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리아 (Assyria)
19세기 중엽에 니네베 코르사바드 등의 발굴로 우선 아시리아의 제국시대(帝國時代)가 밝혀졌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신석기시대 이후의 문화도 점차 밝혀지고 있다. 원주민은 셈족(族) 계통이 아닌 스바르투인(人)이라고 한다. BC 3000년경부터 셈계(系)의 아카드인이 원주민을 대신하여 세력을 가지게 되고, 언어 풍습 신앙 등이 셈화(化)하였다.
그 중심이 된 아수르는 BC 2500년경 도시국가로 성립되었는데, 수메르 문명의 북변(北邊)의 전진기지(前進基地)이기도 하였다. 이 수메르인의 끊임없는 침입을 받는 악조건에서 강건하고 용감한 민족성을 지닌 셈계의 아시리아인이 형성되었다.
아시리아의 중심부는 티그리스강과 대(大)자브강의 합류점에 가까운 삼각형의 지역이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지리(地利)를 이용하여 바빌로니아에서 산출되지 않는 금속·보석·목재·석재 등을 실어다 교역을 하고 점차 군사(軍事)국가로서 발전하였다.
BC 13세기에 투쿨티니누르타 1세는 바빌로니아를 점령하였고, BC 11세기 전에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가 히타이트의 쇠퇴를 틈타 페르시아만(灣)에서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였다.
BC 8∼BC 7세기에 이르자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 사르곤 2세, 센나케리브, 에사르하돈, 아슈르바니팔 등의 용감한 왕들이 나와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이집트까지를 정복하여 일찍이 없었던 세계제국을 건설하였다.
광대한 영토는 잘 훈련된 강력한 군대, 조직화된 관료군(官僚群), 완비된 역전제도(驛傳制度) 등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특히 기병과 전차(戰車)를 구비한 군대와 중세(重稅)는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강대하던 아시리아도 아슈르바니팔 왕이 죽은 뒤의 내분을 틈타 바빌로니아에서 독립한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인의 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BC 612년 니네베의 함락과 더불어 멸망하였다.
아시리아의 문화적 특색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화를 융합하여 변경지대에 전한 것이다. 또 니네베와 코르사바드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계획이나 축성(築城)에 능하였고, 예술면에서는 석조(石造)의 환조(丸彫)와 부조(浮彫)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전투와 맹수(猛獸) 사냥 등 잔인한 행위를 주제(主題)로 한 것이 많다. 역대의 왕들은 전승(戰勝)이나 사적(事績)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연대기(年代記)도 편찬하였다. 아슈르바니팔 왕은 왕궁에 부속도서관을 짓고 각종 사료(史料)를 수집·정리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1) 아시리아의 미술 (Assyrian art)
인류문명의 여명기에 아시리아를 포함한 북(北)메소포타미아 일대는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바빌로니아를 앞지르고 있었으나, 바빌로니아가 관개경작(灌漑耕作)에 의해서 농작물의 증산으로 번영하자 이 지방의 문화는 급속도로 진보하였고 아시리아는 오히려 뒤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BC 3000년대의 아시리아 미술은 같은 시대의 바빌로니아 수메르 아카드 미술의 지방판(地方版)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상태는 BC 2000년대가 된 뒤에도 한참 계속되었다.
다만 조각(彫刻)은 BC 2000년대 후반이 되어 한때 아시리아를 지배했던 미타니의 영향으로 수메르 아카드 양식과는 다른 아시리아적 성격을 점차 나타내게 되었다. 즉, 일반적으로 양식이 답답하고 비례가 압축되었으며 좌우대칭을 중시하고 의상에 풍부한 장식을 좋아하는 점 등이 그렇다.
BC 1000년대의 아시리아 미술은 이 나라의 제국주의적 발전에 힘입어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한다. 흔히 아시리아 미술이라 하면 그 특성이 확립된 시기요, 신(新)아시리아 미술로 불리기도 하는 BC 9세기에서 BC 7세기에 걸친 미술을 말한다.
건축으로는 아슈르나시르팔이 세운 님루드의 궁전,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의 아르스란 타슈의 궁전, 사르곤 2세의 코르사바드의 궁전 등이 있었는데 보수적인 아시리아인은 석재를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지방에서도 수메르의 전통에 따라 볕에 말린 벽돌을 주재료로 사용하였다.
다만 입구의 좌우나 바깥쪽에 인두수신(人頭獸身)의 거상(巨像)을 세우고, 방 내부에는 부조가 있는 설화석고(雪花石膏:alabaster) 등의 석판을 벽면 아랫부분에 둘러서 붙였다.
궁전에는 옥좌실(玉座室)이 있는 알현실, 왕의 거실, 왕비의 거실 등을 포함하는 일곽과 조신(朝臣)이 사는 일곽, 신전이나 지구라트[聖塔]가 있는 일곽 등이 있고, 중앙에는 정원이 있었다. 지구라트는 코르사바드에서는 7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흉벽이 있는 비스듬한 길이 건물의 주위를 돌아서 정상까지 달하였다.
조각의 유품은 주로 부조(浮彫)이다. 환조(丸彫:입체조각)는 포효하는 사자나 유익인두(有翼人頭)의 황소 또는 사자, 인상(人像)으로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상(像)이나 나브 신상(神像) 등이 있는데 형체보다도 표면 세부묘사에 중점을 둔 부조적 표현이었다.
부조의 주제는 종교적 의식, 전쟁, 수렵 조공자(朝貢者)의 행렬 등 왕의 권위와 제국의 위력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고 시대적인 변화는 없으나 구도와 양식에는 진전을 보였다.
즉, BC 9세기 전반의 아슈르나시르팔 2세 시대의 것은 살붙임이 얇고 인물의 비례가 답답하며 때로는 명문(銘文)이 작품의 표면을 덮기도 했다. BC 8세기 후반,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나 사르곤 2세에 와서는 살붙임이 도톰해지고 뚜렷해졌으며 작품 표면은 물론 배경에도 명문을 넣는 일은 없어졌다. 그 후의 센나케리브 시대에는 작은 인물을 많이 담은 우화적 구도가 행해졌다.
그러나 아시리아 부조의 최고 작품은 니네베의 궁전 유적에서 출토된 아슈르바니팔왕 시대의 것으로, 살붙임도 풍부하고 기교는 소박하며 표현은 자유롭고 힘에 넘친다.
그 중에서도 사자의 방의 부조는 동물묘사가 세계적인 걸작이다. 유약(釉藥)을 끼얹은 벽돌이나 회화도 궁전 내부장식에 사용되었다. 공예품으로는 먼저 청동(靑銅) 제품으로서 사자형의 주조종(鑄造鐘), 그리고 샬마네세르 3세(BC 858~BC 824)의 사적(事蹟)을 찍어낸 문표면의 장식이었던 띠 모양의 판이 유명하다.
상아조각품으로는 부조도 있고 줄새김도 있는데 채색된 것이 가구에 장식되었으며 님루드나 아르스란 타슈 등지에서 뛰어난 작품이 출토되었다. 표현양식면에서 볼 때에는 아시리아적인 것 이외에 페니키아적인 것, 이집트적인 것이 있다. 원통인장(圓筒印章)은 주제도 양식도 모두 벽면 부조를 따랐다.
또한 BC 1000년대의 아시리아 미술은 가까운 인접제국의 미술에 다소간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에서도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 미술의 형성에 크게 공헌했다.
(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