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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Fernando Pessoa. 1888~1935(47세)
「1888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나. 양아버지가 영사로 근무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 일곱 살 때 리스본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무역 통신문 번역가로 일하며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생전에 그는 몇 편의 시를 발표하였을 뿐, 작가로서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후 발견된 유고는 시와 드라마 초고, 정치적 에세이 등을 포함하여 모두 27,543매나 되었다. 그중 1982년 출간된 유작산문집(불안의 서)은 문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 그는 포르투갈 현대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손꼽힌다. 」
서문
리스본에는 술을 마실 수 있는 몇몇 레스토랑과 음식점이 있다. 1층은 별 장식 없이 간단하게 꾸민 주점이고 2층은 식사를 하는 공간인데, 튼튼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마치 철도가 연결되지 않은 작은 마을의 식당 풍경을 연상시킨다. 일요일을 제외하면 손님이 별로 없는 그런 식당에서 종종 나는 아주 기이한 인상의 인물들과 마주친다. 표정 없는 얼굴의 그들은 대개 삶의 주변부를 사는 사람들이다.
서른 살 정도 된 그 남자는 마른 몸매에 키가 큰 편이었다. 그는 앉아 있을 때 몸을 과하게 앞으로 구부정하게 숙이는 습관이 있었지만 서 있을 때는 좀 덜했다. 차림새는 분명 신경을 쓰지 않은 듯했으나 그렇다고 정말로 아무렇게나 입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늘 저렴한 메뉴를 선택해서 식사를 했고, 다 먹은 뒤에는 직접 만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식당에 있는 다른 손님들을 관찰했다.
그 이후로 - 왜 그런지는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 우리는 서로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곤 했다.
사실 없는 자서전
1.
1930년 9월 3일
내가 태어난 이 시대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신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버렸는데, 그 이유는 과거 그들의 조상이 신을 믿게 되었던 이유와 동일하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의 정신은 본래 무슨 일에든 비판을 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느낌이 기반이지 생각을 기반으로 하는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인간을 신의 대체물로 삼아버렸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 속하든지 항상 그 무리의 가장자리에서만 머물고, 같은 무리에 속한 인간들 뿐 아니라 그들의 곁에 있는 커다란 다른 공간도 함께 관찰하는 사람 중 하나다.
나처럼 존재하는 사람, 삶을 살 줄 모르는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와 같은 유형의 극소수의 인간에게는 일반적인 삶의 양식을 포기하고 오직 관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인 삶이 무엇인지 모르며, 알 수도 없다. 인간은 이성으로 신을 믿는 것이 아니고 추상적인 믿음 자체가 불가능한데다 추상적인 대상과 어떻게 교류를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른다.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삶을 미학의 대상으로 관조하는 것뿐이다.
자연과학의 기본적인 개념은, 만물은 운명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법칙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반응할 수가 없다. 자연법칙이 이미 정해놓은 그 법칙대로 우리의 행동이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법칙은 오래전부터 인간이 지배당하고 있는 신으로부터의 숙명과도 일치하므로, 허약한 사람이 우람한 운동선수들이나 하는 훈련을 따라 할 수 없듯이 우리는 헛되이 안간힘 쓰기를 포기해버린다. 오직 느낌의 지식욕으로 무장한 신중한 태도로, 우리는 감각의 책 위로 몸을 기울인다.
우리는 아무것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우리의 느낌만을 유일한 실체로 지각하고 그 안에서 도피처를 구한다. 우리의 느낌을 거대한 미지의 왕국으로 보고 그것을 탐구한다. 우리가 쓰는 산문과 시는 낯선 이의 이해를 구하거나 그들을 설득하려는 의지나 욕망이 아니라 오직 순수하게 한 명의 독서가에 의해 소리 내어 말해지는 말이다.
비니Vigny는 인생이 감옥과도 같고, 자신은 그 안에서 죽을 때까지 새끼를 꼬면서 생을 소진해야 한다고 믿었다. 염세적이라는 것은 비극의 요소를 내포하며 과장되고 불편한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쓴 글에 대해서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일거리를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감옥의 죄수가 불행을 견디기 위해서 새끼를 꼬듯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우리의 글은 지루함을 잊으려고 쿠션에 수를 놓는 소녀의 행위에 가깝다. 그것이 전부다.
나는 인생이 집과 같다고 본다. 명부(冥府. 저승)로부터 올라온 우편마차가 나를 데리러 오기까지 그 안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집이다. 마차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그것은 알지 못한다. 어차피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안에서 대기해야 하므로 이 집은 감옥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인간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으므로 이 집은 사교모임의 장소도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를 익숙하고 마음 편한 장소로 느끼지도 않는다. 어떤 자들은 방에 틀어박혀서 게으르게 빈둥대며, 잠을 자는 것도 아니면서 침대에 누워 시간이 가기를 기다린다. 어떤 자들은 살롱에 나가서 분주하게 떠들어댄다. 그들 모두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놓아두면 그만이다.
우리 모두에게 저녁은 찾아올 것이다. 우편마차는 도착할 것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마음껏 즐긴다. 그리고 산들바람을 즐길 수 있도록 나에게 주어진 영혼도 마음껏 즐긴다. 나는 더 캐묻지 않는다. 나는 애쓰지 않는다. 내가 지금 여행자의 책에 써넣는 것이 언젠가 다른 이들에 의해 읽히게 된다면, 그래서 그들의 휴식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무도 이것을 읽지 않거나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 나는 괜찮다.
2
꿈꾸기 혹은 행동하기, 나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이란 끔찍하다. 내 이성은 꿈꾸기를 혐오하고, 내 감수성은 행동하기를 역겨워한다. 행동이란 내가 부여받지 못한 천성이며, 꿈꾸기란 그 누구도 부여받지 못한 운명이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끔찍하게 싫어하므로 그중 하나를 선택할 수가 없다. 그런데 나는 종종 꿈을 꾸거나 아니면 행동을 해야만 하는 입장이므로 한 가지를 다른 한 가지 속에 뒤섞어버린다.
3
나는 도시의 거리에 고인 긴 여름 저녁의 고요를 사랑한다. 특히 그것이 한낮의 소란스러움과 가장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장소를 선호한다. 아르세날 거리와 알판데가 거리, 그리고 알판데가 거리의 끝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모든 슬픔의 거리들, 고요하고 긴 항구의 길이 중단되는 지점, 여름날 저녁, 미로와 같은 고독의 도시를 헤맬 때면 침울에 잠긴 거리들이 나를 위로한다. 그럴 때 나는 나보다 앞서 이 길을 지나간 시간을 체험한다. 세자리우 베르드와 동시대의 인물이 된 느낌이 들고, 그 느낌을 즐긴다. 나는 그의 시를 마음속으로 음미할 뿐 아니라, 그 시들이 탄생한 배경에 있게 된다. 어둠이 깔릴 때까지 나는 그런 곳을 걷는다. 거리가 자아내는 느낌과 비슷한 삶의 느낌들이 산책 내내 나와 동행한다. 낮 동안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런 북적거림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밤이 되면 거리는 부재하는 북적거림의 공간이다. 그 북적거림 역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낮이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밤이면 나는 내가 된다. 나와 알판데가 거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단지 거리는 거리이고 나는 영혼이라는 차이만을 제외한다면, 하지만 아마도 그 차이는 사물의 본질적 측면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리라. 인간과 사물 모두는 동일한 추상적 운명을 갖는다. 비밀의 산술식으로 표기하면 둘 다 마찬가지로 하찮고 무의미한 기호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 .... 이 느리고 텅 빈 시간, 슬픔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며 차오르고, 모든 것은 오직 나의 느낌이고, 오직 피상적이기만 할 뿐이라서, 내 힘으로는 세상의 그 무엇도 변화시키지 못하리란 비통한 인식이 내 정신을 점령해 버리고 만다. 아, 내 꿈은 나의 현실을 대체해주는 것이 아니라, 꿈 자신이 얼마나 현실과 흡사한가를 알려주는 데 그치고 마는구나. 그리하여 내가 현실과 마찬가지로 꿈마저 외면해버리면, 꿈은 내 의식의 외부에서 출현한다. 마치 지금 거리 끄트머리에서 막 모퉁이를 돌아가는 전차처럼, 혹은 저녁을 향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떠들어대는 가두선전원의 외침처럼, 석양의 단조로움을 깨뜨리는 그의 외침은 아라비아의 노래가 되어, 급작스럽게 솟아난 분수의 물줄기가 되어, 정적 속으로 솟구쳐 오른다.
사랑에 빠진 커플들이 함께 걸어간다. 재봉사 여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 지나간다. 젊은 남자들이 무언가 재밋거리를 찾아서 간다. 해방된 은퇴자들이 일과처럼 행하는 산책길에서 담배를 피운다. 여기저기 상점 문 앞에는 한가한 상점 주인들이 멍하니 서 있다. 신병들이 거리 곳곳을 몽유병자처럼 서성인다. 건강하거나 홀쭉한 몸집인 그 청년들은 몰려다니면서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나중에는 소음 이상의 소동을 일으키는 요란한 무리들로 변한다. 거리에는 평범한 사람들도 돌아다닌다. 이 시간 이곳 거리에 자동차는 드물게만 돌아다니므로, 차 소리가 내 귀에는 음악과 같다. 숨 막히는 평안이 내 심장을 조여 온다. 내 안식은 곧 체념이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일도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내 운명의 눈에는 낯설기만 하다. 심지어 운명 자체도 이들을 모른다. 우연이 던져놓은 돌멩이이며 모르는 목소리의 메아리다. 의미도 생각도 없는 무의식과 재앙이 한꺼번에 뒤섞여 있다. 이것이 삶이다.
4
부조리하고 앙상한 내 방 책상 앞에서, 이름 없고 하찮은 사무원인 나는 쓴다. 글은 내 영혼의 구원이다. 나는 멀리 솟아난 높은 산 위로 가라앉는 불가능한 노을의 색체를 묘사하며 나 자신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내 석상으로, 삶의 희열을 대신해주는 보상으로, 그리고 내 사도의 손가락을 장식하는 체념의 반지로, 무아지경의 경멸이라는 변치 않는 보석으로 나에게 황금의 옷을 입힌다.
6
나는 삶에게 극히 사소한 것만을 간청했다. 그런데 그 극히 사소한 소망들도 삶은 들어주지 않았다. 한 줄기의 햇살, 전원에서의 한 순간, 아주 약간의 평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빵, 존재의 인식이 나에게 지나치게 짐이 되지 않기를,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리고 타인들도 나에게 아무 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런데 이 정도의 소망도 충족되지 못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의 단추를 풀고 지갑을 꺼내기 귀찮아서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지 않은 것처럼, 삶은 나를 그렇게 대했다. 적막에 잠긴 내 방에서, 슬픔으로 나는 글을 쓴다. 항상 그랬듯이 혼자이며, 앞으로도 항상 혼자일 것이다. 무의미한 것이 분명한 나의 목소리는 수천의 목소리의 본질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 굶주림을 고백하는 수천의 목소리를, 내 영혼과 마찬가지로 일상이라는 운명에 굴종한 채 헛된 꿈과 영원히 실현되지 않을 희망을 차마 파기하지 못하고 있는 수백만 영혼의 끝없는 기다림을 담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의문이 드는 순간 나는 내 심장을 의식하므로,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뛴다. 나는 더 높이 살아가므로, 나는 더 많이 산다. 종교적인 힘이 내 안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일종의 기도와도 같은, 탄식과 유사한 어떤 것, 하지만 동시에 내 이성이 불러일으키는 반발도 튀어나온다.
11
탄원의 기도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아득한 심연입니다. 하늘을 응시하는 우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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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기로 기록될 만한 그런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혹은 직접 자신의 인생을 자서전으로 쓸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록 이 감정이 확실한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지만, 막연한 질투의 감정을 느낀다.
나는 사실 없는 내 자서전, 삶 없는 내 인생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이것은 내 고백이다. 내가 고백 속에서 아무 것도 털어놓지 않는다면, 그건 털어놓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고백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고, 고백을 해서 유용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란 모든 이에게 일어나거나, 혹은 우리에게만 일어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첫 번째 경우라면 새로울 것이 없고, 두 번째 경우라면 타인들을 납득시킬 수가 없다. 내가 느낌을 글로 쓰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내 느낌의 열기를 낮추기 위해서다. 어차피 아무것도 의미가 없으므로, 내 고백 역시 무의미하다. 나는 내 감각을 재료로 하여 풍경을 만들어 낸다. 내 느낌의 휴가를 떠난다. 나는 걱정거리가 있을 때 수를 놓거나, 단지 살아 있기 때문에 양말을 뜨는 여자들을 이해한다.
삶이란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양말을 뜨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생각은 자유다. 상아 코바늘이 하나하나 코를 완성하는 동안, 마법에 걸린 왕자가 정원을 산책한다.
14
완성되지 않은 작품은 결코 졸작이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아예 시작도 하지 않은 작품은 그 어떤 경우보다 더욱 졸작일 수밖에 없다! 완성된 작품은 최소한 탄생이라도 했다. ~~~노쇠한 내 이웃 여자의 유일한 화분에 심어진 화초처럼, 초라하게나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화초는 이웃여자의 기쁨이다. 그리고 종종 내 기쁨이 되기도 한다. 내가 쓰는 글, 나는 그것이 형편없음을 알아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글을 읽은 한 두 명의 상처 입은 슬픈 영혼은, 한순간이나마 더욱 형편없는 다른 일을 망각하게 될 수도 있다.
권태는 앞으로 도래할 더욱 커다란 권태의 전초적 감정일 뿐이다. 내일 닥쳐올 고민을 오늘 앞당겨서 미리 고민하는 것이다. 그건 혼동의 소동에 불과하다. ....소용도 없고 의미도 없이, 그냥 혼돈일 뿐이다.
19
해변의 모래사장 안, 가까이 자리한 숲과 풀밭 가운데, 헛된 심연의 불확실한 구덩이로부터 불타는 욕망이 변덕스럽게 솟아오른다. 그곳에서 사람은 밀밭과 수많은 사이에서(sic)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 사이프러스 나무들 사이의 간격이 점점 벌어진다.
20
언제나 내 삶은 현실의 조건 때문에 위축되어 있다. 나를 얽매이는 제약을 좀 해결해보려고 하면, 어느새 같은 종류의 새로운 제약이 나를 꽁꽁 결박해버리는 상태다. 마치 나에게 적의를 가진 어떤 유령이 모든 사물을 다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내 목을 조르는 누군가의 손아귀를 목덜미에서 힘겹게 떼어낸다. 그런데 방금 다른 이의 손을 내 목에서 떼어낸 내 손이, 그 해방의 몸짓과 동시에, 내 목에 밧줄을 걸어버린다. 나는 조심스럽게 밧줄을 벗겨낸다. 그리고 내 손으로 내 목을 단단히 움켜쥐고는 나를 교살한다.
21
신들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그들의 노예다.
22
거울 속 모습과 마찬가지로 나의 이미지는 내 영혼과 영원히 결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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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핑크스로 변신한다. 비록 잘못 된 스핑크스이긴 하지만.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누구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잘못된 스핑크스이고, 우리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만 남는다. 이렇게 자신과 조화하는 법을 알 수 없을 때만이, 우리는 삶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부조리는 신적인 것이다.
27
말 속에 하나의 사물을 잡아넣는 행위는 사물에게 힘을 부여하고 대신 공포스러운 성격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들판은 그것이 언어로 묘사될 때 실제보다 더욱 녹색을 띤다. 꽃을 문장으로 표현할 때 그 문장은 상상의 영역에서 꽃을 정의하는 것이며, 이때 꽃의 색채는 원래 식물시포가 결코 이룰 수 없는 항구성이라는 특징으로 저장된다.
