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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가 김대성의 개인사찰로 둔갑한 까닭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19]
1. 불국시대(佛國時代)의 도래
성덕왕(聖德王, 702~737년 재위) 김융기(金隆基, 690년경~737년)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재위
36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며 통일 신라 왕국의 국세를 절정에 올려 놓는다. 마침 중국에서도 당(唐) 현종
(玄宗, 713~755년 재위) 이융기(李隆基, 685~762년)가 등극하여‘개원(開元, 712~742년)의 다스림’으로
불릴 만큼 중국을 평화와 안정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옛땅에서 발해(渤海) 왕국(698~926년)이 일어나고, 백제 피난민을 대거 수용한 일본은
찬란한 백제 문화를 기반으로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3년)의 번영을 누리기에 여념에 없었다.
이런 국제적인 소강상태를 충분히 활용하여 성덕왕은 나라를 부강과 안정으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삼국통일 과정에 삼국간의 쉴 새 없는 전쟁은 물론이려니와 중국과 일본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이 땅에서
싸우게 함으로써 200년이 넘는 동안 전쟁 없이 살아본 적이 없던 한반도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 동안 백제와 신라는 각기 자기 나라에 미륵보살이 하생하여 미륵불국토를 이룩함으로써 자신들을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미륵불국토 건설에 매진해왔다.
그래서 백제에서는 미륵하생시에 3회 설법으로 일체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는 ‘미륵하생경’의 가르침에
따라 익산 용화산 아래에 이 3회 설법을 상징하는 삼탑삼금당(三塔三金堂)의 구조를 가진 미륵사를 무왕
(武王, 600~640년) 초년경에 건립하였다.
백제가 미륵보살이 하생한 미륵불국토임을 표방한 것이다.
자신과 신라에서 유인해 온 신라 왕녀 선화공주가 미륵보살의 화신임을 백성들로 하여금 확신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신라는 선덕여왕이 하생한 미륵보살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를 왕위에까지 올려 그 권위를 인정하려
한다.
진흥왕(540~576년 재위) 말년경에 확장된 국경선을 지키기 위해 소년 군단을 창설했는데, 묘령의 미녀를
선발하여 원화(原花) 혹은 선화(仙花)라는 이름을 붙여 미륵보살의 화신(化身)임을 표방하면서 이들
소년군단을 이끌게 한 것이 그 발단이었다.
장차는 왕녀가 원화의 소임을 맡아 막강한 소년군단을 이루어갔던 듯하니, 석가모니불의 부모와 이름이
같은 백정반(白淨飯)과 마야(摩耶)부인이란 이름을 가졌던 진평왕(眞平王, 579~632년 재위) 부부 사이
에서 태어난 장녀 덕만(德曼) 공주(580년경~647년)가 그 핵심인물이었던 듯하다.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을 선덕여왕의 초상조각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덕만공주를 원화로 삼아 그를 중심으로 성장한 화랑도 1세대인 김유신(金庾信, 595~673년) 세대가
30대 후반이 되어 군권의 실세를 장악하니 미륵보살의 직접 통치를 표방한 여왕의 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백제가 미륵사를 대규모로 지어놓고 미륵불국토의 성취를 내외에 선전하며 민심을 사로잡아 신라를 맹공해
오는 데 대항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여주(女主)가 이렇게 미륵보살의 하생을 표방하며 군림하여 민심을 사로잡는 일은 이미 중국 북위(北魏)로
부터 비롯되고 있었으니 문명태후(文明太后) 풍(馮, 466~490년)과 영태후(靈太后) 호(胡, 516~528년)의
청정(聽政; 정치하는 일을 직접 듣고 처리함)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전례 없던 여왕이 된 선덕여왕은 그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보수적인 반진골(反眞骨) 세력들이 끊임없이 그 위상에 도전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을 필요가 있어 진골 출신 승려로 신라
불교계를 주도하던 자장(慈藏, 590~658년) 율사가 선덕여왕 5년(636)에 당나라로 건너간다.
장안 동북쪽의 오대산(五台山)에 머물러 살고 있다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나서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임을 확인받기 위해서였다.
2. 백제 미륵사 겨냥한 황룡사 9층목탑
자장은 오대산 북대(北台)에 모셔진 문수보살의 소조상 앞에서 기도하는 중에 꿈속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마정수기(摩頂授記; 이마를 쓰다듬으며 보통사람이 알 수 없는 사실을 미리 가르쳐 주는 것)를 받고 그
증표로 석가세존이 입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붉은 비단에 금점을 수놓은 가사) 한 벌과 석가세존의
정수리뼈와 치아 및 사리 백과(顆)등을 받아 가지고 온다.
마정수기의 내용은 선덕여왕이 찰제리종(刹帝利種), 즉 크샤트리아에 속하는 특수혈통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과거에 부처님으로부터 여왕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것이다.
자장은 이렇게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신라국왕이 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문수보살로부터 확인받고, 종남산 원향(圓香)선사로부터는 황룡사(黃龍寺)에 9층탑을 세우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온다.
자장이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하여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공표하자 나라에서는 황룡사에 높이 225척
(약 56.25m거나 68m)의 9층 목탑을 건립한다.
따라서 선덕여왕 14년(645) 3월부터 세우기 시작하여 다음해에 완공을 본 <황룡사구층탑>은 선덕여왕이
하생한 미륵보살의 화신이며 신라가 곧 미륵불국토임을 상징하는 조영물(造營物)이었다.
이로써 신라 사람들은 자신이 미륵불국토에 살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니 백제 사람들이
미륵사에서 미륵불국토를 확신하던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신라가 이 탑의 건립을 서둘렀던 것은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과 때를 맞추어 짓기 시작함으로써 이 황룡사
구층탑이 완성되고 나면 고구려가 멸망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쟁을 치르듯이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1년 만에 탑을 완공해냈다.
그런데 당 태종은 이 해(645) 2월에 수십만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낙양을 출발하여 5월에 요하를 건넌 다음
6월에 가서야 요동성(遼東城) 하나를 떨어뜨리고 곧바로 안시성(安市城)을 들이친다.
그러나 60일 동안 집중 공격해도 안시성이 끄떡 없자 9월에 들어 참패를 인정하고 회군해 돌아간다.
다음해 3월에야 장안으로 돌아온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이 불가능함을 깊이 깨닫고 윤 3월에는 요동성 점령
포기를 선포한다.
이에 신라에서는 황룡사 구층탑 건립의 의미가 무색하게 되어 미륵불국토 건설을 표방하던 선덕여왕 측근
혁신 진골 세력들은 반진골 보수세력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그래서 황룡사 구층탑이 완공될 즈음인 선덕여왕 15년(646) 11월에는 저들을 회유하기 위해 반동세력의
수장인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발탁해 들인다.
그러나 비담은 오히려 그 다음 해인 선덕여왕 16년(647) 정월 초승에 그 무리를 이끌고 명활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여왕이 잘 다스리지 못하니 이를 바꿔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전례에 없는 여왕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다. 이는 바로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믿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니 미륵불국토 건설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깨뜨리는 행위였다.
이에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화랑 출신 진골 수호세력들은 감연히 일어나 이 반란을 철저히 진압하고 반란
주동자들의 9족을 멸하여 그 씨를 말린다.
그러나 이미 68세쯤의 고령이던 선덕여왕은 이 반란의 충격으로 1월8일에 돌아간다.
이를 숨긴 채 반란을 진압한 진골 수호세력들은 신라가 계속 미륵보살이 다스리는 불국토임을 내외에 천명
하기 위해 다시 미륵보살의 화신인 원화(原花)를 여왕으로 추대하니 이분이 진덕여왕(眞德女王, 647~653년
재위)이다.
3. 미륵보살은 가고 미륵불 시대가 오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숙부인 국반(國飯, 석가모니불의 숙부 이름도 국반이다)의 따님으로 일찍이 선덕
여왕과 함께 원화가 되었던 분이라고 생각된다.
풍만한 용모를 가진 미인으로 서면 손이 무릎을 지날 정도로 긴 팔을 가진 특이한 신체를 타고났다고 한다.
이 역시 불보살이 지니는 32대인상(大人相) 중의 한 항목에 해당하는 것이니, 미륵보살이 될 수 있는 신체적
특징으로 받아들여져 여왕으로 모셔질 수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진지왕(眞智王, 576~579년 재위)의 장손자(長孫子)이자 진평왕(579~632년)의 외손자이며 선덕
여왕의 이질(姨姪)이던 김춘추(金春秋, 603~661년)가 진덕여왕 2년(648) 윤12월 당나라에 가서 당태종
이세민(李世民, 597~649년)을 면대하고 나서부터는 생각이 달라지게 된다.
미륵보살의 화신을 표방하는 정도로는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미륵불의 화신으로 등장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런 생각은 벌써 자장율사가 당나라를 다녀와서 바로 가졌던 듯, 자장이 귀국한 다음해인 선덕여왕 13년
(644)에 서남산 북쪽 봉우리인 삼화령(三花嶺) 위에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을 조성 봉안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삼화령미륵불삼존상>은 주불을 의좌상(倚坐像; 의자에 앉은 좌상)으로 표현하여 하생 성불한 미륵불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제 미륵보살의 시대는 가고 미륵불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표시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진덕여왕의 7년이라는 짧은 통치기간이 끝나자 용수(龍樹; 龍華樹의 생략어)의 아들인 김춘추가
하생성불한 미륵불의 자격으로 왕위에 등극한다.
처남인 김유신의 막강한 군사력이 이를 뒷받침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흥왕 이래 전륜성왕을 표방하며 미륵불국토의 현실 구현을 꿈꿔오던 신라는 진흥왕의 증손자인 김춘추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꿈을 이루어 미륵여래가 다스리는 미륵불국토를 현실에 구현해 내게 되었다.
그래서 신라가 곧 미륵불국토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백제와 고구려에 강력하게 대응하면서 당태종과
당 고종의 정복 욕구를 부추겨 결국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 재위기간(654~661년)에 백제를 멸망
시킨다(660).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등극한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년) 김법민(金法敏, 626~681년)은 당군의 힘을
빌려 고구려까지 멸망시킨다(668).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면 바로 삼국이 통일될 줄 알았던 신라는 당 고종의 영토확장 야욕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신라마저 당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할 위기에 직면한다.
미륵불국토의 이상을 구현하려던 신라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게 되었다.
결국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벅찬 감격을 누려볼 겨를도 없이 당군(唐軍)을 국토 밖으로 몰아내는 힘겨운
전쟁에 다시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래서 문무왕 16년(676)에는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요동성(遼東城)으로 옮겨가고
공주에 있던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가 건안성(建安城)으로 옮겨가게 되니 비로소 당태종이 김춘추에게
약속했던 대로 패수(貝水, 대동강) 이남의 땅이 신라 판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당은 끝내 옛 고구려와 백제 땅의 신라 영유를 공식 인정하지 않고 기회가 닿는 대로 이를 신라로부터
탈취하려는 야욕을 부린다.
이런 형편이니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고도 신라가 불국토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이 지내다 돌아갔다.
