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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자기 최면 효과
사흘을 쉬기로 했던 것과는 달리 일행이 천불루를 떠난 것은 닷새 후였다. 그 기간 동안 사막을 횡단할 때 사용했던 탁타와 게르 등을 팔고, 솜옷을 장만하느라 시간이 지체됐던 것이다. 천불루를 떠난 일행이 감숙성 성도 난주에 도착한 것은 그 해 말이었다.
이틀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발은 난주로 들어서면서 폭설로 변했다. 더는 여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연우강은 이철상을 시켜 객잔을 잡게 했다.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숙박을 해야 하기 때문에, 미리 객잔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여야 했다.
“ 일행을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 손님이 많아?”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이철상을 보았다. 감숙성에 있는 객잔은 서방을 오가는 상단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때문에 규모가 상당히 크다. 하지만 지금은 한겨울, 서방으로 떠나는 상단이 있을 수가 없다.
문을 닫아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손님이 많아 인원을 나눠야 할 지경이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 잠룡들이 머물고 있습니다.”
“ 아!”
연우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팔황새는 남만 독존궁, 해남 남십자성, 북해뱅궁의 세 곳을 제외하면 대부분 감숙성 주변에 몰려 있다.
천외흑막과 새외귀막은 대막이라고 불리는 고비사막 남쪽에 있고, 막북혈마성과 막북백마성은 고비사막 북쪽에 위치해 있다. 청해천종림은 난주 남서쪽에 있고, 서장 포달랍궁은 청해성 남쪽에 위치해 있다.
북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으로 광범위하게 위치해 있지만 중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감숙성으로 들어와 관도를 이용하는 게 가장 빠르다. 임무가 끝난 자들이 난주로 모여드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다만 시기가 공교로울 뿐이었다.
“ 몇 조로 나눠야 하는데?”
“ 네 개 조로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럼 각 군별로 나누면 되겠네.”
“ 그렇게 하겠습니다.”
“ 혹시 잠룡 칠 조도 있더냐?”
듣고 있던 이자승이 이철상을 보며 물었다. 잠룡 칠 조는 이지약이 조장으로 있는 조였던 것이다.
“ 황상루에 머물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럼 난 황상루로 가도록 하마.”
이자승이 먼저 갈 곳을 정했다.
“ 황상루가 이곳에 있는 객잔들 중 가장 고급이던가?”
연우강은 과거 기억을 떠올리며 물었다.
황상루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황상이란 특이한 이름 때문이다. 황상루의 황상은 황하 상류라는 의미다. 하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황제를 의미하는 황상이란 말로 들리기도 하여, 황제루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곳이다.
이름 때무인지 모르지만 황상루는 난주의 최고급 객잔 중 한 곳이고, 규모 또한 그다지 크지 않다.
“ 객잔 거리에 있는 객잔들 중에서는 최고급입니다.”
“ 황상루엔 이 소저 말고 또 누가 머물고 있지?”
“ 대부분 잠룡 칠 조가 사용하고 있고, 각 조 수뇌들도 그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 빈 방은?”
“ 몇 개는 남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럼 남궁소저 하고 수 소저도 그곳으로 가면 되겠네.”
“ 그럼 황상루 주변으로 객잔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이철상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출발해.”
연우강의 지시가 떨어지자 잠룡들은 눈발을 헤치며 빠르게 나아갔다.
“ 욱 영감은 잠깐 나 좀 봐.”
연우강은 뒤로 처지며 욱일승을 불렀다.
“ 왜 그러는가?”
잠룡들을 따라 걷고 있던 욱일승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아무래도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와야 할 것 같아.”
“ 주변이라면?”
“ 우리가 대야벌을 떠날 때 담대만승 그놈이 가장 빨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자에게 높은 평점을 주겠다고 했잖아.”
“ 임무를 끝마친 잠룡들이 대야벌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게 이상하단 말인가?”
“ 두세 명이 모이는 건 우연이지만 그 이상은 필연으로 봐야 하거든.”
“ 대야벌에서 지시를 내렸을 거란 말인가?”
“ 대야벌의 지시가 아니면 잠룡들이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겠지.”
“ 그럼 우린.......”
