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45, 수원정에서의 하루 (Ⅱ) - 전도사의 길
연단선님들의 순회를 마치고 용산 '수원정'에 복귀해서 나의 사수 갈렙목사에게 보고를 마치고 나는 용산 대로를 건너 철도병원의 뒤편에 있는 건물 2층을 전세로 얻어 확장 개점(?)한 '수원정 제2성전'으로 간다. 확장 개점 이후 부터는 이곳을 용산교회라고 불렀다. 이제부터는 그런대로 편안한 나의 시간이 된다.
오후 3시경부터 신도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기존 신도들이 새로 데리고 오는 예비 신도들에게 나는 이런 저런 진리말씀(세칭 동방교에서는 그렇게 말한다)들을 전한다. 꼭 내가 중2 어린학생시절에 세칭 동방교의 '사상8교회'에 처음 들어가 김인경 입다목사에게 귀담아 듣던 여러 가지 신기하기도 하고 신비스럽기도 하던 그 진리말씀들을 내가 하는 것이다.
오후 5시가 되면 모여있는 신도들을 정렬시키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야말로 어줍잖은 설교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신도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한마디 놓칠새라 열심히 메모하면서 말씀을 듣는 것이다. 세상은 말세라, 수다한 징표들을 갖다 붙이고 이제 곧 불바다가 되어 세상은 심판을 받게되고, 새하늘과 새땅이 내려올때에 성민들은 구원받아 휴거하여 그 천년왕국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라는 설교가 주축을 이루게 된다.
한없는 공포심을 불러 일으킨 후에 안전한 탈출구를 알려주고 화려한 미래를 약속하는 것은 모든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이 가지는 공통점이 아닐까. 오후 7시경에 늦게 온 신도들을 위하여 한번 더 예배를 드린다.
열심있는 신도들은 오후 5시에 참석하고도 기다렸다가 다시 한번 더 참석하고 마친후에도 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교제를 나누다가 오후 9시-10시경 모두 돌아가고 나면 나는 문을 잠그고 다시 '수원정'으로 돌아가 다른 일터에서 돌아온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들과 같이 허기진 저녁 한술을 뜨게 되는 것이다.
이때는 항상 배가 고팠다. 배를 채울 다른 방법도 없었다. 이때부터 자정 전후에 시작되는 마지막 집합시간까지 약간의 짬이 생긴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사람, 양말이나 빨래를 하는 사람, 구석구석에서 꾸벅꾸벅 조는 사람, 성경책을 보는 사람, 끼리끼리 모여 오늘 일어났던 여러 잡담들을 나누는 사람등 '수원정' 내부가 다소 어수선 해진다.
용산 '수원정' 내부의 중간쯤에 마루 한쪽을 들어올리면 조그마한 지하공간 하나가 나타난다.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비상 피난시설인듯 했다. 간 크게 이곳에 들어가 잠을 자는 대기자도 가끔 있었다.
어느날 밤인가 나는 수원정의 대문에 붙어있는 쪽문을 열고 나가 담옆에 세워져 있는 조그만 1톤 트럭에 올라타고 무작정 운전을 해 보고 싶었다. '수원정'의 대기자중에 운전수가 한사람 있었는데 그는 ‘호로’라고 흔히 부르는 천막을 차 위에 덮어 씌워 다른 대기처나 농장으로 사람들을 수송하고 같이 일하다가 저녁에 복귀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차의 키가 그대로 꽂혀 있는것이 아닌가.
운전대를 한번도 잡아 본 적이 없는 내가 옆에서 가끔 쳐다 본대로 그냥 키를 돌려 시동을 걸고 기어를 이리저리 움직여 악세레다를 밟고 골목길을 빠져 나갔다. 참으로 위험천만하고 막무가내였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런 돌출행동을 했는지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너무 긴장의 연속이라 정신이 헤까닥 했었던가, 어쨌던 차가 움직여 수십m를 가기는 갔는데 U턴이 되지 않는 골목길이라 Back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Back 기어를 넣을 줄을 모르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Back이 되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수원정'으로 돌아가 운전수 대기자에게 말하니 그는 기겁을 하면서 나와 같이 달려가 다시 차를 몰고 '수원정'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그의 이름도 잊었지만 자동차의 키를 잘못 간수한 그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었던지 그는 상급자에게 나의 행동을 보고하지 않았고 그가 만일 그날 상급자에게, 특히 김태문 삼손목사에게 그 사실을 보고 했더라면 나는 아마 반병신이 되도록 얻어 터졌으리라. 고맙다 운전수 친구야 . . .
이 이야기를 적다보니 옛일 하나가 생각난다. 초등학교 5학년 쯤이었던가, 산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인근동네에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거쳐 읍내로 들어가는 버스가 생겼는데 나는 웬지 그 버스를 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어린 학생이 차비도 없이 출발하는 버스에 훌쩍 올라 타 버렸다. 초등학교앞 정류소에 내릴려고 하니 차장 누나가 차비를 내라고 한다. 돈이 없던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대다가 그냥 울어버렸다. 차장 누나가 우는 나를 달래면서 그냥 내려 주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차에 얽힌 한토막 추억이다.