그리고 그 장자인 신문왕(神文王, 681~692년)이 등극하였으나 불과 11년이라는 짧은 기간 재위하며 통일
전쟁의 영웅들을 제압하느라 정력을 모두 허비하고 말았으니 역시 신라가 불국토라는 생각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미륵불국토의 현실 구현을 꿈꾸며 삼국 통일을 힘겹게 달성해 내던 초기 80여 년 세월은 신라가
미륵불국토라는 확신이나 자부심을 드러내 보일 겨를도 없이 어수선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차례로 극복해 나가는 중에 한반도 주변이 점차 소강 상태로 접어들어 국제적인
평화가 자리를 잡아가자 신라는 통일된 국세를 바탕으로 점차 강대국으로 성장한다.
성군(聖君)의 자질을 타고났던 성덕왕(702~737년 재위)이 36년 동안 통일 신라 왕국을 다스리며 나라를
안정과 부강(富强)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4. 신라 화엄종의 불국토 건설
그러자 성덕왕은 그 6대조 진흥왕이 꿈꾸던 불국토의 건설을 실현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조부 문무왕이 일찍이 통일 왕국의 주도이념으로 수용했던 의상(義湘, 625~702년) 대사의 신라
화엄종(新羅華嚴宗, 海東華嚴宗이라고도 한다) 이념에 따라 불국토 건설을 실현해 나가려 한다.
우선 신라가 불국토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신라 국토 안에 여러 보살의 진신(眞身; 육신을 벗어난
참모습, 각종 육신을 빌려 나타나 보이기도 함) 상주처(常住處; 항상 머무는 곳)를 설정하였다.
동해안 양양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의 진신상주처라 하고 , 평창 오대산(五台山, 淸凉山)은 문수보살의 진신
상주처이며 ,회양 금강산(金剛山)은 법기(法起)보살의 진신상주처라 한 것이다.
이는 실차난타(實叉難陀, 652~710년)가 측천무후(則天武后) 증성(證聖) 1년(695)부터 번역하기 시작하여
성력(聖曆) 2년(699)에 번역을 끝낸 ‘신역화엄경(新譯華嚴經)’에서 말한 내용을 신라 국토에 적용한 것이다.
‘신역화엄경’ 권45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북방에 머무는 곳이 있으니 청량산이라 이름한다. 옛날부터 여러 보살이 그 가운데 머물러 살았는데 현재
있는 보살의 이름은 문수사리(文殊師利)다. 그 권속인 여러 보살 1만 인과 더불어 항상 그 속에 머물러 있으
면서 설법하고 있다.
바다 가운데 머무는 곳이 있으니 금강산이라 이름한다. 옛날부터 여러 보살이 그 가운데 머물러 살았는데
현재 있는 보살의 이름은 법기(法起)보살이다. 그 권속인 여러 보살 1200인(‘구역화엄경’ 권29 보살주처품
에서는 1만 2000인이라 하였다)과 더불어 항상 그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설법하고 있다.”
또 ‘신역화엄경’ 권68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남방에 산이 있으니 보달락가(補洛迦)라 하고 저곳에 보살이 있으니 관자재(觀自在)라 이름한다.”
이렇게 ‘신역화엄경’에서 말한 여러 보살의 진신 상주처를 이미 자장율사(慈藏, 590~658년)나 의상대사
(義湘; 625~702년)가 확정한 것처럼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대산월정사오류성중
(臺山月精寺五類聖衆) 및 낙산이대성관음정취(洛山二大聖觀音正趣) 조에서 말하고 있다.
문수보살의 진신상주처가 청량산이라는 것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의희(義熙) 14년(418)
에 번역한 60권본 ‘구역화엄경’ 권29, 보살주처품에도 나오는 말이니 모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제보살 진신의 신라국 상주설이 일반에 널리 보급된 것은 성덕왕(702~737년) 치세 시대부터
라고 보아야 한다.
신라가 신라화엄종 이념을 바탕으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며 신라 불국토의 자존심을 확보해 가는 것이 이때
부터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의상대사는 신라화엄종의 근본도량인 부석사(浮石寺)를 건립하면서 금당(金堂)의 주불(主佛)을 <아미
타불 독존상>(제14회 도판 8)으로 모셨다고 한다.
통일 전쟁 과정에 무수하게 죽어간 망령(亡靈)들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당시의 신앙 욕구를 수용하기 위해서
화엄종에 정토(淨土)사상을 녹였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의상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스승 지엄이 다음과 같이 이르셨다. 일승(一乘)의 아미타는 열반에 들지 않아서 시방정토(十方淨土)로 몸을
삼으니 나고 죽는 모습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이르기를, 간혹 아미타와 관세음보살이
관정수기(灌頂授記)한 자들이 법계(法界)에 가득 찬 것을 본다고 하였다.”
만법귀일(萬法歸一; 만법은 하나의 근본으로 돌아온다)의 원융무애(圓融無碍; 원만하게 녹아들어 거칠 것이
없음)한 종지(宗旨)로 일체 불교를 융회(融會; 녹여서 한데 모음)하려는 신라화엄종의 통합적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는 내용이다.
그래서 종래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여왕을 출현시켰던 사실이나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망령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해야 했던 사실들을 모두 만법귀일의 신라화엄종지로 수용해 신라불국토 건설의
풍부한 제반 요소로 재현하게 되었다.
5.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구득한 김지성
성덕왕 5년(706)에 성덕왕이 돌아간 모후(母后)인 신목태후(神穆太后, 655~700년)의 추복(追福)을 빌기
위해 <황복사(皇福寺) 3층탑>(제15회 도판 6) 제2층 옥개석 위에 사리 4과(顆)와 높이 6치(寸)짜리 순금제
아미타불상 1구(軀), 즉 <황복사지3층석탑출현 금제 아미타여래좌상>(제15회 도판 10)과 ‘무구정광대
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권을 추가 봉안한 것이 바로 그런 일의 첫걸음이었다.
황복사는 의상대사가 19세(643)에 출가한 절이라 하니 의상대사의 출가 본사로 화엄종 사찰이 분명한데
신문왕이 돌아가자 그 미망인인 신목태후가 장자인 효조왕(孝照王, 692~702년 재위)과 함께 신문왕의 추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건립하고 신문왕의 초상조각이자 미륵불이라고 생각되는 순금 불상인 <황복사지3층
석탑출현 금제여래입상>(제15회 도판 7)을 만들어 탑 안에 봉안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화엄종사찰에 미륵여래를 모신 3층 석탑이 세워지고 다시 거기에 황금아미타불좌상과 ‘무구정광대
다라니경’ 1권이 추가 봉안된 것이다.
이로써 황복사가 점점 복합적인 성격을 띠어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측천무후 말년인 장안(長安) 4년(704)에 밀교승 미타산(彌陀山)이 번역한 것으로
번역되자마자 그 다음해인 성덕왕 4년(705)에 김지성(金志誠, 652~720년)이 사신으로 가서 구득해 온 것
이었다.
성덕왕은 갓 번역된 이 밀교 경전을 보고 그 경설(經說)에 심취하여 바로 그 내용대로 황복사 3층 석탑 안에
77소탑 그림과 이 경전을 봉안하면서 아울러 순금제 아미타좌상 1구도 함께 조성 봉안했던 것이다.
신라 화엄종 이념을 근간으로 하며 미륵신앙과 밀교 신앙을 모두 융회했다고 볼 수 있다.
성덕왕 18년(719)에 전대등(典大等) 김지성(金志誠)이 감산사(甘山寺)에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
(제16회 도판 1)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제16회 도판 2)을 거대한 규모로 조성해 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김지성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최초로 구득해 온 바로 그 김지성일 것이다.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의 광배 뒤에 새겨진 명문에서는 조상 공덕주인 김지성이 법상종(法相宗) 근본
경전의 하나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100권을 연구했다 했으니 현장(玄, 602~664년)이 문호를 세운
법상종 이념까지 혼효(混淆; 마구 뒤섞임)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유가사지론’ 100권은 미륵보살이 설(說)한 것을 무착(無着)이 편집하고 현장이 정관(貞觀) 22년(648)에
처음 번역해 낸 신역 경전이었다.
6.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배경
통일신라 왕국을 그 문화 절정기인 불국시대로 이끌어간 성덕왕은 개인적으로 매우 불행한 사람이었다.
3세경에 부왕인 신문왕이 돌아가고 11세경에 모후인 신목태후가 돌아가서 어린 시절을 고아로 보내야
했으며 형인 효조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 때는 13세쯤의 소년이었다.
다만 태종무열왕의 적장손(嫡長孫) 혈통이라는 사실 때문에 태종무열왕의 내외 혈손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
되어 그들의 구심점 노릇을 하게 되었을 뿐이니, 초기에는 저들의 세력다툼 틈바구니에 끼어 말못할 고통을
겪었다.
15세에 결혼하여 태자까지 생산한 첫 왕비 성정왕후(成貞王后)와는 27세 때(716)에 강제 이혼을 당하기도
했다.
뒤이어 외사촌 누이동생인 소덕왕후(炤德王后, 700년경~724년)를 계비로 맞이하여 두 왕자를 낳았으나
그 역시 25세쯤의 젊은 나이에 어린 왕자 형제를 남겨 놓고 타계하고 만다.
35세의 한창 나이에 상배(喪配)한 성덕왕은 어린 왕자 형제를 위해 재혼을 하지 않고 13년 동안 독신으로
지내다 돌아간다.
이때 남겨진 어린 왕자들이 효성왕(孝成王, 721년경~742년)과 경덕왕(景德王, 723년경~765년) 형제였으니
효성왕은 4세, 경덕왕은 2세쯤의 젖먹이였다.
자신이 고아로 자라난 성덕왕이 다시 30대 중반에 상처하여 어미 잃은 젖먹이 아들 형제를 보게 되었으니
그 참담한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래서 재혼을 거부하고 어린 왕자들의 양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듯하다.
그 결과 외척들에게 세력다툼을 벌일 명분을 주지 않게 되니 이후 성덕왕의 치세 시에는 정국이 안정되어
신라가 곧 불국토임을 실감할 수 있는 극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런 상황을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鍾銘)’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엎드려 생각건대 성덕대왕은 덕(德)이 산하(山河)와 같아서 그와 같이 높고 이름은 해와 달과 가지런할
만큼 높이 걸려 있다.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등용하여 시속(時俗)을 어루만지며 예악(禮樂)을 숭상하여
풍습을 바로잡으니, 들에서는 근본인 농사에 힘쓰고 시장에서는 넘치는 물건이 없었다.
당시 풍속은 금과 옥을 싫어했고 대대로 문재(文才, 글 잘하는 재주)를 숭상했다.
내 자신이 신령스럽다 생각지 않았고 마음에는 노인의 경계함이 있었다. 40여 년 나라에 임하여 정치에 힘썼
으나 한번도 전쟁으로 백성을 놀라고 어지럽게 한 적이 없으니 그런 까닭으로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만리 밖
에서 손님으로 찾아와 오직 교화를 흠모하여 바라다보았을 뿐 일찍이 화살을 날리려고 엿보지는 않았다.