욱일승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지금껏 함께 왔지만 대야벌로부터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 우리 행선지는 북천지옥부였잖아. 소식을 전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겠지.”
“ 더구나 단ㅊ러도문과 무쌍검문까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 돈황에 도착했을 때는 하오밀문 토벌로 정신이 없었을 테고.”
“ 그렇겠군.”
욱일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 대야벌에서 뭔가를 보냈다면 객잔에 가면 알게 될 거야. 그것보다는 잠룡들을 이곳에 묶어둔 이유가 뭔지 그걸 알아내야 해.”
“ 연 공자가 생각하는 이유는 뭔가?”
“ 미끼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은데..... 일단 한 번 둘러봐.”
“ 알았네.”
“ 탈라하 자네도 따라가.”
이번엔 탈라하를 보며 말했다.
“ 바로 떠나란 말입니까?”
“ 담대만승 그놈도 바쁘게 해 줘야지. 그리고 이건 이별 선물.”
연우강은 둘둘 말린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 무공 구결을 바라도 되겠습니까?”
탈라하는 웃으며 종이를 폈다.
종이를 내려다보던 그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지도 위로 길게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 그 줄만 따라가면 대야벌에 도착할 거야.”
“ 가, 감사합니다.”
황당한 얼굴을 했던 것도 잠시 탈라하는 고개를 숙였다.
“ 수 영감, 갈 영감, 허 영감, 정 영감, 이 영감은 욱 영감을 따라가, 두 영감은 짐 날 주고.”
두작군 앞으로 걸어간 연우강은 그가 지고 있던 궤짝을 벗겨 제 어깨에 졌다.
“ 알았네, 그럼 다녀와서 보세.”
고개를 끄덕인 일행은 곧 욱일승과 함께 자리를 떴다.
“ 미끼라는 건 무슨 소리죠?”
지금껏 연우강과 욱일승의 말을 듣고 있던 남궁운화가 물었다.
“ 싸움이 됐든, 전쟁이 됐든 양측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 그런데요?”
“ 이번 팔황정벌은 싸움을 거는 쪽은 있는데 싸움을 받아주는 쪽이 없는 이상한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 팔황새 수뇌들이 북천지옥부로 간 것 때문에, 잠룡들의 도발에도 응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도와주는 자들을 합친다고 해도 백여 명 남짓일 텐데 적의 심장부로 갈 수는 없잖아요.”
“ 닭 쫓던 개 꼴이 된 셈이네요?”
“ 아마도 그럴 겁니다.”
“ 그것과 잠룡들이 미끼가 된 상황과 관련이 있나요?”
“ 잠룡강호행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만들면서 내보냈는데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계획을 입안한 사람의 입장이 뭐가 되겠습니까?”
“ 반대파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 큰 타격을 주려고 하였던 팔황새는 팔황천이라는 이름으로 통일이 됐고, 이제는 대야벌로 들어가겠다고 나선 상황 아닙니까.”
“ 얻는 것도 없이 잠룡들을 내보낸 행위에 대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인가요?”
“ 그 책임추궁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 다른 싸움이라면?”
“ 이곳에 잠룡들이 모여 있다는 소문을 흘리게 되면 관심을 가질 자들이 강호에 있잖아요.” 리고는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 밀천이라고요?”
“ 개파대전을 하게 될 밀천 입장에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위상 제고입니다.”
“ 위상 제고라는 건 무슨 뜻이죠?”
“ 대야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걸 강호 무림에 보여줘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 최고의 개파대전을 열 수 있을 겁니다.”
“ 그들이 잠룡을 공격할 거란 말인가요?”
“ 잠룡은 미래 대야벌의 기둥이 될 자들 아닙니까. 그 정도면 위상을 높여줄 희생물로는 부족함이 없죠.”
“ 개파대전은 언제쯤 할 걸로 보세요?”
이번엔 옆에 있던 수여설이 물었다.
“ 그동안 생각은 좀 해봤어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 글쎄요. 내부적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들뿐 다른 이유는......”
“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말입니다. 제가 나천후라면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이 멸망하면 그때 개파대전을 개최할 것 같습니다.”
“ 아.....!”
수여설은 탄성을 흘렸다.
