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라 부르리까』(김운하 작사, 나화랑 작곡)는 「이미자」가 한창
전성기 때인 1963년 발표한 곡입니다. 「이미자」(1941년생)가
가수의 꿈을 부풀리게 된 것은 6.25 전쟁 당시 부산 피난시절
'백난아' 의 공연을 보면서였다고 합니다.
여고 시절 「이미자」는 ‘예능 로타리’ 란 방송 프로 그램에서 가요
부문 1등을 했읍니다. 당시 KBS 관현악단장으로 활동하던 작곡가
'나화랑' 에게 발탁되어, 1959년 데뷔곡 ‘열아홉 순정’ 을 취입
했읍니다. 그녀의 나이가 열 아홉이었읍니다.
이어서 1963년도에 『님이라 부르리까』가 히트하였지만 크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지방 무대의 무명 가수 측에 들던 「이미자」는 가수 5년차인 1964년,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노래 ‘동백 아가씨’ 를 만삭의 몸으로
취입합니다. ‘동백 아가씨’는 크게 히트하여 「이미자」는 물론이고
작곡가 백영호를 '톱 크라스'로 부상시킵니다.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가수 이미자의 콤비 시대가 열리게 되는 거죠.
'동백 아가씨'는 당시 35주를 주간 가요 베스트에 오르는가 하면,
레코드 판매가 1백만장을 넘어서는 등 1960년대 최고의 히트곡으로
기록됩니다.
'동백 아가씨'로 인기 정상에 오른 「이미자」는 황포 돛대(1964년),
울어라 열풍아(1965년) ,지평선은 말이 없다, 저 강은 알고 있다,
옥이 엄마, 빙점, 여자의 일생(1968년) 잊을 수 없는 연인, 서울이여
안녕, 평양기생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습니다.
작곡가 백영호는 "미자야! 너는 무슨 노래를 부르던 마이크 앞에만
세워 놓으면 제 맛이 나는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1967년도 부터는 작곡가 박춘석과 콤비를 이루어 히트곡을 대량 생산
합니다. 흑산도아가씨, 섬마을 선생님(1967년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황혼의 블루스, 그리움은 가슴마다, 삼백리 한려수도, 기러기 아빠,
아네모네, 한번 준 마음인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히트곡을 연발
합니다. 당시 「이미자」의 노래는 나오는 대로 히트 하였는데
‘엘레지의 여왕’이라 불렀습니다.
「이미자」의 노래 인생에 있어서 전반기는 주로 백영호와 콤비를
이루는 가운데 '엘레지의 여왕'으로 등극했다면, 후반기는 주로
박춘석과 콤비를 이루는 가운데, 한국인들로 부터 사랑을 받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국민 가수'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미자」의 노래는 음반이 560장. 취입곡은 2,069곡으로 한국가요
사상 레코드 취입을 가장 많이 했읍니다. 「이미자」는 1978년까지
10대 가수상을 열번 이상, 그 가운데 가수왕을 3번이나 수상했습니다.
한국 가요사의 황금기를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중반으로
봅니다. 이즈음의 대표 가수로는 남자 가수는 '배 호', '남 진', '나훈아'
이고, 여자 가수로는 「이미자」 뿐으로 거의 독주(獨走)를 합니다.
1980년대 중반 까지도 인기가 여전 하여, 인기 조사에서 당대의
'통기타'와 팝 계열의 가수들을 누르고 1위를 차지 하기도 합니다.
'한국 가요사'에서 20년을 정상에 있었던 가수는 '남인수'와 「이미자」
뿐입니다. 작곡자이자 음악 평론가 였던 '황문평'은 「이미자」를
"하늘의 묘음(妙音), 최고의 음성을 지닌 불멸(不滅)의 가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미자」는 한국적인 향수와 애환(哀歡)을 대표한 천재적 가희(歌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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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고 부르리까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참고 사는
마음으로만 그리워 마음으로만
사무쳐 애타는 가슴
그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
울어야만 됩니까 울어야만 됩니까
님이라 부르리까
당신이라고 부르리까
밤이면 꿈에서나 다정히 만나 보고
잊지 못하고 언제나 가슴 속에만
간직한 못난 이 마음
그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
울어야만 됩니까 울어야만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