밤 12시 전후가 되면 집합싸인이 떨어지게 된다. 마지막 점호가 시작되는 것이다. '수원정'으로 들어와야 할 사람이 다 들어왔는가, 없어진 사람이 없는가 이때 점검하는 것이다. 미리 머리를 조아리고 줄지어 앉아있는 갈렙목사, 김태문 삼손목사등을 위시하여 여러 대기자들 앞에서 주로 양학식 베드로목사가 성경 찬송 한 두권 올려 놓을만한 넓이의 허리높이 정도되는 조그만한 탁자앞에 서서 ‘거어룩타아 십자아성에 문이 여얼려 부우름이여’ 하는 성가 1장을 선창하면 모두 따라 부르게 되고 그 소리를 듣고 미쳐 참석하지 못한 대기자까지 모두 모이는 것이다.
어떤때는 다정다감한 양학식 베드로목사인데 어떤날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쌍소리를 내뺏으며 군기를 잡기 다반사다. 하루일과에 피곤하여 졸고 있으면 어느새 다가왔는지 뺨따귀에 불이 나기 일쑤고 성경 찬송이 날아가는 것은 신사요, 앞에 있는 탁자를 불쑥 치켜들고 공중으로 날릴 기세다. 그가 자기도취에 빠지면 시간은 밤 1시를 넘기고 2시를 넘기기도 예사다. 그야말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난리 법석이 벌어진다.
일반신도(대기자들은 그들을 평성민이라고 불렀다) 들을 위한 낮시간의 집회와는 너무나도 분위기가 다른, 야밤의 대기자들 집합시간은 그야말로 칼바람부는 살벌한 동토(凍土)의 나라다. 낮시간에 잠간씩 들렀다 가는 일반신도들은 감히 상상도 못하는 해병대식 순검의 시간이다. 평성민들에게는 웃음을 띠고 자애롭게 표정관리를 하던 그들이 이렇게 돌변하는 사태를 그 누가 알겠으며 상상이나 해 보았으리요 . . .
마지막 집합을 마쳐도 끝이 아니다. 김태문 삼손목사가 구석으로 나를 부른다. ‘엎드려 뻗쳐’를 시켜놓고 어린아이 팔뚝만한 작대기로 인정사정없이 허벅지를 10여대 후려친다. 아파 죽을 지경이다. 웬지 내가 마음에 들지않는 모양이다. 이유는 모른다, 반항하면 더 두드려 맞는다. 차라리 빨리 두드려 맞고 끝내는 편이 낫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기록해야 겠다.
이제 경비순번이 남았다. 매주 지방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순회자들도 이곳에서 정신무장을 다시 하고 세칭 동방교의 각종 기관에서 일하는 대기자, 연단선님 순회자등 항상 10여명의 남자들이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 경비는 이들의 몫이다. 30분 정도씩 경비순서가 칠판에 기록되는데 제일먼저 들거나 제일 마지막에 순번이 드는 경우는 운수대통한 날이다.
오늘 첫 번째로 순번이 들면 내일은 다음 순번, 이렇게 주로 순서대로 돌아가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다. 한밤중의 중간쯤에 경비순서가 들게 되면 억장이 무너지는 날이다. 피곤한 육신을 이끌고 이곳 저곳으로 찾아 들어가 잠을 청하게 되는데 나는 주로 동쪽 골방하나에 들어가 부산에서부터의 친구인 D와 둘이서 잠에 골아 떨어지게 된다. 잠이 들기전 잠시 그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나는 주로 이노무 '수원정' 생활이 못마땅해서 늘 투덜거리는 쪽이었고 그는 항상 나를 달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같이 참아보자고. . .
내 친구 D는 낮에 주간기독교라는 세칭 동방교의 주간지 신문사에 나가 일을 보고 있었다. 당시 주간기독교 사무실에는 여러명의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있었다. 인연깊은 친구 D를 위시하여 나와 같은 또래인 청년신사 장현* , 부산에서 역시 빈집초월 (무단가출)해서 서울로 올라 온 친구 J, 역시 부산에서 빈집초월해서 서울로 올라 온 다정다감했던 여직원 김*원, 후에 내 친구 D의 안사람이 된 여직원 K, 훗날 내 친구 D와 애정의 삼각관계를 형성했던 여직원 Y 등. . . 이들은 모두 또 다른 대기처에서 일반 직원인것처럼 가장해서 출퇴근 하면서 섭외, 광고, 행정, 편집, 경리등의 업무들을보고 있었다. 당연히 모두가 무임금이다.
이들도 모두가 제각기 개인적으로는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빈집초월(무단가출)하여 대기처에 들어와 세칭 동방교에 충성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도 나처럼 개인의 이력과 경험이 복잡하겠지만 여하튼 모두가 좁은길(세칭 동방교)에 충성한다는 명분 하나만은 일맥상통해서 대기처 생활중에서도 가끔 만나는 기회가 되면 서로가 안부를 묻고 위로를 주고 받던 사이였는데 지금은 모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추억속의 사람들이다. 그중의 몇 명은 아직도 대기처안에 남아 세칭 동방교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 이들도 있다.
새벽 다섯시, 중간에 경비근무까지 마치고 잠든 피곤한 밤이 어느새 지나고 나면 마지막 순번의 경비를 서고 있던 대기자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기상∼’, ‘기상∼’을 외쳐댄다. 아. . . 제일 듣기싫은 소리다. 웬수같은 소리에 떨어지지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눈을 비비면서 그래도 일어난다. 새로운 하루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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