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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 배후에는 노바스코샤의 여신도들이 있었다
2월 초에 나와 같은 교단에 속해 있는 한국의 한 여성 신학박사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신학대학교의 정식교수로 채용되었다. 그로서 그는 캐나다 대학교에서 정식으로 채용된 최초의 아시아계, 한국인으로서 교수가 되는 영광과 첫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안게 되었다.
그는 백인들의 인종 차별과 외국인으로서 영어 핸디캡이 있으므로 캐나다에서 교수가 되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의 강력한 추천과 격려를 힘입어서 지원서를 냈다. 그 후 그는 캐나다신학대학교의 교수 채용심사 과정이 한국 대학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일말의 희망을 품고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였다.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강의, 교수들과의 그룹 인터뷰, 총장과 단독 인터뷰 등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지만 그는 며칠 일정 속에서 대학교가 요청한 테스트를 다 받았고 좋은 점수를 얻었다는 총장의 통보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총장은 처음 약속한 날짜보다 한 달 늦게 임명 통지를 하면서 모든 지원자 중에서 그의 평가 점수가 가장 높았으나 교수 경력이 일천하고 박사 논문 외에는 뚜렷한 저서가 없어서 여느 때보다 결정이 힘들고 어려웠다고 하였다. 그가 망설이고 있을 때 그의 논문을 지도하였던 캐나다 신학대학교의 지도교수와 부 지도 교수들이 그에게 그를 임용하여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을 해주어서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고 전하였다.
총장이 자신과의 인터뷰와 학생들의 강의 점수, 교수 그룹과의 인터뷰 평점이 좋았어도 교수경력이 없는 그에 대하여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그와 함께 스터디한 경험을 나누어 주었다. 주변 사람들이 총장으로 하여금 그가 장차 캐나다 교회를 섬길 신학생들을 건강한 목회자로 양육해야 하는 지도교수로서 경건의 능력과 영적인 카리스마가 있음을 확신하게 만든 것 자체가 성령의 도움심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원자 중에는 교수 경력과 많은 저작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들이 있었고 더구나 그들은 캐나다인이거나 구미인 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총장은 나라와 인종을 염두에 두는 인간적인 생각과 계산을 버리고 기도하며 캐나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아시아 유색인을 기꺼이 교수로 발탁하였던 것이다.
이는 실로 1898년 캐나다 선교사가 조선을 향해 온지 만 125년 만에 일어난 놀라운 일이다. 125년 전에 캐나다 교우들이 조선에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조선인의 후예가 캐나다에 와서 가르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를 친히 캐나다의 신학교에 선교사로 파송한 것을 믿는다.
캐나다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125년 전에 캐나다교회와 노바스코샤 여신도들이 조선을 위해 바친 눈물과 기도를 기억하고 영적으로 눌리고 신음하는 캐나다교회와 교우들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새 일을 시작하였다고 믿는다. 아울러 캐나다를 향한 나의 감사와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였다고 믿는다.
나는 그가 캐나다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에 합격하였다는 통지를 받은 날부터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그를 캐나다신학교의 교수로 써주시라고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지도교수가 그에게 교수직에 지원하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감동으로 가슴이 벅찼다.
캐나다에 대한 나의 특별한 감사와 사랑은 2018년 연길에서 지내면서 고난의 땅인 북간도에서 캐나다선교사들이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배후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맥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메리타임지역의 여신도들이 캐나다장로회 총회의 조선 선교사업안 부결에도 불구하고 조선 선교의 깃발을 높이 들고 우리를 위해 눈물의 기도와 애정 어린 후원을 아끼지 않음으로 총회의 부결을 1년 만에 뒤엎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 아무런 이익도, 영광도, 명예도 줄 수 없는 작고 초라한 조선 선교를 위해 기도와 눈물로 닫힌 선교의 길을 열어 조선 선교를 캐나다장로회가 총회 사업으로 받도록 한 역사의 순간을 음미하면서 사순절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캐나다장로회 조선 선교사 파송에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다.
노바스코샤 여신도들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조선인들을 사랑하여 뜨거운 눈물로 캐나다장로회 선교사의 첫 장을 열었다.
