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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3일 충무로역 근처 ‘공간채비’에서 열린 <민청학련 50주년 기념 회원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사진 제공 : 약자와의 동행TV).
2024년5월13일, 오후 3시부터 지하철 충무로역 근처 ‘공간채비’(서애로 1길 11, 충무로 헤센스마트 상가 201호)에서 ‘민청학련동지회’(상임대표 강창일 전 국회의원, 공동대표 임상우. 최철)가 <민청학련 50주년 기념 회원토론회>를 열었다. 주제는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의 민청학련 운동의 의의’였고, 약 50년 전, 1974년4월3일 발생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탄압사건으로 투옥당한 당사자 등 약 20여명이 공개적으로 자기들이 관련된 반(反)유신 투쟁을 직접 평가하는 자리를 마련하여 재평가 공론화를 시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지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정보부가 그린 그림에 의해 전에 인혁당 멤버와 현 유신반대 세력에다가 일본인을 가미하여 사실상 조작한 것이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의 관련자 180여 명이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된 사건이다. 2009년 9월 재판부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8명의 생목숨이 선고 7일 만에 사라지고 돌아온 사형수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박정권은 이것으로도 안되자 그해 8.15 전철개통식날 육영수가 죽는 비극까지 연출하게 만들면서 국면전환을 시도 이것으로 위기를 넘기고. 이어 1975년 4월 걷잡을 수 없는 데모사태에 드디어 월남패망이라는 카드가 나와 박정권을 살린다. 그 뒤 3년간은 이른바 단군이래 가장 잘나간다는 안정(?)된 상황이 연출되니 가장 극악무도한 암흑의 시기가 시작된다. 민주당 김영삼 까지 말려들어 녹아난다.
이에 다시 격분한 노동자,학생의 1978년 경제위기에서 벌어진 압구정 현대아파트 특혜분양등 문제점이 터져나오는 시기로 가다가 결국 10.26이라는 막장으로 끝이 나는 듯하였다.
이렇듯 민청학련이라는 사건이 주는 충격은 컷으나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 당사자들의 그 뒤 행적을 잘 분석하여보면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인가 알수도 있다.
이번 세미나는 그런 차원에서 반세기 전의 일을 회고 하여야 한다. 80년대 부림사건인지 뭔지 그것도 한달간 그들과 싸우며 보니 정보기관이 붙인 이름이라고 하여 웃어주다가 봉변을 당한 기억이 있다. 90년대 김영삼을 위해 만든 이른바 중부지역당도 그런식이다. 당원이라면서 서로 모르는 사이라니 그리고 남북 정보 기관의 짬짜미 문제가 있어다면 역사는 밝혀내고야 말 것이다. 그러면 과연민청학련이란 단체가 있었나? 인민혁명당이 있었나?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토론에서 왜? 죽은 8명의 이야기는 없는가? 물론 모른 사이니 그럴 것이지만 따져봐야 할 것이다.
아렇듯 동학혁명으로 부터 이어지는 저항의 역사는 오늘날 세계 10대 강국으로 가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다.
경북대 여정남 공원제막식 2010년 세월은 이렇게 흐르고 그들도 이제 아는 이가 없어질 수가 있다. 작은 기록이나마 남긴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사진 권오철
이날 토론회는 대부분 고희를 넘긴 이들은 약 3시간 30분 동안 이어진 진지한 토론에서 "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발제자 의견에 공감하면서도 각론에서는 적지 않은 시각차를 보였다. 예컨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기적적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이철 전 국회의원(동지회 초대 상임대표)은 발제문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가 발간한 <한국 민주화운동사> 2권은 민청학련운동의 의의에 관한 기술이 없고,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을 저급하며 미약한 운동으로 서술해 놓고 있다. 이는 같은 책 총론에서 ‘(70년대 유신)체제와 대결하는 고통스런 저항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한국의 반독재민주화투쟁은 그 대중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서술 등과 모순된다.”면서 수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지정토론자 반병률 ‘무돌국제한국학연구소’ 소장 겸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1911년 발생한 105인 사건과 유사한 구조 및 성격 등을 갖고 있는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한 반유신민주화운동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 동의한다.”면서도 "(저항)운동과 (탄압)사건은 구분해야 한다. 국민적인 높은 평가가 이루어지려면, 피해당사자들이 그 후에도 각 부문에서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사건당사자가 다수생존하고 있으므로 개인적, 단체적 행적이나 활동 등을 조사할 수 있도록 빨리 증언을 남기거나 역사적 진실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고 주문했다(첨부1 지정 토론문 참조).
