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왜 그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니?” 누구나 한 번쯤 말해보았거나 들어보았음직한 말이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상식이 우리에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얼마나 ‘표정 관리’나 ‘음성 관리’를 잘하느냐, 즉 ‘인상 관리(impression management)’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 우리는 일상적 삶에서 늘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성도 작동하지만, 많은 경우 이성은 감정의 ‘졸(卒)’이거나 ‘호위 무사’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분노, 슬픔, 두려움, 즐거움, 사랑, 놀람, 혐오, 부끄러움 등 8명의 가족과 그밖의 여러 식객을 거느리고 있는 감정은 한마디로 말해 ‘행동하려는 충동’이다. 감정(emotion)이라는 단어는 ‘움직이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모테레(motere)’에 ‘떠나다’의 뜻을 내포한 접두사 ‘e’가 결합된 것으로, 이는 행동하려는 경향성이 모든 감정에 내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캐나다 신경학자 도널드 칸(Donald Calne)은 “이성은 결론을 낳지만, 감정은 행동을 낳는다”고 말했다.
일찌기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인간은 동정, 사랑, 공포, 증오 등에 더 영향을 받는다며 이성을 ‘감성의 노예’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당시의 주류적 견해에 속한 건 아니었다. 흄의 책은 당시 불온서적으로 간주되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18~19세기 내내 이성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예찬하는 신도들의 수는 늘어갔지만, 동시에 소수나마 이성에 대한 회의와 도전도 계속되었다.
1899년 『유한계급의 이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을 출간한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은 합리적 이기심을 경제행동의 기본 동기로 본 주류 경제학, 즉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합리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효용을 계산해 선택한다는 평균적 인간 유형을 가정한 신고전학파의 이론은 잘못되었다”며 인간은 그보다는 탐욕, 공포, 순응 등과 같이 훨씬 근본적인 심리적 힘에 의한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베블런 역시 학계에서는 ‘왕따’를 당한 인물이었지만, 오늘날 전성기를 맞고 있는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은 감정의 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베블런의 계보를 잇는 것이다(물론 이념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베블런은 탐욕스런 자본가들을 약탈적 충동의 노예로 보면서 그들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행동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는 등 진보적 자세를 취한 반면, 행동경제학자들은 금융시장에서 비효율성에 대한 통계학적 증거를 모색하는 동시에 연구 결과를 활용하기 위해 투자 매니저로 일하고 ‘행태재무론(behavioral finance)’을 개척하는 등 친(親)자본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 미국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Dan Ariely)는 “경제학은 종교입니다. 경제학은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되도록 행동하리라고 가정하죠. 하지만 이것은 믿음일 뿐 증거는 없어요”라고 단언한다.
경제학만 종교이겠는가? 인간의 이성을 전제로 하는 모든 학문이 종교이거나 유사 종교의 혐의가 다분하다. 행동경제학의 대중화 덕분에 이제 우리는 인간이 ‘합리적 존재(rational being)’라기보다는 ‘합리화하는 존재(rationalizing being)’라는 걸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느 나라 정치든 다 그렇겠지만, 특히 한국 정치를 보면 그 상식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2006년 1월 28일 미국의 성격과 사회심리학회 연례학술대회에서 에모리대학 드루 웨스턴(Drew Westen) 교수 연구팀은 “정치적 판단을 할 때 인간의 뇌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 영역이 작동한다”는 요지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성균관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이정모는 감정적 판단은 사전에 가진 신념이나 감정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여러 정보를 분석해야 하는 이성적 판단보다 속도가 빠르다며 “감정적 판단이 이성적 판단보다 발달한 것은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 우리는 생존과 번영에 유리한 길을 찾아 진화해왔으며, 속도가 생명인 인터넷과 SNS로 대변되는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과로 과거보다 더욱 견고한 ‘감정 독재’ 체제하에서 살게 되었다. 속도는 감정을 요구하고, 감정은 속도에 부응함으로써 이성의 설 자리가 더욱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감정 노동(emotional labor)’과 ‘감정 자본주의(emotional capitalism)’가 주요 이슈로 등장한 것도 바로 그런 변화와 무관치 않다. 감정 독재가 심화되면서 자본이 감정을 활용해야 할 ‘감정 식민지화’의 필요성이 더욱 커진 것이다.
우리는 ‘감정 식민지화’를 인정하고 향유하면서도 이성의 끈은 놓지 않은 채, 나를 둘러싼 바깥 세계를 향해선 이성에 대한 호소를 멈추지 않는다. 특히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 더욱 그렇다. 나는 ‘감정 독재’를 껴안을망정 너는 ‘이성 독재’를 지향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젠 좀 달리 생각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 책은 바로 이 물음에서 출발했다.
