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어령 박사의 글 중에(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25쪽)
‘ㅅ’을 ‘ㅈ’으로 바꾸면 ‘사랑’이 ‘자랑’이 된다. 라는 글귀가 있다.
수많은 사랑이 있다. 사랑은 수많은 수식어를 동반한다. 지금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수많은 사랑 중에 가장 사랑에 부합하는 수식어는 ‘자랑하고 싶은’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갈라디아서 6:14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 데살로니가전서 2:19~2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로마서 5:8
‘ㅅ’을 ‘ㅈ’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어떤 사랑을 해야할까?
세상엔 희한한 물질이 많다. 그중에 비뉴턴 액체라는 것이 있다. 녹말가루와 물의 혼합물로써 강한 충격에는 고체처럼 단단해지고, 약한 충격에는 물처럼 부드러워진다.
(뉴턴 액체들은 물에 의해 물질이 분해되는 반면 비뉴턴 액체는 물질이 물을 완전히 흡수해버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강강약약이다. 그를 온전히 받아들여 나를 강하게 한다. 그가 나타나야할 때에 나를 완전히 내려놓는다.
‘ㅅ’을 ‘ㅈ’으로 바꾸는 방법은 강할 때는 강해야 하고, 약할 때는 약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실제로 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강할 때와 약할 때가 분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힘이 없거나 힘을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자랑이 되면 내가 아닌 그가 드러난다. 그로 가득한 세계를 살면 사랑은 자랑이 된다.
하지만 사랑에 여전히 내가 있으면 절대로 사랑은 자랑이 되지 못한다. 서로를 빼았는 치열한 다툼만 있을 뿐이다.
십자가를 생각해보라. 예수가 자신을 드러내려 했다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사랑했다. 예수는 나를 살려야만 했다.
그래서 십자가로 자신을 죽이려는 강한 세력 앞에서 굴복하지 않으셨다. 예수도 십자가만큼은 피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결국 그의 선택은 ‘ㅅ’을 ‘ㅈ’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 예수는 단단했다. 수많은 군중 앞에서 벌거벗겨졌지만 당당했다. 예수는 당신이 사랑한 하나님과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힘이없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들에게 ‘당신의 아들이요, 너의 어머니며,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마가복음 2:17
사랑하다 부서지지 말라. 사랑하다 처내지 말라.
내가 부서지면 더이상 사랑할 수 없다. 깨진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오히려 깨진 조각이 그를 다치게만 할뿐…
그를 처내면 더이상 사랑할 수 없다. 흠이 나고 상해버린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되려 나 스스로에게 손가락질을 할뿐…
‘ㅅ’을 ‘ㅈ’으로 바꾸려면 아파야 하는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많이, 더 많이…
각오가 서야한다. 왠만한 각오가 아니면 안되는 것 같다.
두 사람을 변화시킬만큼의 힘을 가진 것이 사랑인데 그 힘은 더이상 아프지 않을 때 비로소 발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아프고 싶겠는가…
어설픈데 자랑하는 객기는 창피한 것이다. 부끄러움을 타인의 몫이라고 치부하지 말라. 엉뚱한 각오가 사랑을 더 힘들게 만드는 법이다.
아프다. 아픈 자리에 돋아난 새살이 보기 좋다면 이미 ‘ㅅ’은 ‘ㅈ’이 되어있을 것이다. 아팠던 자리에 돋아난 새살은 티가 난다. 속이 꽉찬 단단함이 느껴진다.
성경은 그 새살을, 그 자랑을, 그 사랑을 ‘스티그마’라고 한다.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나에게 그의 사랑이 자랑이 되었노라!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 갈라디아서 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