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글은
2016년 5월 28일 포스팅하였습니다.
오늘은 믿음의 아들 선대 형제를 만나 영양을 보충하고 영화를 감상하며
그 유명한 설빙을 나누면서 아름다운 소통의 대화로 믿음의 교제를 가졌습니다.
반기독교 정서의 영화 "곡성"은
무속적 세계관의 혼동을 그린 샤마니즘의 미스테리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 오는 날 한적한 시골 마을의 곡성은
의문의 연쇄 살인에 대한 살아있는 사람의 절규였습니다.
순박한 시골 사람을 곡성의 제물로 삼는 것으로 시작해서
어린 아이를 곡성의 제물로 삼고 경찰관은 물론 천주교의 신부와 부활의 실증 메세지마저
곡성의 제물로 삼았습니다.
비 오는 날의 계속되는 의문의 연쇄 살인.....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곡성의 호곡 소리는 삶의 불행을 무속적 세계관으로 풀고자 하는
조현병의 푸닥거리였습니다.
영화에는 복선의 이중 메세지를 많이 내포하고 있어
심리적 공포 영화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곡성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연쇄 살인의 절규를 곡성으로 담아내었고
귀곡성의 진실을 파헤치는 무속의 한판 놀음으로 검은 그림자의 실체를
이중적인 복선으로 설정하였습니다.
난데 없는 좀비의 등장으로 검은 실체는 혼돈의 미로에 빠지고
금어초의 덫으로 악마를 사로 잡으려는 수호신은 귀신의 옷을 입었습니다.
믿음의 확신으로 서양 귀신 잡는 신부의 십자가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면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메세지를 사진으로 담는
실체의 형상을 한 악마의 한 수 앞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악마의 혼을 뒤집어 쓴 순박한 어린 아이는 곡성의 가해자가 되어
그 이웃과 할머니와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잔혹한 곡성의 제물로 삼았습니다.
끝나지 않는 곡성의 호곡 소리는
삶의 친근한 문화가 되어 무속의 세계관으로 악마의 탈을 쓰고
영화의 감동으로 혼동의 미스테리를 남겼습니다.
기독교의 허구를 고발한 영화 "곡성"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기독교 인사를 상대한 것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연쇄살인의 악마로 형상화하였습니다.
영화 감상을 마치고 불현듯
글감의 제목으로 곡성의 호곡 소리가 떠올랐습니다.
곡성과 호곡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로
한글 개역 성경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곡성의 호곡 소리는 무속의 세계관이지만
성경의 곡성과 호곡은 하나님의 심판을 담은 신본적 세계관입니다.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은 연쇄 살인을 즐기는 악마의 진혼곡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완악과 애굽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초태생의 죽음에 대한 절통이었습니다.
또한 시인의 곡성은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 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는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곡성의 호곡 소리는 살인마의 만행이지만
시인의 곡성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않는 하나님의 구하시는
바로 그 상한 심령의 제사였습니다.
곡성의 호곡 소리는 삶의 비극과 불행에 대한 무속적 세계관의 혼동으로 빠지지만
종말론적인 곡성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
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입니다.
세상은 세상사 모든 삶의 비극과 불행을 무속적 세계관의 샤마니즘적인 미스테리로 인식하고
우리 곁에 친근한 삶의 문화로 포장한 귀신의 놀음으로 기독교를 희화하여
공포와 불안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영혼에 대한 심판으로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고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고 하였습니다.
끝없는 곡성의 호곡 소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의 행위에 대한
그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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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꿈에.....
반기독교 정서의 영화 "곡성"의 악마와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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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에 나타났던 성경 구절......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영화 "곡성"의 악마는 살과 뼈가 있는 신.....
곧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뉘앙스와 여운을 남긴 시나리오여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전면전을 선언한 안티 기독교 영화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악마의 탈을 쓰고 순수 지대의 어린 영혼을 조종하여
잔인한 연쇄 살인을 한다는 영화 "곡성"은
부활의 자기 증거의 메세지로 삼은 예수님의 말씀을 악마의 진혼곡으로 왜곡하고 날조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잔인한 악마로 형상화한 영화 "곡성"은
사진을 조형하듯 섬세한 예술로 포장된 기독교의 이미지를 순전한 시골과 어린 아이를
참혹한 곡성의 호곡 소리로 만든 잔혹한 살인마의 온상으로 비판하였습니다.
살인과 성폭행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기독교 종교인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신 소위 말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악마의 형상으로 옷 입힌 영화였습니다.
충격적인 영화의 실상!
그냥 심리적 공포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한국형 부활하신 예수님을 잔혹한 연쇄 살인의 악마로 형상화한 영화였습니다.
이제는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 아닌 영화마저.....
기독교를 사회적 분노와 환멸을 느끼게 하는 개잡스런 악마의 소굴로 고발하였습니다.
보통 영화를 보고는 잊어버리는데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지난 밤 꿈에 영화 "곡성"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복음의 전사로서 한판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렇게 까지 기독교를 경멸하고 모독하는 영화 "곡성"은
폭발적인 인기리에 절찬 상영되고 있습니다.
영화 "곡성"을 만든 사람들과 그 주역들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시는지 지켜 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도마에게 부활을 믿게 하는 실증적 믿음의 메세지로
잔혹한 연쇄 살인의 복마전인 악마의 자기 증거의 메세지로 삼은 영화 "곡성"의 여운은
예수님의 부활을 모독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살과 뻬가 있는 부활의 예수님을
잔혹한 연쇄 살인의 악마로 형상화하였습니다.
안티 기독교는 안티 바이블로, 안티 바이블은 안티 예수로
사탄의 무저갱을 만들었습니다.
서양 귀신 예수를 형상화한 악마는 반일 감정의 옷을 입었고
좀비를 때려잡는 분노를 곡성의 호곡 소리로 담아 금어초의 덫으로 마을을 지키는 흰 옷 입은 수호신은
친근한 전통 무속신 삼신 할매의 현신이었습니다.
결국 연쇄 살인의 복마전으로 쏙대밭이 된 곡성은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일본을 증오하는 분노의 감정으로
순수 지대의 마을과 어린 영혼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고유한 전통을 파괴하였다는
증오의 여운을 남겼습니다.
영화 "곡성"의 이중적인 복선의 설정은
살인마가 누구인가에 대해 남긴 그 단서로 부활의 예수를 증오하는 악마로 형상화 하였으며
그 예수를 믿는 기독교는 한국의 전통을 잔혹하게 파괴하는
복마전의 온상이라는 메세지를 던졌습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지만........
끝나지 않은 곡성의 호곡 소리는 반기독교적인 정서로
천만 기독교인의 분노와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