움직인다는 것은 산다는 것이다. 말 속에 스며든다는 것은 월등하게 산다는 것이다. 글로 묘사되는 삶이라고 하여 현실성이 희박하지는 않다. 속 좁은 비평가는 이렇게 강조하기를 좋아한다. 송가풍의 시들은 결국 삶은 아름답다는 결론 말고는 말해주는 것이 없다고. 그러나 삶의 아름다움을 말 속에 포착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나날은 항상 거기 있는게 아니라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름다운 나날을 풍요로운 어휘와 찬란한 기억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어느 날엔가 텅 비고 허무한 바깥세상의 공허한 들판과 하늘에 화사한 꽃과 별들을, 아름다운 날에 그랬던 것처럼 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시간의 다층을 넘어 우리 이후에 오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우리가 그토록 열렬하게 상상해오던 그 모습 그대로 기억될 것이다. 즉 우리가 상상력의 구현을 통해서 진정으로 될 수 있었던 그런 존재로 남게 된다는 의미다. 나는 창백한 파노라마가 거대하게 펼쳐지는 역사를 해석의 나열 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이 없는 수많은 증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어떤 함의를 도출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우리 모두는 작가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면, 우리는 그것을 쓴다. 본다는 것은 나머지 모두를 포함할 만큼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결정적인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많은 수의 진짜 형이상학적인 사물들이 저마다 할 말을 갖고 고개를 드는 바람에, 나는 갑작스럽게 엄청난 피곤을 느끼고 이제 글을 그만 중단하기로, 생각을 중단하기로 결심한다. 모든 것이 제 갈 길로 가도록 그냥 놓아두자. 글이, 열병이 잠을 불러온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잠들지 않았다면 내가 계속해서 했을 말들을, 마치 고양이처럼 쓰다듬는다.
29
마지막 빗방울이 여전히 주저하는 몸짓으로 지붕에서 떨어져 내린 후 포장된 도로 한가운데서 새파란 하늘빛이 완연하게 반사되는 순간, 거리를 달리는 차량들의 소음이 갑자기 다르게 들린다.
32
불안한 밤의 심포니
모든 것이 잠들었다. 마치 우주 자체가 실수의 산물인 것처럼, 불확실하게 펄럭이는 바람은 형체 없는 깃발이었다. 깃발은 존재하지 않는 병영 위에 걸려 있었다. 하나의 무無가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찢겨 나갔고, 유리창의 창틀이 요란하게 덜컹거리며 비상사태가 임박했음을 알렸다. 모든 것의 심연에서 신의 무덤인 밤은 침묵했다(그를 향한 동정심이 영혼을 채웠다).
그리고 갑자기, 우주의 새로운 질서가 도시 위에 나타났다. 바람이 바람과 바람의 사이에서 휘파람 소리를 냈고, 인간은 잠에 취한 채 높은 곳으로 파도처럼 몰려가는 상상에 잠겼다. 그러자 밤은 천장의 다락문처럼 아래로 떨어지며 닫혔다. 위대한 안식이 도래하여, 이 모두를 잠으로 뒤덮으려는 욕구를 탄생시켰다.
33
갑자기 시작된 가을의 첫날, 어둠이 유난히 이르게 찾아오고, 늘 하던 일상의 작업을 마치려면 평소보다 더 늦게까지 일해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 즈음이면 나는 사무실에서도 어스름과 그것이 암시하는 무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즐긴다. 어둡기 때문이다. 어둠은 집과 잠, 그리고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넓은 사무실에 불이 밝혀지면서 어둠이 물러가고, 비록 이미 날은 어두워진 다음이나 우리는 하루의 일과를 계속 진행한다. 그러면 나는 이 모두가 마치 타인의 기억 속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만 같다. 그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묘한 행복감을 느낀다. 나는 책을 읽듯이 차분하게 장부를 기입해 나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읽던 책을 덮고 침대로 갈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 때까지.
우리 모두는 외부의 환경에 예속된 노예다. 햇살이 화창한 날은 설사 좁은 카페에 앉아 있을지라도 우리의 눈앞에 너른 들판이 활짝 펼쳐진다. 들판의 그늘 속에서 우리는 내면을 향해 몸을 수그리고, 우리 자신이라는 문 없는 집 안에서 힘겹게 스스로를 지킨다. 저녁이 시작되면 석양은 서서히 펼쳐지는 부채처럼 번져 나가고, 아직은 낮의 사물들 한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이제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싹튼다.
그러나 노동은 사그라드는 법이 없다. 노동은 저절로 더욱 활기를 띤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일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에게 선고된 행위 안에서 모종의 휴식을 발견하는 단계에 이른다. 내가 숫자를 써넣는, 줄이 그어진 커다란 용지 위에 운명이 순서대로 적혀 있다. 내 늙은 숙모님들이 세상과 담을 쌓고 살던 낡은 집이 거기 있다. 숙모님들이 나른한 10시에 마시는 차가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다.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석유램프가 아마포를 덮은 탁자 위에서 타오른다. 램프의 불빛 때문에 음영이 생긴 모레이라의 모습이 어두운 그늘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드넓은 공간을 환하게 비추는 검은 전깃불 아래 선명하게 보이던 모레이라가, 차가 나온다. 숙모님보다 더 늙은 하녀는 잠이 덜 깬 모습으로 차를 가지고 온다.
내가 장부를 덮음과 동시에, 다시는 불러 올 수 없는 과거의 시간도 그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잠에서 완전히 깬 맑은 정신으로 생의 침대에 오르게 된다. 홀로, 아무런 안식도 없이, 운명이 다하는 어두운 밤 한꺼번에 밀려오는 두 개의 조수처럼. 그리움과 아득한 슬픔의 감정이 밀물과 썰물이 되어 내 의식 속에서 뒤섞인다.
34
종종 나는 생각한다. 도라도레스 거리를 영영 떠나지 못할 거라고. 글로 쓰자마자, 이 생각은 마치 영원처럼 느껴진다.
36
1930년 2월 5일
내 셋방의 초라한 벽도, 내가 앉아서 일하는 사무실의 낡아빠진 책상들도, 너무도 자주 지나다녀 익숙해진 나머지 이제는 영원히 불변하는 상징처럼 보이는 도심 거리들의 빈곤도, 그 어떤 것도 일상의 황폐함만큼 빈번하게 정신적 구토를 유발하지 않는다. 내 일상의 주변에 머무는 사람들, 낮 동안의 삶을 함께 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나와 친분을 만든 사람들, 그러나 나를 알지는 못하는 그들로 인해, 나는 종종 정신의 목구멍을 틀어막는 육체의 가래 덩이를 실제로 느낀다. 그들 삶의 앙상함과 단조로운 내 외적인 삶과 나란히 진행된다. 그들은 내 삶도 자신들과 똑같다고 굳건하게 믿으면서, 나에게 강제로 죄수복을 입히고 교도소 독방에 감금하여, 나를 사이비 성자로, 그리고 걸인으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시인의 영혼을 갖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런 영혼의 유무로 시와 정신의 시대를 규정했다. 하지만 또한 내가 피상적 사물에 불과하다는 우울한 인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이 세상 전체가 더러운 진흙과 비의 밤으로 변해버리고, 나는 외딴 시골의 황량한 기차역에 고독하게 앉아 내가 올라탈 삼등열차를 기다리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다.
37
고통의 막간극
구석에 던져진 어떤 것, 길거리에 떨어진 넝마, 내 비루한 존재가 삶 앞에서 자신을 위장한다.
38
1930년 2월 21일
마치 운명이라는 외과의사의 손이 나를 수술하여 낡은 맹목을 벗고 돌연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해준 듯이, 갑자기 나는 내 익명의 생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존재의 환한 인식을 바라본다. 그리고 내 모든 행위와 생각이 예전의 나였던 것이 한낱 미혹이었음을, 헛된 망상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그토록 많은 것을 보지 못했다니 놀라울 뿐이다. 예전에 내가 그토록 수많은 무엇이었음이 놀라우며, 그리고 지금, 마침내 내가 아닌 그 무엇을 보게 되었음이 놀랍다.
나는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나온 순간의 너른 들판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지나간 내 일생을 응시한다. 심사숙고한 행동, 가장 명징한 표상, 가장 논리적인 계획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지금 돌이켜보니 타고난 허황함, 숙명적인 멍청함, 엄청난 무식함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깨달을 때, 나는 가히 형이상학적인 충격을 느낀다. 단 한 번도 나는 연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연기되는 역할 그 자체였다. 나는 배우가 아니었다. 배우의 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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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이 배제된, 고도로 다듬어진 삶을 살기. 이상의 전원에서 책을 읽고 몽상에 잠기며, 그리고 글쓰기를 생각하며, 권태에 근접할 정도로, 그토록 느린 삶. 하지만 정말로 권태로워지지는 않도록 충분히 숙고된 삶. 생각과 감정에서 멀리 벗어난 이런 삶을 살기. 오직 생각으로만 감정을 느끼고, 오직 감정으로만 생각을 하면서, 태양 아래서 황금빛으로 머문다. 꽃으로 둘러싸인 검은 호수처럼, 그늘 속은 독특하고도 고결하니, 삶에서 더 이상의 소망은 없다. 세상의 소용돌이를 떠도는 꽃가루가 된다. 미지의 바람이 불어오면 오후의 대기 속으로 소리 없이 날리고, 고요한 저녁 빛 속 어느 우연한 장소로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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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고 흰 빛을 내는 반딧불이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기 자신을 뒤쫓는다. 시골의 밤은 온통 깜깜하다. 소음이 없는 거대한 빈 공간. 공기에서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난다. 모든 사물에 깃든 평화는 고통스럽고 음울하다. 형체 없는 권태가 나를 질식케 한다.
나는 시골로 여행하는 일이 거의 없다. 시골에서 하루 종일 보낸 적이 한 번도 없다시피 하고 하룻밤을 지내고 온 적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오늘, 한 친구가 자신의 초대를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절대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없이 여기로 와서 그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마치 큰 파티에 초대받은 수줍은 남자처럼, 나는 즐거웠고, 신선한 공기와 너른 자연 풍경을 보며 기쁨을 느꼈다. 점심과 저녁 식사도 훌륭하고 맛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둠 속에서, 불빛이 없는 내 방에서, 이 불확실한 장소는 나를 공포로 채우고 있다.
내가 잠자는 방의 창문은 탁 트인 벌판을 향해 나 있다. 모든 벌판과 마찬가지인 벌판이다. 거대하고 불명확한 별들의 밤. 소리로 들리지는 않지만 피부에 느껴지는 가벼운 바람이 분다. 나는 창가에 앉아 나의 감각을 이용해 저 바깥의 우주적인 무를 바라본다. 시간 속에는 모종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하모니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불가시적인 전체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몸을 기대고 있는, 흰색으로 색칠한 페인트가 떨어져 나간 창틀의 살짝 골이 패인 목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보지는 않고 생각만 할 때, 나는 참으로 자주 이러한 평화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지금,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무례한 짓이 아니기만 하다면, 당장 이 평화로움에서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다! 얼마나 자주 나는 저 아래 그곳, 좁은 골목길과 높은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도시에서 믿어왔던가. 평화와 소박함, 결정적인 그 무엇이 이곳 자연 속에 있다고. 문명의 식탁보 때문에 그 아래 놓인 채색 소나무 목재의 감촉이 잊혀지는 거리고! 그런데 지금, 바로 여기, 건강하고 기분 좋은 나른함을 느낄 수 있는 이곳에서 나는 불안하고 답답하다.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이 그리워 가슴이 터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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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게 흐린 하늘이 태주강 남쪽에 무겁게 가라앉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흰색 갈매기들의 활기찬 활공과 검은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날은 이제 더 이상 비가 쏟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무섭게 위협하던 비구름 덩어리는 모두 강 반대편으로 물러났고, 이미 내린 빗물로 살짝 젖어 있는 도심 거리의 포도가 하늘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북쪽 하늘 먼 곳에서는 창백한 색이 사라지고 대신 푸른색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봄날의 싱그러운 대기에는 가벼운 냉기가 스며있었다.
측정할 수 없는 공허의 시간, 나는 끊임없는 상상의 연상 작용 속으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것은 무의미하기는 하지만, 그 명료한 무의미 속에는 갠 날에 느끼는 고독한 냉기의 일부가 역류된다. 멀리 보이는 검은 하늘, 그리고 떠오르는 어떤 직관, 흰 갈매기들이 이루는 암흑에의 대조가 깊은 심연에서 사물들의 비밀을 불러내오는 암시가 아닐까 하는.~~~
생기 없는 회색빛 하늘은 암울한 기운을 풍긴다. 하늘 여기저기를 조각내고 있는 구름은 하늘 자체보다는 더욱 어둡다. 한 점의 바람도 느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은 분다. 맞은편 강변은 긴 섬처럼 보인다. 그 뒤로 훨씬 더 큰 강이, 인적이 없는 태주 강이 흐른다! 진정한 다른 강변이 멀리 흐릿하게 모습을 보인다.
그쪽으로 가닿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앞으로도 아무도 가닿지 못할 것이다. 설사 내가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여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이 풍경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저 반대편 강변으로는 가 닿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서 나는 헛되이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그리고 최후의 순간, 서서히 밤이 다가오면서, 구름은 하늘의 거대한 덩어리로부터 해체되어 지상을 향해 가라앉는다. 그러자 더할 수 없이 짙은 암흑의 색채가 풍경을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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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일었다.~~~처음에 그것은 어떤 진공의 목소리처럼 울렸다. ~~~ 공간의 구멍을 통과하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고요한 대기 사이에 벌어진 균열의 틈새, 그런데 흐느낌이, 세계의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흐느낌이 있다. 유리창이 부르르 떨린다는 느낌.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바람이었다는 느낌. 소리가 커진다. 둔중한 통곡, 울음, 그러나 점점 더 깊어가는 밤에 비하면 그 울음은 울음이 아니라 사물의 삐걱거림에 불과하다. 가장 미세한 입자들의 파쇄, 세계의 종말을 구성하는 하나의 원자로. 그리고 다시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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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유명해지면 참 좋을텐데 라는 생각을 한다. 남들이 내 비위를 다 맞춰준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승자가 되어 우뚝 설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날아갈 듯한 마음일까! 하지만 동시에 그런 공상의 유혹을 비웃어버리곤 한다. 나는 스타가 되는 꿈속에 잠길 때마다, 이 도시의 거리처럼 익숙하고 가까운 어떤 사람이 나를 향해 던지는 커다란 비웃음 소리를 듣는다. 유명해진 나를 상상해보면, 그 상상 속에서 내가 보는 것은 유명한 회계원이다. 최고 영예의 꼭대기에 올라앉은 나를 그려보면, 어느새 나는 도라도레스 거리의 사무실 안에 있고, 동료들이 내 앞길을 막아선다. 수많은 군중이 나에게 찬사의 함성을 보낸다. 그들의 박수갈채와 환호성이 여기 5층에 있는 내 귀에까지 도달한다. 그 소리는 싸구려 방의 초라한 가구들과 주변의 허름한 사물들, 부엌에서 일할 때나 몽상에 잠길 때 늘 나를 왜소하게 만드는 일상의 진부함을 두르려댄다. 위대한 스페인의 몽상가들과는 달리 나는 한 번도 허공에 거대한 모래성을 쌓지 않았다. 대신 낡아서 테두리가 반질반질해진, 더 이상 짝도 맞지 않아 이제는 카드놀이를 할 수도 없는 그런 카드로 성을 쌓아 올렸다. 그 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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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영향 아래서 꿈을 추구하다 보면 간혹 삶의 일상적 수준을 넘어서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네를 타는 아이처럼 힘껏 위로 들려진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곧 이어서 그네 위 아이와 마찬가지로 다시 시립공원의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내 패배의 현장과 마주하게 된다. 펄럭이는 전쟁의 깃발도 없고, 걸음 한 번 휘두를 만한 기운도 남아 있지 않은 채.