연(燕)나라(昭王)와 진(秦)나라(穆公)가 사람을 쓴 것이나 제(齊)나라와 진(晋)나라가 패권을 번갈아 차지한
것과 어찌 바퀴를 나란히 하고 고삐를 쌍으로 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정치적 안정은 성덕왕이 돌아가면서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여 17세에 등극한 효성왕의 여자
관계가 도화선이 되어 척족들간 세력다툼이 반란 형태로 드러난다.
이를 제압하지 못한 효성왕은 결국 재위 5년 만에 척족들의 손에 비명 횡사한 듯하다.
이를 뒤이은 경덕왕(景德王, 723~765년)은 자못 현명하고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던 듯 이런 외척 전횡의
고리를 차단하려고 20세에 등극하자마자 자식 못 낳는 것을 트집잡아 김순정의 딸인 왕비 삼모부인(三毛
夫人)을 출궁시킨다.
폐립(廢立)을 자행할 만큼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자신의 처가이자 외가인 김순정(金順貞) 집안을 제압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조카딸 뻘인 서불한 김의충(金義忠, 670년경~739년)의 따님 만월부인(滿月夫人)을 맞아들인다.
경덕왕 2년(743) 4월에 결행한 일이다. 자신의 왕위 계승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비를 내쳐서
외척 전횡의 싹을 자른 다음 다시 그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인 것은 이 막강한 외척세력이 결사적으로
왕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한 현명한 처사였다.
경덕왕이 등극 초에 자신을 옹립한 외척 집권가문의 기세를 이렇게 가차없이 눌러놓자 효성왕 때 일시 흔들
리던 신라의 정국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이에 경덕왕은 성덕왕이 다져 놓은 튼튼한 기반 위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군림하여 절대왕권을 행사
하며 불국시대(佛國時代) 문화의 황금기(黃金期)를 이루어낸다.
우선 자신이 전륜성왕임을 내외에 표방하기 위해 전륜성왕의 자격이 충분했던 부왕 성덕왕을 전륜성왕답게
대접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왕릉을 스투파 형식으로 꾸미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입체상으로 조각하여 호석(護石) 주변에 돌려가며
세우고 난간석과 요도(繞道)를 상징하는 지면석(地面石)을 추가 설치하여 전륜성왕이나 불타의 탑묘와 같은
형식으로 <성덕왕릉>(제18회 도판 1)을 치장함으로써 새로운 스투파형 능묘제도를 창안해낸 것이다.
그리고는 부왕 성덕왕과 모후 소덕왕후의 추복(追福)을 위해 두 가지 큰 불사를 일으켜 불국시대의 최고
문화역량을 과시하고자 한다.
그 첫째가 봉덕사(奉德寺)에 봉안할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제17회 도판 10) 주조(鑄造)이고,
둘째가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의 조영(造營)이었다.
3세 때 돌아가 얼굴조차 알 수 없는 어머니 소덕왕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자식들을 위해 13년 동안이나
홀아비로 살면서 고독한 여생을 보낸 불쌍한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경덕왕은 이 분들을 위해 간절한 마음
으로 불사(佛事)를 일으켜 그 복을 빌어 드려야겠다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선왕을 위해 추복사찰을 짓고 그 초상조각을 주불로 봉안하는 것은 북위 운강석굴로부터 용문석굴의
빈양중동(賓陽中洞)으로 이어지고 최근에는 당 고종과 측천무후에 의해 <용문(龍門) 봉선사동>(도판 1)이
굴착되어 고종과 측천무후 및 왕황후가 <노사나불삼존상> 형태로 조성되고 있음에랴!
경덕왕은 이제 자신이 전륜성왕이며 신라가 불국토라는 사실을 천하에 과시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부모를 위한 추복사찰을 짓되 화엄불국세계(華嚴佛國世界)를 신라 땅에 구현(具顯)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투파 형식이 장엄한 부모의 능인 <성덕왕릉>이 있는 경주 동남쪽 양장곡(楊長谷) 주변의 길지
(吉地)를 찾아 토함산(吐含山)에 불국사를 조영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 당시 경덕왕의 심회는 ‘성덕대왕신종명’에 다음과 같이 극명하게 묘사돼 있다.
“그러나 사라쌍수에 누운 시기(석가모니불은 두 그루의 사라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들었다)는 헤아릴 수
없고 천추(千秋)의 밤은 길어지기 쉬운지라 (성덕대왕이) 돌아가신 이래 이미 34년이 되었다.
그 전에 아드님인 경덕대왕이 살아 있던 날 대업(大業)을 이어 지키며 모든 일을 살피고 어루만졌다.
그런데 (경덕대왕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어 해가 지날수록 그리움이 일어났고 뒤이어 아버지를 여의었으
므로 대궐의 전각에 임하면 슬픔이 더했다.
추모하는 정(情)이 더욱 처절해지고 혼령을 이익되게 하려는 마음이 다시 간절해져서 삼가 동 12만근을
시주하여 한 길쯤 되는 종 하나를 주조하려 했다. 그러나 뜻을 세워 성취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화엄불국세계의 구현이라는 것은 용문 봉선사동에서 부분적으로 시도되어 ‘구역화엄경’ 권2에서 말한 연화장
세계(蓮華藏世界)를 부분적으로 구현해 낸 적이 있다.
주불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이 오존상(五尊像) 형태로 표현되어 문수와 보현 양대 보살이 보살을 대표하고
가섭과 아난 양대 제자가 10대 제자를 대표하여 좌우에 시립해 있다.
그리고 여러 털 구멍에서 나오는 화신운(化身雲)을 상징하듯 화불(化佛) 입상이 각 벽면의 감실마다 가득
새겨져 있다. 입구는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사천왕 중 남북 양대 천왕이 한 쌍씩 문을 지키고 있으니 사천
왕도 대표로 넷 중 둘만 표현한 것이다.
경덕왕은 불국사 조영을 계획하면서 이 용문 봉선사동의 조형기반이 된 화엄 정신을 가장 면밀하게 관찰해
오게 했을 것이다.
그 결과 ‘화엄경’ 내용만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화엄불국세계의 구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일체 경전
에서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는 일체의 불국세계를 종합적으로 표출해 내는 것이 진정한 화엄불국세계의 구현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듯하다.
이는 바로 신라화엄종이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종지에 따라 일체 불교를 융회하려는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
었다.
그래서 화엄 불국토의 건설이라는 근본 원칙만 ‘화엄경’으로부터 취하고 구체적인 불국세계의 모습은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는 각 경전에서 따다가 조화롭게 배치하는 설계를 하게 되었다.
정녕 ‘화엄경’에서 얘기하는 제망중중(帝網重重, 제석천의 보배구슬망은 서로 아름다움을 반사하여 아름
다움을 몇 제곱으로 배가시킨다는 말)의 효과를 이루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통틀어
하나의 화엄불국세계로 설정하고 일관된 기획 아래 그 조영을 일사불란하게 이루어 갔으리라 생각된다.
7.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를 짓다
‘삼국유사 권5 대성(大成)이 2세 부모에게 효를 하다’라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량리(牟梁里, 浮雲村이라고도 한다)의 가난한 여자인 경조(慶祖)에게 아들이 있는데 머리가 크고 정수
리가 넓어 성과 같으므로 그로 인해서 대성(大城)이라 이름지었다.
집안이 가난해서 살아갈 수 없으므로 지주인 복안(福安)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니 그 집에서는 소작논 몇
마지기로 의식을 해결하게 하였다.
어느 때 점개(漸開)라는 승려가 흥륜사(興輪寺)에서 육륜회(六輪會)를 베풀고자 하여 복안의 집으로 시주를
권하러 왔다. 베 50필을 시주하니 점개가 축원하여 말하기를 ‘단월은 보시하기를 좋아하니 천신(天神)이
항상 보호하여 지키고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을 것이며 편안하고 즐거우며 수명이 길 것입니다’ 한다.
대성이 이를 듣고 뛰어 들어와 그 어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문에서 승려가 외는 소리를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을 수 있다 합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정녕 전생에 착한 일을 한 것이 없어서 이렇게 곤궁한 모양입니다.
이제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가난할 터이니 내가 소작 밭을 법회에 시주하여 뒷날의 보답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미도 좋다고 하여 점개에게 밭을 시주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대성이 죽었다. 이날 밤 나라의 대상(大相;
큰 재상)인 김문량(金文亮) 집에는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이제 네 집에 태어난다.’
집안 사람들이 놀라서 모량리를 찾아가 보게 하니 대성이 과연 죽었고 그날 외침이 있던 것과 같은 때였다.
임신이 되어 아이를 낳았는데 왼쪽 손을 꼭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여는데 금간자(金簡子; 금으로 만든
조각판)가 있고 대성(大城)이란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대성이라 이름짓고 그 어머니를 맞이해다 집안에서 아이를 함께 기르게 하였다.
장성하고 나자 사냥을 좋아하여 하루는 토함산(吐含山)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았다.
산 아래 마을에서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이렇게 따진다. ‘네가 어째서 나를 죽였느냐.
나도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겁에 질려 용서를 청하니 귀신이 이렇게 말한다. ‘능히 나를 위해서 절을
지어줄 수 있겠느냐.’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꿈에서 깨어나니 땀으로 이불과 요가 모두 젖었다.
이로부터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하여 그 잡았던 곳에 장수사(長壽寺)를 지었다.
이 일로 인해서 마음속으로 느낀 바가 있어 자비와 서원(誓願)이 더욱 독실해졌다.
이에 현생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佛國寺)를 창건하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창건하여 신림
(神琳)과 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를 청해다 각각 머물러 살게 했다.
성대하게 상설(像說; 불보살상과 불사에 필요한 각종 설비)을 베풀어서 또 길러준 노고에 보답하니 한 몸
으로 2세(世) 부모에게 효도를 한 것이다.
예전에도 듣기 어려웠던 일이니 보시를 잘한 영험을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차 석불을 새기려고 큰 돌 하나를 쪼아서 감실 뚜껑을 만들었더니 돌이 홀연 세 쪽으로 갈라졌다.
분하고 성이 나서 자는 척하고 있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서 조성(造成)을 마쳐놓고 돌아간다.
대성이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남쪽 잿마루로 달려 올라가서 향을 태워 천신을 공양했다.
그래서 그곳을 향령(香嶺)이라 한다.
그 불국사의 구름다리와 석탑에서 돌과 나무에 조각해 새긴 공이 동부 여러 사찰로서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옛날 시골에서 전해오는 얘기책에 실린 것은 이와 같으나 절에 있는 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덕왕대 대상(大相; 큰 재상) 대성(大城)이 천보(天寶) 10년(751, 경덕왕 10년) 신묘에 불국사 창건을 시작
했으나 혜공왕대를 지나 대력(大曆) 9년(774, 혜공왕 10년) 12월2일에 대성이 돌아감으로써 이에 국가가
이를 끝마쳐 이루어냈다.
