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짧은 글 긴 여운 ***
(1)
40대 후반의 김변호사는
어느 날 지인의 장례식장에
문상을 마치고 나오다가
다른 방 빈소에
유치원생 나이로 보이는 아이의
영정사진을 보았습니다.
조문객은 아무도 없었고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젊은 부부만
상복을 입은 두 개의 섬처럼
적막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김변호사는 조용히 들어가
아이의 영정에 분향하고
절을 한 뒤 상주인 부모에게
말했습니다.
“지나다가 사연은 모르지만
너무 가슴 아프고 안타까워
아이의 명복이라도
빌어주려고 들어왔습니다.”
(2)
50대 중반의 프리랜서 작가는
어느 날 자기 아내가 갑자기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린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내의 친구가
항암치료 때문에 삭발한 다음,
창피해서 외출을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
‘머리 깎은 한 사람은
쳐다보지만 두 사람은
안 쳐다본다’며
자신도
긴 머리카락을 친구처럼
빡빡 깎아버린 것입니다.
그 뒤로
시장이든 백화점이든
늘 함께 다녔습니다.
비구니가 되는 줄 알고
매일 좌불안석이었던
프리랜서작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3)
50대 중반의
중견 출판사 대표는
어느 날
골목에서 남루한 행색의
‘걸인’ 같은 사내를 보고
지폐를 꺼내 적선하려다가
멈칫했습니다.
돈을 불쑥 내미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때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사내의 등을 향해 말합니다.
"아저씨,
이거 흘리고 가셨어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는 척하며
적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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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한 장면처럼
이 세 사람의 따뜻한 일화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지만,
우리 주변에서 실제 일어난
마음따뜻한 얘기들입니다.
생면부지의 빈소에 분향하며
헌화했다거나,
암투병중인 친구를 위해
같이 삭발을 하는 용기있는 행동들,
‘걸인’의 자존심을 배려하며
도움을 주는 모습이
괜히 유별나고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비웃음을 사는 시대가 된건 아닌지
쓴 입맛을 다시게 됩니다.
요즘처럼
‘공감’과 ‘배려’가 크게
강조되는 시대도 드뭅니다.
그러나
대부분 먼발치에서
잠시 눈물짓고 잠시 슬퍼하는
것으로 공감과 배려를
‘소비’해 버립니다.
마치,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커피 브랜드를 마시는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공감과 배려는
브랜드가 아닙니다.
소비도 아닙니다.
값싼 동정은 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작은 감동의 생산이고
그 생산이 모여 감동의
연대를 이룹니다.
아이의 엄마는
낯선 조문객 하나 만으로도
세상이 따뜻했을 것이고,
암투병 환자는
삭발한 친구 하나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나았을 것이고,
‘걸인’은 일부러 자신의
‘떨어진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
하나만으로도
긴 터널 같은 일상에
잠시나마 빛 같은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세 분의 인품과 마음이
진짜 생산적인 공감과 배려의
씨앗입니다.
그 씨앗이 자라
우리가 사는 사회의 '희망'이라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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