1895년 6월 캐나다장로회 총회 위원들 중의 한 명인 할리팍스 출신의 로버트 머레이 목사가 “한국에서 온 기쁜 소식”이라는 머리말로 시작하는 맥켄지 선교사가 보낸 편지를 발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맥켄지의 조선 선교를 돕기 위하여 위원회를 소집하였고 열정적으로 맥켄지의 선교활동을 소개하였다. 위원회는 조선에 있는 맥켄지의 선교 사업에 참여하고자 하는 계획을 해외선교위원회 동부 분과가 연구하여 다음 회의 보고하도록 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는 캐나다장로회 총회 의사록에 나오는 최초의 ‘조선’에 대한 언급이다.
이런 총회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맥켄지 선교사는 황해도 장연 소래교회에서 숨졌다. 이 사실을 두 달 늦게 안 머레이 목사는 ⌜프레스비테리언 위트니스⌟에 그가 살아 있으면 ‘캐나다장로회 교회가 그를 성심성의껏 도왔을 것’이라고 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글에서는 그는 ‘누군가가 빨리 맥켄지가 떠난 자리를 메우기 위해 조선에 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러나 맥켄지의 사망으로 캐나다장로회의 조선에 대한 관심은 식어졌다. 선교회 운영으로 빚을 지고 있는 해외선교위원회는 맥켄지 선교사를 돕자는 호소로 조선 선교 바람을 일으킨 머레이 목사에게 ‘조선 선교 문제를 더 이상 공론화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으며 조선 선교 안건을 다루지 않고 1896년 봄으로 연기하였다.
1896년 4월 회의에서 해외선교위원회는 조선의 선교 사업을 위해 맥켄지가 구입한 2,000불상당의 토지가 있고, 선교부 동료로부터 3년 동안 매년 1,000불의 선교 지원금을 받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선교 안건에 부정적이었다. 당시 위원들은 장시간 그 문제를 고려한 끝에, 조선에서 활동한 맥켄지의 선교 사업을 계승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만약에 해외선교위원회의 서부 분과가 조선 선교 사업을 맡을 경우 선교 지원금을 그들에게 전달하기로 총회에 보고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선교위원회는 조선선교를 위해 1,000불의 지원금을 약속했던 후원자에게 조선이 아닌 데머라러의 선교사업을 위해 기증해줄 것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1896년 6월 총회에 해외선교위원회의 결정이 보고되었다. 총회는 조선에서 선교 사업을 부결하기로 한 해외선교위원회 동부분과의 결정을 승인하였으며 맥켄지가 조선에 구입한 토지로부터 얻어진 자금은 해외선교위원회가 지정하는 곳에 지원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런 캐나다장로회 총회의 결정은 조선 선교에 대한 관심과 논의를 원점으로 돌리는데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총회의 최종 결정도 조선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막지 못하였다.
1896년 11월, 조선 선교 안을 부결시킨 총회 해외선교위원회의 보고서가 널리 알려진 후, 파인힐의 잡지인 ⌜테올로그⌟에 조선 선교를 절박하게 요청하는 로브의 글과 함께 맥켄지가 선교하였던 소래교회 교우들로부터 온 편지가 실렸다.
우리는 맥켄지 목사의 친구요 동역자이며 형제이신 여러분께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이 편지를 읽어 주시고 또 깊은 관심을 보여주시기를 원합니다.
맥켄지 목사님이 조선에 오신 후, 그 분은 황해도 장연(Chang Ynn)의 소래 마을로 내려오셔서 열심히 하나님 아버지의 사업을 하시며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서 이끌어 주셨습니다.
소래 마을을 늘 어둡고 악한 힘이 강한 지역으로 축복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제는 맥켄지 목사님의 본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우리와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캐나다에 계신 우리 형제들이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교인 교사 한 분을 보내주시리라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래의 조선인 그리스도교인들의 이름으로
서명 : 서경조 Suh Kyung- Choi
조선 황해도 장연 소래 마을로부터
1895년 12월 26일
맥켄지 선교사의 사망 소식과 소래 교우들의 편지가 널리 알려지면서 캐나다장로회 교회 안에 조선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특별히 ⌜위트니스⌟지는 소래교회 교우들의 편지를 각종 인쇄물에 인쇄해서 널리 알렸다. 그로 말미암아 캐나다장로교회 교인들이 조선에 대한 관심이 들불처럼 번져서 많은 학생들이 조선으로 자원 봉사를 가기 위해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선교 문제가 다시 거론되게 되었다.