처음에 유가(瑜伽) 대덕(大德)을 청해다가 마군(魔軍)을 항복받고 이 절에 머물게 했다는데 지금에 이르기
까지 이를 계속하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얘기와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일연(一然, 1206~1289년)이 ‘삼국유사’를 완성하던 때인 충렬왕 6년(1280) 전후한 시기에도 이미 불국사의
사적기(事蹟記)가 믿을 만한 것이 못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향전(鄕傳)에 실린 고담(古談)을 채록하고 그 말미에 사중기(寺中記) 한 토막을 실은 다음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하고 있다.
사중기(寺中記; 절에 있는 기록)가 얼마만큼 자세한 내용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향전에 실린 고담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기에 일연이 오히려 향전의 고담 내용을 전면 채록하고 나서 그와 다른 내용만 한 토막 실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애당초 불국사의 사적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그 창건시말을 이런 고담 형태의 전설에 의지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성덕대왕신종>과 같은 경우 일연이 직접 종명을 읽고 그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한 것은 현존한 종명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국사는 무언가 애매모호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중기’ 내용에서 대강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천보 10년(751)에 불국사 창건을 시작했으나 혜공왕(765~780년) 시대를 지나 대력 9년(774) 12월2일에
대성이 돌아감으로 이에 국가가 이를 끝마쳐 이루어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대력 9년이 혜공왕 시대 이후라고 착각하고 쓴 내용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는 혜공왕 시대에도 불국사의 완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후 원성왕(元聖王, 785~798년) 대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다. 원성왕릉인 <괘릉(掛陵)>(도판 2)이 바로 불국사 아래 토함산 산자락 끝에 있기 때문이다.
원성왕이 불국사 창건 시말을 분명히 밝혀 놓기를 꺼렸던 것은 바로 원성왕 자신이 성덕왕과 경덕왕의 혈통을
단절시키고 새 왕조나 다름없는 하대(下代) 왕조를 열어간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원성왕이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면 어째서 원성왕이 불국사 창건 시말을 밝히려 하지 않았는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겠기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관계 기록 중 일부를 옮겨 보겠다.
‘삼국사기’ 권10 원성왕 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원성왕이 서다. 휘(諱; 임금의 이름은 감추고 부르지 않는 것이므로 임금의 이름자는 휘라고 부른다)는
경신(敬信)이고 내물왕 12세손이다.
어머니는 박(朴)씨 계오(繼烏) 부인이고 왕비는 김씨이니 신술(神術) 각간의 따님이다.
처음 혜공왕 말년에 반신(叛臣; 반역하는 신하)이 발호(跋扈; 제멋대로 날뜀)하자 선덕왕(宣德王, 金良相)이
그때 상대등이 되어 임금 곁의 악인들을 제거하자고 먼저 부르짖었다. 경신도 이에 참여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으니 선덕왕이 즉위하자 곧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자 군신들이 뒤이을 일을 의논하고 왕의 조카인 주원(周元)을 세우자고 했다.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밖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閼川)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임금자리라는 것은 큰 자리라서 진실로 사람이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폭우가 하늘에서 쏟아지니 혹시 주원을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인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아우로 본디 덕망이 높아 임금의 자격이 있다.’
이에 뭇사람들의 의논이 일치하여 세워서 자리를 잇게 하니 끝나고 나자 비가 그쳤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2월에 고조인 대아찬 법선(法宣)을 추봉(追封)하여 현성대왕(玄聖大王)
으로 하고, 증조인 이찬 의관(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하며 조부인 이찬 위문(魏文)을 흥평(興平)
대왕으로 하고 부친인 일길찬 효양(孝讓)을 명덕(明德)대왕으로 했다.
어머니 박씨는 소문태후(昭文太后)로 하고 아들인 인겸(仁謙)을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 개성(開聖)
대왕 2묘(廟)를 헐고 시조대왕(始祖大王, 내물왕)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조부인 흥평대왕과 부친인 명덕대왕
으로 5묘를 삼았다.”
‘삼국유사’ 권2 원성대왕(元聖大王)조에는 이런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기술해 놓고 있다.
“이찬 김주원(金周元)이 처음에 상재(上宰; 최고위 재상)가 되고 (원성)왕이 각간이 되니 두 번째 재상 자리에
있었다. 꿈을 꾸니 복두( 頭, 벼슬아치들이 쓰는 관)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간다. 깨어나서 점을 치게 하니 이렇게 말한다.
‘복두를 벗은 것은 실직할 조짐이고 가야금을 잡은 것은 큰 칼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들어갈
조짐입니다.’ 왕이 듣고 몹시 걱정이 되어 두문불출(杜門不出; 문을 닫고 나다니지 않음)하고 있는데 그때에
아찬 여삼(餘三; 어떤 본에는 餘山이라고도 함)이 찾아와서 만나기를 청한다. 왕이 병을 핑계 대고 나가지
않자 다시 청하기를 한 번 보기만 하자고 한다.
왕이 허락하자 아찬이 이렇게 말한다. ‘공이 꺼리는 것이 무슨 일입니까.’ 왕이 꿈을 점친 일을 모두 얘기하니
아찬이 일어나 절하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길하고 상서로운 꿈입니다. 공이 만약 대위(大位; 임금
자리)에 올라서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풀어드리겠습니다.’
왕이 좌우를 물리치고 풀기를 청하니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두를 벗는다는 것은 사람이 윗자리에 없음이고 흰 갓을 쓴다는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며 열두 줄 가야
금은 12손이 대를 물릴 조짐이며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중으로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
왕이 이르기를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윗자리에 오를 수 있겠는가.’
아찬이 이르기를 ‘북천(北川; 閼川의 다른 이름) 신(神)에 가 몰래 제사지내기만 하면 됩니다.’ 이를 좇았더니
얼마 안 되어 선덕왕이 돌아가고 나라 사람들이 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아 궁으로 맞이해 들이려 했다.
(주원의) 집이 내의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나서 건널 수 없자 왕이 먼저 궁으로 들어가 즉위하니
상재(上宰, 김주원)의 무리가 모두 와서 이에 붙좇고 새로 등극한 임금께 절하며 축하했다.
이가 원성대왕이다. 휘는 경신(敬信)이고 성은 김씨이니 대개 꿈의 보응을 두텁게 받은 것이다.
주원은 명주(溟洲, 지금 강릉)로 물러나 살았고 왕이 등극했을 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 자손을 불러다
벼슬을 주었다.(중략)
8. 화엄불국세계를 구현한 토함산의 석굴암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동(西洞; 서쪽 골짜기) 곡사(鵠寺; 崇福寺의 옛이름)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碑)가 있다.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창건했다.
조부인 훈입(訓入) 잡간(干; 신라 관등 제3위)을 추봉하여 흥평(興平)대왕으로 삼고 증조인 의관(義官) 잡간
을 신영(神英)대왕으로 삼았으며 고조인 법선(法宣) 대아간(大阿干; 제5위)을 현성(玄聖)대왕으로 삼았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마질차(摩叱次) 잡간이다.”
이로 보면 원성왕은, 경덕왕의 아들이며 성덕왕의 손자인 혜공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장본인 중 한
사람으로, 자립한 후에는 경덕왕은 물론 성덕왕의 사당까지 허물고 자신의 조부와 부친의 사당을 대신 세워
새 왕조의 개창을 표방한 것을 알 수 있다.
성덕왕과 경덕왕으로 이어지는 전왕조, 즉 진흥왕의 혈통을 이은 순수 진골 왕통과의 단절을 표방했으니
경덕왕이 성덕왕의 추복사찰로 국력을 기울여 건립해온 불국사의 건립 시말을 자세히 밝힌다는 것은 원성왕
자신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사실을 공표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니 불국사 건립을 마무리지은 원성왕은 이를 공사 감독관으로 건립의 총책임을 맡았던 김대성 개인의
원찰로 둔갑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김대성이 양대 부모를 위해 그 추복사찰로 지은 것처럼 선전하여 민간에 그 얘기가 퍼지도록 하고
창건시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인멸시켜간 듯하다.
경덕왕이 성덕왕의 추복사찰로 국력을 기울여 지은 사실을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왕릉 자리를 그 불국사가 바라다보이는 토함산 끝자락에 써서 불국사가 마치 자신의
원찰인 듯 착각하게 했다.
그 결과 신라불국토 사상을 표방하기 위해 토함산에 화엄불국세계를 구현해 낸 불국사와 석굴암의 정확한
창건 시말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려 오늘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백인 백설로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고 있다.
세계 불교탑의 최고봉 불국사 다보탑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20]
1. 불국사가 구현한 화엄 불국의 세상
불국사는 경주시 중심에서 동남쪽으로 40여 리 떨어진 토함산(吐含山) 서남쪽 기슭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다. 토함산은 통일신라 왕국의 5방(五方) 중심 산악 중 동악(東岳)에 해당하는데, 일찍이 석탈해(昔脫解)
왕이 차지하여 석씨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선덕여왕 때 비담(毗曇)의 반란으로 석씨들이 거의 멸족당하자 그 소유권은 김씨 왕족들에게 돌아간다.
이에 선덕여왕 이후부터 김씨 왕들의 왕릉이 차츰 그곳으로 통하는 길목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드디어 문무왕이 월성군 양북면 용당리(龍堂里) 대종천(大鍾川) 입구 대왕암에 자신의 수중릉(水中陵)을
건설하기에 이르자, 태종 무열왕의 내외 혈손들은 동해구(東海口)로 불리던 감포 일대의 동해안에서
토함산을 거쳐 경주로 들어오는 지역 전체를 차지해 나가게 된다.
그래서 문무왕 이후 신문왕이나 효조왕의 왕릉이 모두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일대에 자리잡고, 성덕
왕릉은 더 동쪽으로 나가 토함산 서북쪽 줄기가 뻗어내린 양장곡(楊長谷)의 산자락 끝과 조양뜰의 너른
분지가 마주치는 곳에 모셔진다.
사적 28호 성덕왕릉
성덕왕릉은 경주역에서 울산으로 통하는 7번국도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있는 한국광고영상
박물관 동쪽의 철로 건너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능은 이후 신라 왕릉의 규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왕릉 양식의
시원(始原)이 되었습니다.
성덕왕릉의 밑둘레는 52m로, 봉분더미가 무너지지 않도록 아래쪽에 돌로 호석을 두르고,
12지상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바깥으로는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만들었고, 능 앞쪽에는 잘
다듬은 돌로 안상이 새겨진 상석(床石)을 설치하였습니다.
잘 다듬어진 높은 상석이 능 앞에 놓이기 시작하는 것은 이 능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경덕왕은 부왕과 모후가 합장되어 있는 이 <성덕왕릉>을 전륜성왕의 왕릉 제도에 합당하게 십이지신상을
곁들인 호석(護石)과 요도(褥)형 지면석(地面石) 및 돌난간으로 봉분을 장엄하게 꾸민 다음 전륜성왕의
추복사찰답게 완벽한 불사(佛事)의 건립을 기획하였던 듯하다.