내가 우연히 마주치는 대다수의 인간들 역시, 침묵하는 입술의 움직임, 멍하니 방황하는 눈동자의 불안. 어쩌다가 간혹 알아들을 수 있는 웅얼거림으로 추측건대, 마음속에 깃발 없는 군대와 함께 전쟁을 벌이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들 모두는 -나는 고개를 돌려 이 가엾은 패배자들의 등짝을 주시한다 - 종국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진창과 갈대 사이에 꼬꾸라지면서 엄청난 참패를 겪게 된다. 그들의 강변을 비쳐주는 달빛도 없고, 물웅덩이가 불러주는 노래도 없다. 비참하고 졸렬한 패배일 뿐이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격앙된 심장을 갖고 있다. ~~~~가장 가엾은 인간인 그들은 모두 시인이다. 그들의 눈에 내가 그렇게 보이듯이 내 눈에도 그들은, 우리를 공통의 불행인 자신과의 불화를 힘겹게 끌고 가는 신세로 봉니다. 내 미래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미래도 과거에 묻혀 있다.
흐릿한 유리창을 통해 어느 노인이 맞은편 인도에서 흔들거리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광경이 보인다. 노인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걷지 않는다. 그는 꿈을 꾸듯이 걷는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아마도 그는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으리라. 만약 신들이 그들의 불공정함 속에서나마 공정하다면, 설사 불가능한 꿈이라고 해도 그래도 우리에게 원하는 꿈을 선사할 것이다. 오늘 나는 아직 늙지 않았으므로, 남쪽 섬나라와 불가능한 인도의 풍경을 꿈꿀 수 있다. 하지만 내일이면 신들은 나에게 조그만 담배상점의 주인이 되는 꿈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혹은 연금을 받는 은퇴자로 교외에 집을 가지고 사는 꿈을, 이 모든 꿈은 사실상 같은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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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하다는 것은 부끄러워한다는 것이다. 명예롭다는 것은 거래할 수 없음을 의미하고, 위엄 있다는 것은 살기 위한 술수를 부리지 않음을 의미한다.
나는 내 안에서 단 한 번도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던 몸짓의 우물이다. 단 한 번도 입술을 움직여 생각하지 않았던 말의 우물이다. 내가 끝까지 꾸는 것을 잊어버린 꿈의 우물이다.
나는 폐허 아닌 다른 것으로는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집들의 폐허다. 그 집들을 지어 올리는 도중에 이미 사람들은 완성된 집에서 염증을 느꼈다.
향락한다는 이유로 향락자들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은 그들처럼 즐거워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즐거워하는 자들을 증오한다면...이러한 인공적인 경멸, 이러한 평균치의 증오는 다듬어지지 않은, 대지를 더럽히는 석주에 불과하다. 그 석주 위에 우리들 권태의 조각상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자랑스럽게 서 있다. 그늘진 형상, 얼굴, 미소, 정체불명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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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4월 10일
누구나 다 자신만의 허영심을 갖고 있다. 이 허영심 덕분에 사람은 다른 이들도 자신과 유사한 영혼을 갖고 있음을 잊어버린다. 나의 허영심은 몇 페이지의 글이며, 몇 단락의 글이고, 숨길 수 없는 회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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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 으쓱거리기
대개 우리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상상할 때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이미지를 거기에 대입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죽음을 잠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죽음의 상태가 잠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을 새로운 삶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죽음이 현생의 삶과는 구별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에 대해 작은 오해를 재료로 하여 믿음을 상상하며 희망을 지어 올리고, 마치 가난한 아이들이 공상의 놀이를 하듯이 빵 껍질을 케이크라고 부르며 그것을 먹고 살아간다.
하지만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최소한 인간이 문명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삶의 시스템은 모두 마찬가지다. 문명의 속성은 사물에게 잘못된 명칭을 붙인 다음 그 결과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는 데 있다. 그리고 잘못 붙여진 이름은 진실한 꿈과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사물들은 다른 것이 된다. 우리가 그들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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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쏟아진다. 더 강하게, 점점 더 강하게 비가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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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4월 13일
나는 항상 타인들과의 공감대 형성이 극심하게 부족한데, 그것은 대다수의 타인들이 느낌으로 생각하는 데 반해 나는 생각으로 느낀다는 차이에 기인한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에게 느낌은 산다는 것이고, 생각은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각이 삶이고, 느낌은 생각을 위한 영양분과도 같다.
그나마 내가 가진 극히 부족한 감동의 능력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놀랍게도 대개 나와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지, 나와 유사한 정신세계의 소유자들은 절대 아니다.
문학에서 보자면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고전주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인데 그들과 나는 유사성이 가장 덜하다. 샤토브리앙과 비에이라의 책 중에서 단 하나만을 선택해서 읽어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비에이라를 고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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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엘은 말했다. 풍경은 영혼의 어떤 상태라고. 하지만 이 문장은 겨우 평균치인 몽상가가 운 좋게 떠올린 빈약한 비유를 연상시킨다. 풍경은 풍경으로 있는 한, 영혼의 상태이기를 멈추어버린다. 객관화란 창조하는 것이다. 한 편의 완성된 시를 두고 그것이 시를 완성하려는 생각의 상태라고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아마도 꿈의 한 형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꿈꾸다’ 대신 ‘본다’는 말로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꿈과 보는 것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런 언어심리학적 추측을 벌이는 걸까? 풀은 나와는 상관없이 자라난다. 풀들 위로 비가 내리고, 풀이 자라난, 혹은 자라나고 있는 들판에 황금빛 햇살이 내리쬐기만 하면 말이다. 측정할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산들은 그 자리에 있었다. 호메로스가 살갗에 느꼈던 것과 같은 바람이, 설사 호메로스가 실존인물이 아이었다고 해도, 오늘도 들판 위로 불어온다. 그러므로 영혼의 상태가 하나의 풍경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올바를 것이다. 이 문장은 장점이 있다. 이론의 거짓말을 빌려오지 않고 대신에 은유의 진실을 채택한다는 것이다.
세상 전체를 비추는 태양빛 속에 높다랗게 위치한 상 페드루 드 알칸타라 전망대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에게, 이 우연한 문장이 그대로 내려왔다. 매번 이토록 드넓은 공간을 눈앞에 둘 때마다, 170센티미터의 키와 61킬로그램의 몸무게라는 내 신체 조건을 망각하고 아득히 펼쳐진 공간을 내려다볼 때마다, 내 입가에는 꿈을 꿈이라고 꿈꾸는 모든 인간들을 향한 형이상학적 미소가 깊게 아로새겨진다. 고결한 이성의 힘으로 나는, 절대적 외계라는 진실을 사랑한다.
뒤편 배경으로 자리 잡은 테주 강은 푸른 호수이며, 강 건너편의 산맥은 봉우리가 편평하게 깍인 스위스의 고원이다. 포수 드 비스푸 선착장을 출발한 조그만 배 한 척이 -검은 화물선이다- 내 시야에는 보이지 않는 강 하구 쪽을 향해서 간다. 내 육신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모든 신들이여, 외적 실체를 볼 줄 아는 태양처럼 찬란하고 투명한 시야를 간직하게 해주십시오. 나 자신의 사소함을 아는 직관과 사소한 것으로 존재하면서 행복을 생각할 줄 아는 즐거움을 잊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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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글의 스타일이 두 가지 기본 원칙 위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원칙이란 다음과 같다. 인간이 느끼는 것을 정확히 인간이 느끼는 느낌 그대로 표현한다. 그것이 명확하다면 투명하고 명확하게, 그것이 불명확하다면 불명확하게, 그것이 혼돈에 싸여 있다면 혼돈스럽게, 그리고 문법을 법칙이 아닌 도구로 이해한다.
한번 상상을 해본다. 내 앞에 남성적인 얼굴을 가진 한 소녀가 있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소녀는 사내애처럼 생겼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다른 인간, 하지만 말이 곧 표현이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는 인간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소녀는 사내아이다.” 역시 표현의 의무를 잘 알고 있는데다가 의미심장함과 속박되지 않은 상상력에 좀 더 강력하게 이끌리는 유형이라면, 소녀를 “이 소년dieses junge(문법의 틀을 깨고 남성 명사(소년)에 중성(소녀)관사를 사용함)”이라고 말하겠다. 그리하여 명사와 꾸밈어는 성과 수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가장 기초적인 문법 규칙을 훼손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올바르게 말한 것이다. 사진을 찍듯이, 절대적인 진술을 한 것이다. 진부한 규칙을 넘어, 일상의 규범을 초월하여. 나는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나는 표현한 것이다.
문법이 활용을 구속할 때, 올바른 구분과 잘못된 구분을 가른다. 예를 들어 문법에서 타동사와 자동사가 구분되는 식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표현의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은, 보통 인간짐승들이 그러하듯 자신이 느낀 것을 암흑 속에서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사진처럼 찍어내기 위하여 종종 타동사를 자동사로 활용해야만 한다. “내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 나는 “나는 있다”라고 한다. “나는 유일한 영혼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 나는 “나는 나다”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자기지향과 자기형성의 존재,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의무인 자기창조를 이행하는 실재로서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존재동사를 타동사로 활용해야만 한다! 그러면 나는 승리감에 취하여, 모든 문법 규칙의 위에 올라서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나를 있다.” 나는 세 개의 짧은 어휘로 철학을 펼쳐 보였다. 이것이 마흔 개의 문장을 가지고 아무것도 의미하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을끼? 철학과 표현법에서, 여기서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면 문법을 따르는 편이 낫다. 문법의 모든 규칙들에 통달한 인간이라면 그냥 문법을 사용하게 놓아두라. 로마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연설을 할 때 어떤 자가 황제의 문법 오류를 지적하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로마의 황제다. 당연히 나는 문법보다 높다.” 그날 이후로 역사는 그를 지기스문트 슈퍼 그라마티캄 super grammaticam으로 불렀다. 얼마나 대단한 상징인가! 그러므로 자신이 말하는 바를 말할 줄 아는 자는 누구나, 자신의 방식으로, 로마 황제인 것이다. 그런 칭호가 기분 나쁠 것은 없다. 정신의 존재는 곧 그 자신의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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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한 문학적 성과를 이룬 사람들, 아니면 최소한 내가 알고 있거나 혹은 이름을 아는 이들이 발표한 글이나 완성된 저작물을 보고 있으면, 정체 모를 질투심이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을 느낀다. 경멸 섞인 감탄과 같은, 복합적으로 뒤엉킨 양면적인 감정이다.
86
삶의 모든 것은 퇴화의 과정이 아닌지 질문해 본다.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다가간다는 것, 그것의 앞에, 혹은 그 주변에.
기독교가 변형된 신플라톤주의의 타락한 형상이고 로마시대의 영향 아래 유대화된 헬레니즘이었듯이, 노쇠하여 암을 일으키는 우리의 시대는 호응하면서 그리고 동시에 저항하면서 모든 위대한 의도로부터 유일하게 비켜난 시대다. 의도가 파산한 그 자리에서, 파산을 불러온 그 시대가 자라났다.
오케스트라의 음악과 함께, 우리는 막간의 삶을 산다.
나는 안개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인간의 섬이 되어 바다의 꿈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존재의 과잉을 실은 한 척의 배가 되어, 모든 사물의 표면을 항해할 것이다.
87
1930년 5월 6일
우리는 우주의 불가해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이해하려 든다는 것은 인간보다 열등해지겠다는 생각이다. 인간이라면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종류임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낯선 쟁반에 담긴 소포처럼 신앙을 나에게 배달한다. 나는 그것을 받아야 하지만, 열어서는 안 된다.
88
설사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 나는 기도할 것이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회개하고, 반드시 모성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종류의 애무를 받을 때처럼, 용서를 즐길 것이다.
89
더 높은 경지에 있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행위는 ,무익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이다.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할 훈련에 자신을 내던지고, 이미 무의미함을 알고 있는 철학과 형이상학적 규범을 혹독하게 준수하는 것이다.
91
1930년 5월 15일
도시의 성벽 너머 탁 트인 벌판을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긴 여행을 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자유로워진 기분이 든다. 모든 시점이 규정할 수 없는 바닥면을 가진 피라미드의 거꾸로 선 꼭짓점처럼 펼쳐진다.
100
1930년 6월 13일
도시의 나무 한 그루가 만드는 짧고 검은 그림자, 우중충한 수조로 떨어지는 가벼운 물소리, 잘 손질된 공원의 초록빛 풀밭 위로 내려앉는 은은한 황혼, 너희 모두는 이 순간 나에게 전 우주와도 같다. 너희가 내 의식적 감각을 모두 차지해버리기 때문이다. 감각 이외에 나는 삶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 오후, 공원에서 뛰어노는, 모르는 아이들의 외침소리가 주변 거리의 멜랑콜리에 뒤섞여 들려오고, 높은 나뭇가지들 너머로는 고대 하늘의 둥근 천구, 그 안에서 별들이 다시금 타오른다.
101
우리의 삶이 창가에 영원히 서 있는 것이라면, 가만히 서 있는 연기처럼 영원히 그렇게 있을 수 있다면, 항상 똑같은 황혼을 바라보면서, 언덕의 윤곽선들 위에 고여 있는 고통과도 같이 그렇게 .... 수많은 시간이 다 지날 때까지 그렇게 서 있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우리의 입술이 말로 더렵혀지지 않고도. 불가능의 건너편에 있는 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사위가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라!.... 모든 사물의 긍정적인 안식이 나를 분노로 채운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쓰디쓴 맛이 난다. 내 영혼이 나를 아프게 한다 ..... 먼 곳에서 연기가 서서히 피어올라 공기 중에 흩어진다.;;;; 음울한 권태가 내 생각을 네게서 떼어놓는다......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한가! 우리와 세계, 그리고 둘 모두의 비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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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 혹은 그와 유사한 것)
가치를 지닌 모든 영혼은 삶을 극단까지 몰고 가기를 원한다.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는 겸손한 삶은 노예에게나 어울린다. 더 많이 정복하는 것은 바보에게나 어울린다. 왜냐하면 정복한다는 것은 (....)
삶을 극단으로 몰고 간다는 것은 최대치에 이르도록 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고귀한 영혼을 가진 자라면 그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극단적인 점유를 통해서 극단적으로 살기, 오디세우스와 같은 방랑자가 되어 모든 체험 가능한 감각을 통해서 살기. 그리고 외면화 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에너지를 통하여 살기. 그러나 이 세계의 모든 시대를 통틀어, 모든 피곤을 담은 피곤한 눈동자를 닫을 수 있었던 자. 모든 것을 모든 방식으로 소유했던 자는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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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무엇이고, 무슨 의미가 잇는가? 모든 석양은 다 같은 석양이다. 석양을 보기 위해서 콘스탄티노플까지 길 필요는 없다. 여행이 주는 해방감이라고? 그런 해방감은 리스본에서 교외인 벤피카로만 나가도 느낄 수 있다. 그것도 리스본에서 중국으로 가는 여행자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왜냐하면 해방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디로 가도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칼라일은 말했다. “모든 거리, 심지어 엔테풀의 거리도 당신을 세상의 끝으로 데려다준다.” 하지만 엔테플의 거리를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결국 엔테플로 되돌아오게 된다. 우리가 있는 엔테플이 바로 우리가 찾아 나섰던 그 세상의 끝이기 때문이다.
콩디야크는 그의 유명한 책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아무리 높이 상승해도, 아무리 깊이 하강해도, 우리 자신의 감각을 넘어서 더 멀리 나갈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 우리들 자신의 감각과 상상력을 이용해 스스로를 다르게 하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결코 다른 누군가가 되지 못한다.