어린 아이들이 가끔 던지는 “왜?”라는 질문은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너무도 익숙해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왜?”라고 물으니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지는 것이다. 지식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왜?”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는 게 꼭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그렇게 하긴 매우 힘들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다. 인지적(認知的)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어떤 생각을 깊게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왜?”라는 질문이 감정과 관련된 것이라면 답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아빠는 왜 엄마와 결혼했어?” 장난스럽게 대답해도 그만인 질문이긴 하지만, 진지하게 답하려고 해도 답을 할 수가 없다. 자신도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감정을 통제하는 우리의 두뇌 영역에는 언어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피곤할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에서든 꼬치꼬치 따져묻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심정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습성이 필요 이상으로 확대되고 고착화되어 “왜?”라고 묻는 게 꼭 필요한 일에서조차 “왜?”를 회피한다는 데에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분석을 건너뛰고 곧장 문제 해결로 달려드는 경우가 아주 많다. 심지어 공적인 사회문제들마저 그런 취급을 받는다. 물론 성공하기 어렵다. 원인을 잘 모르거나 무시하면서 내놓는 답이란 건 뻔하기 때문이다. 그저 사람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추상적이고 당위적인 주장만 난무할 뿐이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 당사자들을 비판함으로써 그 일의 원인마저 그 사람들 때문이라는 식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데, 이게 옳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사람 탓만 하는 식의 해법은 그런 일들이 사람만 바뀐 채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속된 말로 정치가 개판이라면 그렇게 된 이유와 책임을 정치인들에게만 물어선 답이 나오질 않는다. 정치인들은 왜 그러는지, 한 단계 더 나아간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게 필요하고, 바로 여기서 이론이 필요한 것이다.
“왜?”라는 질문의 전부는 아닐망정 상당 부분은 이론이 있을 때에 더 쉽고 정확하고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 이론은 사실상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에서부터 개인의 심리 문제에까지, 이론을 알거나 이론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도움되는 게 많다. 특히 사실과 정보의 홍수 또는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 이론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사실과 정보의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론 만능주의’를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이론으로 모든 걸 설명하려는 시도는 위험할 수도 있다. 이론은 사고를 그 어떤 틀에 갇혀버리게 만드는 족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바로 이게 문제다. 사람들이 이론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모두 다 나름의 이론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야구계에 떠도는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이론은 칫솔과 같다. 모든 이들은 각자 자기만의 이론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론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야구 선수들만 그런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은 다 자기 나름의 이론을 갖고 있다. 그것이 고정관념이든 편견이든 버릇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이론은 강력한 증거로 뒷받침되는 가설이라는 엄격한 정의를 고수하는 학자들은 이론이라는 개념이 대중적으로 ‘근거 없는 추측’과 동의어로 쓰이는 걸 개탄한다. 그럴 만하다. 속된 말로 ‘똥고집’도 그 나름의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걸 갖고 있는 사람에겐 하나의 이론이지만, 이론으로 밥을 먹고사는 학자들은 그것마저 이론이라고 부르는 데에 속이 상할 만하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개에게 벼룩이 있듯이, 학자에겐 이론이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개탄하거나 속상해할 일은 아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론이라는 말이 그렇게 느슨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에 이론에 그 어떤 위험이 있다 해도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검증받을 수 있는 이론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자기 혼자만의 이론을 검증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 어떤 이론이든 이론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는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이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게 열린 자세로 이론을 이용해 좀더 긴 시야와 깊은 안목을 갖고 세상을 이해하고 꿰뚫어보려는 노력을 해보자는 것이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될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심리학자이지만 “심리학에서의 통찰을 경제학에 적용함으로써 연구 분야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이유로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심리학자에게 경제학상을 주었다고 해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이는 기존 학문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고 무너져야 함을 시사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 융합의 정신에 따라, 이 책은 ‘감정의 독재’에 관한 50개의 “왜?”라는 질문을 다양하게 던지고 여러 분야의 수많은 학자에 의해 논의된 이론과 유사 이론을 끌어들여 답을 하려는 시도를 해보았다. 왜 하필 50개인가? 내 목표는 앞으로 수백 개의 이론과 유사 이론을 시리즈로 계속 소개하는 것인데, 우선 책 한 권 분량에 적합한 수치가 50개여서 그렇게 한 것뿐이다.
싸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감정 독재’와 ‘싸우는 법’은 사실상 ‘타협하는 법’이다. 정면 승부를 해선 결코 이길 수 없으며, 감정과 이성의 완전 분리가 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정이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큰일을 이룰 수 있는 동기와 정열은 감정의 몫이 아닌가. 누구 말마따나 “이성의 적이 아니라 동료로서 감정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타협이 가능한 것들을 긍정적으로 살려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독자들께서 이 책을 통해 그런 타협에 성공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기를 바랄 뿐이다.
2013년 12월
강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