일체 대·소승 경전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불국세계를 신라 화엄종의 만법귀일(萬法歸一)과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종지에 입각하여 한 가지 기준으로 융합해내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마치 하나의 태양 아래 산하대지(山河大地; 산과 강과 평야)와 숭산심해(崇山深海; 높은 산과 깊은 바다)가
각자 자태를 마음껏 뽐내며 서로가 서로를 빛내며 어우러지듯이, 일체 경전에서 말하는 불국세계를 신라
화엄의 질서 속에서 한자리에 모두 표출해보려 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신라가 일체 경전에서 얘기하는 그 불국세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자부심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실로 수많은 불국세계를 설정해 붓끝이 닳도록 기록하고 입이 아프도록 말
해온 불설(佛說; 부처님의 말씀)의 내용들이 이제야 신라 사람들의 종합적인 불교 이해와 창조적인 조형
정신을 통해 지상에 총체적으로 구현하게 되었다.
그래서 토함산 전체를 화엄불국세계(華嚴佛國世界)로 보고 우선 그 서남쪽 산허리에 당시 신라사람들이
가보기를 가장 염원하던 대표적인 불국세계를 한꺼번에 표출했다. 우선 현재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
(敎主)로서 우리에게 무수한 불국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가르쳐주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루어낸 불국
세계인 영산정토(靈山淨土)가 있어야 하니, 대웅전(大雄殿)을 중심으로 하는 한 구역의 불국세계가 그것
이다.
그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가는 과정에 무수하게 죽어간 영가(靈駕)들이 태어나기를 간절하게 소원
하였던 아미타불의 극락세계가 있어야 하니, 극락전(極樂殿)을 중심으로 한 대웅전 서쪽 구역이 바로 그
아미타불국토이다.
대웅전 구역 뒤로는 동쪽 언덕에 관음전(觀音殿)이 가장 높게 자리잡고 있다. 사바세계에서나 극락세계
에서나 일체 중생들의 고뇌를 해소해주는데 가장 앞장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이기 때문이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7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관세음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루어내는 영산정토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고, ‘불설관무량수경(佛說觀無
量壽經)’에서 말한 대로 아미타정토에서는 아미타불의 좌협시(左脇侍) 보살로 첫째 보좌역을 맡고 있으며,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도 53선지식 중의 하나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당시 신라 사람들의 관음신앙이 얼마나 열렬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구조다.
그 관음전보다 한 단계 낮게 비로전(毘盧殿)이 있어 ‘화엄경’에서 말하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상징
한다.
일승(一乘)의 화엄 종지로 여러 불국세계를 원융무애하게 조화시켜 제망중중(帝網重重; 제석천궁의 구슬
발이 서로 빛을 반사하여 무수한 아름다움을 몇 곱절로 발산하는 것을 일컫는 말)의 효과를 드러내도록
배후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 당시 아직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던 미륵불의 용화세계(龍華世界)가 빠져 있다.
혹시 지금 법화전 터로 추정하고 있는 극락전 뒤쪽이 용화전(龍華殿) 터로서 미륵불이 하생할 용화세계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2. 불국세계와 중생세계 구분하는 대석단
이렇게 된다면 이 당시 신라사람들이 가서 태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하던 모든 불국세계는 이 불국사
대석단(大石壇) 위에 모두 구현된 셈이다.
불국사가 화엄 불국사로 불리며 불국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절로 꼽히는 것은 여러 경전
에서 얘기하는 대표적인 불국세계를 총체적으로 구현해냈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우선 불국사를 다른 절과는 비교할 수 없게, 즉 불국사를 불국사답게 만드는 점이 불국세계와 중생세계를
나누어 놓은 대석단의 건설에 있다. 대석단은 전체적으로 보아 2단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 사바세계의 정토(淨土)인 영산불국토를 불국사의 중심구역으로 삼기 위해 이 터를 가장 높게
쌓아올리니, 그 아랫단이 백운교(白雲橋) 18계단 높이에 해당하고 그 윗단은 청운교(靑雲橋) 15계단
높이에 해당한다(국보 23호).
이곳이 대석단의 중심으로 정문이 설치된 곳이니, 백운교 18계단과 청운교 15계단 도합 33계단을 올라가면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자하문(紫霞門)이 나오게 된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기쁨과
축복의 다리'로 의 표현의지인 것이다.
아래로는 17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는데, 청운교(靑雲橋)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白雲橋) 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 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풀어주고 있다.
청운교(靑雲橋) 15계단 높이에 해당한다(국보 23호).
이 대석단은 동서로 뻗어가며 단 위의 불국세계와 단 아래의 중생세계를 나누어 놓는데, 서쪽으로 이어
지면서는 범영루(泛影樓)를 끝으로 그 윗단이 사라지고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아랫단 높이에 전개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랫단 높이를 다시 2단 구조로 나누어 놓으니, 그 아랫단은 연화교(蓮華橋) 10계단 높이에
해당하고 윗단은 칠보교(七寶橋) 8계단 높이에 해당한다(국보 22호). 결국 정문의 백운교 18계단 높이와
같은 평면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 위에 곁문인 안양문(安養門)이 세워져 극락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국보 22호 연화교(蓮華橋)와 칠보교(七寶橋)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은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청운교 ·백운교보다
규모가 작을 뿐 구조나 구성형식 등이 매우 비슷한데,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성이나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한 점, 다리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그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비슷한 구성 속에도 이 다리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연화교의 층계마다 연꽃잎을 새겨놓았
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동안 스쳐간 사람들의 발자국 탓에 많이 닳아서인지 조각이 희미
해져 있어, 지금은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
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대석단은 기본적으로 목조건축의 축조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 세계 석조건축사상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이다.
돌을 쌓아올리는데 돌 쌓는 방법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나무집 짓는 방법으로 돌을 쌓아올린 것이다.
기둥을 세우고 아래· 위에 방목(枋木)을 끼워 벽면을 만들고 그 벽면을 판석(板石)이나 잡석으로 채워나가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러자니 아래·위 단을 나눌 때는 보 끝 형태의 받침돌을 목조건축의 첨차(遮) 형태로 다듬어 빼내기도 하였
으니, 극락전 대석단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범영루 돌기둥에서는, 기둥머리를 높여 들보를 쌓아가기 위해 고안된 포작(包作)을 아래위로
맞붙여놓은 목조와 같은 장식성이 석조로 번안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목조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짜임새 있는 결구미(結構美)를 표출해 석조미술 특유의 딱딱하고 냉랭한
기운을 모두 거둬들였다.
<미륵사지 9층석탑>
이런 석축기법은 백제에서 비롯한 <미륵사지 9층석탑>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기법이 신라로 전해져
<감은사지 쌍3층석탑> 등으로 계승되다가 이곳 불국사 대석단 축조에 원용되었던 듯하다.
<감은사지 쌍3층석탑>
잡석으로 벽면을 채우는 방법은 <전(傳) 신문왕릉 호석> 축조 경험이 그 발상을 도왔을 것이다.
대석단 축조의 발상도 성덕왕릉의 호석을 첨가하는 과정에 얻은 묘안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석단 주변에 돌난간을 두르는 것은 성덕왕릉 호석 주변에 돌난간을 두른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난간을 두르는 것은 경계를 표시하여 출입을 통제하는 금지와 보호의 의미도 있지만 내부를 공개하여 과시
하려는 의도도 있으니, 난간이 있는 자리에 벽을 쳐서 시야를 가리는 것은 난간 설치의 본뜻에 위배되는
것이다. 입체조형예술은 만인에게 시각적 쾌감을 제공하는 데 조형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하문으로 오르는 백운교와 청운교는 계단 밑으로 각각 무지개 문을 설치하여 그 문으로 통행할 수 있게
했는데, 안양문으로 오르는 연화교와 칠보교에서도 연화교 밑에만 무지개 문이 나 있다.
칠보교는 8계단 높이밖에 안 돼 무지개 문을 내기에 너무 낮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본래 이 대석단 아래에는 칠보연지(七寶蓮池)가 있어 연꽃이 만발했고 그 사이로 배를 띄워 백운교와 연화교
아래 무지개 문으로 드나들었다 하나 아직 그 유구는 발굴을 통해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칠보연지는 반드시 이 대석단 밑에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구마라습이 번역한 ‘불설아미타경(佛說
阿彌陀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저 국토를 어째서 극락이라 하는가. 그 나라 중생은 온갖 괴로움이 없고 다만 온갖 즐거움만
받으므로 극락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사리불아, 극락국토에 일곱 겹의 난간과 일곱 겹의 구슬발과 일곱 겹의
가로수가 있는데 모두 네 가지 보배로 이루어져서 두루 주변을 에워싸니 이런 까닭으로 저 나라를 극락
이라 부르느니라.
또 사리불아 극락국토에 일곱 개의 보배연못이 있어 8공덕수(八功德水; 달고, 차고, 맑고, 가볍고, 깨끗
하고, 냄새 없고, 마셔서 탈나지 않는 물, 즉 일급수)가 그 안에 가득하고 못 밑바닥은 순금모래로 덮여
있으며 사방 계단은 금, 은, 유리, 파려()로 합성되어 있고 위에 누각이 있는데 역시 금, 은, 유리, 파려,
자거(), 붉은 구슬, 마노(瑪瑙)로 장엄하게 꾸몄으며, 못 속의 연꽃은 크기가 수레바퀴만한데 푸른색은
푸른 빛을 내고 노란색은 노란 빛을 내며 붉은색은 붉은 빛을 내고 흰색은 흰 빛을 내며 미묘하고 맑은
향기를 내느니라.”
3. 영산 불국토를 증표하는 다보탑
백운교 18계단과 청운교 15계단을 올라가 자하문을 지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 불국세계에 도달한다.
여기서 처음 마주치는 것이 대웅전 앞에 좌우로 벌려 서 있는 국보 20호 <다보탑(多寶塔)>과 국보 21호
<석가탑(釋迦塔)>이다.
바로 이 <다보탑>과 <석가탑>이 대웅전이라는 현판과 함께 이곳을 영산(靈山) 불국세계로 인정하게 하는
증표이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즉 ‘법화경(法華經)’ 권5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서 석가세존은 미륵보살의
청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여 영취산(靈鷲山), 즉 영산불국세계에 무수한 세월을 살면서 불국세계를 이루어
놓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대들은 여래의 비밀스럽고 신통한 힘에 대해 자세히 들으라. 일체 세간과 천인, 아수라가 모두 이르되,
‘지금의 석가모니불은 석씨의 왕궁에서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한다. 그러나 선남자여, 내가 실제로 성불한 이래로 이미 한량없고 끝도 없는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 지났다….
이로부터 나는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법을 전해 중생들을 이롭게 했으며 또 다른 곳의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국토에서도 중생을 인도하여 이롭게 하였다.
모든 선남자여, 이 중간에 내가 연등불(燃燈佛)의 일들을 말하였으며 또 그 열반에 듦을 말하였으나 이와
같은 것은 모두 방편(方便)으로 분별한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펼치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한량없는 겁을 지나온 이래 중생을 제도
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냈으나 실제로 멸도하지 않고 항상 이곳(영취산)에 머물러 설법하였다.
