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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신자와 초보 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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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장코뱅 추천 4 조회 357 25.03.29 07:33 댓글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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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5.03.29 07:40

    첫댓글 여러 번 안내하였듯이, 위에 있는 포스팅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초신자는 그것조차도 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급자 이상이나 시간이 많은 분들의 더 다양한 이해를 위해서 추가 댓글과 주석의 내용을 첨부합니다.

  • 25.03.29 10:10

    네, 알고 있습니다.

  • 작성자 25.03.29 07:43

    서언 (마태복음 5:1, 2) - <매튜 헨리 주석>

    여기에는 이 설교의 일반적인 개요가 기록되어 있다.

    Ⅰ. "설교자"는 설교자들의 왕이시오, 그의 교회의 위대한 예언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셨으니, 그는 "세상의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예언자들과 세례 요한은 "능력 있게" 설교를 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이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그는 영원하신 지혜자로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으며," 그의 뜻을 완전히 아셨다(요 1:18). 우리는 앞 장 바로 끝 부분에서 볼 수 있었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병 고치심은 이 산상 설교를 위해 준비한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신적 능력과 선을 행하신 자로부터 가르침을 받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마도 이 설교는 그가 갈릴리에서 두루 말씀하셨던 설교들을 요약하거나 열거한 것인 듯 하다. 그의 설교 본문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이 설교는 그 본문의 전반부로서 판단과 실천에서 "회개하거나 개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말 3:7)라는 질문에 답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 작성자 25.03.29 07:44

    그는 이 본문의 후반부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그때에 그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천국이 무엇과 같은가를(13:)보여 주었다.

    Ⅱ. 이 산상 설교를 하신 "장소"는 갈릴리에 있는 산이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우리 주 예수님은 잘 갖추어진 곳에서 설교하시지 못하였다. 즉 그에게는 설교하기에 편리한 장소가 없었으며, 더욱이 "그의 머리를 둘 곳도 없으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온갖 지위와 명예, 안락을 누렸지만 그들은 율법을 그릇되게 와전시켰다. 그러나 진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우리 주님은 광야에로 내몰아졌으며, "산"보다 더 좋은 강단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산은 "거룩한 산"이나 "시온 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평범한 산이었다. 이러한 산에서 설교하신 것은 구약의 율법 시대에서와 같이 어떤 장소만이 특별히 거룩하지는 않으며, 만일 그것이 적절하고 편리한 곳이라면 "어디서나" 기도하고 전파해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해석하셨던 이 설교를 산에서 하신 것은 율법이 "산"에서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것은 기독교 율법의 엄숙한 선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차이는 있다.

  • 작성자 25.03.29 07:44

    즉 "율법이 주어졌을 때" 주님은 "산"위에 "내려 오셨으나," 지금은 "올라 가셨다." 그 때에는 "천둥과 번개로" 말씀하셨으나 지금은 고요하고 조용한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지금은 가까이 오도록 초청을 받고 있다. 아, 이 얼마나 축복스러운 변화인가! 만일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이 확실히 그의 영광이라면 복음의 영광은 모든 것을 능가하는 영광이다. 왜냐하면 "은혜와 진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기" 때문이다(고후 3:7; 히 12:16 등). "그들이 열국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갈릴리의 두 지파인 스볼론과 잇사갈에 대해 예언되었으며, 또한 우리는 이 "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리는 법을 배우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산은 "여호와의 산"이었고 여기에서 그는 우리에게 "그의 길을 가르치셨다."

    Ⅲ. "청중"은 그에게 나아왔던 제자들이었다. 마가복음 31장 3절 누가복음 6장 1절에 보면 그의 부르심을 받고 나아온 제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병만을 고치려고 그를 따랐던 사람들과는 달리 사랑하는 마음과 배우려는 열의를 가지고 그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 작성자 25.03.29 07:44

    또한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기꺼이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고(그는 온유한 자에게 그의 길을 가르친 것이다), 또한 그가 가르치신 것(이것은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을 알려고 했고 또한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일들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져야만 했다. 이 설교에 기술된 의무들은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성실히 수행되었다. 그러나 비록 이 설교가 제자들에게 행해진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많은 무리들"도 청종하였다. 왜냐하면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시내 산에서와 같이"(출 19:12) 백성들을 멀리 떨어지게 했던 일은 이 "산"에서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에게 말씀드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가 이 설교를 말씀하신 것은 "무리들"을 목표로 삼았다. 그가 기적들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무리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을 때 그는 그렇게 많은 무리들에게 가르칠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 작성자 25.03.29 07:45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물고기가 있는 곳에 얼마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복음의 그물을 던지는 것은 신실한 교역자들에게 좋은 격려가 된다. "무리들"의 광경은 설교자로 하여금 생기를 북돋아 주는데 이것은 그 자신이 칭찬을 얻으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을 주려는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야 한다.