이날 토론회 좌장은 민청학련사건 등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던 장영달 전 국회의원(동지회 제2대 상임대표)이맡았다. 이 자리에서 장영달 전 의원은 지난 3월 달 임기만료로 동시 퇴임한 신대균 공동대표와 함께 동지회가 수여하는 감사패를 받았다.
제2부 회원자유토론에서는 김택춘, 송운학, 이종구, 권진관, 박종렬, 최철 및 줌(zoom) 참석자 윤조덕, 김은혜 등이 잇달아 발언하면서 "발제문에 민청학련 등 반유신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민중민족민주 동시지향성, 대중적 지지요인과 부문별 확산과정 및 세계사적 공감연대동향 등을 간단하게 언급했거나 누락했다. 특히, 특정대학 편중적 서술과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표현과 용어 등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비판적 견해를 피력했다.
예컨대, 송운학 회원은 "민청학련은 저항과 탄압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과거 회고적인 평가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해야 한다. 1974년 4월 3일 최초로 배포된 유인물 중 하나인 <민중, 민족, 민주선언>에 유일하게 적혀있는 ‘민청학련’이라는 명칭을 유신체제가 신속하게 파악했다. 당일 저녁 박정희가 직접 이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사형 등 중형으로 엄벌할 수 있는 긴급조치4호를 즉각 발동하고, 심지어는 아무런 수사도 없이, 그것도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 배후에 불순한 공산주의세력이 있다고 단정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할 정도로 치밀하고 체계적인 사전조작계획과 탄압책을 마련할 수 있었던 과정 등을 밝혀내야 비로소 객관적이고도 종합적인 평가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송운학 회원은 "발제문에는 미래지향적 평가가 결여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공동체로서의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로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위기에 빠져있다. 이는 정치적 민주화는 물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민주화가 아직도 미완성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 출신이 초심으로 돌아가 <민중, 민족, 민주선언> 정신을 계승하여 무언가를 실천해야 한다. 특히, 개헌과 각종 개혁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세대가 민주화운동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첨부2 자유 토론문 참조).
한편, 상시적인 공법기관의 하나인 ‘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이하 민기사) 관계자도 이날 토론회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예컨대, 민기사 사료연구팀 선임연구원(역사학 박사) 고지수는 "2009년 민기사가 발간한 <한국 민주화운동사 2 : 유신체제기>는 2008년 집필이 완료되었다. 민기사는 향후 민주화운동사 수정증보판을 발간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오늘 지적받은 각종 한계와 비판 및 오류 등 토론내용은 물론 그동안 축적된 학계연구 성과 등을 최대로 반영할 예정”이라면서 최근 예산삭감과 조직개편 등을 겪고 있는 민기사 소식과 함께 온라인 민주화운동 사전(事典) 발간계획 등을 공개했다.
이날 토론회는 약자와의 동행TV가 생중계했고, 발제문은 신대균 제2대 공동대표가 초안을 작성한 뒤 이철 초대 상임대표가 수정·보완한 것이다.
당시 기사, 이 뒤로 또 수많은 조작 사건이 나왔다 사진 구글
참고로, 발제문 등에 따르면, 민청학련 사건과 연루되어 1천 24명이 수사를 받았다. 구속된 사람은 180명, 기소된 사람은 168명이다. 이들 168명 가운데 직접 관련자는 123명(학생 등 108명, 일반시민 13인, 일본인 언론인과 유학생 각 1명)이고, 그 배후로 조작되어 별도로 기소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이하 제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는 24명(8명에 대해서는 1975. 4.9. 사형집행, 나머지는 장기복역 강제), 사후에 기소된 자는 5명, 기타 긴급조치4호 관련 단일사건으로 각각 기소된 자는 16명이다.