연우강의 말을 듣고 나자 안개가 걷힌 듯 비로소 머릿속이 환해졌다. 밀천 입장에서 보면 담대만승과 황궐 일파가 티격태격 싸우다가 화해하는 것보다 어느 한 편이 완전히 멸망하는 게 훨씬 이익이다. 나천후가 개파대전을 미루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 그런데 배 안 고파요?”
수여설은 연우강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지난 며칠 동안 연우강은 매일 복용하는 약을 제외하곤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 때문에 볼은 홀쭉해졌고, 눈 주변으로 검은 그림자가 짙게 져 있다.
마치 환자를 보는 것 같았다.
“ 견딜 만합니다.”
“ 이유는 ....... 말해주지 않겠죠?”
“ 저절로 알게 될 겁니다. 이철상이 방을 잡아놨을 테니까 들어가세요.”
어느새 황상루가 눈앞에 있었다.
“ 연 공자는요?”
“ 전 다른 객잔에서 쉬겠습니다.”
이지약을 다시 보는 게 어색할 것 같아서였다.
“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다른 조장들도 전부 이곳에 있는데, 일단 들어가요.”
남궁운화가 연우강의 손을 잡아끌었다.
“ 글쎄 그게....”
“ 광랑 방도 잡아 뒀으니까, 들어가도 됩니다.”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다른 객잔으로 잠룡들을 안내해주고 돌아오던 이철상이 다가왔다.
“ 방이 있어?”
“ 방이 남아 있는 게 아니고 위선이 남아 있었습니다.”
“ 위선?”
“ 본관 건물 꼭대기 층의 특실이 남아 있더군요.”
“ 하룻밤 숙박비가 오십 냥이라는 황상실?”
“ 네.”
“ 남궁소저와 수 소저는?”
“ 소명공주께서 별관 방을 두 개 내 주셨습니다.”
“ 안내해.”
“ 따라오십시오.”
세 사람은 이철상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황상루는 전면에 본관이 있고, 좌측과 우측에 별관이 하나씩 있는 세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본관 건물은 사층이고, 좌우 측의 별관은 삼층 건물이었다.
상단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객잔에 비하면 작은 규모라고 할 수 있겠지만, 중원 객잔에 비하면 그다지 작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연우강은 마당 가운데 있는 인공 호수로 시선을 주었다. 삼 장 가량 되는 인공 호수 가장자리에는 특이한 형태의 바위가 늘어서 있고, 그 사이 사이로 의자와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흰 눈에 덮인 마당 전경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고즈넉하다.
“ 전 그럼 위선의 방으로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연우강은 남궁운화와 수여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본관으로 향했다.
“ 언닌 알아요?”
남궁운화는 수여설을 보았다.
“ 위선의 방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 네.”
“ 황상루에서 특실은 그거 하날 걸요? 그렇지 않나요?”
수여설은 이철상에게 물었다.
“ 한 층을 통째 사용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요리사는 상시 대기 중이고, 시중드는 사람 둘에 욕실과 화장실도 붙어 있습니다.”
“ 그런데 그게 왜 위선의 방이라는 거죠?”
남궁운화는 여전회 고개를 갸웃거렸다.
“ 각 조의 조장들의 신분이나 재력으로 보면 특실에 투숙할 능력은 됩니다. 아마 조장 신분이 아니라면 무조건 특실로 투숙했을 겁니다.”
“ 그런데요?”
“ 조원들은 일반 객잔, 일반 객실에 투숙하고 있는데, 자신만 하룻밤에 오십 냥이나 하는 객실에서 잘 수는 없잖습니까?”
“ 그러니까 들어가서 자고는 싶은데 남의 눈 때문에 차마 투숙할 곳이 없는 곳이라고 해서 위선의 방이라고 한 거군요.”
“ 그렇습니다. 남궁 소저.”
“ 풋!”
남궁운화는 피식 웃었다.
“ 왜 웃어요?”
남궁운화를 지켜보던 수여설이 물었다.
“ 연 공자답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연 공자다워요?”
“ 연 공자는 체면이나 그런 걸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 그렇긴 하네요. 그런데 요즘 계속 굶고 있는데 굳이 요리사가 필요할까요?”
“ 왜 굶죠?”