내가 항상 여기(영취산)에 머물러 있어도 여러 가지 신통력으로 삐뚤어진 중생은 가까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중생이 이미 믿고 따라서 곧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한결같이 부처님을 뵙고자 하며 목숨조차 아끼지
않으면 그때 나와 뭇 승려들이 함께 영취산에 나타나리라….
겁이 다하여 큰불에 모두 타는 것을 중생이 볼 때도 내 이 국토는 안온하여 천인(天人)이 항상 가득하고
동산 숲과 여러 집들은 갖가지 보배로 꾸며지며 보배로운 나무에는 꽃과 과일이 많이 달리고 중생들이
노는 곳에 여러 천인들이 하늘 북을 치면서 항상 온갖 기악을 연주하며 만다라 꽃으로 비를 내려 부처님과
대중에게 뿌리리라.”
그러니 영산 불국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에 현존하는 불국세계로 우리에게 불법을 가르쳐서
교화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상주처(常住處; 항상 머무는 곳)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러 불국세계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친근하고 중요한 불국세계이므로 불국사의 가람배치에서
가장 중심에 놓아 정문을 통해서 맨처음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이곳이 영산 불국토임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다보탑>과 <석가탑>을 대웅전 앞에 쌍으로
벌려 놓았다.
그 이유는 ‘법화경’ 권4 견보탑품(見寶塔品)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시자 그 앞에 높이가 500유순, 가로 세로가 250유순이 되는 칠보탑
(七寶塔)이 땅에서 솟아나온다. 이에 법회에 모여 있던 모든 회중(會衆)이 보탑에 공양을 올렸다.
그러자 보탑 속에서 소리가 나는데 이런 말이었다.
“석가모니 세존께서 ‘묘법연화경’을 설하시어 법을 가르치시니 이는 모두 진실이다.”
이에 무리 속에 있던 대요설(大樂說)보살이 석가세존께 그 까닭을 여쭈니 석가세존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득한 옛날 동방의 먼 나라인 보정국(寶淨國)에 다보불(多寶佛)이라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보살도를
닦으실 때 이런 서원(誓願)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성불하고 나서 멸도(滅度; 열반에 듦, 즉 돌아감)
한 후에 시방국토(十方國土; 모든 국토)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 있다면, 나의 탑묘는 이 경을 듣기 위해
그 앞에 솟아나서 증명하며 잘한다고 찬탄하게 하소서” 하는 내용이다.
이 말을 듣자 대요설보살은 이 다보불을 뵙고 싶다고 한다. 석가세존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다보불께서는 깊고 깊은 소원이 있으니, 만약 보탑이 ‘법화경’ 설하는 것을 듣기 위해 나타났을 때 다보불
자신의 모습을 대중에게 보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부처님의 일체 분신불(分身佛)
을 모두 그곳으로 모이게 한 뒤에라야 대중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석가세존은 이 말씀 끝에 대요설보살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눈썹 사이 백호(白毫)에서 솟아나오는 백호광
(光)으로 신호를 보내 사방 무수 국토에서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일체 분신불을 불러모은다.
헤아릴수없이 많은 분신불들이 모두 달려와 나무 아래 사자좌(獅子座)에 자리잡고 각기 시자를 보내 석가
모니불께 문안드리고 나서 보탑의 문을 열어주십사 하고 청한다.
이에 석가세존께서는 오른손으로 칠보탑의 문을 여니 성문을 여닫을 때 나는 것처럼 큰 소리가 나며 열리
는데 다보불은 사자좌에 앉으시어 선정(禪定)에 든 듯 몸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석가불께서 이 ‘법화경’을 설하시므로 내가 이 경을 듣기 위해 여기에 이르렀노라.” 모여 있던 대중은 헤아
릴수없이 많은 과거의 천만겁 전에 멸도하신 다보불이 이와 같이 말씀까지 하시는 것을 듣고 일찍이 없었
던 일이라 찬탄하며 하늘의 보화(天寶華)를 모아 다보불과 석가모니불 위에 뿌려 공경한다.
이때 다보불은 보탑 가운데서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석가모니불께 내어드리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석가모니 부처님이시어, 이 자리에 앉으십시오.”석가모니불께서는 이 청을 받아들여 보탑 안으로 들어
가서 그 반쪽자리에 앉아 결가부좌를 트셨다. 이렇게 두 분 부처님께서 칠보탑중의 사자좌 위에 결가부좌
하시는 것을 본 대중은 부처님들이 너무 높이 올라앉아 뵐 수 없으니 신통력으로 우리를 허공에 뜨게
하소서 하고 염원(念願)하니 대중이 모두 허공에 떠올랐다.
이때 큰 소리가 있어 대중에게 고하되, “누가 능히 사바국토에서 ‘묘법연화경’을 널리 설할 수 있겠느냐.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여래께서 머지않아 열반에 드실 터이므로 이 ‘묘법연화경’을 전해주어 세상에 남게
하고자 하심이다”라고 하였다.
4. 독창적인 불국사 다보탑
이런 내용을 조형예술로 표현한 것이 <다보탑>이다.
다보여래의 전신탑이라는 의미로 <다보탑>이라 하였는데 칠보로 장식된 화려하고 장엄한 탑으로 묘사되어
법화신앙이 팽배하던 남북조시대에 벌써 중국사람들이 다보탑을 널리 만들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당고종 건봉(乾封) 2년(667)에 혜상(惠祥)이 지은 ‘홍찬법화경(弘贊法華經)’ 권1에서 다보탑 건립기록을 찾아
볼 수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진(東晋) 애제(哀帝) 흥녕(興寧) 2년(364)에 혜력(慧力)이라는 승려가 건강(建康; 현재 남경) 와관사
(瓦官寺)에 돌로 다보탑 하나를 만들었다. 송(宋) 문제(文帝) 원가(元嘉) 5년(428) 팽성(彭城) 사람 유불애
(劉佛愛)가 건강에 다보사를 짓고 또 다보탑 하나를 지었다.
제(齊) 고제(高帝) 건원(建元) 원년(479)에 예주(豫州)자사(刺史) 호해지(胡諧之)가 종산(鍾山)에 법음사
(法音寺)를 지으니 사인(舍人) 서엄조(徐儼助)가 석조 다보탑 하나를 지었다.
당나라 국자좨주 소경(簫璟)은 난릉(蘭陵) 사람인데 양무제의 현손으로 누님이 수양제의 황후가 되었다.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집안 대대로 불법을 깊이 믿었으므로 수양제 대업(大業, 605∼616년) 중에 스스로
‘법화경’을 외우다가 경문(經文)에 의지하여 다보탑을 만들었는데 전단 향나무로 하였다.”
4세기 중반부터 혜상이 ‘홍찬법화경’을 지을 당시까지 300여 년 동안 중국에서는 다보탑이 끊임없이 조성
되고 있었던 사실을 헤아려볼 수 있는 기록이다.
이와 더불어 다보탑 안에 다보불과 석가모니불이 반자리씩 차지하고 함께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도 무수
하게 만들어졌다.
따라서 불국사 다보탑도 중국의 이전 역대 다보탑을 널리 참고한 다음 그 틀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독창성을
발휘해 만들어낸 것으로 보아야겠다. 현재 중국에서 기록에 남은 다보탑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아 전체 중국
다보탑 형식을 일괄해서 얘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운강석굴에서 보이는 다보탑은 한결같이 지붕과
탑신을 갖춘 일반형의 목조다층탑 양식으로 그 초층이나 3층 등에 <이불병좌상>이 조성되어 있다.
이와 비교해보면 불국사 다보탑은 그 조형적 연계성은 그만두더라도 다보탑에 대한 기본 이해에서 판이한
자세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불국사 다보탑은 중국식의 누각형 층탑개념에서 벗어나 스투파(stu-pa) 원형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우리 석탑양식의 진전 성과를 총체적으로 종합해내려는 의지가 표출된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이는 그 동안 성덕왕릉을 비롯한 스투파식 왕릉을 축조하면서 터득한 지혜가 다보탑 건립의장에 영향을
끼친 결과일 수도 있다. ‘법화경’ 권4 견보탑품에서 다보탑을 서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때 부처님 앞에 칠보탑(七寶塔)이 있으니 높이는 500유순이고 가로와 세로는 250유순인데 땅에서 솟아
나와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갖가지 보물로 장식하니 오천의 난간과 천만의 감실(龕室)이 있고 무수한
당번(幢)으로 장엄하게 꾸몄으며 보배영락을 드리우고 보배방울 만억을 그 위에 달았다.
사면(四面)에서 모두 다마라발전단향(多滅跋檀香)의 향기가 나와 세계에 두루 가득 차고, 모든 번개(幡蓋)
는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진주, 매괴 등 칠보(七寶)로 합쳐 만드니 높이가 사천왕(四天王) 궁전까지 이르
렀다.”
이런 내용을 가능한 한 조형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 불국사 다보탑이다.
그래서 층마다 난간이 둘리고, 감실이 2층 탑신석 둘레 팔면(八面)에 새겨졌다.
지대석과 초층기단은 일반 석탑이 가지는 구조대로 기둥을 세우고 벽면을 친 목조결구의 번안 형태인데,
다만 초층 탑신으로 오르는 계단이 사방 중앙에 설치되어 기단 평면이 십(十)자형으로 된 것이 일반 석탑과
크게 다르다.
5. 인도탑과 중국탑
본래 인도에서 전륜성왕이거나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舍利)를 봉안하기 위해서 스투파(Stu-pa, 塔婆)를
건립하였는데 그것이 곧 왕릉(王陵)에 해당하는 무덤이라 사발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반구형(半球形; 공을
반으로 쪼개놓은 듯한 모양) 봉분(封墳)을 갖는다는 말을 이미 한 바 있다.
그래서 서기전 1세기경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산치대탑도 적색 사암(砂巖)으로 깎은 벽돌로 쌓은
둥근 봉분으로 이루어지고 그 주변은 역시 적색 사암으로 깎은 돌난간을 둘렀으며 돌난간과 봉분 기단
사이에는 지면석(地面石)을 깔아 요도(褥; 주변을 에워싸며 빙 둘러 난 길)를 삼았다.
그리고 봉분 상부에는 이를 장엄하는 둥근 합(盒; 밥 그릇) 뚜껑 모양의 윤보(輪寶)가 켜켜이 무쇠 찰주
(刹柱; 탑의 중앙을 관통하는 기둥)에 꽂혀 있고 다시 이를 보호하기 위한 난간이 네모로 둘러쳐져 있다.
이것이 스투파의 원형이었으니 대승 율장(律藏)의 기본인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권33 명잡송발거법
(明雜誦跋渠法) 중 탑 만드는 법에서 그 제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구살라(拘薩羅)국에 머무시면서 나돌아다니시는데 그때에 바라문이 있어 땅을 갈다가 세존이
지나시는 것을 보고 소부리는 막대를 땅에 짚고 예불을 드린다.