수배된 자 등 이들 가운데 유명을 달리한 인사는 약 1/3에 달하며, 학생집단과 배후불순세력의 연결고리로 날조되어 사형당한 여정남 등 8명을 포함하여 제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21명, 나머지 관련자 45명 등 모두 66명이다. 이들 중에는 무료변론에 나선 홍성우, 황인철, 한승헌은 물론 이로 인해 구속된 강신옥 변호사, 지명 수배된 노병직, 오성숙, 조영래(변호사)와 조중래 형제 및 기소유예로 석방된 김혜숙 그리고 윤보선 대통령, 김관석 목사, 박형규 목사, 지학순 주교, 김지하 시인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사건 당시 성균관대 학생이었던 김수길과 한양대 학생이었던 심기화는 미혼으로 후손도 없이 이승을 떴다. 게다가, 심기화는 모진 고문으로 사망할 때까지 정신병에 시달렸다.
생존자 가운데 사건 당시 단국대 학생으로서 최연자였던 구충서 역시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미혼 상태에서 정신병원 등을 전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결혼했지만, 아직도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 등 약 10여명이 국가배상을 받지 못했다. 그밖에도 당시 외국인 시노트 신부와 오글 목사 등은 해외로 추방당했고, 우리나라로 유학하러 온 적지 않은 재일교포학생 등도 큰 피해를 입었다.
동지회는 작고회원 66인 전원과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는 회원 및 동안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추모하고 사과하며 감사하는 마음 등을 담아 이달(5월) 30일(목) 오후 4시부터 조계사 전통문화예술 공연장에서 50주년 기념식 및 작고회원 추모식을 개최한다. 이 자리에 정태춘 가수와 임진택 명인 등이 특별 출연하여 경건함과 엄숙함 등을 더할 예정이다.
이와 별도로 광주민청학련동지회는 5월 23일 오후 4시부터 광주 전일빌딩 4층 줌 회의실에서 광주시민 등이 동참하는 민청학련 세대와의 대화마당을 개최한다.
동지회 공동대표단은 "이들 행사를 통해 젊은 세대 등이 자기와 무관한 먼 옛날이야기처럼 듣거나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길 수 있겠지만, 오늘날 민주화가 고통스러운 희생과 운동 끝에 비록 불완전하나마 쟁취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렇듯 간고한 투쟁의 역사는 시대의 아픔으로 남아 있지만 그 의미는 크고도 깊다. 일부 관종형 운동가들이 그것을 아이템으로 자신을 내세우고 관직에 탐닉하면서 조직을 파괴하다 결국 변절의 길을 걸은 적이 있지만. 대다수의 양심적인 운동가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 표나지 않게 임무를 수행했기에 조용할 뿐이다. 그러나 저항은 아름답고, 투쟁은 위대했다. (글 권오철 기자)
아래는 2010년 당시 여정남 공원 이제 이분들 중 계시는 분은 몇명?
첨부 1. 반병률 교수 지정토론문
2024. 05. 13., 공간채비, 민청학련동지회 회원토론회 발제문에 대한 토론문
반병률(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 무돌국제한국학연구소 소장)
1. "민청학련운동 5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민청학련 선배들과 이 뜻깊은 50주년을 기념하는 토론자리를 함께할 수 있어서 참으로 큰 영광입니다. 선배 여러분들께서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선 저를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75학번으로 이른바 긴급조치9호 세대입니다. 1977년 12월에 이른바 서울대 인문대 시위 및 유인물 배포 미수사건으로 체포되어 1년 징역을 살았고, 석방 후에는 병역문제대책위원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징집영장을 거부하고 도피생활 중에 체포되어 병역법위반으로 체포되었다가 10.26으로 박정희가 죽은 후에 집행유예를 받아 석방되었습니다. 5개월 정도 구치소 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은 후 한국근대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로서 한국외대 사학과에서 교수로 활동하다가 지난 2021년 8월에 은퇴를 했습니다. 제 전공분야는 한국근대사 특히 러시아와 만주지역의 한국독립운동사, 그 가운데서 사회주의운동사를 전공했습니다.
