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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을 받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본문 ; 느헤미야 4: 1-14
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5.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하고
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7.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8.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9.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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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지도아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쌓기 시작하자 산발랏을 포함한 이방족속들은 이 공사를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성읍이 부강해 짐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기들의 영향력이 감소되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받아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을 증건하기 시작했지만 이 사역을 방해하고자 하는 적대적인 세력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은 원치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궤계와 술수를 써 하나님의 사역을 좌절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아무 어려움이나 반대를 받음이 없이 만사형통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 우리는 항상 박수와 갈채 그리고 칭송을 받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사탄의 방해와 어려움과 환난에 직면하리라는 것을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죽어 쓰러져 있는 시체는 발길로 차지 않는다고 D.L.Moody 목사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 반대에 직면한다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더욱 열심히 깨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벽공사를 반대한 사람들 가운데 먼저 산발랏이 있습니다. 그는 북쪽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이었습니다. 산발랏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도비야는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암몬족속의 지도자였고, 유대 남쪽 지방의 아랍사람의 지도자인 게셈, 또 유대 서부지방의 아스돗사람들도 연합하여 느헤미야를 대적하여, 그를 넘어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지도아래 예루살렘 성읍 사람들이 성벽중건공사를 시작하자 산발랏은 크게 격분하여 유다사람들을 비웃으며 자기 친구들과 사마리아 군인들 앞에서 2절에 보면 "이 미약한 유대인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는 유대인들을 연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계속하여 그는 말하기를
(1)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라고 비웃는 것입니다.
아무 재력도 없는 너희들이 성벽을 쌓아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겠는가?". 너희들은 할 수 없다고 도비야는 비웃습니다.
(2)"제사를 드리려는가?"
기도만 한다고 기적적으로 성벽이 쌓아지겠는가?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이 난공사를 너희들이 하루에 끝낼수 있는 쉬운 공사라고 덤벼드느냐?
(4) "노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하고 산발랏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의 돌들은 대부분 다시 사용될수 있었기에 유대인들이 쉽게 성벽을 쌓을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산발랏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산발랏은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우리는 할 수 없다. 자원이 부족하다. 주변 이방민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생각과 두려움을 갖게 함으로 성벽 쌓는 일을 포기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자기자신의 인간적인 조건과 외부상황을 바라보게 함으로 절망하도록 유도했습니다.
톰이란 어느 젊은이가 있는데 그는 성적인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항상 자기의 육신의 욕망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60년대의 히피족으로 배우자를 서로 교환하여 즐기는 소위 열린 결혼관을 가졌던 분들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어렸을 때 그의 집에는 주말마다 여러 부부들이 와서 자기 부모들과 함께 배우자를 교환하여 즐기는 성의 파티가 열렸고 마리화나를 비룻한 많은 마약들의 냄새가 집안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적으로 문란한 집에서 성장한 그는 부모로부터 아무런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성장했습니다.
톰도 성장하여 대학에 들어가서 성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다가 우연히 대학생 선교 단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음란한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 성결한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방안의 TV를 없앴습니다. TV를 보다가 성적인 충동을 받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도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옛날 삶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다가, 혹은 차를 운전하여 가다가 길에 있는 육감적인 여성을 모델로한 광고판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 발을 잘못 디뎌서 지뢰가 폭발할지 모르는 지뢰밭을 거니는 것처럼 다시 죄를 짓는 생활로 되돌아 갈까봐 매일 두려워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톰이란 이 청년은 너무나 내가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나 하는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관심을 죄보다는 하나님께 집중을 하여야 합니다.
나의 능력보다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사탄이나 죄보다는 그리스도께 나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로마서 8:5-6에 보면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죄와 정욕에 사로잡힌 삶을 이기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을 더욱더 생각하며 성령님으로 내 삶을 충만케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노력하여 육체의 정욕을 이기면 성령을 쫓아 사는 사람이 될것으로 생각하는데, 갈라디아서 5:16에 보면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에 충만하여 성령님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정욕을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서를 바꾸어서 내가 내 힘으로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이기면 성령님이 찾아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먼저 성령을 쫓아 행하게 되면, 육체의 욕심을 이길수 있다고 말합니다.
산발랏은 유대민족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생각하고 그들 자신을 바라보게 함으로 절망케하고, 벽 쌓는 공사를 포기케 하려 했습니다.
"너희는 연약하고 미미하고 힘없는 자가 아니냐, 이 공사가 하루에 끝내는 공사이냐, 너희들이 성벽을 쌓아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무너진 돌덩어리를 다시 사용할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할 때 느헤미야는 유대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끔 했습니다.
9절에 보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여" 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대민족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실망되고 절망될 때 나 자신이나 외부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능력과 권세를 얻게 됩니다.
시편 121편에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산을 향하여 눈을 들어 온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으로 부터 도움이 오는 것을 믿으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산발랏이 유대인들을 비웃고 비방할 때, 그에게 동조하는 암몬사람의 지도자 도비야도 3절에 보면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고 덧붙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정적인 사람, 악을 꾀하는 사람들은 함께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들끼리 모이고, 악한 사람은 악한 사람들끼리 어울립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악한 사람들의 무리와 어울려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지 아니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도비야는 유대사람들이 쌓고 있는 성벽을 바라보며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저들의 성벽, 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벽, 그 성벽은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벽을 쌓고 있었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성벽을 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벽을 세우고자 계획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로 이 공사의 지도자를 세우셨으니, 실제의 설계자는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따라서 산발랏과 도비야가 유대인들의 성벽쌓는 공사를 방해하고, 비난하는 것은 실상 하나님의 공사로 방해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행동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행위인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느헤미야는 기도합니다.