그때 앞에서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수여설과 남궁운화를 마중 나온 이지약이었다.
“ 언니.”
“ 오랜만이에요, 이 소저.”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 바, 방금 뭐라고 했죠?”
이지약은 다시 물었다.
“ 무슨 말을 했다는 거죠?”
남궁운화는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 그, 아니 연 공자가 밥을 굶는다고 했어요?”
“ 아, 그거. 그래요, 언니. 며칠 전부터... 그런데 왜 그래요?”
이지약의 얼굴에서 심상찮음을 읽어낸 남궁운화의 얼굴 역시나 웃음기가 가셨다.
“ 아니에요. 일단 들어가요. 수고했어요. 이 소협.”
이지약은 이철상에게 인사를 하고는 남궁운화와 수여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독고철응과 이자승이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환노 할아버지.”
독고철응을 발견한 남궁운화는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했다.
“ 건강해 보입니다. 운화 아가씨.”
독고철응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로 위에 올려놓은 주전자를 가지고 왔다.
“ 제가 할게요.”
“ 됐습니다. 아가씨. 추운데 이쪽 불가로 앉으십시오.”
독고철응은 손사레를 치며 남궁운화를 끌어다가 화로 옆으로 앉혔다. 그러고는 수여설을 보았다.
“ 처음 뵙습니다. 수여설입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수여설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말 많이 들었네. 환노라고 부르면 되네, 앉게.”
“ 감사합니다.”
수여설은 다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남궁운화 옆으로 앉았다.
“ 조금 전에 했던 말은 무슨 말이죠?”
자리에 앉은 수여설은 찻잔을 들 생각도 하지 않고 이지약을 향해 물었다.
“ 소문 .... 못 들었어요?”
“ 무슨 소문을 말하는 거죠?”
“ 연 공자가 앵속을 한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어요.”
“ 앵속이라고요?”
수여설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남궁연화를 보았다.
“ 저도 처음 들어요, 언니.”
남궁운화 또한 수여설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황당한 얼굴로 수여설과 이지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무슨 말인가?]
이자승은 독고철응을 향해 전음으로 물었다.
[ 태상가주님도 모르십니까?]
[ 모르니까 묻지.]
[ 며칠 전부처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 우강이 녀석이 앵속을 복용하고 있다는 소문 말인가?]
[ 아십니까?]
[ 잘 알지. 그 녀석은 군에 있을 때 매일 아침 앵속을 약처럼 달여 먹었다고 하더구먼. 그런데.....]
이자승은 곁눈질로 손녀딸인 이지약을 보았다.
수여서로가 남궁운화를 쳐다보고 있는 이지약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태상가주인 이 ‘ 저 녀석이?’
이자승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지약의 얼굴은 단순히 친한 동료를 걱정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간혹 남궁운화와 수여설이 보이는 그런 표정과 거의 비슷했다.
이자승은 독고철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는가?]
[ 뭘 말입니까?]
독고철응은 시치미를 뚝 뗐다.
“ 그럼 앵속을 복용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 요즘 들어 약만 복용하고 밥을 거의 굶고 있기는 한데....”
수여설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 앵속 때문에 밥을 굶는 건 아닐까요?”
[묘아가 우강이 그 녀석을 저렇듯 걱정하는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네.]
[ 제가 항상 옆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압니까?]
[ 자네 생각은 어떤가?]
[ 연 공자가 공주님에 비하면 조금 밀리긴 하지만, 죽은 녀석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 할아버지.”
[ 묘아 눈치는 어떻던가?]
[ 연 공자로부터 받은 선물이 있는데, 단 한 번도 손에서 떨어뜨려 놓은 걸 못 봤습니다.]
[ 선물?]
“ 할아버지!”
“ 응? 응! 불렀냐?”
느닷없이 귓전을 파고드는 뾰족한 소리에 이자승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두 분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 아무것도 아니다. 알고 싶은 거라도 있느냐?”
“ 앵속에 중독되면 어떻게 되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요.”
“ 식욕이 떨어진다.”
“ 시, 식욕이 떨어진다고요?”
동시에 소리를 지르는 세 여자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 복도 많은 놈!’
“ 무서움이 뭔지 모른다.”
“ 거, 겁이 없다고요?”
