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15-18
본을 보이는 사람들 / 백구영 목사
살전 1:2-8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것이 없노라
===================================================================
요즈음 신문지상에 "노블레스 오블리즈 (Noblesse oblige)" 란 말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 말은 프랑스 격언에서 유래한 "귀족의 도덕적 의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배 계층의 도덕적 의무"나 "지도계층의 정신적 의무"를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 사회는 모두가 "무엇이 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들도 많고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사람들도 많으며, 감독이 되고 싶고, 박사가 되고 싶고, 탈렌트가 되고 싶고, 유명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천지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드러내는 무엇이 되고 싶은 사람은 많으나 "무엇을 책임지겠다"는 책임 있는 사람은 드물다는데 우리 사회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블레스 오블리즈"는 자신의 기득권을 자기 이익 이상의 것을 위해 내 놓을 수 있는 행동이란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만,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의 귀족 리흐트 호헨 남작은 자신이 탄 전투기에 적군의 눈에 잘 띄도록 붉은 색을 칠하고 항상 최선봉에 서서 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 미망인을 남긴다는 것은 군인 귀족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여 독신으로 적기 80대를 격추시켜 "붉은 남작"이란 명예를 남긴 채 26세에 젊은 나이에 산화해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고 기피하는 것을 공익을 위해 기꺼이 짊어지는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즈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범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도 책임과 모범이 주제인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7:15-18절의 말씀은 요셉 지파의 책임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 요셉 지파는 자신들은 수도 많고 큰 지파인데 다른 지파와 동일하게 한 분깃만 분배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를 했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는 자신도 에브라임 지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들의 불만을 대담하게 처리했습니다.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네가 개척하라"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스스로 크고 능력이 있음을 자부하는 에브라임을 인정하면서 새 임무를 부여한 것입니다.
가나안땅의 철 병거를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네가 능히 쫓아내리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1:2-8절의 말씀은 신앙의 연조가 짧은 교회이면서도 모든 교회에 본이 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신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이였으나 이제는 이방 교회에 본이 되는 지도자의 입장이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소문이 각처에 퍼져 믿는 자의 본이 된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교회 창립 46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두분 장로님이 은퇴하여 원로 장로님이 되시고 네분 장로님이 취임 축하를 받으시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본이 되는 교회, 본이 되는 장로님이 본이 되는 교인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본을 보여야 할 것은 역사가 있는 믿음입니다.
여호수아 17:15절에 보면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신 말씀이 있고, 데살로니가 전서 1:2 상반절에 보면 "믿음의 역사"란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씀과 "믿음의 역사"란 말씀은 공통된 의미가 있습니다.
스스로 지도적인 지파의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과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자부심은 개척을 통해, 그 믿음을 역사를 통해 증명되어야 함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흔히, 우리가 믿음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의 조건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믿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고 동력이 되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은 하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관념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이며, 믿음은 영적인 책임을 다하려는 열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는 "믿음이 그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하였습니다.
어느 농촌 교회에서 비가 오지 않아 논밭의 작물이 모두 타 죽어가자 안타까운 마음에 산상에서 비 오기를 기도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모두 성경 찬송과 햇빛을 가릴 모자들을 들고나서는데 한 어린이는 우산을 들고나섰습니다.
교인들이 이상히 여기면서 넌 왜 우산을 들고 나왔니? 하니까 어린이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지금 우리 비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려 가는 거 아니예요?" 하더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치하고 우스개 소리처럼 들려지는 얘기이지만 이 얘기 속에는 역사 없는 우리의 믿음의 허상을 고발하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안전이란 미신이다. 세상에 안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위험을 피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모험을 택할 것인가? 허무를 택할 것인가? 두 길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는 길 밖에는 없다. 용기 있게 모험을 택하라. 이것이 믿음의 길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것저것 따지는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동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느 종교 연구기관에서 교인들의 신앙생활상태를 조사한 결과 100%의 교인들이 구원받기를 희망하면서도 교인 중에 20%의 교인이 주일을 지키지 않으며, 25%의 교인이 기도를 하지 않고, 35%의 교인이 성경을 읽지 않고, 40%의 교인이 교회의 의무를 행치 않고, 60%의 교인이 기독교 서적을 읽지 않고, 75%의 교인이 교회의 어떤 책임도지지 않고, 85%의 교인이 전도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있는 믿음의 본을 보이시는 장로님들이 되시고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본을 보여야 할 것은 수고가 있는 사랑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 중반절에 보면 "사랑의 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수고"라는 헬라어 "코프스"라는 말은 "희생"이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리신 것 같이 희생의 의미가 없는 사랑은 성서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미국 우표 중에 가장 히트를 한 것은 "사랑" 우표라고 합니다.
1973년에 발행되어 10년간 팔린 우표가 3억 3천만 매가 팔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원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원하는 사랑이 쉽게 성공하지를 못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의 사랑과 부부들의 사랑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기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희생이 있는 사랑은 받음으로 행복하기 보다 줌으로 행복하고 힘이 되는 사랑입니다.
믿음은, 때로 세상의 고난과 시련 때문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세상의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버텨서 서 그 시험을 이기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네 번째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어도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그물을 오른쪽에 던지라 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히 잡히리라고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밤이 새도록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던지리이다" 하고 미온적인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복종심에서 그물을 던졌던 것입니다. 믿음의 동기가 흔들릴 때 때로 사랑의 동기에 의해 믿음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사랑일 뿐 아니라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의무에 순종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가 있는 사랑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본을 보이시는 장로님들 그리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본받아야 할 것은 인내가 있는 소망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 하반절에는 "소망의 인내"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소망은 믿음과 사랑을 초월하는 은혜입니다. 세상의 시련과 고난이 믿음을 흔들고 온갖 역경이 사랑의 용기와 지혜를 지치게 할지라도 소망은 그 풍파를 넘어 본향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약속의 실현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 낙심될 때가 있고 사랑은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일시 상처로 남을 수도 있으나 소망은 미래의 영광을 눈앞에 보여줌으로써 믿음을 북돋아주고 사랑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바울 사도가 즐겨 사용하는 신앙생활의 3대 요소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무지개는 3가지 삼원색, 즉 빨강, 파랑, 노랑이 서로 섞여 영롱한 7색을 내는 것처럼, 믿음, 소망, 사랑은 서로 조화하여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소망이 없는 믿음은 형식이 되기 쉽고, 소망이 없는 사랑은 무력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언제나 믿음과 사랑에 종말론적인 역사와 수고를 요구하고 기쁘게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능력이며, 교회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이것이 택함을 받은 성도의 증거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이방인을 구분 짓는 증거였습니다.
사랑의 수고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거짓 교사를 구분 짓는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소망의 인내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유대인을 구분 짓는 증거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택함 받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택함 받은 증거는 무엇입니까?
믿음은 점점 관념이 되어가고 사랑은 점점 이기적 욕망이 되어가고 소망은 점점 눈앞의 이익 때문에 어두워져 가는 이때,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세상과 구별되어 신앙의 노블레스 오블리즈의 사명을 다하시는 장로님들이 되시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