++ 1910년대 일제가 자행한 105인사건과의 비교(체제고착화를 위한 광범위한 조작. 이후 운동의 pool 형성, 미국의 영향, 변절인사들 존재 등)
2. 제가 오늘 토론회에 참여한 것은 오늘 자리를 함께한 장영달, 신대균 등 선배님들이 주도던 프로젝트(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연구원으로 참여했던 인연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신대균 선배님이 강조한 바, 프로젝트의 취지와 목적은 민청학련운동에 대하여 재평가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오늘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철 선배님의 발표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2009년에 간행한 『한국민주화운동사』에서 "민청학련운동의 의의를” "민주화운동사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민청학련운동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설명하기 위하여 발표자는, 민청학련운동의 경과를 1973년 10월 2일의 서울대 문리대 학생시위이후 학생시위, 성명서 발표, 단식 등 반유신운동과 국내외의 구속자 석방운동까지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매우 흥미롭고 인상적인 부분은 서울대 문리대 학생시위를 "민청학련운동의 기점이자 유신체제 붕괴의 기점”이라고 매우 적극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4. "운동”과 "사건”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 발표에서는 "운동”과 "사건”이 혼재되어 있어 용어 등 표현이나 해석과 평가에서 혼선이 있습니다. "민청학련운동”으로 볼 경우, 운동의 주체, 목적(계획), 실행, 성과 등을 분명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민청학련운동”의 시점과 종점이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1 : "1960년대 이래의 민주화운동세력이 최대 규모로 결집하여유신폭압정권과 충돌한사건이었고, 종교계, 언론계, 문화예술계, 지식인 등 사회 각 분야의 민주화운동 진영을 창출하여1979년의 10.26 유신정권 붕괴와 1987년 6월 항쟁으로 절정에 달한 대중적 민주화운동의 기반을 형성한운동이었으며, 한국민주화운동이 대중적 민주화운동에 이르는 발전과정을 거쳐 성공에 이른 운동이라고 할 때, 민청학련운동은 그 이전의 학생운동 위주의 민주화운동에 사회 각 부문의 민주화운동을 추가하게 하여대중적 민주화운동의 토대를 형성하게 한 계기가 된 운동이었다. (발표문, 6쪽)
"학생운동세력, 종교계 세력 및 대학교수, 구제도 정치인이 참여하여”(발표문, 7쪽)
예2 : 제대로 된 서술로 소개한 바, "2021-22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민청학련 특별전시회 해설문”(필자-당시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은 전체적으로 적절한 설명이다.
"이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이끈 청년층과 박정희정권을 비판해온 지식인, 양심적인 종교인 등은 학생들과 합세해거국적 인 반유신운동을 계획했다.(발표문, 9쪽)
‘운동’의 주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당국의 탄압의 결과(‘사건’)으로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 아닌가? 최대 규모로 결집하여 유신폭압정권과 충돌? 학생운동 선배 세대 지도력의 가담이라는 점에서는 적합한 표현이나, 각 부분의 민주화운동세력의 결집은 당국의 탄압의 결과로 된 것이 아닌가. 사회 각 분야의 민주화운동 진영 창출 역시, ‘민청학련운동’의 주체들이 목표로 계획한 것이 아니라 탄압의 결과로 파생된 것이 아닌가?
5. 『한국민주화운동사』에서 반유신운동이나 민청학련운동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점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6. 민청학련운동의 의의로서 제시된 바, "민청학련 구성원들이 이후의 민주화운동에 지도력으로서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도력의 재생산에도 기여하였다.” 1970년대의 각 사회 재야 부문운동의 확대와 강화, 1980년 광주항쟁, 1980년대 각 부문운동의 형성, 1987년 6월항쟁 등.(발표문, 11쪽).
이를 실증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사후에 사건에 연루되어 탄압을 받았던 학생운동 등 각부문의 인사들이 사건 후에 지속적인 활발한 활동을 함으로써 가능. 이에 대한 연구 필요. 개인적, 단체적, 행적이나 활동 등이 조사, 연구, 발굴, 정리, 조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 통일운동. 민족적 반외세운동으로서의 남민전 등 운동에서의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활동
기타 질문들:
1. 당국의 "탄압기도와 비판 여론에 의한 탄압 철회의 패턴”이 유신체체 전 기간에서 남산부활절연합예배 사건(1973년 4월), 서울대 문리대 시위사건, 민청학련사사건 등 3개의 사건에서만 발생하였다. (발표문 4쪽) 그 이유는?" (이 3사건에서만 "탄압기도와 탄압 철회의 패턴”이 일어난 이유는?) – 초기? 예상치 못한 것?, 내외 비판 여론?
