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두리 양식장 외 4편
임덕기
잿빛 천장이 보이는 곳에서 어릴 적 살았어요
숨 막히게 좁은 통 안에서 생존을 위해
온종일 동그라미를 그렸어요
햇살 대신 조명이 켜지고 먹이를 잡지 않아도
끼니때가 되면 사료를 던져주었지요
어느 날 수조에 갇혀 다른 곳으로 이사 갔어요
구름 사이에 짙푸른 하늘이 고여 있고
바람에 짭짤한 갯내가 묻어와
본능적으로 바다라는 것을 직감 했어요
주위에는 온통 낯선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녀요
그들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네요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고 있어요
그런데 불쑥 그물이 앞을 가로 막네요
그물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바다감옥에 갇힌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어요
개미들의 행진
임덕기
개미들이 무궁화나무 가지를 타고 줄지어 오른다
진딧물 농사지으려고
나무 우듬지를 향해
무궁화 꽃을 향해
작은 발들이 재바르게 움직인다
진딧물이 보이지 않자
진딧물이 없어도 살길이 있다고
개미들은 무궁화 꽃 속에 들앉아
꽃가루를 묻힌 채 널브러져 있다
해마다 무궁화를 향한 집념이 사라지지 않는지
영악한 개미들 발걸음이 멈추질 않는다
언제 개미들에게서 자유로워질까
무궁화나무의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벌개미취의 발돋움
임덕기
베란다 화분에서 목을 길게 늘인 벌개미취
줄기가 창 쪽으로 기어간다
기다란 이파리는
쏟아지는 햇살을 손바닥에 퍼 담는다
창밖 벚나무에서 온종일
목울대 세워 울부짖는 쓰르라미
열띤 목소리가 귀에 쏟아져도
우두커니 창밖만 내려다보고 있다
뜨거운 햇살도 아랑곳 않고 창틀에 얼굴을 파묻고
모기장을 열고 나갈 기색이다
벌개미취는 발돋움하고 서서
화단에 쓰러진 나무 둥치와 보랏빛 붓꽃을 바라보며
아슴푸레한 지난 기억을 더듬어 떠나온 숲속을 헤맨다
벌개미취 연보라 낯빛이 환하다
은행나무의 속성
임덕기
공룡시대 화석이 살아있다
살아서 천년의 삶을 이어간다
더 이상 진화가 필요치 않다고 거부하며
홀로 기품있게 살아간다
홀로 서서 고독을 즐기는 명상가이다
친척도 없이 처음 태어난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잘 버티고 사는 것은
철저한 계획과 준비성으로 태어난
완벽을 추구한 부모 덕분이다
급변하는 계절변화에도 휘둘리지 않는
끈질긴 고집 덕분이다
갈바람이 불어 은행 알이 땅에 떨어지면
누구도 해치지 못하게 악취를 풍겨
처음부터 접근을 막아버린다
이중 잠금장치 안에 열매를 숨겨두고
비로소 안심하는 완벽주의자다
바람에 샛노란 은행잎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길게 살려면 철저한 준비성이 필요하다고
바닥에 떨어진 잎들이 넌지시 제 속내를 드러낸다
지구 모퉁이에는
임덕기
코로나 펜데믹으로 배달주문이 폭증했다
코로나 펜데믹 이후에도 배달주문은 여전하다
잘 썩지 않는 플라스틱과 비닐이
지구 모퉁이마다 쌓여간다
바다에 떠도는 플라스틱 쓰레기 산
오염된 바다의 물고기는 인간의 목을 죈다
지구의 자연질서를 인위적으로 망가뜨리면 큰 위해(危害)가 찾아온다
인간이 편리하다고 마구잡이로 쓰고 버린 비닐과 플라스틱들이 바다에
산더미처럼 쌓여간다 쓰레기들은 모여 섬이 되어 태평양에서 떠돈다
섬의 크기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어도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아직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강 건너 불처럼 여기는 것일까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내놓지 않고 눈만 질끈 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광경을 보다 못한 사람들이 쓰레기 섬을
국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임덕기 약력 경북 포항 출생, 이화여대 국문학과 졸업, 중‧고등학교 교사 역임
2014년 계간《애지》신인상 등단. 2012년⟪에세이문학⟫완료추천
시집:《꼰드랍다》,⟪봄으로 가는 지도⟫(A MAP TO THE SPRING) (2024년 4월 미국 뉴욕에서 영역본 출간)
수필집:⟪조각보를 꿈꾸다⟫,⟪기우뚱한 나무⟫(2015년세종나눔도서선정),
⟪서로 다른 물빛⟫(원종린수필문학상),⟪스며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