진실한 풍경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풍경의 창조자일 경우에만 우리는 풍경의 진짜 모습을, 그것이 창조된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여덟 번째 구역을 여행한다. 그것이 내 세계다. 세계의 모든 대양을 다 다녀본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은 단조로운 자기 자신을 돌아다닌 것에 불과하다. 나는 이미 모든 대양을 넘어선 곳으로 항해를 다녔다. 나는 이미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산맥들보다 더 많은 산을 보았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도시들보다 더 많은 도시를 여행했고, 비현실의 커다란 강들이 사색에 잠긴 내 시선 아래서 도도하게 흘러갔다. 내가 여행을 한다면, 여행을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내가 보았던 이 모두의 창백한 복제품만을 보게 될 것이다. 다른 이들은 자신이 여행하는 나라에서 이름 없는 이방인이다. 나는 내가 여행한 나라에서 익명의 여행자라는 비밀스러운 즐거움뿐 아니라, 그 나라를 지배하는 왕과 같은 명예까지도 누렸다. 나는 그곳의 백성이었고, 규범이자 풍습이었고, 모든 나라들의 모든 역사이기도 했다. 풍경, 집들, 모두를 나는 보았다. 내가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상상력을 재료로 하여 신 안에서 창조된 그 모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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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풍경
하나하나의 빗방울은 잃어버린 내 삶을 대신하여 자연이 흘리는 눈물이다. 어떨 때는 방울방울 떨어지다가 하루의 슬픔으로 무작정 대지를 뒤덮으려는 물줄기처럼 한꺼번에 쏟아지기를 반복하는 이 빗속에는, 내 불안의 어떤 요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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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2월 1일
며칠 동안 줄곧 비가 내린 후, 하늘은 그동안 저 높고 광대한 은신처에 숨겨두었던 푸른빛을 다시 꺼내 보인다. 시골길처럼 곳곳에 웅덩이들이 누워 있는 거리와 깨끗하고 화창한 대기는 더러운 길거리를 기분 좋게 만들고 겨울의 진부한 하늘을 이른 봄빛으로 채우는 대립의 기운이 가득하다. 일요일이다. 나는 할 일이 없다. 심지어는 꿈조차 나를 유혹하지 못한다. 그 정도로 이 하루가 아름답다. 나는 이날을 마음껏 즐긴다. 그러기 위해서 내 이성을 감각에 모두 바친다. 나는 해방된 수금원처럼 산책에 나선다. 나는 젊어지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내가 늙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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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2월 2일
인간은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많이 포기하게 된다. 정상에는 그 한 사람을 위한 자리밖에 없다. 그가 완벽하면 할수록 그는 더더욱 자기 자신이다. 그가 자기 자신일수록, 그만큼 덜 다른 사람일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신문에서 어떤 유명한 남자의 위대하고 파란만장한 생애에 대한 기사를 읽은 다음이다. 미국의 백만장자인 그는 거의 모든 인물로 살아보았다. 그는 획득하려고 시도한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었다. 돈, 연애, 호의, 헌신, 여행, 수집, 돈은 만능이 아니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인 개성적인 매력은, 실재로 거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 신문을 커피하우스의 테이블에 내려놓을 때, 내가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그 대리상이 오늘도 구석자리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문득, 저 사람 역시 자신의 궤적 내에서는 신문에 나온 백만장자와 똑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만장자가 갖고 있는 것은 그도 모두 갖고 있다. 물론 더 적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처지에서는 충분히 걸맞은 분량으로. 그들 두 남자는 모두 동일한 것, 즉 성공을 이루었다. 지명도에서조차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도 누군가 좀 특별한 점이 있으면 다 알아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 백만장자의 이름을 안다. 하지만 리스본 상업계에서도 지금 점심을 먹고 있는 저 남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 두 남자는 자기 자리에서 팔을 뻗어서 움켜쥘 수 있는 모든 것을 획득해사. 단지 두 사람의 팔 길이가 차이가 날 뿐이다. 그것만 제외하면 그들은 모든 점에서 동일하다. 이런 유형의 인간을 질투하는 일에 나는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그 어떤 세력권 내에도 없는 것을 얻으려 했고, 그 누구도 살지 않는 곳에서 살고자 했으며,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음 이후에 더욱 삶을 즐기자는 생각을 유지해왔다. 한마디로 말해 불가능한 것, 불합리한 것을 이루고 싶어 하며 세계의 현실을 장애물처럼 뛰어넘어버리고자 한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삶이 끝난 이후 쾌락의 지속은 아무 의미 없는 공허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가장 먼저 이렇게 대답하겠다. 나는 그것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남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대답하겠다. 미래의 명성에 기뻐하는 것이 곧 현재의 기쁨이다. 명성은 그 자체로 미래적인 것 아닌가. 더군다나 그것은 자랑스러운 기쁨이다. 사후의 명성은 아무런 물질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몽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설사 그럴지라도 그 기쁨이 현재 주어진 것을 즐기는 기쁨보다 훨씬 더 큰 것도 사실이다. 시를 한 편도 쓰지 않은 미국의 백만장자는 후세가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아예 할 수가 없다. 리스본의 대리상은 후세가 그의 그림에 감동을 받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그림을 한 점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과도적 삶에서는 무명의 인물인 나는, 이 페이지를 읽으면서 미래를 미리 즐길 수 있다. 나는 실제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 때문에 자랑스러워하듯이, 나는 미래의 명성 때문에 자랑스러워한다. 나는 최소한 명성을 기대해볼 수 있는 그 어떤 무엇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탁자에서 일어선다. 내면의 위엄에 가득차서, 보이지 않는 내 위대함으로 디트로이트와 미시간 그리고 리스본의 전 상업 지구를 뒤덮으며 우뚝 선다.
그러나 내가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처음에 나는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극히 작은 존재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은 결국 마찬가지다. 둘 다 결국 같은 결론에 이른다. 명성은 훈장이 아니라 동전이다. 한 면에는 인물이, 다른 면에는 액수가 적혀 있다. 액수가 높은 동전은 없다. 지폐뿐이다. 그러나 지폐의 액수도 결코 크지는 않다.
이런 형이상학적 심리 분석으로 나와 같은 평범한 정신들은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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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3월 10일
나는 쓴다. 아이의 죽음 때문에 넋이 나간 어머니처럼, 나는 나를 흔들어 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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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는 많은 경우 길거리의 인간보다 더욱 실제적이다. 책 속에 숨어 있는 삽화들은 많은 경우 평범한 남자와 여자들보다 더욱 가시적으로 살아간다. 문학의 문장들은 많은 경우 인간과 같은 개성을 자체에 갖추고 있다. 나는 내 글을 읽으면서도 종종 놀라움에 얼어붙곤 한다. 문장들은 그 정도로 선명하게 살아 있는 존재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밤이면 내 방의 벽에 뚜렷한 그림자를 형성한다.
많은 인간들이 자신이 회화 속 인물이 되지 못함을, 카드 그림 속 형상이 되지 못함을 꽤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의 시간을 살면서 중세의 인물이 되지 못함을 무슨 저주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예전에는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 문제를 넘어설 만큼 성숙했다. 하지만 아직도 나를 괴롭히는 것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가진 서로 다른 우주에 속한 서로 다른 두 왕국의 두 명의 왕이 되어 그들 각자의 꿈을 동시에 꿀 수 없음이다. 이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나에게는 고통이며 굶주림의 맛이다.
불가해한 것을 꿈꾸고 그것을 명확히 언어화하는 것은, 그 분야에 능통한 나조차 흔하게 겪지 못하는 위대한 승리 중의 하나다. 그렇다. 예를 들어서 나는 동시에, 각각 별개이며 뒤섞이지 않는 방식으로, 어느 강변에서 산책하고 있는 남자이자 동시에 그와 동행하는 여자가 되는 것을 꿈꾼다. 동시에 똑같은 선명함으로, 똑같은 방식으로, 따로따로 개별적으로 있는 나를 보기 원한다. 두 존재에 똑같이 감정이 임할 수 있기를 원한다. 남쪽 바다를 항해하는 의식을 지닌 배이자 동시에 어느 책의 한 페이지가 되기를 원한다. 얼마나 부조리할 것인가!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 그 꿈은 차라리 가장 덜 부조리한 종류에 속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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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바람에 마치 과거에 읽은 책의 한 부분이나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체험과 다를 바 없는 청년 시절. 나는 사랑으로 인해 두 번의 비통한 굴욕을 즐겼다.
우리 영혼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주적 질서의 파괴다. 그것이 무너지면 태양과 별들이 궤도를 잃고 우리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감정을 느끼는 모든 영혼에게 언젠가는 그러한 묵시록의 재앙이 엄청난 위력의 공포와 함께 닥칠 것이다. 그때 하늘과 전 우주가 절망에 빠진 그들을 짓밟는다. 자기 스스로는 우월하다고 느끼지만 운명으로부터는 하찮은 존재보다 더욱 하찮게 취급당하는 것, 이러한 상황에서 그 어떤 인간이 인간임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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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삶에서 불쾌감을 느낄 때, 바보짓을 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거나, 자신의 소임을 망각해버렸을 때, 그럴 때 우리는 단순히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그런 불행한 사건은 우리의 영혼에 본질적으로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삶의 괴로움을 마치 치통이나 티눈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들이 설사 우리 몸에 달라붙어 있을지라도 외부적인 존재이며, 우리의 유기체적 성격에만, 즉 우리의 육신에만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는 신비주의와도 상통하는 이런 사고방식을 확립하게 되면 우리는 세계 앞에서 안전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안전해진다. 우리 안의 피상적이고, 낯설고, 상반되는 것들, 따라서 우리 안의 적들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라티우스는 말했다. 의로운 이는 주변 세계 전체가 무너져 내릴지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기이한 그림이지만, 그것이 의미 하는바는 옳다. 주변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면 함께 공생하는 우리 존재의 명분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은 무너져 내리는 외부 사물에 영향을 받지 않음을 의미한다. 설사 그들이 우리의 존재 이유 바로 위로 쏟아져 내릴지라도 말이다.
최고의 인간에게 삶은 대결을 거부하는 꿈이다.
163
직접적인 경험은 상상력이 없는 인간들을 위한 은신처 혹은 탈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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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물의 단조로움이 나를 지독히 음울하게 만들어, 마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듯 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단조로움은 사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단조로움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가 어제 본 얼굴이라 해도 오늘 그것은 다르게 보인다. 오늘은 어제와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날들이 모두 다르며, 지금껏 이 세상에는 똑같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모든 것이 일관되게 유사해지는 동일함이란, 비록 그렇게 느껴질 뿐인 허위의 동일함이라 해도, 오직 우리의 영혼 안에서만 가능하다. 세계는 다양한 사물과 다양한 윤곽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근시안이라면 세계의 불투명한 안개는 영원히 걷히지 않는다.
나는 달아나고 싶다. 내가 아는 것으로부터, 내 것으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달아나고 싶다. 나는 홀연히 떠나고 싶다. 불가능한 인도나 모든 것이 기다리는 남쪽의 섬나라가 아니라, 어딘가 알려지지 않은 곳, 작은 마을이나 외딴 장소, 지금 여기와는 아주 다른 곳으로, 나는 이곳의 얼굴들을, 이곳의 일상과 나날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낯선 이방인이 되어 내 피와 살 속애 뒤섞인 위선에서 벗어나 쉬고 싶다. 휴식이 아니라 생명으로서 잠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싶다. 바닷가의 작은 오두막, 아니 험난한 산비탈 벼랑의 동굴이라 할지라도 내 이런 소망을 채우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의지는 그렇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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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6월 30일
마지막 비구름이 남쪽 하늘로 물러가자, 구름을 쓸어간 바람만이 남았다. 변치 않는 화창한 햇살이 도시의 언덕으로 되돌아왔고, 색색의 건물 창가에는 흰 시트들이 내걸리면서 팽팽한 리넨 천이 바람에 힘차게 펄럭거린다.
184
1931년 8월 22일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시기, 날은 덥고 대기는 무거우며 사물의 색채가 흐릿해진다. 늦은 오후는 금세 눈에 띄는 거짓의 광체를 차려입는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무에서 튀어나온 그리움이 뱃길의 물살처럼 구불거리며 자신을 무한 복제하는 음흉한 몽상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 오후, 나는 바닷물처럼 급격하게 밀려오는 감정을 느낀다. 권태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그것을 지칭할 만한 이름은 없다. 어디쯤인지 위치를 짐작하기 힘든 절망의 감정, 영혼 전체가 난파하는 듯 한 감정이다. 자비로운 신이 나를 떠난 것 같고, 모든 실체가 주어버린 것만 같다. 감지할 수 있는 우주의 사물은 내가 사랑했던 것의 시체가 된다. 마지막 색체를 완전히 잃지 않은 구름은 아직은 따스한 빛을 지니고 있는데,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무가 되어 사라진다.
186
신들은 정녕. 오 내 슬픔이여. 운명에 어떤 의미가 있기를 원했던가! 그게 아니라면 운명 자신이 신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를 원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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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주된 비극은, 모든 다른 비극과 마찬가지로, 운명의 아이러니에 있다. 나는 마치 저주처럼 실제의 삶을 거부한다. 나는 마치 조야한 해방인 것처럼 꿈을 거부한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사는 방식은 실제 삶 중에서도 가장 속되고 가장 진부하다. 그리고 내가 꿈으로 사는 방식은 가장 강렬하고 가장 굳건하다. 나는 낮잠을 자면서 술에 취하는 노예와 같다. 하나의 몸에 깃든 이중의 비참함이여.
그래. 나는 똑똑히 인식할 수 있다. 이성의 섬광이 삶의 암흑으로부터 비상한다. 그러면 나는 삶을 규정하는 가까운 사물들의 정체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내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도라도레스 거리의 비열함, 뒤처짐, 태만함 그리고 거짓된 모습을. 직원들의 뼛속까지 초라함이 스며드는 이 사무실, 한 명의 죽은 인간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월셋방. 내가 주인을 알 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다 알고 있는 모퉁이의 식료품 가게, 오래된 선술집 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젊은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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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대기는 베일에 싸인 노란빛이다. 탁한 흰색을 투과해서 보이는 흐릿한 노란색이다. 사실 대기의 회색빛 속에는 노랑의 흔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회색빛의 창백함이 풍기는 슬픔 속에는, 약간의 노랑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190
익숙하게 정해진 시간이 어떤 계기로 늘어나게 되면, 정신은 냉정한 새로움을, 살짝 불쾌한 즐거움을 선사받은 기분이다. 6시에 사무실을 나오는 일에 늘 익숙한 자는, 어쩌다가 5시에 퇴근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정신적인 휴일을 맞은 듯하고, 그 여분의 시간 동안 자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아프기까지 하다.
어제 나는 4시에 사무실을 나왔다. 좀 떨어진 교외에서 처리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5시에 교외의 볼일을 마쳤다. 나는 그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마치 모르는 도시에 와 잇는 느낌이었다. 내가 잘 알고 잇는 건물 파사드 위로 느릿하게 움직이는 빛이 신경을 거스르면서 부드럽게 반짝이고, 낯설게 변한 도시의 행인들이, 어젯밤 함선에서 상륙한 수병들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시각, 아직도 사무실은 일이 한창일 때였다. 나는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동료들은 벌써 작별인사까지 마치고 떠난 내가 돌아오자 당연히 깜짝 놀라며 바라보았다. 왜 다시 돌아온 거지? 그냥 돌아왔어. 그곳에서, 나에게는 정신적인 존재가 아닌 그들 사이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느낌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사무실은 내 집이기도 했다. 집이란 인간이 별다른 느낌을 갖지 않는 장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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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나는 서글픈 유쾌함으로 생각해본다. 언젠가 더 이상 내가 살아 있지 않을 미래에, 내 글이 칭송받고 길이 읽히게 될 날을. 드디어 나를 이해 해주는 사람들이 생기니. 그들은 진실 된 의미의 내 사람들, 나를 있게 하고 사랑해주는 가족이란 울타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너무도 멀고, 이미 한참 전에 나는 죽은 몸일 것이다. 망자의 살아생전 운명이었던 거부감을 호감이 상쇄시키지 못한다면, 나는 단지 모사품으로만 이해될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 어떤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내가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자연으로부터 번역의 의무를 부여받았고, 그에 따라 우리 세기의 일부분을 번역해온 것이라고. 그러면 그들은, 내가 일생 동안 이해받지 못한 자였으며 불행하게도 거부와 냉담의 한가운데서 살았고,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그렇게 기록할 것이다. 그런데 미래의 어느 날 나를 이해하여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미래의 시대에 나와 같은 작가가 있다면 지금 동시대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작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오직 죽어 버린 조상에게서만 어떤 유용한 장점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올바른 방법을 오직 망자들에게만 전달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오후이고, 막 비가 그쳤다. 대기에는 명랑한 기운이 움트고, 피부에 와 닿는 감촉이 너무도 신선하다. 하루가 끝나간다. 회색이 아닌 창백한 푸른빛을 향해. 길바닥조차 희미한 푸른색으로 물든다. 사는 것은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은 멀리에 있다. 당장 몸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이곳저곳 진열장에 불이 밝혀진다.