특별히 노바스코샤의 메리타임연회의 여신도회원들은 조선을 향한 가슴은 화산처럼 불타올랐다. 그들은 조선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뜨겁게 기도를 시작하였다. 멕켄지 목사가 자기들의 지역인 노바스코샤 출신이라는 것과 그가 장로교회의 아들이건만 교회의 후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선교지에서 가난하고 힘들게 살다가 죽도록 방치한 교회와 자신들의 무관심에 대한 회개, 그리고 멕켄지가 받았던 조선에 대한 소명을 이어받고자 하는 강한 감동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해외선교위원회가 데머라러 선교에 총력을 기울인다고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선교를 위한 여론을 활성화시키며 기도회와 모금 활동을 시작하였다.
1897년 2월 23일 열린 동부분과 해외선교위원회 정기모임에 ‘부인여성해외선교회’ 대표가 참여하여 조선 선교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여성대표의 진술과 나눈 대화가 ⌜위트니스⌟에 실렸다.
1) 조선 선교는 지금 우리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2) 해외선교위원회는 맥켄지의 유산을 소유하고 있다. “교회가 이 유산과 두 명의 자원봉사자를 다른 이들에게 인계하는 것이 정 당한가?”
3) 지금까지 조선과 그 밖의 장소로 분리되어 사용되던 자금들은 해외선교위원회 예산에 편입 될 것이고, 그것은 선교부 예산을 늘릴 것이다.
4) 조선은 온화한 기후를 가진 지역이기 때문에 뜨거운 기후를 지닌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을 주저하는 선교 지망생에게 매력적 일 것이다.
5)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조선 선교를 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이다.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6) 우리부인여성해외선교회(WFMS)는 진심어린 지원을 약속하며 그리스도교 교육단체들 (C.E.Societies)도 지원할 것이다.
“우리의 모든 단체들은 우리가 진행한 사업을 통해서 이미 우리의 신앙을 증명했다.”
7) 조선 선교문제로 증대된 선교에 대한 관심은 기존 선교단체들도 함께 후원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 장로교회의 신앙 선배들은 지금보다 더 수백 배가 어려운 상황이었던 50년 전에도 게디(Geddie)박사를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것을 자 랑하고 있는 우리 장로교회가 오늘날 교인들에게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보일 것인가?”
8) 맥켄지가 독자적으로 선교를 떠났지만, 그의 선교사역을 축복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경이롭다. 이렇 게 작은 시간과 물질로 이와 같이 훌륭한 성과를 올린 선교사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여신도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들 모두가 성령의 불길 속에 타고 있음이 분명하다. 주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니고서는 이토록 절절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조선 선교를 호소하며 최선을 다해서 후원하겠다고 약속할 수가 없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은둔의 나라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 주었기에 그들은 용감하게 총회가 이미 부결한 안건을 재심사하라고 요청할 수 있었다.
동부분과 해외선교위원회는 여신도들의 선교 열정과 의지에 감동하여 조선 선교 문제를 총회에 안건으로 상정하기로 합의하였다.
동부분과 해외선교위원회는 여신도들의 선교 열정에 감동하여 조선 선교 문제를 다시 총회에 안건으로 상정하기로 합의하였다.
1897년 5월 25일, 트루로에서 모인 해외선교위원회는 조선 선교 안건에 대한 메리타임 지역 노회 대표들의 투표 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노회 대표 10명 중 6 명은 조건 없이 찬성하였고 3명은 부표를 던졌으나 안건이 연회에서 상정되기를 바라는 의견을 냈고 딱 한 명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노회 대표만이 반대하였다.
해외선교위원회는 메리타임 전체 연회(Synod)에서 조선 선교문제를 다시 토론할 것을 총회에 요청하였다. 그리고 조선 선교 여부를 최종적으로 총회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1897년 10월 5일 화요일 저녁, 몽튼의 성 요한교회에서 정기 연회에서 조선 선교사업안이 논의되었다.