2. 학생운동 지도력들의 범세대적 결집(발표문, 5쪽) 60년대 학생운동의 선배들이 가세하게 된 이유?
첨부 2. 송운학 회원 자유토론문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의 민청학련 운동의 의의>(발제문) 관련 토론문
2024.05.13. 송운학
오늘 토론회 주제는 평가와 관련된 것입니다. 평가는 평가주체와 평가시기 및 평가시각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특정사건의 당사자 또는 관련자 시각과 전문가 또는 연구자 입장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당사자집단의 동질성과 이질성의 조합비율은 물론 이념적, 사상적, 조직적 주류 여부 등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토론회가 서로 다른 시각과 입장 등을 진솔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하나의 통합적인 국민시각이 만들어지는데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유신반대투쟁의 하나라는 성격과 함께 그 투쟁에 대한 과장, 허위조작, 고문날조, 과잉탄압이라는 성격 등을 동시에 갖고 있는 민청학련 사건을 운동사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사자로서는 그것을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에 기초하여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 국민이 살아가고 있는 경제생활에 기초하여 민청학련 사건을 포함한 민주화운동을 재평가하고, 부족한 점을 성찰하고, 채워나가자고 굳게 다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인 민주화가 정치민주화로 한정되기 어려운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정치적 민주화가 이미 완성되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검찰독재라는 말에 더 많은 국민이 공감할 정도로 우리나라 정치민주화는 무언가 큰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해졌고, 87년 이후 여러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일구어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국민이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올바른 평가를 내리려면, 미완성 정치민주화가 각각 미완성 상태에 있는 경제적 민주화, 문화적 민주화, 사회적 민주화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평가할 필요성이 제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직접 오신 선후배님들은 물론 줌(Zoom)으로 참석하신 여러 동지님들처럼 민주화운동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었던 많은 분들이 학생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 환경운동 등에 각각 적극 동참하여 때로는 앞장서서, 때로는 뒤에서 우리나라를 보다 민주적인 사회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자 각각 성실하게 노력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몇몇 분들은 정치에 투신하여 여러 차례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국민은 차별성과 독자성, 진정성과 신뢰성, 청렴함과 유능함 등에서 기존정치인들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요컨대, 민주화운동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가능해졌다는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민주국가가 된 것이 분명합니다. 절차상 민주화, 형식적 민주화는 어느 정도 완성되었습니다. 게다가, 우리 민청학련 세대를 포함한 60대 이상의 고령층은 거의 대부분 춘궁기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절대빈곤 시대를 거쳐 고속도로와 마이카, 메모리 반도체 강국 등으로 상징되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나라 국민다수가 또는 적어도 상당수가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각종 고통과 불행 및 비극 등에 시달려 왔고,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예측된다는 사실입니다. 시간관계상 자세한 내용을 생략하고 압축적으로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대한민국은 상대적 빈곤이 고착되어 빈부가 대물림되고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세계 1위 저(低)출산율 국가이자 헬(hell) 조선 등으로 상징되는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구조적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인지 우리국민은 지금 서로 극심한 불신과 대립, 증오와 적대라는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헌법에서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공동체로서의 존립 가능성 자체가 다양한 관점에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민주화운동권이 기득권 세력의 일부라는 비난과 비판마저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모두 정당한 것도 아니며, 불순한 정치적 동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반론을 전개하여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일부비판을 정당하다고 시인하고, 구조적 양극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87년 체제가 분단반공독재세력이 붕괴한 뒤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주도 아래 자기진화과정에서 수립된 과도기적인 질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특히, 과도기적인 체제를 설계할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지배세력이 양보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매우 취약했기 때문에 선별적, 차별적 포섭만 가능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87년 체제는 약 3년 뒤 40주년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개헌과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고착될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가 반(反)유신 투쟁에 나서면서 요구했던 온전한 민주공화국에 어울리는 헌법은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힘찬 개헌운동, 개혁운동 등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민정학련 사건을 포함한 민주화운동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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