하루여. 흔들리지 않는 네 종말을 향해서 걱정 말고 가라. 이제 믿는 사람들 그리고 방황하는 사람들 모두 나머지 일을 마무리 짓고, 고통과 함께 무의식의 행복을 느낄 것이다. 걱정 말고 네 종말을 향해서 가라. 꺼져가는 빛들의 파도여. 이 쓸모없는 오후의 멜랑콜리여. 내 마음을 뒤덮는 베일 없는 안개여. 걱정 말고 네 종말을 향해서 가라. 부드럽게, 이 수채화 같은 오후 불분명하게 흩어진 옅은 푸른색 창백함이여. 가볍게 가라앉아라. 부드럽고 슬픈 몸짓으로 편평하고 차가운 땅위로 내리 거라. 걱정 말고 네 종말을 향해서 가라. 보이지 않는 회색으로, 울음에 젖어, 지루하게, 과잉이면서 경직이 아닌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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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동안이나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펄펄 끓던 폭염은 중간 중간 번개가 번득이는 쾌적하지 못한 휴식기로 바뀌었다. 그러다 뇌우가 완전히 물러가고 나자 사물의 표면은 일제히 밝은 광채를 띠면서 가볍게 반짝거렸고, 온화하고도 신선한 느낌이 반가움을 불러일으켰다. 삶을 앓는 영혼도 이런 순간에는 종종 설명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안도를 느낄 때가 있다.
우리는 뇌우가 번득이는 기후대라고, 나는 상상해 본다. 뇌우는 우리의 머리 위에서 위협하지만, 번개는 다른 곳으로 떨어진다.
사물의 텅 빈 무한함. 하늘과 땅의 거대한 망각...
193
1931년 9월 2일
어떤 악령이 내 운명을 장악했기에 오직 가질 수 없는 것만을 갈망하는 괴로움을 주었단 말인가.
201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안개가 내렸다. 줄지어선 집들의 윤곽, 버려진 공간들, 저마다 높이가 다른 도로와 건물이 태양빛에 의해 점점 금색을 띠는 가벼운 안개의 외투로 감싸였다.. 그렇지만 정오가 가까워올수록 안개는 점점 희미해지면서 측량할 수 없이 엷은 그림자의 베일이 되어 물러가버렸다. 오전 10시가 되자 주저하듯 연한 하늘의 푸르스름한 빛만이 한때 안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할 뿐이었다.
은폐의 가면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도시의 얼굴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이미 시작된 하루가 활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서듯 한꺼번에 밝아왔다.
도시의 깨어남은, 안개의 유무와 무관하게, 시골 들판 위로 널리 퍼지는 아침의 붉은 노을보다 더욱 내 마음을 움직인다.
202
1931년 9월 14일
여름의 마지막 며칠 동안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더니, 어느새 늦은 오후가 되면 완연히 부드러운 색조가 먼 하늘에 퍼지면서 거의 감지하기 어려운 차가운 공기를 실은 가을의 전령이 느껴지곤 했다. 아직 나뭇잎들은 초록을 완전히 벗어버리지는 않았고 낙엽이 되어 떨어지지도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외부의 죽음을 통해 우리 자신의 죽음을 예감할 때 어쩔 수 없이 엄습하는 그 막연한 공포감도 아직은 도달하지 않았다. 실제로 힘든 일을 하고 난 다음 느끼는 나른한 피곤, 혹은 우리의 마지막 몸짓에 침전되어 잇는 가벼운 졸음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아, 우수에 잠긴 냉담한 저녁들. 가을은 사물들 안에서 채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가을은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모든 것의 소멸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여름은 한 번 응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다음 우리는 여름을 잊는다. 아직 가을이 온 것은 아니다. 아직은 누렇게 변한 낙엽이 허공에 날리지도 않고, 곧 겨울이 도래하리라는 축축한 슬픔이 대기에 넘실대지도 않는다. 그러나 분명 그 안에는 선행하는 슬픔의 기색이 섞여 있다. 그것은 여행을 떠나기 위해 옷을 차려입은 우수와도 같다. 와해되는 사물의 색채와 변화한 바람의 느낌으로 우리의 집중력은 산란되고, 밤이면 피할 수 없는 우주의 관계 위로 더 오래된 고요가 내려와 덮인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사라질 것이다.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감정과 장갑을 착용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 죽음과 지방정치를 논하는 존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햇빛이 성인의 얼굴과 행인들의 각반을 똑같이 비춘다. 그 햇빛이 사라지면 무엇이 성인의 얼굴이었고 무엇이 행인의 각반이었는지 전부 암흑 속에 묻히고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되리라. 아득한 바람 속에 이 세계 전체가 마른 나뭇잎이 되어 소용돌이치며 흩날린다. 손으로 기운 옷가지처럼 수많은 왕국이 있구나.
204
1931년 9월 15일
구름... 구름은 서쪽 강 하구에서 요새가 있는 동쪽으로. 산산이 찢어진 혼돈의 형태로 흘러간다. 산산이 찢어져서 뭔지 알 수 없는 것의 선발대를 형성하는 구름들은 흰색으로 보이지만, 소리가 요란한 바람에 의해 뒤늦게 흩어지는 느린 구름들은 거의 검은빛이다.
205
1931년 9월 16일
죽어가는 보랏빛 속에서 하루가 흐르며 저물어간다.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으리라. 내가 누구였는지 아는 사람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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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갖추었건 그렇지 못하건 우리 모두는 형이상학적 존재이며,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 모두는 도덕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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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건 나를 작게 만드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나를 크게 만드는 행위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내 자의식만이 나에게는 실제다. 이 자의식 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불확실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런 타인들에게 현실적인 실제를 부여한다는 것은 질병에 가깝다.
216
저물어가는 태양이 산산이 와해된 구름 위로 빛을 흩뿌린다. 흩어진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다. 온갖 색채가 혼재하는 부드러운 반사광이 대기의 모든 층을 다양한 색으로 채우고, 우수 어린 드넓은 하늘을 무심하게 떠다닌다. 절반쯤 색조가 있고 절반쯤 그늘진 높다란 지붕 꼭대기에는, 서서히 허물어지는 마지막 햇살이 지붕의 색도 햇살 자체의 색도 아닌 오묘한 색으로 빛나고 있다. 도시의 소음계 위로 거대한 침묵이 자리 잡는다. 도시도 이제 점차 고요해질 것이다. 색채와 소음 너머 저편에서, 모든 것이 깊은 침묵 속에 심호흡을 한다.
태양의 눈길 바깥쪽에 선 집들의 평범한 색깔이 회잿빛으로 물든다. 이들의 다양한 회잿빛 속에는 싸늘함이 스며있다. 계곡처럼 보이는 거리의 으슥한 곳에서 가벼운 불안이 졸고 있다. 졸면서 쉬고 있다. 높이 뜬 구름의 낮은 층 속에서 역광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단지 다른 구름들 위로 흰 독수리처럼 둥실 떠다니는 작은 구름들만이 먼 햇빛을 받아 황금빛 미소를 지을 뿐이다.
224
.... 이것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환상의 에피소드다.
이틀 전부터 쉬지 않고 비가 내린다. 차가운 회색의 하늘에서. 영혼을 우울하게 만드는 색체의 비가 쏟아진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 옆집의 뜰에는 알록달록한 깃털의 말하는 앵무새가 살았다. 비가 오는 날에도 앵무새는 뭔가를 줄곧 떠들어댔다. 분명 어딘가 안전한 처마 밑에서, 어떤 감정을 담은 까옥거림을 완강하게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발명되기 이전의 축음기 소리처럼 구슬픈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금 내가 슬프기 때문에, 아득한 어린 시절의 앵무새를 기억에서 불러내왔는가? 아니다. 실제로 지금 내 방 맞은편 집 뜰 어디에선가 앵무새가 삐딱하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나는 어린 시절의 앵무새를 생각한 것이다.
236
아무것에도 굴복하지 않기, 어떤 인간에게도, 어떤 사람에게도, 어떤 이념에게도, 항상 거리를 두고 독립을 유지한다. 설사 존재한다고 해도 진리를 믿지 않으며, 진리의 유용함도 믿지 않는다. 내 생각에 이것이야말로, 생각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을 위한 정신적이고 내적인 삶의 올바른 상태다. 어딘가에 속한다는 것은 진부함을 의미한다.
237
타인을 지배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타인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의미다. 우두머리는 종속된 자다.
240
밤새도록, 조금도 쉬지 않고 비가 요란하게 쏟아졌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불면의 밤 내내 차가운 비의 단조로움이 유리창을 두들겨 댔다. 한 줄기 강한 돌풍이 허공 높은 곳을 날카롭게 채찍질하면, 빗물은 파도 모양으로 부르르 떨면서 유리창 표면에 날렵한 손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이어서 둔중한 메아리가 들리며 바깥세계는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 속에 가라앉았다. 내 영혼은 항상 동일하게, 사람들 사이에 잇을 때나 이불과 침대 사이에 있을 때나 상관없이, 늘 세상을 고통스럽게 의식한다. 날은 밝을 줄을 모른다. 행복이 올 줄을 모르는 것처럼 이 시각, 태양은 영영 떠오를 것 같지가 않다.
242
괴물의 카탈로그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불면의 밤 지친 영혼에게 엄습하는 그것들의 사진을 말로 찍으면 된다. 잠을 잔다는 알리바이가 없는 꿈처럼, 그것들은 일관성이 없다. 그것들은 박쥐처럼 영혼의 수동성 위로 둥둥 떠다니거나, 흡혈귀처럼 굴종의 피를 빨아먹는다.
그것들은 산비탈 쓰레기에서 자라는 애벌레이고, 계곡을 가득 채운 그늘이며, 운명이 남겨놓은 흔적이다. ~~~~어떨 때는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 무(無)의 주변을 음침하게 빙빙 돌기도 하고, 어떨 때는 뱀이 되어 잃어버린 감정의 부조리한 은신처에서 재빨리 기어 나온다.
오직 공간을 채우기 위한 기만의 허상들, 그것들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를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영혼에 뿌려진 심연의 의심, 거기에 동반하는 축 늘어진 차가운 주름이다. 그것들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발자국처럼 흩어진다. 그것들은 우리의 의식을 구성하는 척박한 질료의 산물일 뿐이다. 종종 그것들은 내면의 불꽃놀이와 같다. 잠시 동안 꿈과 꿈 사이에서 불꽃을 일으킨다. 나머지는 모두 그것들을 인식하는 우리의 무의식적 의식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영혼은 풀린 매듭처럼 자신 안에서 존재하지 못한다. 위대한 자연 풍경은 내일에 속하고, 우리는 이미 주어진 삶을 살았다. 대화는 중단 되면서 좌초하고 말았다. 삶이 이런 것이라고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244
자리에 앉자! 이곳에서는 더 많은 하늘을 볼 수 있다. 별들로 가득한 드높은 창공의 무한함은 위로를 준다.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삶의 고통은 덜해진다. 살 고운 부채가 삶에 들뜬 우리의 뜨거운 얼굴에 한숨처럼 부드러운 바람을 보내준다.
278
대개의 사람들은 즉흥적으로 꾸며낸, 낯설고 가상인 삶을 산다. 대개의 사람들은 타인들이다, 하고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는데 그건 정말로 적절한 표현이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찾아 헤매면서 생을 탕진한다. 어떤 이들은 비록 원하기는 하나 자신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을 찾아 헤맨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행복하며, 특별한 이유도 없이 삶을 즐긴다. 보편적으로 인간은 잘 울지 않는다. 인간이 뭔가에 불만을 가지면, 그것은 문학이 된다.
279
1931년 12월 16일
한번이라도 우리에게 속했던 것들은, 비록 그것이 순전한 우연에 의해 우리의 일상이나 우리의 시선에 들어왔던 것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우리의 것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우리의 일부로 남는다.
사무실의 배달원이 떠났다.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난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영역에서 중단되는 것들은 우리 안에서 그대로 중단되어 버린다. 한때 있었던 모든 것들, 그리하여 우리가 존재를 목격한 것들은, 사라짐과 함께 우리의 내부에 거두어진다. 사무실의 배달원이 떠났다.
더욱 둔해지고, 몇 년이나 더 늙고, 더욱 흉해진 채로, 나는 높다란 작업대 앞으로 가 앉는다. 그리고 어제 하던 장부 정리를 계속한다. 하지만 오늘 일어난 불분명한 비극이 자꾸만 내 생각 속으로 파고들어 온다. 나는 기계적으로, 하지만 실수하지 않고 숫자를 적어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나를 통제해야 한다.
그렇다. 내일이나 아니면 그 어느 미래의 날, 죽음과 떠남의 종소리가 소리 없이 울려 퍼질 때, 나 또한 더 이상 이곳에, 이 자리에 없는 그 누군가가 될 것이다.
280
오 밤이여, 별들이 거짓의 빛을 반짝인다. 우주처럼 광대한 유일한 존재여. 내 몸과 영혼을 네 육신의 일부로 만들어 달라. 그리하여 내가 나를 잊고, 오직 어둠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밤이 될 수 있도록, 별처럼 내 안에 박혀 있는 꿈 없이. 미래에서 비치는 태양빛에 대한 희망도 없이.
282
아침이 밝아오는 하늘, 빛을 잃은 마지막별이 아무것도 아닌 무로 변해버리고, 낮게 흐르는 구름 위로 아주 희미한 오렌지 빛이 섞인 노란빛이 나타날 때 미풍은 신선함을 잃었다.
284
삶을 건드리지 말자. 손가락 끝으로라도 건드리지 말자!
단지 사랑하지 말자. 생각 만으로라도 사랑하지 말자!
303
1932년 1월 17일
세계는 느끼지 않는 자들에게 속한다. 실용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기본전제는 감수성의 부족이다. 실용적 삶을 위한 최고의 전제조건은 행동을 위한 추진력이고. 그것이 바로 의지다. 그러나 행동을 방해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감수성과 분석적 사고인데, 분석적 사고는 곧 감수성으로 사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행동은 본질상 외부세계에 자신의 개성을 투시하는 일이다. 그런데 외부세계는 인간 본성을 주성분으로 이루어지므로 , 그 결과 개성의 투사는 다른 인간들을 가로막는 행위이며, 우리가 취하는 행위의 유형에 따라 다른 인간을 방해하거나 상처 입히거나 혹은 억누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에는, 타인의 개성과 고통, 기쁨을 상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공감을 느끼는 인간은 앞으로 진행하지 못한다. 반면에 행위의 인간은 외부세계를 오직 비활성물질의 조합이라고만 생각한다. 그가 훌쩍 뛰어넘어버리거나 옆으로 치워버릴 수 있는 돌처럼 그 자체로 비활성인 사물, 혹은 인간이라고 해도 그에게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다면 결국에는 돌이나 다를 바가 없으므로, 그런 인간은 마찬가지로 훌쩍 뛰어넘어버리거나 옆으로 치워버릴 수가 있다.