겁이 없다는 이자승의 말에 세 여자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해 광적인 집착을 보인다.”
파삭!
급기야 남궁운화의 손에서 찻잔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 동정호 지하로 들어가면서까지 약을 가지고 갔는데.”
남궁운화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매일 아침 그 지겨운 동작을 한 시진 동안 해대는 건 어떻고요.”
수여설이 남궁운화의 말을 이었다.
“ 아무렇지도 않게 십뢰를 자기 입에 넣고 쏘는 사람이잖아요.”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은 이지약이었다.
[ 정말입니까?]
독고철응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방금 이자승이 말한 증상과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 연우강이었다.
[ 뭐가?]
[ 연공자가 정말로 앵속쟁이 맞냐고요.]
[ 앵속쟁이가 이마에 나 앵속쟁이야 하고 써놓고 다니는 거 봤어?]
[ 그럼 모른단 말입니까?]
[ 당연히 모르지.]
[ 방금 그 말은 다 뭡니까?]
[ 앵속에 중독되면 그런 걸 나보고 어쩌라고.]
[ 공주님은 연 공자와 입까지 맞췄단 말입니다.]
[ 정말?]
[ 그렇다니까요.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그렇게 되긴 했지만 어쨌든 입을 맞춘 건 맞습니다.]
[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게 뭔데?]
[ 그러니까......]
독고철응은 동정호 지하에서 일어났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 그럼 입을 맞춘 게 한두 번이 아니겠네?]
[ 그건 저도 모릅니다.]
[ 그럴 거야. 원래 숨이라는 건 참았다가 뱉어내면 더 가쁘기 마련이거든. 아마 입술이 부르트도록 입맞춤을 했을 거야.]
[ 태상가주님 손녀딸입니다.]
[ 내 손녀딸이니까 그러는 거야. 난 묘아가 낳은 자식을 안아보고 죽는 게 소원인 사람이야.]
[ 앵속쟁이라는 말 못 들었습니까?]
[ 그거야 고치면 되지. 아무튼 좋은 정보 줘서 고마워.]
‘ 넌 이제 끝났어, 자식아.’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흡족하게 웃었다.
하지만 웃는 그와는 달리 세 여자는 신혼 첫날 밤 신랑이 도망친 신부처럼,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 그런데 우강이 그 녀석이 묘아에게 준 선물은 뭔가?]
문득 선물을 주었다는 말이 떠올라 물었다.
[ 천수귀장 혁미월이 남긴 천수귀장이란 비급입니다.]
[ 천수귀장?]
이자승은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본 것 같은데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천마 제석강의 첫 번째 부인이면서 마총을 건설한......]
[ 아! 맞아. 이제 떠올랐네. 그 혁미월이 남긴 비급을 얻었단 말인가?]
[ 그 안에 토목기관만 있는 게 아니라 무공도 다수 포함돼 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무공이 우주일만검결이고요.]
[ 우, 우주일만검결이라고?]
이자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엄청난 기연을 얻은 셈입니다.]
[ 그걸 그냥 줬단 말인가?]
[ 그랬답니다.]
[ 공짜로?]
[ 네.]
[ 그걸 믿어?]
[ 네?]
[ 아니네. 아무튼 엄청난 기연을 얻은 건 맞는 것 같네.]
이자승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바로 그 시각,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연우강은 어슬렁거리며 일층 식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식당 안에는 올라갔을 때 만났던 자들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이지약이 이끄는 잠룡 칠 조 조원들이었다. 그리고 창가에는 적리세우를 비롯한 네 명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이지약의 호위를 맡고 있는 지옥의 죄수들이었다.
“ 어서 오게.”
연우강이 다가가자 적리세우가 웃으며 반겼다.
“ 살기 편한 모양이네?”
연우강은 적리세우 일행의 얼굴을 보며 자리에 앉았다. 지옥에서 막 나왔을 때는 병자처럼 해쓱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검게 그을려 건강미가 넘쳤다.
“ 자넨 환자가 다 됐구먼.”
적리세우는 연우강의 얼굴을 살폈다. 광대뼈는 도드라지게 튀어나오고 검게 그림자 진 눈두덩은 움푹 패여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환자였다.
