우라는 이 일련의 상황을 베델의 신문이 선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물로 베델의 신문에 실렸던 논설 3건을 제시했다.
2. 일본과 영국의 반응
일본 외무성은 외교경로를 통해 영국정부에게 베델을 추방하거나 그의 신문을 폐간 시켜달라고 요구한다. 영국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마찰을 일으키고 있는 베델을 예의 주시했고, 결국 베델을 재판에 회부한다.
3. 베델은 누구인가
영국의 한 신문사 특별통신원으로 한국에 온 베델은, 통신원 자리에서 해임된 이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다. 창간된 신보는 발간 초기부터 강한 반일논조를 띠었고 점차 국민들 속에 깊이 파고들어 민족지로써의 자리 매김을 하면서, 일본 당국과 전면적인 대결로 돌입하게 된다.
4. 국채보상운동
1907년 초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면서 퍼져나간 일종의 캠페인이다. 일본에 진 국채 1300만원을 민간인들이 담뱃값을 줄여서라도 갚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애국계몽운동. 당시 불길처럼 번진 이 자발적인 민중운동의 뒤에는 대한매일신보가 있었다.
5.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위원들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의 논설 위원들은 베델을 끼고 혹은 그의 이름을 빌어 소신껏 자기 주장을 폈다. 특히 훗날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맡았던 박은식은 칼 같은 논설로 유명했다.
6. 신보의 몰락
재판결과, 베델은 상해에 있는 영국인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신보에 치안 방해라 하여 발매금지처분을 내렸고, 실제로 신보사를 운영해오다시피 하던 양기탁에게는 국채보상금을 횡령했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워 구속했다.
7. 베델의 죽음
상해에서 돌아온 베델은 서울의 한 호텔에서 서른 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추도모임에는 도산 안창호가 추도사를 맡았고 직업, 귀천, 국적,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는 베델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만에 종간호를 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