실용적인 인간의 가장 좋은 예는 전략가다. 그런 인간은 최고의 행위 집중력과 최대의 효과가 합쳐진 결과물이다. ~~~전략가는 체스 선수가 체스말로 게임을 벌이듯이 인간의 삶으로 게임을 벌인다. 만약 전략가가, 자신이 말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수천의 가족들에게 밤이 다가오고, 그 세 배나 되는 마음에는 고통이 들어찬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정녕 인간적이라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인간이 진실로 느낄 수 있게 된다면 그땐 문명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예술은 행동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망각된 감수성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 예술은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집에 있을 수밖에 없는 신테렐라다.
모든 행위의 인간은 본성적 활기차며 낙천적이다. 원래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행복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늘 기분이 명랑하면, 그는 행위의 인간이다. 기분이 울적한데도 일을 열심히 하면 그는 행위의 하수인이다. 그는 삶의 거대한 보편성 안에 안주하며 회계원으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마치 내가 나만의 특별한 보편성 안에서 그러듯이. 그런 사람은 인간과 사물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 지배의 속성은 무감정이다. 그러므로 유쾌한 자가 지배한다.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바스케스 사장은 오늘 사업상 계약 하나를 체결했고, 그 결과 한 명의 병든 남자와 남자의 가족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그 일을 하는 동안 바스케스는 자신의 앞에 잇는 것이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오직 상업적인 적수일 뿐이었다. 절차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바스케스는 감수성을 되찾았다. 만약 계약 도중에 감수성이 그를 엄습했더라면 그 계약은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었으리라. “저 사람 참 안됐어.” 하고 사장은 나에게 말했다. “이제 얼마 버티지도 못할 텐데.” 그런 다음 사장은 담배를 입에 물고 덧붙였다. “어쨌든 저 사람이 나중에라도 뭔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이것은 적선을 의미한다.- “내가 그 덕분에 좋은 거래를 할 수 있었고 몇 만 이스쿠드(유로화 도입 이전의 포르투갈 화폐)나 이득을 보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지.”
바스케스 사장은 결코 나쁜 인간이 아니다. 그는 행위의 인간인 것이다. 이런 게임에서 항상 나쁜 패를 뽑는 자는, 정말로 나중에 그의 적선을 기대해볼 수가 있다. 사장은 마음이 아주 너그럽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의 인간들은 바스케스 사장과 같다. 산업과 상업의 소유주들, 정치가, 군인, 종교계와 사회의 이상주의자들, 이름난 시인과 예술가들,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려 드는 아름다운 여인과 아이들.
느끼지 않는 자들이 명령을 내린다.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만 생각하는 자들이 승리한다. 나머지 모든 불특정한 보통의 일반 인간들, 볼품없고, 감정적이고, 상상력으로 충만하고, 허약한 이들은 단지 마리오네트 연극이 끝날 때까지 배우들의 연기를 돋보이게 해주는 무대 뒤편의 커튼에 불과하다. 체스 말들이 서 있기 위한 정사각형의 페스 판에 불과하다. 인중인격이라는 쾌락으로 자기 자신과 즐겁게 게임을 벌이는 위대한 체스 선수가 마침내 상대를 물리치고 말들을 가져가버릴 때까지.
306
나는 기독교신앙에 대한 불신을 상속받았으며, 모든 종류의 신앙에 맞서는 불신을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세대에 속한다.
317
1932년 1월 26일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고 아무리 질문을 해도 해답을 발견 할 수 없는 일은, 타인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내 것이 아닌 영혼이 어떤 방식으로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내 것이 아닌 의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다. 나에게 의식이란, 오직 한 가지만이 존재 가능한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내 앞에 서서, 내가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듯한 언어로 나에게 말을 하고, 나처럼, 마치 내가 하는 듯한 그런 몸짓을 취하는 사람이 어떤 의미로는 나와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내 상상 속 인물, 혹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일 수도 있고, 연극 공연에서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과 내가 말을 나누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추측하건대 그 누구도 타인에게 진정한 실제를 부여하지 못한다. 타인이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감정과 생각을 가진 인간이라고 인정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인정에는 나와 다른 질료적이며 이름 없는 그 무엇이라는 차별적 전제가 들어 있다. 그에 비하면 과거에서 온 형상들, 책에서 읽은 정신적 이미지는 우리가 실제로 상점 탁자 너머로 대화를 나누거나 우연히 전차에서 눈이 마주친 구체화된 무관심보다, 혹은 거리를 지나가다가 아무 의미 없이 옷깃을 스친 죽은 우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타인들은 나에게 무대를 꾸미는 장치 이상의 의미가 없으며, 그 대부분은 잘 아는 거리의 보이지 않는 배경을 이룬다.
어제 담배 가게 점원이 자살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거짓말처럼 들렸다. 가엾은 인간, 그런 그도 한때는 존재했었던 것이다! 그를 알고 있었던 우리 모두는, 그를 전혀 몰랐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존재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이면 그를 더욱 쉽게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도 영혼을 갖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열정? 공포? 분명 갖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내 기억에 남아 잇는 것은, 알록달록한 무늬가 들어가고 어깨가 비뚤어진 지저분한 재킷 위로 보이던 그의 어벙한 미소뿐이다. 그것이 너무도 강렬한 감정을 가졌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누군가로부터 내가 받았던 인상의 전부다. 그 외의 다른 이유 때문에 자살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젠가 그에게서 담배를 살 때 그가 곧 대머리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럴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이것이 그에 대한 내 기억이다.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석양의 가혹하고도 쓸쓸한 색조는 오직 나만을 위해서 무거운 날개를 접을 채 저기 머물러 잇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강물의 흐름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저 커다란 강은 저물어가는 태양빛 아래서 오직 나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강물의 수위가 높아진다. 오늘 담배 가게 점원이 땅에 묻혔던가? 오늘의 석양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생각을 했으므로 이제 석양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더 이상 나를 위한 것도 아니다.
318
... 한밤에 서로 스쳐 지나가는 배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지도 않으며 서로 모르는 사이로 남는다.
319
....나는 어느 추운 하루처럼 맑고 슬펐다....
선명한 윤곽의 사물들은 위안을 준다. 햇살이 가득 스며든 투명한 사물들은 위안을 준다. 푸른 하늘 아래를 지나가는 생명을 보고 있노라면 많은 상처를 잊을 수 있다. 나는 끝없이 잊는다. 나는 기억한 것보다 더 많이 잊는다. 내 투명한 공기의 심장은 사물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고 사물의 응시가 나를 부드럽게 만족시킨다. 영혼도 육체도 없는 단순한 응시, 나는 단 한 번도 그 이상은 아니었다. 오직 스쳐 지나가면서 응시하는 한 줌의 공기였을 뿐이다.
내 생의 강물은 마음속 바다에서 끝이 난다. 꿈속의 농장을 둘러싼 나무들이 가을을 입었다. 원처럼 둥그런 이 풍경은 내 영혼의 가시관이다. 삶의 행복한 순간들은 꿈이었으며, 슬픔의 꿈이었고, 그 안의 호수에서 나는 눈먼 나르시스처럼 나 자신을 목격했고 차가운 물의 감촉에 기뻐했다. 나르시스의 추상적 감성은 밤의 환영의 속삭임을 들었고, 비밀스러운 환상 속에서 무한히 칭송된 자신의 그림자에 기뻐했다.
320
끝없고 불분명한 슬픔의 가벼운 흔적과 함께 이른 가을이 시작되었다. 하늘의 푸른빛은 어느 순간 밝은 색이다가 어느 순간은 초록으로 변하는데, 두 색채 모두 공기의 성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 가지 농담의 흐릿한 보랏빛 구름이 피워 올리는 망각과 같았다. 그러다가 구름이 평화로운 고독을 뒤덮으면, 고요는 지루함으로 바뀌었다.
진짜 가을은 대기 중의 싸늘하지- 않음 속에 스민 싸늘함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직 색이 바래지 않은 색채의 색바램과 함께 시작되었다. 풍경의 색조로부터 물러나 그늘지는 것들과 함께, 사물에 드리우는 먼 시선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무것도 죽지 않았다. 모든 것이, 아직은 부재하는 미소를 띠고, 그리움에 가득 차서 삶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완연한 가을이 왔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아직은 완전히 마르지 않은 나뭇잎이 마른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대지는 안개에 젖은 늪처럼 규정할 수 없는 색채와 형태로 어른거렸다. 마지막 미소마저 무거운 눈꺼풀과 냉정한 몸짓에 실려 희미해졌다. 그리하여 느낌을 가진 것, 느낌을 가졌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자신과의 작별을 마음에 품었다. 다른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관통하며, 마당에 돌풍이 불어 닥쳤다. 누구나 이 순간 삶을 진실하게 느끼기 위하여 건강을 회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득할 것이다.
첫 번째 겨울비가 내렸다. 가을의 한가운데서. 비는 희미하게 남아 있는 색채들을 말끔히 씻어 내버렸다. 거센 바람이 울부짖는다. 바람은 땅에 단단하게 서 있는 모든 것을 뒤흔들고 매달린 것들을 요동치게 한다. 움직이는 것들을 휩쓸고 지나간다. 바람은 제멋대로 퍼붓는 빗속으로, 익명으로 항거하는 말 아닌 말을, 영혼 없는 절망이 내지르는 슬프고도 거의 광포한 비명을 토했다.
이윽고 춥고 음울한 가을이 끝났다. 그 이후에 도래한 것은 겨울 같은 가을이며 모든 사물의 먼지가 남긴 더러움이다. 하지만 겨울의 추위는 뭔가 좋은 소식도 품고 있다. 모진 여름이 지나갔고, 이제 봄이 올 것이다. 가을이 겨울에게 자리를 내주었으므로. 높은 하늘의 흐릿한 색조는 더 이상 뜨거운 열기나 슬픔을 상기시키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것은 영원한 명상의 밤에 어울렸다.
내가 이것을 생각하기도 전에 이 모두가 나에게 그대로 다가왔다. 오늘 나는 이것을 기억했으므로, 글로 쓰고 있다. 내가 사는 이 가을은 내가 잃어버린 가을이다.
322
황혼의 거리를 지나가는 수레와 같이 시간은 내 생각의 그늘을 통과하여 삐걱거리며 되돌아온다.
376
미열로 인한 경미한 몽롱함.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지를 파고드는 멍하고 냉랭한 통증. 맥박 뛰는 관자놀이 아래 뜨거운 눈동자의 불쾌함. 나는 마치 노예가 되어 폭군에게 종속되듯이 이 불쾌한 상태에 종속되어 있다. 그것은 나에게 파열된. 떨리는 수동성을 부여하며, 일시적인 환각이 내 생각의 주변을 맴돈다. 나는 과격하게 분출하는 느낌들 속에서 길을 잃고 만다.
사고와 감정, 욕구가 하나로 복잡하게 얽힌다. 확신, 감각, 꿈과 실체의 사물들이 헤어 나올 수 없는 혼돈으로 한꺼번에 치닫는다. 마치 서랍을 뒤집었을 때 바닥에 쏟아지는 무수한 내용물들처럼.
378
1932년 7월 25일
나는 상상의 금빛 석양으로 나를 물들인다. 내가 상상한 것은 상상 속에서 살아 있다. 나는 상상의 산들바람을 맞으며 행복해한다. 상상은 누군가 그것을 상상할 때 살아 있게 된다. 여러 가지 다양한 가설에 의하면 나는 영혼을 갖는다. 그러나 정확히는 그 가설들 각자가 영혼을 갖고 있으며, 그들이 나에게 영혼을 선사하는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 현실의 문제다. 그것은 살아 있으며, 해결이 불가능하다. 한 그루의 나무와 하나의 꿈의 차이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알겠는가? 나무는 만질 수 있다. 나는 내가 꿈을 꾼다는 것을 안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인적 없는 사무실에 홀로 있는 다해도 나는 정신이 이상해지는 법 없이 오직 공상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391
1932년 12월 13일
춥고 음울한 겨울날 오후. 비가 내리고 있다. 마치 세상이 창조되던 첫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내리는 비처럼, 비가 내린다. 마치 비 때문인 듯 내 감정은 앞으로 수그리며 기울어진다. 감정의 협소한 시선은 도시의 바닥을, 빗물이 흐르는 거리를, 아무것에도 양분을 주지 않고 아무것도 씻어내지 않고 아무것도 기쁘게 하지 않는 대지를 내려다본다. 비가 내린다. 갑자기 나는 무한한 음울에 잠긴 한 마리 동물인 것만 같다.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동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꿈꾸기 위해 존재의 공간이라는 동굴로 기어들어가, 그 안의 미약한 온기를 마치 불변의 진리인듯이 만족해하며 즐기고 있다.
418
나의 베겟머리 책은 피게이레두 신부의 <수사학>이다. 나는 이미 천 번은 읽은 이 책을 매일 밤 천한 번째로 펼쳐든다.
426
1933년 4월 5일
우리의 가장 큰 공포조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이 우주적 삶에서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을 마주하고도 그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공포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이것을 실행할 수 있는 자라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우리가 실제로 고통 중에 있을 때 인간의 고통은 무한의 영역에 가닿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인간도 무한의 삶을 살지 못하므로 인간의 그 무엇도 무한할 수 없고, 우리의 고통 또한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의 것은 되지 못한다.
광기와 종이 한 장 차이인 권태, 혹은 그보다 극심한 불안에 시달린 나머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발광해버리기 직전, 얼마나 자주 나는 멈칫거렸나. 나를 신으로 추앙해버리는 단계 바로 직전까지 갔다가 망설이며 멈추어 서기가 몇 번이었던가. 세상의 비밀을 깨닫지 못한 고통. 사랑 받지 못한 고통. 부당한 대우를 받는 고통. 삶에 질식당한 고통. 꽁꽁 결박당한 채 억압받는 고통. 치통을 수반하는 고통. 꽉 죄는 신발의 고통. 이 모든 고통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누가 말할 수 잇는가? 그 자신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가장 고통스럽다고, 다수의 인간들에게도 역시 그러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아 그렇다. 삶이 고통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리고 삶을 생각하는 것 역시 고통이 아니다. 진실은 이렇다. 우리가 고통을 진짜 괴로운 것으로 생각할 때만 고통은 진짜 괴로운 것이 된다. 그저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어느날 고통은 우리를 찾아왔던 것처럼 그렇게 슬쩍 우리를 떠나버릴 것이다.
441
잠 없는 잠의 상태에서는 지성을 전혀 발휘하지 않고도 지성적으로 즐길 수가 있다. 이럴 때 나는, 무작위적 인상들을 합산한 형태가 될 내 책의 몇 페이지를 훌훌 넘겨본다. 그러면 페이지들은, 내게는 익숙한 냄새와도 같은 황량하고 무미건조한 기운을 발산한다. 비록 나 스스로는 매번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실제로는 항상 똑같은 말을 하고 있음을 느끼고, 내가 나 자신과 닮아 있음을, 스스로에게 인정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닮아 있음을 느낀다. 그리하여 계산을 끝마칠 즈음에 다다르면, 이익을 창출했다는 기쁨도 손해를 보았다는 충격도 경험하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이라는 잔액의 부재이며 자연적 균형의 결여다. 이것이 나를 취약하게 만들고 나를 깊은 우울에 잠기게 한다.
내가 쓴 모든 글은 전부 다 잿빛이다. 사람들은 말하리라. 내 인생, 심지어 내 정신적인 삶까지도 온통 우중충하고 어둑어둑하며, 그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오직 비만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고. 내 삶은 전부가 무의미한 특권, 잊힌 목적 같기만 했다고. 누더기가 된 비단 옷을 걸친 나는 고뇌한다. 빛 속에서도 권태 속에서도 나는 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최소한 내가 누구인지라도 말해보려고 마치 신경기계처럼 초정밀의 주관적 의식을 갖고 내 삶의 극미세한 인상까지도 기록으로 남기려 비루한 노력을 기울인다. 엎질러진 양동이처럼 쏟아져 나온 이 모든 내용물이 물처럼 바닥에 홍수를 이룬다. 나는 허위의 색으로 나를 창조하며, 그 결과 다락방을 제국이라고 부르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내가 참으로 오래 전에 심혈을 기울여 쓴 사색의 산물들은 오늘날 다른 영혼으로 다시 읽어 보면, 본능적으로 혹은 정해진 대로만 작동하는 단순한 사고를 기록해 놓은 듯하다. 시골 농장의 물펌프 처럼 기계적이다. 파도도 없는 잔잔한 바다에서 나는 좌초했다. 심지어 서 있어도 될 만큼 깊지도 않은 바다에서.