    Ⅳ. 그의 설교의 "엄숙성"은 "낮으시니"란 말에 암시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종종 이야기체로 많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설교는 고정된 설교였다(kaqi,santoj auvtou/, 그가 앉으시니). 그는 청중들이 가장 잘 들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심판자가 입법자처럼 앉으셨다. 이것은 진지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이 언급되고 청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가 "앉으신"것은 "성경 말씀이 성취되려고 하기 위함이며"(말 3:3), "그는 연단사(금이나 은 등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처럼 앉아서 "찌꺼기, 즉 레위의 후손들의 부패한 교훈들을 정결케 하실 것이다. "그는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다"(시 9:4).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셨던 말씀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 작성자 25.03.29 07:45

    "입을 열어"란 구절은 욥기 3장 1절에서와 같이 히브리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에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이 설교의 엄숙성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즉 모인 군중에 너무도 많았으므로 그는 목청을 돋우어 평상시보다 더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그의 종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으며, "그들의 입을 여셨다"(겔 3:27; 24:27; 33:22).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자신이 직접 "입을 열어," 자유스럽게 "권세 있는 자와 같이" 말씀하셨다. 고대 교부들 중의 한 사람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입을 여시지 않고"가르치신 경우가 허다하다. 다시 말하면 그의 거룩하고 모범이 되는 생활로 "가르치신 것이다." 아니,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함으로써" 가르치셨으나 이제는 "그의 입을 열고 가르치심으로써" 성경이 말씀한 예언이 이루어졌던 것이다(잠 8:1, 2, 6). 지혜가 부르짖지 아니하느냐?─높은 곳의 꼭대기에서 부르짖지 아니하느냐? 또한 "그의 입술을 여는 것은 바른 일들이 될 것이다." 그는 약속을 따라서 그들을 가르치셨으니(사 54:13),

  • 작성자 25.03.29 07:46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학자의 혀"와(사 50:4) "주 여호와의 신"을 가지셨다(사 61:1). "그가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그들이 마땅히 미워해야 할 악과 그들이 마땅히 거처해야 할 선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사색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성향과 우리의 대화의 경향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복음의 때는 개혁(개심)의 때이다(히 9:10). 복음으로 우리는 개심 되어야 하며, 선하고 나아져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는 "경건함에 속한 진리"이다(딛 1:1).

  • 25.03.29 10:17

    @장코뱅 일반적인 개요라는 표현에 매우 공감합니다. 조용하게 말씀하지만 수준은 천둥 번개보다 더 높은 진리임을 믿습니다.

  • 25.03.29 16:31

    @노베 네, 공감합니다.

  • 작성자 25.03.29 07:50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 , 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한'(* )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 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한편,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Wellhausen)하거나

  • 작성자 25.03.29 07:50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 , 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 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10;9:6), 지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 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 작성자 25.03.29 07:51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시 37:1, 11, 22, 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신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 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시 42:2;63:1;107:9; 암 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 작성자 25.03.29 07:51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3:3, 5)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Alford).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의'(稱義)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 , 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 190 ff).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 작성자 25.03.29 07:52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벧후 3:13)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 )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 )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미이다(요 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5:7
    긍휼히 여기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 )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 )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 )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 )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 작성자 25.03.29 07:52

    발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그리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 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 1서 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 작성자 25.03.29 07:52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계기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5:8
    마음이 청결한 자 -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 )란 그리이스인들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 )나 '레바브'(* )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로 '가슴',

  • 작성자 25.03.29 07:53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 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정.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 )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와손타이'(* )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 )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 )와 '눈여겨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 )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

  • 작성자 25.03.29 07:54

    라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 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5:9
    화평케 하는 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 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 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 , 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 )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간의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 작성자 25.03.29 07:54

    회복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 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실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다(사 9:6, 7; 눅 2:14; 요 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 작성자 25.03.29 07:54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 없이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 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 작성자 25.03.29 07:55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 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 25.03.29 10:24

    @장코뱅 호크마는 늘 좋은 설명을 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옆에 놓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 25.03.29 16:43

    @노베 공감합니다!

