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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8-16 (바벨론의 압박들을 이기는 원리)
성경본문 : 다니엘 1: 8-16 출 처| 피영민 목사
서론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이 이방땅 바벨론에 끌려가 많은 고생을 했다는 강력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 고생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많은 압박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이긴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기었노라”는 뒤에 말씀하셨고 앞부분에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바벨론 같은 세상에 살아가면 환란과 압박과 고통이 오는데 그것을 예수님이 확증적으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의미는 이렇게 환란과 압박과 스트레스가 많은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 성도는 이길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겪은 압박은 밖에서는 압박이지만 다니엘 개인적으로 느낄 때는 스트레스가 되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다니엘 개인적으로 겪은 스트레스가 훨씬 더 컸습니다.
1. 다니엘이 겪은 네 가지 압박
첫째, 변화의 압박(Pressure of Change)입니다.
사람들은 단조로운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변화는 때로 좋은 것입니다. 옛날에는 음악다방에 가면 DJ(Disk Jockey)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청곡을 받아 레코드판을 틀어줬습니다. 그런데 판이 어느 지점에 가면 어떤 때는 고장이나 판이 튑니다. 그래서 동일한 소리가 계속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고향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얼마나 되나? 얼마나 되나?......” 이렇게 같은 구절이 2분만 계속 나오면 어지간한 사람은 성질을 냅니다. 그리고 5분 동안 계속되면 분노를 폭발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변화가 없는 삶은 지루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집안에 살면서도 가구의 위치도 바꾸고 옷도 바꿔 입고 넥타이도 바꿔 맵니다. 그런데 이 변화가 너무나 크고 급격하면 쇼크가 되고 파괴적이 됩니다. 다니엘은 세 가지 큰 변화를 겪었는데 이것이 모두 크고 급격한 것이었습니다.
첫째로는 문화적인 변화입니다.
히브리어를 쓰던 사람이 갑자기 갈대아어를 쓰는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한국 사람들도 학교에서 영어를 많이 배웠지만 미국에 가면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쓰던 언어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음식도 바뀌었습니다. 음식이 바뀌는 것도 괴롭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여기서 김치찌개, 된장찌개, 냉면 등을 실컷 먹다 다른 나라에 가서 기름진 음식을 먹게 되면 처음에 잘 맞지 않아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가리켜 문화충격(Culture Shock)이라 합니다. 문화변화가 크면 이것도 스트레스가 됩니다.
둘째로는 가족적인 변화입니다.
다니엘은 지금 바벨론에 혼자 잡혀갔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있었습니다. 편지도 전화도 전보도 인터넷도 없는 먼 이방땅에서 가족들과 연락할 수 없는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6.25 때 한국에 온 미국 군인들이 많이 불렀던 바비 빈튼(Bobby Vinton)의 “Mr. Lonely”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Lonely, I"m Mr Lonely(나는 외로운, 외로운 사람이에요). I have nobody for my own(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I"m so lonely. I"m Mr Lonely(나는 너무나 외로워요. 외로운 사람이에요). Wish I had someone to call on the phone(전화를 걸 대상이 있으면 좋겠어요).
Now I"m a soldier, a lonely soldier(지금 나는 군인이에요, 외로운 군인이죠), away from home through no wish of my own(내 뜻과는 달리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요). That"s why I"m lonely. I"m Mr Lonely(내가 외로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요. 나는 외로운 사람이에요). I wish that I could go back home(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Letters, never a letter(편지, 결코 한 통의 편지도). I get no letters in the mail(내게 온 한 통의 편지도 없어요). I"ve been forgotten, yeah, I"m forgotten(나는 잊혀진 사람이죠, 예 잊혀졌어요). Oh, how I wonder how is it I"ve failed(오, 어떻게 해서 내가 실패를 하게 되었는지)....
6.25 때 이런 노래를 부르다가 5만 명 이상 넘는 미국 군인들이 죽어갔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이 얼마나 쓸쓸했겠습니까?
셋째로는 영적인 변화입니다.