그리하여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물들 사이 일련의 복잡한 간극 속에서 아직 남아 있는 한 줌의 의식에게 질문한다. 무엇을 위해 나는 이 수많은 페이지들을 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한 문장들로, 내가 생각이라고 여긴 느낌들로 가득 채우고 군대의 깃발과 휘장으로 펄럭이게 만들었는가. 결국은 뒷골목 거지의 어린 딸이 침으로 붙여놓는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게 될 것들을.
파괴된 나의 잔해에게 묻는다. 폐기되고 산산이 흩어질 미래를 앞에 둔, 누군가 갈기갈기 찢어버리기도 전에 이미 어딘가로 실종되어 버릴 운명인 이 가망 없는 페이지들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나는 질문을 기록하고, 질문에 새로운 문장을 입히며, 새로운 감성을 벗겨낸다. 내일 나는 내 한심스런 책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것이다. 확신도 없는 내 일상의 느낌을 차가운 펜으로 종이게 옮길 것이다.
그냥 이대로, 계속되라고 하자. 도미노게임이 한 판 끝나면 이겼든 졌든 판을 뒤집는다. 끝난 게임은 흑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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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9월 18일
흔히들 권태를 게으름의 병이라 한다. 아니면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걸리는 것쯤으로 안다. 그런데 이 영혼의 앓이에는 사실 좀 묘한 구석이 있다. 걸려들 만한 사람들만을 엄습하며, 대체로 게으름을 실천하는 사람들보다는 근면하거나 혹은 그런 시늉을 하는 사람들(이 경우에 한해서 두 그룹 사이에 특별한 차이는 없다)이 감염을 면하기 어렵다.
내면은 자연스러운 인도들Indias과 그 밖의 미지의 나라를 소유하며 그 풍경이 발산하는 자연스러운 광채로 언제나 눈부시고, 외부의 일상적 삶은 추하고 -비록 실제의 더러움은 아니라 할지라도 - 더럽다. 이 둘 사이의 대비만큼 삶을 흉측하게 만드는 요소는 없다. 게으름을 용인해줄 만한 명분이 없다면 권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에게 닥친 권태는 가장 끔찍하다.
권태는 할 일이 없어서 병적인 분노가 치솟는 것과는 또 다른 상황이다. 그보다 훨씬 더 질환적인 상태, 뭔가를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으리라는 감정이다. 이것은 곧, 할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권태도 따라서 지독해진다는 의미다.
장부 정리에 열중해 있다가 고개를 들 때마다, 세계가 송두리째 내 머릿속에서 빠져나가버린 일이 얼마나 자주였던가! 나는 차라리 수동적으로 살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이 적어도 그런 감정은, 설사 그것이 진짜 권태라 할지라도. 내가 최소한 즐길 수 있는 그 무엇이니까. 나에게 달라붙은 현재진행형인 이 권태는 그 어떤 휴식도, 그 어떤 고결함도, 그 어떤 아늑함도 없으며 모든 것이 오직 불쾌할 뿐이다. 이것은 내가 행한 일의 광범위한 말살이지. 내가 결코 하지 않을 일에서 유래한 그런 상상할 수 있는 피로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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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르 하이암
하이얌의 권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인간의 권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인간은 사실 아무것도 핼할 줄을 모르거나, 혹은 행함 자체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권태는 아예 죽은 채로 태어난 사람, 그래서 모르핀이나 코카인에 손을 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람에게나 해당된다. 이 페르시아 현자의 구너태는 후러씬 더 심오하고 고결하다. 명철한 사고와 응시를 통해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잇음을 간과한 사람의 권태, 모든 종교와 철학에 대한 사색을 마친 후에 솔로몬처럼 “모든 것이 정신의 허영과 유혹이었노라...”라고 말하는 사람의 구너태다. 혹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같은 지배자는 권력과 세상을 향해 이런 고별사를 남겼다. “나는 모든 것이었다. 그 무엇도 수고할 가치가 없었노라.”
알드리치 학장이 그랬듯이.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는,
술을 마셔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고.
건배의 말 때문에, 친구 때문에, 혹은
메마른 입 때문에, 그 밖에는 이런 이유와
저런 이유 때문에
.
하이얌의 실용철학은 쾌감을 추구하는 욕망이 희미하게 비쳐 보이는, 기본적으로 수위를 낮춰주는 쾌락주의다. 장미를 바라보고 술을 한 잔 마시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벼운 산들바람, 목적도 의도도 없는 대화, 와인 한 잔, 화사한 꽃들, 오직 그것들만이 페르시아 현자가 가진 욕망의 최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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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와 철학에 담겨 잇는 진실 혹은 거짖에. 우리가 과학이라 부르는 증명 가능한 모든 쓸모없는 가설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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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르 하이얌
오마르에게는 개성이 있었다. 반면에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개성이 없다. 한번은 이런 성격이었다가. 다음번에는 또 다른 성격으로 바뀐다. 내일이면 나는 오늘의 나를 잊는다. 오마르와 같은 사람은 오마르 자신이며, 하나의 유일한 세계, 외부의 세계를 산다. 그와는 종류가 다른 나와 같은 사람은, 외부의 세계를 살 뿐이다. 다층적이고 변화무쌍한 내면의 세계도 함께 살아간다. 나 같은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봤자 절대로 오마르와 같은 철학을 구축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거절당한 영혼처럼, 내가 비판하는 바로 그런 철학을 내 안에 지니고 다닌다. 오마르라면 그것들을 단번에 집어던지겠지. 모두 다 그에게는 외적인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극서들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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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고통이 잇는데 그것이 너무나 미묘하고 흐릿하여 우리는 그 고통이 몸에 속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 영ㅎ노에 t고하는 것인지, 또는 사람의 덧없음 때문에 느끼는 불안인지 아니면 위장이나 간 또는 뇌 같은 우리 몸 속 신체기관의 심연에서 솟아나는 불쾌한 기분 탓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불안하게 침체되어 있던 마음속 앙금이 한 번씩 휘저어질 때마다 나의 정상적인 인식은 너무나도 탁하게 변해버린다! 존재해야 한다는 모호한 메스꺼움이 치밀 때마다 지독하게 괴롭지만, 그것이 단순한 권태인지 아니면 정말로 구토가 시작된다고 신체가 경고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너무도 자주...
오늘 내 영혼의 슬픔은 뼛속까지 아프게 파고든다. 내 자아 전체가, 내 기억. 내 눈과 팔이 모두 아픔을 느낀다. 나의 온 존재가 류머티즘에 시달리는 것 같다. 환하고 투명한 한낮, 커다랗고 순수하고 푸른 하늘에도, 홍수처럼 쏟아진 채 가만히 머물러 있는 희미한 빛의 폭포에도 내 존재는 아무런 감동을 받지 않는다. 가을의 기운이 담겨 있지만 여름의 기억을 지워버리지는 않은 가볍고도 신선한 미풍 덕에 공기는 개성을 부여받았지만 내 마음은 밝아지지 않는다. 그 무엇도 의미가 없다. 나는 슬프다.
나는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여러 유형의 인간이 되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란다. 알지 못하는 나라의 깃발 아래서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죽기를 바랐다. 단지 오늘이 아니라는 이유로 훨씬 더 나아 보이는 어떤 다른 시대에, 제국의 황제로 선포되고 싶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화려한 시대. 한 번도 보지 못한 진기한 스핑크스의 시대에, 나 자신인 자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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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존재 자체가 이미 여행이다. 나는 매일같이 내 몸이라는 운명의 기차를 타고 이 역에서 저 역으로 향한다. 혹은 거리와 광장에서 사람들의 얼굴에서 얼굴로 여행한다.
내가 상상하는 것을, 나는 눈앞에서 본다. 여행을 떠나면 그것과 무슨 차이가 생긴단 말인가? 상상력이 끔찍하게 빈곤한 경우에나 실제로 뭔가를 느끼기 위해 장소의 이동이 필요한 법이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풍경이 바로 세상의 풍경이다. 그래서 나는 상상으로 풍경을 만들어낸다. 내가 만들어낸 풍경은 그 자리에 있게 된다. 풍경이 있으면,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풍경을 보고 감상한다. 그러니 여행이 왜 필요한가? 마드리드, 베를린, 페르시아, 중국, 혹은 북극이나 남극, 그런 장소들이 내가 실제로 느끼는 내 마음속이 아니라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삶은 우리가 창조하는 인상이다. 여행자는 곧 여행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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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 한 명의 진정한 여행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그는 내가 예전에 근무했던 회사의 사환아이였다. 그 소년은 도시별, 국가별, 운송회사별 판촉용 브로슈어를 모았으며 신문에서 찢어내고 여기저기서 얻은 온갖 지도도 갖고 있었다. 풍경을 담은 일러스트, 이국적인 의상이나 판화, 증기선 등의 배 사진을 잡지에서 오려냈다. 그는 여행사를 찾아가서는 상상으로 만들어냈거나 아니면 실제하는 회사 이름을 대면서, 심부름으로 왔다고 이탈리아와 인도 관광책자, 포르투갈과 오스트레일리아 간 선박시간표 등을 요구했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정통적으로 여행하는 자이므로 가장 위대한 여행자일 뿐만 아니라, 내가 만나볼 수 있었던 가장 행복한 인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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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카페하우스의 테라스에서 나는 가물거리는 인생을 바라본다. 이 아래 광장에 한꺼번에 엉켜 있는 삶의 폭넓은 다양성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내 삶의 모습만은 분명히 볼 수 있다. 취기가 막 오르는 것처럼 약간 몽롱해질 때, 사물의 영혼이 베일을 벗는다. 행인들의 발걸음 소리와 통제된 과격함의 몸짓들. 삶이 내 외부에서 그렇듯 가시적이며 일관된 모습으로 지나가고 있다. 바로 이 순간 내 감각은 마비되고 사물이 다르게 보인다. 내 느낌은 잘못되었다. 혼돈이면서도 명료하다. 나는 상상의 콘도르처럼 나른하게 날개를 펼친다.
불길이 꺼져버린 재를 휘젓는 것처럼, 모든 것이 헛되다. 동트기 직전의 희뿌연 공기처럼, 모든 것이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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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2월 23일
바보같이 굴거나 어쩔 줄을 모르거나 혹은 뭔가를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생을 살면서 그런 불운한 경우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내면의 낙천적인 빛을 발휘하여 그것이 불행이 아니라 일종의 여행병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 세계의 여행자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우리는 무와 무 사이를 혹은 전체와 전체 사이를 여행하고 있다. 우리는 어차피 길 위에 있는 것이니 도중에 만나게 되는 이런저런 불편, 혹은 고르지 않은 길바닥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나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생각 자체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저 나 자신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한들 마음이 편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너무 따지지 않는다.
위로를 주는 요소는 정말로 많다! 맑고 청명하며, 언제 봐도 구름 한두 점이 흘러가고 있는 저 멀리 푸른 하늘, 숲 속에서는 단단한 나뭇가지를 흔들고 도시에서는 5, 6층에 널린 빨래들을 펄럭이게 하는 가벼운 바람. 날이 따뜻하면 따뜻함이, 날이 선선해지면 선선함이 우리를 위로한다. 항상 어딘가의 창가에 서 있는 그리움의 기억이, 희망의 기억이, 신비한 미소의 기억이, 그리고 우리 존재의 문 앞에서 걸인처럼, 그리스도처럼 문을 두드리는 것들이 우리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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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3월 31일
얼마나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는지! 지난 며칠 동안 불명확한 체념의 수세기를 보낸 것만 같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풍경 한가운데 버려진 호수처럼 깊이 침체되어 있었다.
매일매일 항상 같은 시간이 결코 동일하지 않게 이어졌고, 그 가운데서 다채로운 단조로움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은 삶이 다. 그러므로 나는 삶을 즐겼던 것이다. 그동안 내가 잠들어 있었다 한들 삶은 조금도 다르게 흘러가지 않았으리라. 나는 버려진 풍경 한가운데 존재하지 않는 호수처럼 깊이 침체되어 있었다.
자신을 아는 여느 사람들처럼 나는 종종 나 자신을 모른다. ...나는 가면 뒤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을 똑똑히 본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변하지 않는 것, 어떤 행위가 있다 해도 모든 것이, 다른 말로 하면 무가 내게 남는다.
나의 내면 저 멀리에서, 마치 아득한 여행을 떠난 듯 한 느낌이 솟구친다. 시골의 호젓한 그 집이 자아내는 단조로움, 오늘날 내가 느끼는 단조로움과는 너무나도 다른 종류인 단조로움이.... 그곳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 시절이 지금보다 더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는, 설사 말하고 싶다 해도 말할 수가 없다. 그곳에서 살던 당시의 나는 지금과는 다른 나였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비교할 수 없는 별개의 삶이다. 그 둘을 외적으로 연결해주는 동일한 단조로움은, 내적으로는 분명 서로 다르게 작용하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두 가지의 단조로움이 아니라, 두 개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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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나는 시골에 있고 싶다. 나는 원래 도시생활을 좋아하지만, 시골에 있다하면 도시생활이 두 배로 즐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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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을 나는 단 한 번도 갖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죽지 않았다. 부처는 나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의 가장 고귀한 꿈에서조차 아폴론과 아테나가 나타나서 내 영혼을 깨우쳐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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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이 책의 책장을 넘겨본 이라면 지금쯤 틀림없이 나를 몽상가로 결론지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나는 몽상가로 살기 위한 돈이 없다.
위대한 멜랑콜리와 슬픔과 권태는 쾌적하고 호사스러운 환경에서나 가능하다. E.A. 포의 이게이어스가 몇 시간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병적인 관조와 사색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대저택의 커다란 홀 문 뒤편에서 보이지 않는 집사가 집안일과 식사 준비를 하며 생활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위대한 꿈은 특별한 사회적 상황을 필요로 한다. 어느 날 나는 내가 슨 글의 가슴 아픈 운율에 취한 나머지 문득 샤토브리앙을 떠올리게 되었지만, 내가 자작은 고사하고 브르타뉴 사람조차 아님을 기억해 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또 다른 경우에는 위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루소와 유사성이 있다는 느낌이 든 적이 있었지만, 내가 귀족도 대저택의 중니도 아닐뿐더러 스위스인도 아니고 방랑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작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도라도레스 거리에도 역시 하나의 세계가 있다. 신은 이곳에도 삶의 신비를 내려주었다. 비록 내 꿈이란 것이 짐수레와 궤짝으로 이루어진 보잘것없는 풍경이고 바퀴와 판자조각들에서 추출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내가 가진 전부이며 가질 수 있는 전부이기도 하다.
틀림없이 어디에선가는 저녁노을이 지속적으로 실제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 도시의 5층에서도 무한을 응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1층의 창고와 공존하는 무한, 하지만 창공의 별들 역시 존재하지 않는가...
하루가 저무는 이 순간 창가에 서 있는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저 위쪽, 내가 속하지 않은 시민계층의 불만족과, 내가 결코 되지 못할 시인의 슬픔을 느낀다.
465
1934년 6월 9일
여름이 도래하면 나는 슬퍼진다. 원래는 한여름의 작렬하는 태양이 환하게 비치면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위안을 얻는 것이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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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 얼굴을 볼 수 있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더 불길한 일은 없다. 인간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고, 자신의 눈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건 자연이 내린 선물이다.