“ 식욕이 없어서 밥을 좀 굶었더니 그런 것뿐이야. 몸은 이상 없으니까 걱정 마.”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연우강이 앉자 시중을 들고 있떤 점소이가 찻잔을 가져와 연우강 앞에 놓고 자리로 돌아갔다.
“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네.”
적리세우는 연우강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잠시 시간을 번다.
지금 그는 요즘 들려오는 소문에 대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대놓고 앵속을 하냐고 물을 수는 없지 않은가.
“ 고생은 무슨,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 너는 몰라도 십 조 조원들은 고생이 심했을 걸?”
창문 너머에서 비아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담대무궁, 윤허, 율한천, 사유성, 하정일 다섯 명이 이편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 고생은 나보다 네가 더 한 것 같은데?”
연우강은 담대무궁의 왼팔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왼팔이 있어야 할 자리엔 소매만 덜렁거리고 있었다.
“ 그래도 앵속쟁이보다는 더 나을 걸?”
담대무궁은 느긋한 얼굴로 받아쳤다.
“ 얼레? 팔 하나를 잃고 나더니 생각이 깊어진 모양이다.”
연우강은 담대무궁을 빤히 쳐다보았다.
“ 생각이 깊어진 게 아니라 쓰레기 말에 일희일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그러는 거다.”
“ 아! 그러니까 날 앵속쟁이로 몰아서 지금껏 우리 잠룡 십조가 거뒀던 승리를 무위로 돌려버리려는 셈이구나.”
“ 앵속쟁이가 아니란 말이냐?”
“ 군에서 나온 다음부터는 앵속을 접한 적이 없는데 어쩌지?”
“ 군에서는 복용했단 말이냐?”
“ 원래 군에서는 앵속이 많이 쓰여. 진통제나 마취제로 탁월한 효과가 있거든. 간혹 현실을 잊기 위해 그냥 복용하기도 하고.”
“ 네 얼굴을 보고 말을 해라. 연우강. 말로는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얼굴은 절대 못 속인다는 걸 알아야 한다. 연우강.”
담대무궁은 피식 웃으며 출입문으로 향했다.
앵속의 중독성은 무인이라고 해도 피해갈 수 없다는 데에 그 무서움이 있다. 보통 독은 몸의 기능을 정지시키거나 상하게 하여 주임에 이르게 하는데 반해 앵속은 장기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즉, 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운기행공을 통해 태워버리거나 배출할 수가 없다. 앵속에 중독되면 일류 고수라고 해도 폐인이 되고 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앵속쟁이는 곧 폐인의 대명사인 것이다.
그런 자가 이끄는 조가 아무리 공을 세운다 한들 누가 인정해 주겠는가. 그들이 세운 공보보다는 앵속쟁이 조장이 이끄는 조라는 사실이 더 크게 작용하여 평가 자체를 하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간 담대무궁은 연우강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내 얼굴이 앵속쟁이처럼 보여?”
연우강은 담대무궁을 빤히 쳐다보았다.
“ 앵속쟁이라고 커다랗게 씌어 있다. 연우강.”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아니 이렇듯 편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동안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잠룡 십 조의 활약상을 들을 때마다 질시에 몸을 떨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아니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한 공을 세운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 사람들 중에는 본인의 자질이 부족해서 남보다 떨어지게 되면 무조건 남 탓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병에 걸린 놈들을 남탓공황증 환자라고 해.”
“ 앵속쟁이가 아니라는 말이냐?”
“ 당연하지. 지금은 끊었으니까.”
“ 하긴 앵속쟁이가 제 입으로 앵속쟁이라고 하는 놈은 없지.”
담대만승은 여유 넘치는 얼굴로 점소이가 가져온 찻잔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연우강의 행동을 꼼꼼히 살폈다. 연우강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긁고 있었다. 그러자 탁자가 푹푹 파여 나갔다.
“ 흑철마신은 완성한 모양이구나.”
파여 나간 자국을 쳐다보는 담대무궁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쉽게 흥분하곤 하는 앵속쟁이 특징이 바로 저런 모습들이다. 녀석은 흥분한 상태를 감추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손가락으로 탁자를 후벼 파고 있다는 사실은 본인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 응? 하하하! 물론이다, 담대무궁. 난 흑철마신을 진작 완성했다.”