다니엘은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수 없고 성전 제사를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문화적, 가족적, 영적으로 변화가 급격할 때에는 자기 신앙이 견고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남의 신앙에 얹혀서 의존하는 신앙으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에게 천국에 갈 확신 있냐고 물으면 자기 부인이 강남중앙침례교회에 잘 다니니 부인치맛자락 잡고 나도 올라 갈 줄로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치맛자락잡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남의 신앙에 얹혀서 가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어떤 분에게 복을 받느냐고 물으면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예수를 잘 믿어서 나는 그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게 받는 복도 있지만 왜 자기가 직접 잘 믿지 못하느냐는 말입니다. 변화가 크고 스트레스가 클 때 남의 신앙에 얹힌 간접적인 신앙으로는 이기기 어렵습니다. 자기의 신앙, 본인의 확고한 신앙으로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21세기에는 얼마나 변화가 급격합니까?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과학도 변합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오면 벌써 이론이 바뀌어 가르칠 수 없게 될 정도로 빠르게 변합니다. 이것이 변화의 압박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이 아무리 변해도 신앙이 확고한 사람은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세뇌교육의 압박(Pressure of Brain washing)입니다.
느브갓네살이 왕이되어 바벨론을 통치하는데 바벨론이 워낙 강력해지고 하나님이 역사하시자 문화와 언어가 다른 나라들을 지배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젊은 엘리트들을 잡아와 세뇌교육을 시켜 바벨론 사람으로 동화되도록 했습니다. 바벨론을 위해 살고 바벨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바벨론을 위해 살고 죽으면 내가 너희를 축복하여 이 땅에서 돈도 많이 주고 출세하도록 해주겠다고 유혹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그 젊은이들의 종교를 잊게 하는 것인데 종교를 잊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를 통치할 때 맨 처음 한일이 창씨개명입니다. 이름을 바꾸면 자기 사고가 일본사고가 되어 대한민국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에 잡혀가 처음 당한 것이 이름이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사람 이름 끝에 히브리어로 ‘엘’ 혹은 ‘야’라고 끝나는 것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바꿔 버렸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벨드사살’로 바꿨습니다. 벨은 바벨론 신의 이름으로 ‘벨의 금고를 지키는 자라’고 바꿔버렸습니다.
‘하나냐’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의 이름인데 ‘사드락’ 즉, ‘태양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자라’ 이렇게 바꿉니다.
‘미사엘’은 ‘하나님 같이 강한자가 누구냐?’는 뜻의 이름인데 ‘메삭’ 즉, ‘미의 여신을 예배하는 자라’ 이렇게 바꿉니다.
‘아사랴’는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의 이름인데 ‘아벳느고’ 즉, ‘느고라고 하는 바벨론 신의 종(Servant of Neco)이라’ 이렇게 이름을 바꿨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이 젊은이들의 이름을 바꾼 이유는 “너희가 그동안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은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즉, “너희의 흘러간 과거는 잊어버리라. 그래야 너희는 바벨론 사람이 되고 바벨론 신을 섬기면 너희에게 장래가 있고 행복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느브갓네살 왕의 세뇌교육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신문, 잡지, 방송, 인터넷 등 각종 미디어를 통해 우리를 세뇌교육 시킵니다. 특히 우리 자녀들을 세뇌교육 시킵니다. 세뇌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을 빼내려는 것입니다. ‘엘’과 ‘야’ 를 빼내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빼내고 하나님은 잊어라(Forget your God). 그러면 너희는 세상에서 쾌락을 누리며 살고 출세할 것이다. 너희 이름 속에서 ‘엘’과 ‘야’를 빼버려라.” 이렇게 우리를 세뇌교육 시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교회에 잘 나오다가 고등학교에 가면 교회에 빠지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에 가면 아주 빠지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서 ‘엘’이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자신도 이 세속의 세뇌교육에 넘어가서는 안되겠고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을 빼앗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셋째, 핍박의 압박(Pressure of Persecution)입니다.
바벨론은 피정복 국가에 잔인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잘 살 수 있도록 해줬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단지 종교문제만큼은 엄격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핍박과 극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3장과 6장이 핍박으로 유명한 장입니다. 다니엘 3장에서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느브갓네살이 황금 신상을 만들어놓고 거기 절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에 던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풀무 가운데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세 명을 던졌는데 네 명이 뛰어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같은 이가 거기 같이 뛰어놀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풀무 가운데서 그들은 살아나왔습니다.