오직 강물이나 연못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인간이 취해야 하는 자세는 상징적이다. 자신을 보는 굴욕을 행하기 위해, 인간은 허리를 굽히고 몸을 숙여야 한다.
거울을 만든 사람은 인간의 영혼에 독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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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가 시를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잘 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가 내게 말했다. 마치 절대의 자연법칙을 설명하듯이. “지금과 똑같이만 한마면, 단 얼굴 표정은 좀 다르게 해서, 그러면 엄청나게 인기 있을 텐데.” “얼굴”이란 단어가, 그것이 품고 있는 원래의 의미 이상으로, 내 무지의 목덜미를 확 사로잡아버렸다. 내 방에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불쌍하지 않은 걸인의 불쌍한 얼굴이 있었다. 거울을 한 바퀴 돌리자, 열반에 든 우편배달부처럼 내 눈앞에 도라도레스 거리의 전경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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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6월 19일
우리가 지속적으로 추상 속에서 살아갈 때, 관념적 생각이건 상상해낸 감각이건 할 것 없이 모두 현실의 일들은 곧 허상의 신기루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원하지도 않고 그렇게 느끼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심지어는 우리의 심정적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고 따라서 유난히 강렬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누군가와 아무리 가깝고 신실한 친구 사이라 해도, 그 사람이 병들었거나 죽었다는 소식은 내 안에서 막연하고 그저 그런, 희미한 인상밖에는 남기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에 부끄러워하게 된다. 오직 직접 목격한 장면만이, 실제적인 접촉만이 내 감정을 움직일 수 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상상 속을 살아갈 때, 상상력은 언젠가 고갈되어버린다. 특히 실제와 관련된 상상력은 더욱 그렇다.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을 마음에 품고 사는 자는, 마침내는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해낼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오늘 나는 한참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으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동안 늘 마음속으로는 그리워하고 있었던 오랜 친구가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앞두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내 안에서 또렷하고 명백하게 일어난 감정은, 싫든 좋든 그의 병문안을 가야만 한다는 짜증스러움이었다. 그 대안으로는, 병문안을 가지 않고 죄책감을 선택하는 것이 있다. 그게 전부이고 다른 길은 없다. ....나는 항상 그림자와 교류를 하며 살다 보니 나 스스로가 그림자가 되고 말았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의 그림자. 내가 한 번도 되어보지 못한 보통의 평범한 인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내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느낌의 전부였다. 수술을 받게 된 친구를 위해서 정말로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친구뿐 아니라 수술을 앞두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육체와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내가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아플 수 있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매 순간 무엇인지 모를 힘에 떠밀려 항시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된다. 마치 몽롱한 환각에 빠진 것처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 한 번도 되어보지 못한 r서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찰싹거리는 연못의 물소리와 같은 존재하지 않는 농장의 소리에 뒤섞여버린다..... 나는 느끼려고 애를 쓰지만, 어떻게 하면 느낄 수 있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의 그림자가 되어버렸고, 나는 내 존재를 그림자에게 내어주었다. 독일의 페터 슐레밀 이야기(아델베르트 존 샤미소,<페터 슐레밀의 놀라운 이야기>)와는 달리, 나는 나의 그림자가 아닌 나의 실체를 악마에게 팔아넘겼다. 나는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나는 살아 있는가 아니면 깨어 있는가? 한낮의 열기 속에서 시우너스레 불어오는 가벼운 미풍에 나는 모든 질문을 잊는다. 눈까플이 나른하게 감겨온다. ....내가 그곳에 없으며 있고 싶지도 않은 광야 위로 태양이 비친다. ....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적막한 침묵이 피어오른다. .... 얼마나 감미로운가! 그러나 내가 그것을 느낄 수만 있다면, 얼마나 더 감미로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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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를 위해 썼을 뿐인 이 일기를 사람들은 몹시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부자연스러움이 바로 나의 자연스러움이다. 정신의 세계를 세밀하게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 외에 내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 일을 하기 위해 그리 큰 정성을 기울일 필요도 없다. 특별한 순서로 글을 배치하는 것도 아니고, 스타일을 특별하게 가다듬은 것도 아니다. 이 글의 언어는 지극히 당연하게도 평소의 내가 생각할 때 구사하는 그런 언어다 나는 외부세계가 곧 내적 실제인 인간에 속한다. 나는 이것을 형이상학적인 사변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그런 감각으로 인지한다. 어제의 경박함은 오늘 내 인생을 갉아먹는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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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 젖은 내 눈앞으로 침묵에 잠긴 도시가 희미하게 펼쳐진다. 제각기 다른 건물들은 고요한 덩어리를 형성하며 모여 있고, 흐릿하게 얼룩진 달빛은 차갑고 스산한 광체를 번득거린다. 지붕과 그림자들이, 창문들이, 그리고 중세가 거기 있다. 교외에 어울릴 만한 장소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 뒤편으로, 아득한 저 먼 곳이 어른거린다. 내가 서 있는 자리 위로 검은 가지들이 뻗어 있고, 도시의 모든 잠이 낙담한 내 마음을 채운다. 달빛 속에 잠긴 리스본이여, 나의 내일은 벌써 피곤을 느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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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장소를 방문할 때면 늘 그렇듯이, 나는 언제나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주저 없이 이발소 안으로 쓱 들어갔다. 나는 낯선 것 앞에서는 몹시 망설이는 편이지만 이미 아는 장소에서만은 평온을 느낀다.
이발소 의자에 앉은 나는, 어깨에 청결하고 시원한 이발용 가운을 둘러주는 젊은 이발사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오른쪽 이발 의자에서 일하던 나이 많고 농담 잘하는 늙수그레한 이발사는 몸이 아프다더니 이제는 좀 나았느냐고. 예의상 물은 것이 아니라, 그 자리와 그 순간이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제 죽었답니다.” 내 목덜미와 칼라 사이에 가운 자락을 집어넣은 후 손가락을 막 떼어내고 있던 젊은 이발사의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내 어깨 바로 뒤편에서 들려왔다. 이유 없이 기분 좋게 들떠 있던 마음은 돌연 사라져버렸다. 영원히 자리를 비우게 된 옆자리의 이발사처럼, 내 생각은 얼어붙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에게조차 나는 아련한 그리움을 느낀다. 사라지는 시간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리고 삶의 비밀이라 불리는 일종의 병 때문이다. 흔히 마주치는 거리의 평범한 얼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슬픔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나에게 오직 삶의 상징에 불과하다.
아침 9시 30분쯤 길에서 자주 마주쳤던, 더러운 각반을 찬 별 특징 없는 노인은? 한 번도 대꾸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나갈 때마다 귀찮게 달라붙던 절름발이 복권장수는? 담배 가게 앞에서 시가를 태우던 둥근 얼굴의 혈색 좋은 노인은? 얼굴이 해쓱한 담배 가게 주인은? 항상 규칙적으로 마주치곤 했기 때문에 내 인생의 일부였던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 내일이면 나 또한 프라타 거리에서, 도라 도레스 거리에서, 판케이우스 거리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다. 내일이면 나 또한, 생각하고 느끼는 이 영혼. 나에게는 우주 자체나 다름없는 나 자신도, 내일이면 이들 거리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는 “ 그 사람이 요즘 왜 안 보이는 거지?” 하고 문득 떠올릴 것이다. 내가 한 모든 일, 내가 느낀 모든 것, 내가 산 모든 삶은, 어느 도시의 어느 거리를 매일 지나다니던 행인 하나가 줄어든 사건으로 요약되고 말 것이다. ■
Review
“삶의 아름다움을 말 속에 포착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나날은 항상 거기 있는게 아니라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름다운 나날을 풍요로운 어휘와 찬란한 기억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어느 날엔가 텅 비고 허무한 바깥세상의 공허한 들판과 하늘에 화사한 꽃과 별들을, 아름다운 날에 그랬던 것처럼 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27)
저자인 ‘Fernando Pessoa’는 1888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난 후 모친은 1895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사와 재혼하는 바람에 어린 페소아는 그곳에서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열일곱 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할머니 집에서 지내며 마흔일곱 살 생을 마감할 때까지 리스본을 떠나지 않았다. 무역회사에서 통신문을 번역하는 일을 하며 틈틈이 글을 써서 생전에 몇 권의 시집을 발표했으나 대부분 이명(異名)으로 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그 자신이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사후에 그가 남긴 27,543매에 달하는 원고가 발견되었다.
이 책<불안의 서>은 그중 하나로 페소아가 사망한 지 47년 후인 1982년에 포르투갈어로 처음 출판되었고, 54개국 100명의 저자의 응답을 바탕으로 노르웨이 북 클럽이 선정한 최고의 문학 작품 100선 목록에 포함되었다. 순서나 구성에 대한 기준 없이 수백 개의 일기 형식의 단상들로 대부분 날짜도 없는 글이며, 그가 죽기 직전(1934년)까지 이 글을 써온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자신이 아닌 ‘‘Bernardo Soares’라는 이명(異名)으로 쓰인 글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이며, 책의 제목 앞에 ‘사실 없는 자서전’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묘사했다.
“서른 살 정도 된 그 남자는 마른 몸매에 키가 큰 편이었다. 그는 앉아 있을 때 몸을 과하게 앞으로 구부정하게 숙이는 습관이 있었지만 서 있을 때는 좀 덜했다. 차림새는 분명 신경을 쓰지 않은 듯했으나 그렇다고 정말로 아무렇게나 입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늘 저렴한 메뉴를 선택해서 식사를 했고, 다 먹은 뒤에는 직접 만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식당에 있는 다른 손님들을 관찰했다. ~~~그 이후로 - 왜 그런지는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 우리는 서로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곤 했다. ”(서문)
직장에서 일을 하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글을 쓰는 일에 매진한 고달픈 삶을 이어간 그는 오직 글 속에서 자신을 세상에 알리기를 갈망했다. 글 내용에는 그가 일하는 좁은 사무실, 평범한 동료들과 이웃 사람들, 이발소 주인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들뿐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소망, 꿈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차 있다.
깊은 사색을 통하여 그는 고달픈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세상에 보이는 것, 경험한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기에 그것을 글로 남겨 간직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곧 삶의 허무를 이겨내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작가는 삶의 문제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닌 그래서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으로 저자 역시 이명(이명)으로 하지 않았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까지 들었다.
이 책을 읽는 도중에 아내와 함께 동남아의 보르네오섬 휴양지를 다녀왔다. 맑은 하늘과 바다, 깨끗한 거리, 친절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잠깐, 이런 곳에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짧은 기간 경험한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우리는 모두 사실 넓은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개인적으로는 각자 주어진 제한된 삶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타인의 삶을 살 수도 없고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이런 이유로 삶은 늘 불안하다. ‘페소아’는 이런 마음이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다고 말했다. 꿈과 상상을 글로 써 내려감으로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또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저녁은 찾아올 것이다. 우편마차는 도착할 것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마음껏 즐긴다. 그리고 산들바람을 즐길 수 있도록 나에게 주어진 영혼도 마음껏 즐긴다. 나는 더 캐묻지 않는다. 나는 애쓰지 않는다. 내가 지금 여행자의 책에 써넣는 것이 언젠가 다른 이들에 의해 읽히게 된다면, 그래서 그들의 휴식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무도 이것을 읽지 않거나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 나는 괜찮다.”(1)
많은 이들이 여행하고, 또 책을 읽고 글을 남기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들에게 이 책은 공감되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
<본문>
"진실한 풍경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풍경의 창조자일 경우에만 우리는 풍경의 진짜 모습을, 그것이 창조된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38)
"부조리하고 앙상한 내 방 책상 앞에서, 이름 없고 하찮은 사무원인 나는 쓴다. 글은 내 영혼의 구원이다. 나는 멀리 솟아난 높은 산 위로 가라앉는 불가능한 노을의 색체를 묘사하며 나 자신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내 석상으로, 삶의 희열을 대신해주는 보상으로, 그리고 내 사도의 손가락을 장식하는 체념의 반지로, 무아지경의 경멸이라는 변치 않는 보석으로 나에게 황금의 옷을 입힌다."(4)
"나는 종종, 유명해지면 참 좋을텐데 라는 생각을 한다. 남들이 내 비위를 다 맞춰준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승자가 되어 우뚝 설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날아갈 듯한 마음일까! 하지만 동시에 그런 공상의 유혹을 비웃어버리곤 한다. 나는 스타가 되는 꿈속에 잠길 때마다, 이 도시의 거리처럼 익숙하고 가까운 어떤 사람이 나를 향해 던지는 커다란 비웃음 소리를 듣는다. 유명해진 나를 상상해보면, 그 상상 속에서 내가 보는 것은 유명한 회계원이다." (53)
"꿈의 영향 아래서 꿈을 추구하다 보면 간혹 삶의 일상적 수준을 넘어서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네를 타는 아이처럼 힘껏 위로 들려진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곧 이어서 그네 위 아이와 마찬가지로 다시 시립공원의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내 패배의 현장과 마주하게 된다. 펄럭이는 전쟁의 깃발도 없고, 걸음 한 번 휘두를 만한 기운도 남아 있지 않은 채."(59)
"누구나 다 자신만의 허영심을 갖고 있다. 이 허영심 덕분에 사람은 다른 이들도 자신과 유사한 영혼을 갖고 있음을 잊어버린다. 나의 허영심은 몇 페이지의 글이며, 몇 단락의 글이고, 숨길 수 없는 회의다."(63)
"인간이 느끼는 것을 정확히 인간이 느끼는 느낌 그대로 표현한다. 그것이 명확하다면 투명하고 명확하게, 그것이 불명확하다면 불명확하게, 그것이 혼돈에 싸여 있다면 혼돈스럽게, 그리고 문법을 법칙이 아닌 도구로 이해한다."(84)
"(비내리는 풍경의 묘사)하나하나의 빗방울은 잃어버린 내 삶을 대신하여 자연이 흘리는 눈물이다. 어떨 때는 방울방울 떨어지다가 하루의 슬픔으로 무작정 대지를 뒤덮으려는 물줄기처럼 한꺼번에 쏟아지기를 반복하는 이 빗속에는, 내 불안의 어떤 요소가 있다."(141)
"많은 인간들이 자신이 회화 속 인물이 되지 못함을, 카드 그림 속 형상이 되지 못함을 꽤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의 시간을 살면서 중세의 인물이 되지 못함을 무슨 저주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예전에는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 문제를 넘어설 만큼 성숙했다. 하지만 아직도 나를 괴롭히는 것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가진 서로 다른 우주에 속한 서로 다른 두 왕국의 두 명의 왕이 되어 그들 각자의 꿈을 동시에 꿀 수 없음이다. 이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나에게는 고통이며 굶주림의 맛이다. 불가해한 것을 꿈꾸고 그것을 명확히 언어화하는 것은, 그 분야에 능통한 나조차 흔하게 겪지 못하는 위대한 승리 중의 하나다."(157)
"나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고 아무리 질문을 해도 해답을 발견 할 수 없는 일은, 타인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내 것이 아닌 영혼이 어떤 방식으로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내 것이 아닌 의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다. 나에게 의식이란, 오직 한 가지만이 존재 가능한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317)
"바보같이 굴거나 어쩔 줄을 모르거나 혹은 뭔가를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생을 살면서 그런 불운한 경우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내면의 낙천적인 빛을 발휘하여 그것이 불행이 아니라 일종의 여행병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 세계의 여행자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우리는 무와 무 사이를 혹은 전체와 전체 사이를 여행하고 있다. 우리는 어차피 길 위에 있는 것이니 도중에 만나게 되는 이런저런 불편, 혹은 고르지 않은 길바닥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나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생각 자체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저 나 자신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한들 마음이 편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너무 따지지 않는다."(455)
"다만 나를 위해 썼을 뿐인 이 일기를 사람들은 몹시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부자연스러움이 바로 나의 자연스러움이다. 정신의 세계를 세밀하게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 외에 내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이 또 뭐가 있단 말인가?"(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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