석가 세존이 이를 보고 문득 미소를 지으니 여러 비구들이 무슨 까닭으로 웃으시느냐고 묻자 석가 세존은
이 바라문이 지금 두 분 세존께 예배드렸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 이유를 묻자 나에게 예배하였지만 그 막대기 아래에는 가섭불 탑이 있기 때문이라 하며 곧 그 자리에
흙으로 높이 1유순 사방 반 유순의 가섭불탑을 지어내 보이신다.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때에 세존이 스스로 가섭불탑을 세우는데, 아래 기단 사방에 난간을 돌렸다. 둥글게 2중으로 일으키어
모난 이빨 사방으로 빼내고, 위에는 반개(槃蓋; 쟁반같이 둥근 뚜껑)를 베풀어 윤상(輪相; 바퀴 모양)을
길게 표시하였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탑을 짓는 법은 응당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셨다.
(爾時世尊, 自起迦葉佛塔, 下基四方 周欄楯. 圓起二重 方牙四出, 上施槃蓋 長表輪相. 佛言 作塔法應如是)”
이때 구살라국왕인 파사익(波斯匿)왕이 이 소문을 듣고 벽돌 700수레를 싣고 부처님께 찾아와서 이 탑을
벽돌로 짓고 싶다 한다.
석가세존은 이를 쾌히 허락하며 과거에도 가섭불탑은 벽돌탑이었다고 가르쳐 준다.
과거 가섭불이 열반에 들었을 때 길리(吉利)라는 임금이 칠보탑을 세우려 하였지만 한 신하가 이렇게 말하
였다.
“미래세에 마땅히 불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나와 이 탑을 파괴하고 중죄를 지을 터이니 대왕께서는 응당
벽돌로 짓고 금은으로 그 위를 덮으십시오. 만약 금은을 취하는 자라면 탑은 그 때문에 온전할 수 있습니다.”
왕이 곧 신하의 말대로 벽돌로 짓고 금박으로 위를 덮으니 높이가 1유순이고 가로 세로가 반 유순이었다.
구리로 난간을 만들었는데 7년 7개월 7일이 지나서 완성되었다.
이로 보면 불사리탑은 벽돌로 둥글게 2단 봉분을 쌓고 그 상부를 금은 보화로 덮어 장식하며 그 둘레를
난간으로 두르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산치대탑과 같은 대형 탑도 이 제도를 따르게 되고, 그런 대탑 안에 봉헌(奉獻; 받들어 드림)되는
수많은 소형탑도 그 제도를 따르게 되었던 모양이다.
산치 제1탑의 북문기둥 <불탑예배도(佛塔禮拜圖)>돋을새김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고, 서기 1세기경에
중인도 아마라바디에서 만들진 <돋을새김 불탑도>에서도 이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으며, 2세기 후반경
간다라 지방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진 소형 봉헌탑 양식에서도 그 제도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다라지방에서 만들어진 소형 봉헌탑의 경우는 공예적인 장식성이 보태져서 네모진 방형(方形)
기단부가 복발형(覆形; 사발을 엎어놓은 형태) 탑신(塔身; 탑의 몸체) 아래에 첨가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아마 대형 탑의 경우도 이렇게 방형 기단부를 더 첨가하여 방형과 원형의 변화와 조화를 추구하는 쪽으로
탑파 양식을 진전시켰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로리안 탕가이 출토 봉헌탑>은 네모진 1층 기단 위에 2중의 둥근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난간을
두른 복발형 탑신을 안치한 다음 네모진 난간 받침을 사각 지붕처럼 여러 층으로 쌓아올리고 나서 7개의
사발 뚜껑 모양의 윤보를 찰주에 차례로 꽂아 나가 탑 전체를 덮었다.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윤보의 크기는 작아져서 전체적으로 원뿔 모양이다.
그런데 이때 이 방형 기단 네 귀퉁이에 아소카왕의 사자기념주와 같은 사자장식기둥을 세운 것도 있고
기단을 8각으로 변형시켜 탑신으로 오르는 계단을 그 사방에 설치한 경우도 있다.
이런 스투파 양식의 진전현상은 곧 중국에 영향을 끼쳐 중국 특유의 목탑(木塔)과 전탑(塼塔; 벽돌탑) 양식을
출현시킨다.
중인도나 서북인도에서는 각각 조각과 건축에 알맞은 부드러운 성질의 사암(砂岩)과 편암(片岩)이 대량
산출되므로 이런 석재로 불상을 조성하고 탑파도 건립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고운 황토와 목재가 풍부하여 건축이나 조각을 모두 이 두 가지 재료에 의존하였으므로
탑파도 나무로 짓는 목탑이거나 흙을 구운 벽돌로 짓는 전탑이 대종(大宗)을 이루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최초로 지어진 것이 목탑이었던 듯하니, 진수(陳壽, ?~279)가 지은 ‘삼국지(三國志)’ 권49
유요전(劉繇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착융(融)이라는 자는 단양(丹陽)사람인데 처음 수백명을 모아 서주(徐州) 목사 도겸(陶謙)에게 가서 의탁
하니 도겸이 광릉(廣陵)과 팽성(彭城)의 조운(遭運; 물길로 재화를 운반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드디어 방종해져서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3군(郡)의 일을 마음대로 하여 보내라고 맡긴 것들을 제 스스로
차지하였다.
이에 크게 부도사(浮屠祠; 佛塔)를 세웠는데 구리로 사람을 만들어 황금을 몸에 바르고 비단옷을 해 입혔
으며, 구리 쟁반을 아홉 겹으로 드리우고 아래는 여러 층 누각으로 길을 내어 3000여 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
분명히 30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여러 층으로 된 누각 형태의 목탑을 건립하고 그 안에 금동불을
조성해 모셨던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다. 그 시기는 대체로 후한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189)에서부터
헌제(獻帝) 초평(初平) 4년(193) 사이로 추측되는데, 이 시기 목조 누각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한묘(漢墓) 출토의 <도루(陶樓; 흙으로 빚어 구워 만든 누각)>에서 대강 그 양식을 헤아려볼 수
있다.
사실 이런 형태의 목조탑 양식은 서기 480년 전후한 시기에 조성된 운강석굴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개중
에는 이불병좌상이 탑신 감실 안에 조각된 다보탑인 경우가 많다.
나무기둥을 세우고 방목을 걸어 3층, 5층, 7층의 중층 건물을 올려가면서 각층의 지붕은 기와로 덮어간
사실을 기와 골과 연목까지 분명히 표현하면서 밝혀주고 있으니, 당시 목조탑이 이와 같은 양식을 갖추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운강 제6굴 남벽 중층 중앙 불감 오른쪽 5층 다보탑도>에서 보면 2중의 석조 방형 기단 위에 5층의 목조
탑신이 세워지고 수미단 형태의 노반(露盤)이 최상층 기와지붕을 덮고 있는데 그 위로 국화잎처럼 생긴 두
가닥 풀잎 형태의 앙화(仰花)가 양쪽으로 피어나면서 공 모양의 복발(覆)을 받치고 있다.
그리고 노반까지 꿰뚫고 내려온 찰주는 복발 위에서 삼지창(三枝創) 모양으로 갈라지면서 중앙에는 9개,
좌우에는 7개씩의 보륜을 촘촘하게 꿰고 끝에는 역시 공 모양의 둥근 구슬을 달고 있다.
보주(寶珠)이다. 이 노반 이상이 상륜부(上輪部)라 부르는 것으로, 인도의 스투파가 중국 문화권으로
들어오면서 중국식 탑으로 변형된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요소이다.
사실 이 상륜부야말로 인도 스투파의 원형을 간직한 핵심 부분이다. 수미단 모양의 노반이 방형 기단에
해당하고, 풀잎 모양의 앙화가 난간에 해당하며, 공 모양의 복발이 복발형 탑신이고, 찰주와 보륜만이 원래
상륜부에 해당한다. 그러니 누각 형태의 여러 층 목조 건축은 사실 스투파의 중층 기단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 문화권에서는 이 기단부를 탑이라 하고 스투파의 원모습인 상륜부는 탑의 최상부 장엄으로
치부하여 본말(本末)을 전도하고 있는 것이다.
스투파의 의미가 극도로 왜곡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중국에 들어와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이미 간다라지역에서부터 진행되고 있었는지는 갑자기
결론짓기 어렵다.
북위(北魏) 양현지(楊衒之)가 지은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권5에 따르면 간다라성 동남 7리 밖에 카니슈
카대왕이 세운 작리부도(雀離浮屠)가 13층 목탑으로 지어졌는데 높이가 700척(약 175m)이고 철간찰주
(鐵杆刹柱) 높이만도 88척이고 금반(金槃), 즉 보륜이 15겹이었다 하니 벌써 이 13층 목탑에서부터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런 탑 양식의 변화는 건축이라면 당연히 목조가 기본이고 고루거각(高樓巨閣)을 지으려면 반드시 여러
층 집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국적 건축 상식과 만나게 되니, 스투파를 높이 짓기 위해 고층의 목조
건축을 이룩한다는 생각보다는 고층의 목조 건축 그 자체가 탑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것은 벽돌로 짓는 전탑에서도 같이 진행된 현상이었다. 그래서 수(隋) 문제(文帝) 인수(仁壽) 2년(602)에
지어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소재 <영태사 11층 전탑(永泰寺十一層塼塔)>에서도
이런 본말전도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6. 우리나라 불탑의 기원
우리나라에서 불탑이 언제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불탑 초건을 짐작하게 할 만한 기록도 없고 그 유적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1938년 평양 모란봉 동북쪽 약 3km 지점인 주암산(酒岩山) 서쪽 기슭의 청암리(淸岩里)에서 절 터를
찾아내 발굴한 결과 8각 목탑 터가 확인됐는데, 이곳이 ‘삼국사기’에서 밝힌 대로 고구려 문자왕(文咨王)
7년(498) 7월에 지었다는 금강사(金剛寺)로 추정하고 8각 목탑 터를 가장 오래된 목탑 터로 지목하고
있을 뿐이다.
현존 탑파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을 꼽자면 백제 무왕 원년(600)경에 세워졌으리라 추측하는 익산 <미륵사지
9층석탑>의 잔존 유구를 들 수 있다.
현재는 6층 옥개석 일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9층탑으로 복원 높이가 20여m가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탑은 미륵사의 삼소(三所) 전탑(殿塔) 중 서탑(西塔)에 해당하는 것으로 1980년부터 발굴 조사한 결과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서 밝힌 것처럼 동쪽에 이와 똑같은 석탑 터가 있고 그 사이 중앙에 이보다 더 큰
규모의 목탑 터가 있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이 석탑 양식이 어째서 목조탑의 번안 형식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
이미 중앙의 목조탑을 거대한 규모로 먼저 짓고 그 다음에 석재(石材)를 써서 그 목조탑을 그대로 흉내낸
것이 현재 일부만 남은 <미륵사지 9층석탑>이라는 결론이다.
그래서 석재가 석조적 기능을 살려내지 못하고 목조적 결구로 일관하게 되니 재질과 기능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전체적으로 미숙하고 어설프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러나 석재를 건축 자재로 쓰면서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짜맞추는 방법을 썼다는 것은 석조 건축사에서
일대 혁신이 아닐 수 없었다.