다니엘 6장에 보면 바벨론이 망하고 메대 왕 다리오가 다니엘을 좋게 보아 전국을 다스리는 세 명의 총리 가운데 하나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워낙 곧은 사람입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뇌물이라고는 단 돈 일원도 안 받는 사람입니다. 털어도 먼지가 안 나오는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이처럼 다니엘의 흠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것이 없는데 한 가지 다니엘을 넘어뜨릴 것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창문을 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대 왕 이외의 존재에게 기도하거나 절하는 자를 사자 굴에 던지는 악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이법을 알고도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자 그를 잡아 사자 굴에 던져 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막아서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사자와 안고 자고 놀아도 사자가 잡아먹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니엘 6장의 내용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핍박 시에 죽음을 택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17세기 유명한 청교도인 사무엘 러더포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든 주역이기도 했는데 그는 신앙 때문에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천국은 아무핍박이나 아무 반대 없이 은밀히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는 자기 혼자 믿는다며 교회도 안나오고 전도도 안합니다. 그러면 천국가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모르겠다”며 부인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주의 이름을 시인해야 하나님 앞에서도 예수님이 우리의 이름을 시인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됩니다. 그러다 핍박이 오면 당해야 됩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 독일어 단과반 강사로 돈을 벌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학원 원장님이 주일날 와서 강의하라고 하고 회식에 가면 술을 마실 것을 계속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가 지금 주의 종으로 훈련받는 사람인데 이런 것 싫습니다. 저를 해고시키려면 시키십시오.”하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해고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단호하게 신앙을 지켜나가면 세상이 우리를 쓰러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조그만 핍박에도 쉽게 타협하고 굴복합니다. 요즘은 공무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드러내기를 아주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종교편향이라고 자꾸 그러니까 드러내기를 아주 싫어하고 이것을 내가 드러냈다가 혹시 종교편향이라고 인터넷에 뜨면 어떡할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조금 핍박이 왔는데 피해야되겠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핍박에도 당당히 서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정직하게 일하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이렇게 세게 나가면 세상이 꼬리를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핍박이 왔지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드러내면 직장에서 해고당한다고 걱정하시는 분 계십니까? 그렇게 해고당하시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 위해서 조금 손해 보십니까? 그러면 백만 배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 해도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서 목사님한테 좋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핍박이 와도 굴하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도 핍박이 와도 굴하지 않는 단호한 신앙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절망의 압박(Pressure of Dispair)입니다.
다니엘 9장 2절에 보면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말씀을 알았습니다. 포로생활이 70년 갈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그 70년 이후의 계시까지 다 주신 것입니다. 짐승이 나오고 적그리스도가 일어나며 전쟁과 황폐함이 있으리라는 것을 다니엘은 다 뇌 속에 이상으로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밝은 그림이 아니고 어두운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괴로워 절망하는 것입니다.
다니엘 7장 15절에 “나 다니엘이 중심에 근심하며 내 뇌 속에 이상이 나로 번민케 한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뇌 속에 이상이 오는데 그것이 번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8장 27절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역사의 비밀이 자기의 뇌 속에 이상으로 계시가 되었는데 그것이 밝은 그림이 아니라 어두운 그림이었으니 얼마나 절망감으로 홀로 몸부림 쳤으면 혼절했다는 용어를 썼겠습니까? 다니엘은 앓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압박을 이긴 다니엘의 원리
다니엘은 이처럼 급격한 변화와 세뇌교육과 핍박과 절망의 4중 압박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우리 삶 속에는 갖가지 압박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쓰러지지 마시고 이겨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집안에서도 신앙생활하려면 가족들이 핍박하고 직장에서 상사가 핍박합니다. 그래도 이겨내야 됩니다. 다니엘이 이런 4중의 압박을 이기는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 다니엘은 하나님을 아는(Knowing God)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을 많이 알고,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단순히 머리로만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신앙이 진실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적인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2장 28절로 29절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참된 유대인이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 11장 32절에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이 세상이 아무리 핍박해도 강하고 용맹스럽게 세상을 물리치고 신앙으로 살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많이 아십니까?”라는 질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개인적으로 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과 동행하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성령이 여러분 마음속에 내조해 계신다는 것을 아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히브리어로 알다는 뜻인 ‘야다’라는 단어는 지식을 말하지 않고 언제나 체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 영혼에 말씀하기도 하시고 때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기도 하시며 때로 우리의 길을 열어주시기도 하시고 때로 우리 육신의 병을 고쳐주기도 하시며 때로 우리 안에 들어와서 괴롭히는 더러운 악령들을 쫓아내 주시기도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다양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더 깊이 알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다니엘은 뜻(Determination)을 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뜻이 확고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 1장 8절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가 나쁜 음식이어서가 아닙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는 우상에게 먼저 바쳐지고 그들에게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데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어 내 영혼을 더럽히지 아니하겠다.”