연우강은 크게 웃으며 조금 전 팠던 곳을 얼른 손으로 가렸다.
‘ 쿡!’
담대무궁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파인 자국을 가리고 있는 연우강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손을 떠는 수전증 또한 앵속에 중독됐을 때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였다. 자신도 모르게 판 자국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고는 있는데 이번엔 수전증이 나타나고 있었다.
‘ 넌 앵속쟁이가 맞다, 연우강. 그것도 아주 중증 앵속쟁이 말이다.’
담대무궁은 연우강을 앵속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 내보이는 불안정한 행동은 물론이고, 과거 십뢰를 가지고 내기를 했던 것과, 다른 잠룡들이 꺼렸던 야장으로 들어간 것까지. 그동안 연우강이 했던 모든 행동이 앵속과 연관지어졌다. 앵속에 취해 내기를 했고, 앵속을 복용하고 있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야장을 택한 것이었다. 놈은 경계할 이유가 없는 놈이었다.
“ 굳이 그렇게 믿고 싶으면 더 이상 강요하지 않을게. 그보다 불편하지 않아?”
연우강은 또다시 잘려나간 팔 이야기를 꺼냈다.
“ 무인에게 팔 하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연우강.”
“ 무인에게는 상관없을이지 몰라도 보통 사람들은 너 같은 놈을 병신이라고 부르잖아. 그런데 팔도 없는 병신이 아직 조장 질을 하고 있는 거냐?”
“ 조장 질을 계속할 뿐 아니라 지금은 잠룡총사로 승진했다.”
“ 잠룡 총사?”
연우강의 시선이 담대무궁 옆에 앉아 있는 윤허에게로 향했다.
“ 연락 못 받았는가?”
윤허 또한 담대무궁과 다르지 않았다. 말은 태연하게 뱉으면서도 연우강을 훑듯이 살피는 눈빛은 바빴다.
“ 어디서 연락이 왔단 말인가?”
“ 대야벌이지 어디겠는가?”
“ 내용은?”
“ 이곳에서 대기하라는 명령과 함께 일 조 조장을 잠룡총사로 임명한다는 명령서가 왔네.”
“ 잠룡총사는 뭐 하는 직책인데?”
“ 잠룡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이라고 보면 되네.”
“ 지휘관이 왜 필요하지?”
“ 밀천에서 귀환하는 잠룡들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된 모양이네.” 면......”
“ 그런 중요한 정보를 왜 난 받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
연우강은 담대무궁을 보며 물었다.
“ 대야벌의 시선은 사막까지는 미치지 않는다.”
“ 우리가 사막에 있어 소식을 보내지 못했다는 말이야?”
“ 그런 걸로 알고 있다.”
“ 그럼 우리가 백용퇴를 지나올 때 발견한 시체들은 뭐지?”
“ 무슨 시체를 발견했단 말이냐?”
“ 단철도문의 문주 단월도 척응곌르 비롯한 도수 이백 명, 무쌍검문 무인으로 보이는 자들 이백 명 그리고 이름 모를 자들의 시체가 육십여 구 발견됐는데 그 속엔 만경소 누담생이 있더라고.”
“ 만경소 누담생이라고?”
“ 아마 서로 싸우다가 상잔한 것 같은데 ...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어. 아무튼 알고 싶으면 백용퇴 주변을 파보면 될 거야. 그곳에 묻어 줬으니까.”
“ 잠룡 십 조와 싸운 게 아니란 말이냐?”
“ 시체들과 싸울 이유가 없잖아. 그런데 혹시 그놈들 우릴 없애려고 그곳에 숨어 있었던 거야?”
“ 그, 그건 나도 모른다.”
“ 말을 더듬는 것 보니까 맞는 모양이네. 자식놈 새끼는 잠룡총사라는 감투를 씌워주고, 우리 잠룡 십조는 없애지 못해 안달하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뭐 했나 몰라 대야벌 같은 문파나 하나 만들지.”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연 형, 잠깐 나 좀 보세.”
연우강이 나가자 윤허도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 나갔다.
“ 윤 형은 잠시 기다려야 할 것 같네.”