10월 6일 오후, 알렉산더 팔코너 목사가 조선 선교에 관한 경과보고를 하였다. 그는 “노회는 한국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한 명의 선교사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고 보고한 뒤, 여신도회해외선교회(WFMS)가 회의 결의를 통하여 약속한 한국 선교부 지원방안을 낭독하면서 진술을 끝맺었다. 그의 보고는 박수갈채를 받았고 회의에서 수용되었다.알프레드 간디어 목사는 조선 선교 설치와 관련된 논쟁들을 언급하면서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어 있으며 조선이 캐나다장로교회의 관심과 흥미의 대상'임을 강조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재정 문제였다. 9시간에 걸친 논쟁이 시작되었고 조선 선교에 반대하는 이들은 해외선교위원회의 빚을 강조하며 해외선교위원회가 여신도회해외선교회(WFMS)와 함께 조선 선교 방향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며 기성의 선교지인 뉴 헤브리즈와 트리니다드와 데머라러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조선 선교에 찬성하는 이들은 선교부를 위하여 더 큰 지원을 계속할 것을 약속하며, '교회는 앞으로 전진하라' 고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응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케이 박사는 ‘금번 회의에서 조선 선교에 반대하는 교회가 있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고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노회의 회원인 스털링은 즉석에서 100불을 헌금하면서 다음 해에 500불 지원을 약속하였다.
10월 7일 목요일 오후 늦게 알프레드 간디어 목사는 의장으로서 연설로 긴 논쟁을 마무리 지었다. “우리는 데머라러와 다른 선교부를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조선 선교에만 배당된 수천 달러의 지원금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을 향해 가는데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조선은 추수할 곡식이 많은 훌륭한 선교 지역입니다. …중략… 중국 내지선교회와 그리스도교 동맹 같은 일어 난 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던 지나친 신중함과 소심한 때문입니다.”
조선 선교 안건은 111대 25로 가결되었다!
캐나다장로회 조선 선교사업안은 거론 된지 2년 4개월 만에 총회의 공식 사업안으로 받아들여졌다. 까만머리에 노란얼굴을 한 조선인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하얀 얼굴과 파란 눈의 노바스코샤 여인들이 조선 선교의 불씨를 살리는 기적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조선 선교사업안이 총회의 안건으로 가결되자 그들은 환호하며 감격으로 서로 얼싸안고 조선 선교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뜨거운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조선을 형제의 나라로 품으며 선교사 파송을 위한 절차에 들어갔으며 그 결과로
1898년 7월 18일 트루로에 있는 퍼스트교회에서 세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예배가 드려졌다. 그 곳은 맥케지 선교사가 5년 전에 사역한 곳이었다.
1898년 9월 5일 새벽에 부산항에 도착한 캐나다장로교회 첫 선교사들은 로버트 그리어슨 부부, 윌리엄 푸트 부부 그리고 던칸 막레였다. 그들은 같은 고향, 노바스코샤 출신이었으며 조선인들을 사랑하며 죽어간 맥켄지의 대학교 후배들로 그의 선교사역과 죽음에 깊은 감동을 받아서 은둔의 나라 조선에 자원한 심장이 뜨거운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노바스코샤의 메리타임지역의 교회, 여신도들은 자신들이 약속한 대로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으며 대부흥으로 말미암아 일손이 부족하여 비명을 지를 때 마다 선교사 추가 파송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그들이 추가로 파송해준 첫 여자 선교사는 맥컬리(1900년)였다. 그들의 계속적인 관심과 영향으로 케이트 맥밀란(1901년), 제니 로브(1903년), 캐서린 메이어(1905년)가 파송을 받아서 첫 선교사들과 함께 함경북도와 북간도 선교 사역에 초석을 놓았다.
노바스코샤의 메리타임지역의 여신도들이 조선인 선교에 소명으로 뜨겁게 기도한 것처럼 나 또한 토론토 대학교의 교수로서 소명을 감당하게 될 우리 선교사와 그에게 교육을 받는 학생들과 그 학교의 교수들과 캐나다교회와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멀고 먼 동방의 작은 나라에 선교사들을 보내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모금하며 사랑의 수고와 노고를 아끼지 않은 선교의 어머니들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갚을 길이 없지만 그들의 순수하고 뜨거운 믿음을 본 받아 캐나다와 캐나다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나라와 교회로 잘 세워지길 소망한다.
2023.3.27.일 새벽
우담초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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