"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 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데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두지 마옵시며, 그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4-5).
"하나님, 저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고,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마시고, 그들의 죄를 못본체 하지 마옵소서" 라는 느헤미야의 기도는 많은 사람을 당혹케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5:44),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 죄를사하여 주옵시고" (마6:12) 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4)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기도하라고 했는데 느헤미야는 어떻게 저들의 죄를 용서하지 말아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인가? 라고 생각이 되어 질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죄를 용서하지 말아 달라"는 느헤미야의 기도는 개인적인 복수심에 불타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염려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방해하려는 음모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을 반대하여 하나님을 해하려는 행위이기에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공의와 의의 심판이 있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산발랏과 도비야의 조롱과 모욕을 받았을 때, 그는 곧 원수갚는 행동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암살단을 조직하거나, 유격대를 조직하여 한밤중에 기습공격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원수갚는 일은 하나님께 모두 맡기고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기도는 약한자의 현실도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받는 길입니다.
야고보서 1:5에 보면 우리 가운데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간구할 때 우리에게 후하게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되며, 사물을 하나님께서 보시듯이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지혜를 받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들의 영적인 전투의 한 가운데 투입시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욕과 공격, 비판을 받을 때, 우리는 곧 감정이 폭발하여 응수하고 복수하기 보다는 기도해야 합니다.
스윈돌 목사님은 "우리는 무릎 꿇고 기도할 때, 가장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도는 무적의 방패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상에서 죽어야 예수님의 생명이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들, 즉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죽은 자만이 예수의 생명을 맛보는 크리스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 교회에 그를 몹시도 괴롭히는 제직 한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괴로워 하나님께 그 제직이 교회를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목사님에게 "네가 죽으면 된다"고 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날부터 목사님은 날마다 죽는 연습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를 원했습니다. 권위의식, 정욕, 혈기, 교만, 나라는 자아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못박아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철저하게 자기에 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죽으니 이상하게도 그 제직도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 내가 죽으면, 나를 괴롭히는 원수도 죽게 됩니다.
그런데 나도 죽고 상대방도 죽으면, 나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게 되고, 상대방도 예수님의 생명을 얻게 됩니다.
내가 죽어야만 나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게되고 내가 죽어야만 예수 안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세계에서 가장큰 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잭 하일즈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나간 40년간 사역을 통해 원수가 되었던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나는 한 번도 여러분 때문에 기뻐해 본 적은 없지만, 이제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나를 미워한 것을 감사 드립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면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기에 때문입니다.
나를 욕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나를 욕하지 않았더라면 욕하는 자를 축복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례히 나를 이용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나를 무시하고 이용하지 않았다면, 나를 멸시하고 이용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때린 것을 감사드립니다.
나의 원수 된 그대여, 그대가 나를 때리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쪽 빰을 돌리는 것을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주님 말씀대로 내 마음에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고 살기를 거절합니다.
내 영혼에 원한을 품고 살지 않으렵니다. 나는 나를 저주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수를 만들고 싶으면 나 아닌 다른 사람한테 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싸우기를 원해도 나는 안합니다.
나를 미워하면, 나는 도리어 사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없었더라면 내가 하나님을 그렇게 깊게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를 더 많이 기도하게 만듬으로 나는 하나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하나님과 더욱 가까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나는 원수되었던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과 도비야 등이 주축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방해하고 음해 하자, 복수하고 싸우기 보다 먼저 무릎을 꿇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기도로 맡겼습니다.
원수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반대가 심해질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신뢰하며 백성들을 독려하여 공사를 계속해 나아갔습니다.
"이에 (우리가 반대를 받게되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 연락이 되고 (즉, 무너진 성벽들이 이제는 다 서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고는 (높이)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6절)
산발랏의 위협에 유대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성벽쌓는 일을 포기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힘써 성벽을 쌓아 높이가 절반 가량이나 되자 산발랏과 그의 동조자들을 서로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느헤미야는 9절에 보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라고 했습니다. 적대자들이 이제는 실제로 공격해 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느헤미야는 더욱더 힘써 기도하며, 무장한 보호병을 세워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우범지대에 사는 어느 그리스도인은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집을 지켜 주실 것을 열심히 기도했으니, 우리 집 문을 잠그지 않는다. 문을 잠그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도둑을 두려워 한다면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또한 문을 잠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실직을 했다면,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또한 여러 직장을 찾아다니며 일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주님은 활동하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다윗도 사울왕의 추격을 받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빨리 도피하려 몸을 숨기기도 했습니다.
추격이 심해질수록 그는 은밀한 곳에 몸을 숨겼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해야겠고 기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우리가 열심히 일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D.L. Moody라는 유명한 전도자가 대서양을 배를 타고 건너가는데 불이 났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께스에 물을 받아 나르며 불을 끄고 있었는데, Moody도 사람들 틈에 끼어 불을 끄고 있었습니다.
같은 일행중 한 사람이 "Moody 선생님, 선생님은 물을 붓지 마시고 저기 구석에 가셔서 하나님께서 불을 꺼주시도록 엎드려 기도하세요"라고 말하자 Moody는 "아닐세 나는 지금 물을 길어나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겠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도와 행동을 같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역과, 맡는 청지기의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 때로는 뜻하지 않는 오해도 받고 비난도 받고 우리가 조롱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령님께서 나를 온전히 주장하심으로 능력있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