연우강은 별관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이지약이 머물고 있는 별관에서 남궁운화와 수여설이 이편을 향해 몸을 날려 오고 있었다..
“ 잠깐 좀 봐요.”
“ 이쪽으로 와 보세요.”
연우강 곁으로 다가간 수여설과 남궁운화는 그를 끌고 호수 한쪽 구석으로 갔다.
“ 왜 그러십니까?”
“ 그거 사실이에요?”
“ 매일 복용하는 그 약속에 앵속이 있는 거 맞아요?”
“ 무슨 소립니까?”
“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 사실을 말해 주세요, 연 공자.”
“ 그러니까 제가 앵속쟁이란 말입니까?”
“ 아니죠?”
“ 소문이 잘못된 거죠?”
“ 전에 앵속을 복용한 적은 있지만 지금은 끊었습니다.”
“ 정말이죠?”
“ 진짜죠?”
“ 들어보십시오. 앵속에 중독되면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말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손이 떨리는 수전증이 생겨요. 하지만 전 손이 떨리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연우강은 손을 두 사람 앞으로 내밀었다.
“ 세상에.......”
“ 맙소사!”
수여설과 남궁운화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앞으로 내밀고 있는 연우강의 손이 수전증 환자처럼 떨고 있었던 거였다.
“ 제 말이 맞죠? 이렇게 손이 정상인 사람은 절대 앵속쟁이가 될 수 없습니다.”
두 여자는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는 자기 손이 떨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 피곤할 텐데 그만 들어가 쉬십시오.”
[ 야! 이 도둑놈아.]
바로 그때 귓전으로 이자승의 목소리가 전음으로 들려왔다.
“ 수 소저!”
“ 아, 알았어요. 연 공자.”
퍼뜩 정신을 차린 수여설은 남궁운화를 데리고 별관으로 향했다. 앵속 중독은 말로 고칠 수 있는 그런 간단한 병이 아니다. 차분하게 계획을 세워 대처해야 할 터였다.
[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두 여자가 사색이 된 겁니까?]
연우강은 별관을 보며 전음으로 물었다.
[ 네 녀석의 습관을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이다.]
[ 그걸 앵속쟁이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한 겁니까?]
[ 흔히 나타나는 증상 맞아. 네 녀석 행동은 앵속쟁이와 비슷해.]
[ 그럼 잘 됐네요. 뭐.]
[ 담대무궁이나 네 뒤에 있는 윤허 그 녀석이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 이번 잠룡강호행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조는 우리 잠룡 십 조입니다. 영감님.]
[ 널 앵속쟁이로 만들 수밖에 없단 말이냐?]
[ 선입견이 깊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
[ 너를 앵속쟁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관찰하게 되면 너의 모든 행동이 앵속쟁이 습관처럼 보인단 말이냐?]
[ 그런 걸 가지고 자기최면 효과라고 합니다.]
[ 그래서 그 녀석들이 의심하지 않을 거란 말이냐?]
[ 물론 의심은 할 겁니다. 하지만 처음엔 반반이었던 것도 자기최면에 자꾸만 걸려들면 결국엔 자신이 원하는 걸로 바뀌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저놈은 나쁜 놈.’ ‘ 저 놈은 나쁜놈!’ 하게 되면 어느새 그놈이 나쁜 놈으로 변해 있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땐 제가 아니라고 부정을 해도 앵속쟁이가 될 수밖에 없지요.]
[ 그러다 들키면?]
[ 들킨다고 해도 손해 볼 건 없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 아무튼 이번 일로 인해 일어나는 일의 뒷감당도 네가 해야 한다는 것만 명심해라.]
[ 무슨 소립니까?]
[ 앵속쟁이가 앵속을 끊고 나면 금단현상이라는 것이 오지 않느냐.]
[ 전 앵속을 하지 않습니다. 영감님.]
[ 클클클! 다른 사람들은 앵속쟁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한 사람이 너다.]
‘ 저 영감이?’
짓궂은 웃음소리에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별관을 보았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었다. 뒷감당이라고 해봐야 세인들이 보내는 비난의 눈초리밖에 없을 터인데 그 정도는 즐기며 견딜 수 있기 때문이었다.
‘ 아직 절 알려면 멀었습니다. 영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