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키 큰 남자가 모델처럼 성큼성큼 걸어온다.
그를 더욱 훤칠하고 당당하게 받쳐 올려 주는 건 ‘깔창’이다. 오직 키 높임을 위해 낮은 곳에서 고군분투한다. 깔창은 타고난 분수를 지키며 남몰래 주인의 신발 속에 포복해 있다. 전신을 다 바쳐 비지땀을 흘리는 깔창 덕에 남자는 한층 키를 세우고 있다. 다리가 약간 길어지면서 때깔도 스타일도 달라졌다. 무엇보다 용기가, 충천하여 쫙 펴진 어깨엔 힘이 팽팽하게 들어 있다. 으스대는 폼으로 봐서는 거침없이 폼생(生) 폼사(死)라도 할 자세다. 세상 고개를 넘고 넘어온 사람들의 눈엔 천연 범 모르는 하룻강아지 모습이건만 젊어 청청함이니 밉지 않다. ‘나, 이만하면 킹카 아닌감?’ 여우 같은 여자들이 그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어머, 최고예요!’ 늘씬한 꽃띠 여자가 홀씨 날 듯 나풀나풀 다가온다.
그녀를 더욱 쭉쭉 빵빵 상큼, 발랄하게 떠받쳐 주는 건 ‘킬 힐’이다. 높고 가늘며 뾰족한 굽이 보기에도 아찔한 구두다. 그 굽으로 가볍게 키를 업(up)시킨 여자는 낭창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각선미를 맘껏 뽐내며 발걸음이 경쾌하다. 또각또각 마침표를 매기듯 바닥을 찍는 구두 소리는 세상 길도 그렇게 뚫고 나갈 태세다. 인생의 찬란한 봄날인데 무엇이 두려우랴. 이 춘삼월 호시절에 행여 지나가던 바람이 그녀에게 ‘화무십일홍’이라며 시샘 섞인 말을 흩뿌려 본들, 이내 허공중에 묻힐 소리다. ‘어때요. 나 퀸카죠?’ 화사하게 핀 매혹적인 자태에서 엉큼한 남자들의 애가 마른다. “우와, 눈부셔요!”
그렇게 서로 잡히고 물린 여자와 남자. 장장한 해로의 길에 올랐다. 사랑의 세레나데로 황홀한 순간에 세상은 온통 장밋빛 이니던가. 남실대는 봄바람에 초록 싱싱한 나무와 방긋거리는 꽃향기는 얼마나 달달 하던가. 먹장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천둥 번개 요란한 날과 쓰디쓴 인고의 계절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은 머릿속에나 들어 있었을 뿐, 가슴속은 춤추는 음표들로 생의 찬가가 찰랑찰랑했다.
삶의 계단을 오르며 ‘깔창’과 ‘킬 힐’은 어찌 되었을까. 당차고 당당하던 행보는 자갈길에 미끄러지고 날카로운 돌부리에 채며 넘어지기 일쑤였다. 휘청거리다 미끄러지고 날카로운 돌부리에 채며 넘어지기 일쑤였다. 휘청거리다 깨어진 경우도 허다하다. 퍼붓는 빗줄기와, 야속하게 몰아치는 칼바람에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된 것도, 부지기수다. 요동치는 세파에 킬 힐의 굽은 사정없이 부러지고 깔창은 불안에 흔들리다 빠져나가곤 했다. 한때는 마음까지 곧추세우던 것 아니었나. 세상살이엔 가당찮게도 높은 굽이었고 세상 길은 갈수록 미지수였다.
수없이 흔들렸을 남자와 여자의 희망이 짐작된다. 조마조마한 삶의 번지 점프대에서 매정하게 툭툭 끊어지는 희망 줄에 가슴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을 테다. 그러면서 다시 걷고 또 걸으며 불면의 고통과 빛이 교차하는 사이, 어렴풋하게나마 세상 길 하나 체득했을지 모른다. 철없는 무모함으로 무심히 찍어 댄 구두 굽에 상처 입은 것들은, 없었는지 비로소 길을 돌아보았을 법도 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과 마음인들 달라지지 않았으랴. 신장 안에서 신발들의 이야기가 한창이다.
“삶의 가풀막을 기신기신 오르내리느라 중심 잡기가 쉽지 않았어.”
“정말, 내 몸도 비스듬히 닳았잖아"
“반질거리던 빛깔도 꼿꼿하던 풀기도 시름시름 빠져갔네.”
“그래도 굳은살박이인 주인의 발에, 우리만큼 착 달라붙는 게 있겠어?”
“이젠 높지도 낮지도 않은 굽으로 안정감을 주니 중년의 주인에겐 ‘딱’이지.”
“만만찮은 무게를 감당하며 체모를 지켜 주는 것들이 우리말고 또 있을까?”
손이 닿지않는 맨 위쪽 칸에는 ‘깔창’과 ‘킬 힐’이 얌전히 올려져있다.
“이봐, 주인이 우리의 존재를 영 잊었나 봐.”
“그렇진 않을걸, 삐걱거리는 무릎과 시큰대는 발목 때문이야.”
“허투루 착용했다간 맵시는 고사하고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겠지?”
“혹 객기를 부려 뒤뚱뒤뚱 민망한 모양새라도 연출해 봐, 분수를 모른다는 비아냥거림에 가슴은 에이고 어지럼증만 더할 테지.”
“세월만큼 냉정한 것도 없나봐.”
“그나저나 수평으로 누워 있다고 다 평화가 아닌걸.”
그래서인지 킬 힐과 깔창은 주인을 떠받치고 천방지축 활보하던 때가 그립다. 무기력과 무관심의 위피(蝟皮)에서 보면, 세상을 향해 도벌하듯 키를 세우는 동안은 생기 차랑차랑한 푸른 시절이지 않은가. 제바람에 까딱 나가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의 순간이면서, 날개 하나 돋을 듯 간질거리는 시간이며, 세상 길과 타협하지 않고 부풀어 보는 꿈의 시간대…….
누구나 한 번씩 가져 봤거나 지금도 마음속에 갖고 있을 우리들의 ‘킬 힐’이며 ‘깔창’이 아닐까.
성큼 성장한 조카가 큰이모인 나를 찾아왔다.
굽 소리도 선명히, 금방이라도 바닥을 박차고 날 듯이, 한껏 날렵한 킬 힐을 신고 있다. 미지의 세상 앞에 까치발로 선 그 아이를 보며 나는 ‘그 구두 위험하다’는 걱정 대신 활짝 웃음을 안겨 주었다.
“멋져라 봄!”
첫댓글
참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