석조 건축에 대한 보편적 관념을 파괴한 것이다.
그래서 기둥을 세우고 아래위로 방목을 짜맞추어 벽면을 만들고 장혀를 걸고 연목을 얹어 지붕을 받치는
목조 누각 형식이 기본 골격을 이루는 독특한 석탑 양식을 탄생시킨다.
<미륵사지 9층석탑>에서 최초의 실험을 거친 목조 결구의 석탑 양식은 의자왕 초년(640)경에 만들어진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에서 석조적 기능을 살리는 쪽으로 대폭 양식정비를 이룩한다.
별개의 돌기둥을 별개의 주춧돌이 하나하나 받칠 만큼 석재의 석조 기능을 외면했던 <미륵사지 9층석탑>
의 미숙성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석재의 석조적 기능을 대폭 강화하여 기둥과 면석을 합쳐 나가고 창방과
평방이나 하방을 아래위 굄돌로 단순화시키며 포작이나 장혀, 연목도 마름모꼴 옥개 받침으로 세련되게
통합해낸다.
<미륵사지 9층석탑>에서 얇은 판석으로 물매를 느리게 잡고 내림마루의 네 귀를 살짝 들어 경쾌한 기와
지붕을 상징했던 옥개석은, 사면의 처마 끝을 곡선으로 처리하면서 내림마루 끝을 더욱 가볍게 추켜 올려
산뜻한 느낌을 한층 강조하였다.
한편 신라에서는 선덕여왕 3년(634)경 분황사(芬皇寺)에 <분황사 9층모전탑(芬皇寺九層模塼塔)>을 건립
한다. 북중국으로부터 고구려를 거쳐 전해진 벽돌탑 양식의 영향을 받아 안산암(安山岩)을 벽돌처럼 다듬어
벽돌탑처럼 쌓은 것이다. 그러니 그 지붕은 지붕 밑도 벽돌로 층급을 이루며 받쳐 나가게 되었고 지붕 위
물매도 벽돌로 층급을 이루며 쌓여 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고구려계의 벽돌탑 옥개석 양식과 <미륵사지 9층석탑>으로부터 <정림사지 5층석탑>으로
이어지는 백제계의 목조탑식 옥개석 양식이 혼합되어 신문왕 초년(681)경에 건립되는 <감은사지 쌍3층
석탑>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지는 <고선사(高仙寺)지 3층석탑)>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백제식 물매에
고구려식 층급받침을 가진 독특한 통일신라 석탑 옥개석 양식을 창안하여 통일신라 석탑 양식의 전형을
이루어놓는다. 이 탑들에서는 벌써 상하 2층 기단에 각각 아래층은 기둥이 5개, 위층은 기둥이 4개라는
양식 기준도 생긴다.
<고선사지 3층석탑>에서는 옥개석과 옥개석 층급받침돌들이 각각 네 쪽으로 나누어져 있는 데 비해 <감은
사지 3층석탑>에서는 옥개석 아래위가 나누어지지 않은 채로 네 쪽이 나 있어서 <고선사지 3층석탑>이
조금은 앞선 양식인 듯하다.
7.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완성시킨 석가탑
이런 석탑 양식이 <불국사 석가탑>에 이르면 또 한 단계의 과감한 양식 진전을 감행하여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완성해 놓는다. 기둥이나 면석, 옥개 등 각 부재를 짜맞추어 석탑을 짓는 목조적 잔재를 청산하고
석재가 가지는 괴체성(塊體性)을 살려내 가능한 한 통돌로 쌓아올리는 축조적(築造的) 석조 건축 방식을
되살려낸 것이다.
그래서 석재 수를 줄이기 위해 하층 기단부에서는 기단부 전체를 몇 개의 통돌로 나누어 기둥과 면석 갑석
등을 새겨서 표시하고, 상층 기단에서도 면석과 기둥을 한 돌에 새겼으며, 상층 기단 갑석도 초층 탑신의
받침까지 한 돌에 새겨서 네 쪽을 조합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리고 초층 탑신석부터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모두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져 여러 개 돌로 조합하던 이전의 목조 양식의 잔재에서 완전 탈피한다.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각 한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 돌을 짜맞출 때 생기는 불필요한 결구적 과장성이
생략되어 옥개석의 물매는 짧아지고 층급받침도 얇아지며 물매와 내림마루의 네 귀솟음이 더욱 날카롭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자연 초층 탑신은 폭이 좁아지면서 높이가 높아지고 2층 이상의 탑신석 높이와 폭에서
체감률이 둔화되니 탑 모양은 전대의 목조적 잔재가 남아 있던 석탑 양식에 비해 훨씬 고준(高峻; 높고
험함)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굳세고 날카로우며 산뜻한 느낌을 자아내니 우리 민족의 고유 미감인 강경명정성(剛硬明正性)에
합치되는 양식 기법이라 하겠다.
이에 <불국사 석가탑>은 이후 통일신라시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일반적 석탑 양식의 절대 기준으로 영원히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이 석가탑 주위 사방 지면에는 각 모서리와 중앙에 활짝 핀 연꽃 한 송이씩을 조각해
깔아놓고 있는데 그 사이를 각각 2매의 장대석으로 연결해서 탑을 에워싸도록 하였다.
탑의 존엄성을 살리기 위해 접근을 금지하는 성역의 표시였으리라 생각되지만 다보탑의 4방 계단과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에서 고안된 특수 의장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에서는
팔방금강좌대(八方金剛座臺)라 일컫고 있다.
석가탑의 높이는 8.2m이고 기단 폭은 4.4m인데 상륜부는 원래 노반과 복발, 앙화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 불국사 복원 공사를 하면서 남원 <실상사(實相寺) 쌍3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따서 현재와 같이
만들어 놓았다.
이 탑은 1966년 9월 두 차례의 도굴 시도가 있고 나서 10월에 탑 속의 사리장치 안전 여부를 검색하기
위해 상층부를 해체하였는데 이때 2층 탑신석 중앙에 마련한 사방 41cm, 깊이 19cm의 네모진 사리공안
에서 사리장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각종 공양구에 둘러싸여 있던 금동제 사리외함은 인동무늬로 맞뚫린 벽을 가진 가마 모양인데, 그 안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길이 6.45m 폭 6.7cm)’과 금동제의 네모난 사리함과 은제
사리합 등이 들어 있었고 다시 그 속의 녹유리 사리병 등에는 46과(顆)의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었다.
8. 세계 불탑양식의 총화인 다보탑
석가탑에서는 목조의 잔재를 청산하여 석조 건축의 본령인 축조로 환원하는 획기적인 양식정비를 하였
는데, 동시에 대칭으로 세워진 다보탑에서는 정반대로 철저하게 목조탑의 결구 방식을 완결짓는 과감한
양식정비를 단행하였다.
그래서 지대석 위에 기단을 한층만 높이 세우되 기둥과 벽면으로 이루어진 목조적 결구를 제대로 재현하기
위해 각 부재를 딴돌로 사용하였으며 그곳으로 오르는 계단의 부재도 독립된 별개의 돌로 짜맞추고 있다.
초층 탑신은 네모진 큰 돌기둥 넷을 세워 그 사이 빈 공간으로 하여금 벽면이나 문을 총체적으로 상징하게
하였다.
그런데 방목(枋木)이나 포작(包作), 뺄목 등 기둥 위에 얹는 복잡한 결구를 함축하기 위해 각 기둥머리
위에는 십(十)자형의 굄돌을 첨차(遮) 형태로 깎아 받쳤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장혀나 연목, 부연 등 지붕을 받치는 복잡한 목조 부재들을 상징하기 위해 양 끝을 첨차
형태로 다듬은 장대석을 4면에 가로로 걸쳐 얹어놓은 다음 <정림사지 5층석탑>의 옥개석 같은 얇은 옥개
석을 그 위에 덮었다.
목조 결구를 석조로 추상화한 것이다.
탑 내 중앙에 다시 그만한 크기의 네모 돌기둥을 세웠는데 이것은 목탑의 찰주(擦柱)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2층으로 가면 네모지게 돌린 난간 안에 각면마다 감실(龕室)이 설치된 8각 탑신이 있고 그 위 3층
으로 가면 다시 난간이 8면으로 돌려지면서 8개의 대나무 형태 돌기둥이 활짝 핀 한 송이 연꽃을 받치고
있는데 그 대나무 기둥 안에는 8각형의 탑신석이 있다.
꽃잎 16장으로 이루어진 만개한 연꽃 위에는 8모로 이루어진 씨방이 놓이고 그 씨방에서 8개의 꽃술이 마치
목화(木靴; 예전 벼슬아치들이 신던 목이 긴 신발)를 거꾸로 세워놓은 것처럼 솟아나서 최상층 옥개석을
떠받치고 있다.
최상층 탑신석은 8면으로 8개의 꽃술이 에워싸 보호하고 있으며, 최상층 옥개석은 최하층 옥개석과 마찬
가지로 <정림사지 5층석탑> 계열의 평판형 옥개석인데 다만 최하층 옥개석과 달리 8면으로 되어 있어
물매귀가 8개이다. 철저하게 목조적 결구 방식으로 일관되게 짜맞춰진 건축기법이다.
그러나 2층 이상의 탑신석은 중국문화권 내 일반 탑파의 탑신석과 같이 단순한 건축적 요소가 아니다.
인도의 스투파에서 보이던 복발형 탑신석의 원래 의미를 되찾은 왕릉 봉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난간을 층마다 돌려가며 그 봉분을 장엄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니 다보탑은 목조 결구로 석조탑의 원뜻을 살린 3단 변화의 완성체라 할 수 있다. 석탑을 목탑으로
바꾼 다음 목탑을 석탑으로 다시 바꿨는데 그 목조적 석탑 양식으로 반구형의 봉분을 가지고 있던 초기
석탑의 본뜻을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최상층 옥개석 위로는 노반과 복발, 앙화, 보륜이 차례로 석조 찰주에 꽂혀 있다.
본래는 석사자 4마리가 초층 탑신 4방에 놓여 있었다 하는데 현재는 하나만 남아 있다.
그리고 현재는 연화대좌가 상하로 설치되어 있지만 그 사이 간주(間柱)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간다라 출토 사리소탑>에서 사자 기둥이 기단 네 모서리에 세워진 예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보탑은 가까이는 <미륵사지 9층석탑>으로부터 <정림사지 5층석탑>으로 이어지는 백제 석탑의
목조 결구를 이어받고, 멀리는 운강석굴의 다보탑이나 간다라 지방의 여러 석조탑 양식까지 참고하여 여러
탑 양식의 기본 구조와 건축 방식을 완벽하게 이해한 다음,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새롭게 창조하여
완성해낸 석탑 양식이라 해야 하겠다.
즉 모든 재료로 지어졌던 세계적 불탑 양식을 총체적으로 종합하여 한 송이 연꽃으로 승화시켜낸 추상적인
탑이라 할 수 있다.
총 높이 10.4m, 기단폭 4.4m이다. 1925년경 일본인들이 수리하였으나 기록이나 출현 유물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출처] : 최완수의 우리 문화 바로보기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