  • 작성자 25.03.29 10:02

    <칼빈 주석>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눅 6:20.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누가는 단순한 은유를 사용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겪는 가난은 저주받은 것이 자복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마태는 그리스도의 의도를 더 분명하게 표현한다. 병으로 눌리고 고생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여전히 계속해서 교만과 잔혹함으로 부풀어 있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환난들에 복종하여 그 징계를 잘 견딤으로써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시키고, 내적으로는 겸손히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를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심지어 육체를 의지할 생각조차 완전히 비워 버리고서, 자신의 가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누가의 본문과 마태의 본문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에, "가난한 자"라는 호칭이 여기에서 역경(境)으로 말미암아 눌리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두 본문 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마태는 형용어구를 덧붙임으로써 복이 있는 자를

  • 작성자 25.03.29 10:03

    오직 십자가의 연단(crucis disciplina) 아래에서 낮아지는 법을 배운 자들로 국한시킨다는 것이다.

    마 5:3.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리스도께서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자기 백성의 마음을 부풀어 오르게 하시거나,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처럼 냉혹한 완고함 (ferrea contumacia)으로 자기 백성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지 않고, 이런 식으로 할 때에야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들을 이끄셔서, 그들로 하여금 영생에 대한 소망을 품고서 인내할 힘을 얻게 하신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 속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을 의지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낙심하거나 절망에 압도된 자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고, 이것은 그들의 심령이 교만하고 오만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온 말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부록(附錄) 또는 확증(確證)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의 통상적인 생각은 고생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고생은 끊임없이 슬픔과

  • 작성자 25.03.29 10:03

    "애통함"을 불러온다는 생각에서 생겨난다. 사람들은 “애통하는 것”만큼 복이나 행복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애통하는 자들“은 불행하지 않다고 단언하실 뿐만 아니라, "애통하는 것" 자체가 영원한 기쁨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심령을 준비시키고, 그들에게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참된 "위로”를 구하고자 하는 강한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복이 있는 삶을 사는 데에 기여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따라서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한다"(롬 5:3-5)고 말한다.

  • 25.03.29 10:36

    @장코뱅 칼빈의 애통함 설명이 묵상 본문과 잘 매칭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길들여진 사람이라서 칼빈은 애통함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 25.03.29 16:33

    @노베 공감합니다.

  • 25.03.29 10:39

    본문과 댓글을 통하여 애통하는 자가 복을 받은 이유를 잘 알게 됩니다. 익살 맞고 왼악하며 조롱하는 저급한 자들이 넘볼 수 없는 복된 상태에 이른 성도들의 축복을 잘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성자 25.03.29 11:46

    공감합니다. 좋은 댓글이십니다!

  • 25.03.30 16:10

    공감합니다22

  • 25.03.29 11:18

    말씀하신 것처럼 슬픔이 가지는 정화의 능력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는 순간 죄를 짓기는 어려운 것이 인간의 생리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조물주께서 인간이 얼마든지 회개하고 심령이 깨끗해지게 하는 작동 원리를 마련해 놓으셨군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슬퍼하던 사람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손을 위해 울라고 하셨는데, 인간의 처지가 애통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도 여실히 드러나네요.
    진정 천국을 소유하고 싶다면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미워하는 일에 휘말릴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타인을 위해서도 용서하고 관용을 베푸는 것이 결국 스스로를 돕는 일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미움과 원망과 분노에는 평안과 안식이 없지만, 회개와 용서와 긍휼히 여김에는 평안과 안식이 있군요.
    많은 고생과 시련이 인간의 교만을 꺾고 마음을 부드럽고 온유하게 만든다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의 단련이 천국으로까지 연결되니 놀랍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오늘 묵상의 내용에서 위로와 교훈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 25.03.29 11:30

    풍성한 댓글과 추가적인 좋은 분별에 매우 공감합니다.

  • 작성자 25.03.29 11:37

    회개의 작동원리를 잘 파악하시고 좋은 댓글을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 25.03.29 16:58

    좋은 댓글 써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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