라고 확고하게 결단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니엘에게 “왜 너만 유별나게 살려하느냐? 왜 너만 미친 사람 취급받으려하느냐? 신앙은 은밀히 지키면 됐지 왜 네 앞에 놓여있는 부와 명예와 권력과 지위를 버리려 하느냐? 그것을 먹어라. 진미를 먹어라. 포도주를 마셔라. 그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지만 먹고 마셔라. 네 신앙은 너 혼자 속으로 가지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마음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것은 안 먹겠다는 확고한 결단이 섰습니다. 바벨론 같은 이 세상에 살아가시려면 이런 거룩한 결단으로 무장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이 확고해야 됩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나는 강남중앙침례교회에 뿌리를 내린 성도다” 이렇게 확고하게 결단을 내리고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 다니엘은 참된 믿음(Real Faith)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이 믿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Living God)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지식의 하나님(All knowing God)이시며 당신의 백성을 구체적으로 돌보시는 하나님(Caring God)이십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Able God)이셨습니다. 풀무 가운데서도 건져내고 사자 입에서도 지켜내는 전능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하나님은 조금의 헌신에도 축복으로 보답하시는 하나님(Blessing God)이셨습니다. 다니엘은 이런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을 소유했다는 말입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우상들은 거짓인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갖다 놓고 조각해서 신이라고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빌고 절합니다. 그리고 나무를 가져다가 못을 박아 페인트칠해 놓고 그것을 신이라고 섬기고 거기다 빕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도끼로 찍어도 말도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도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다리가 달려도 걷지도 못하는 것이 무슨 신이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섬기면 왜 희한한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 우상에 귀신들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섬기면 집안에 각종 우한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멀리하시고 악령을 떨쳐버리십시오. 예수 이름은 악령의 세력을 향해서는 원자폭탄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시고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시고 확고한 믿음으로 굳건히 서시기를 바랍니다. 21세기에도 그런 우상에 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종교라고 합니까? 그러나 다니엘의 시선은 언제나 하늘의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천지를 지금도 운행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그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눈이 하늘의 하나님께 고정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갖가지 압박과 환란과 고통이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고 너희도 넉넉히 이기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기는 사람으로 승리자입니다. 그러므로 패배자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패배자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살아서도 안됩니다. 승리자가 승리하고 와서 인상 쓰고 다니며 슬프고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모든 압박을 이기고 신앙을 지키고 승리할 수 있다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다니엘은 성경 가운데 참으로 독특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 모두 위대하지만 잘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잘못이 있습니다. 자기 부인 사라보고 내 누이라고 거짓말하라고 했습니다. 모세도 성질을 내고 반석을 하나님이 가리키라고 했는데 두 번이나 때려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윗도 밧세바와 간음하고 밧세바의 남편을 간접 살인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지만 그의 말년에 많은 여자들을 데려와 그로 말미암아 우상이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허물이 있다는 기록이 하나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다니엘은 잘못했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얼마나 축복하셨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인간인데 왜 허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다 가려주셨습니다.
에스겔 14장 20절에 보면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사람 세 명의 이름으로 나옵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찌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세상이 다 망해도 노아, 다니엘, 욥은 자기의 의로 생명을 건진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것을 예언한 사람이 에스겔인데 욥과 노아는 오래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 예언을 한 에스겔과 동시대(contemporary)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동시대 사람인 다니엘을 놓고 이렇게 의로운 사람이라고 에스겔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다니엘 10장 11절에 보면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와 풀무 가운데 같이 들어갔던 예수님께서 다니엘에게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 다니엘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압박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드리고 있는 우리는 다니엘보다 더 큰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주시고 우리는 예수를 직접 믿어 구원받고 죄사함 받은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크신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바벨론 같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패배하지 않고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아가며 다니엘처럼 승리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