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은 욕구의 충족에서 오는 즐거운 마음이고, 이런 기쁨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 웃음이다.
《탈무드》에는 “생물가운데 웃는 것은 인간뿐이고 그 중에서 영리한 사람만이 웃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또 “웃음소리는 울음소리보다 멀리 간다”는 히브리 격언도 있다.
웃음과 울음 두 가지 중에서 웃음을 선택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웃음이 좋을지라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웃고 다닌다면
그는 미친 사람으로 오인 받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많이 웃는 것을 크게 경계했다.
현대에 와서 웃음이 우리 건강에 좋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억지로 웃어도 웃음은 건강에 좋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도가 지나치면 더 이상 좋은 것이 아니다. 웃음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상대적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기쁨의 상대는 슬픔이고, 웃음의 상대는 울음이다.
그래서 한나라 무제(武帝)는 “환락이 절정에 이르자 오히려 슬픔의 정이 몸에 스민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를 한 번쯤 겪어 보았을 것이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오고, 기쁨의 끝에서 갑자기 슬퍼지는 경우를 말이다.
또 유태격언에는 “많은 결혼식에 가서 춤을 추면, 많은 장례식에 가서 울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기쁨이 변하여 슬픔이 되고, 웃음이 변하여 울음이 되면서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고,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크게 웃을 일도 크게 울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크게 한 번 웃을 때, 누군가 크게 우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이렇게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은,
상대적인 입장을 잘 헤아릴 줄 알기 때문에 지나치게 많이 웃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남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만 기쁘다고 크게 웃는 사람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인 사람이다.
실로 죽음과 같이 심각한 주제를 다룰 때에도 웃음이 들어설 자리는 언제나 있다.
그러니 웃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에 따라 지나친 웃음을 경계할 필요는 있다는 뜻이다.
웃음이 지나치게 되면 인간심성의 해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웃음이 건강에 좋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코미디 방송 프로그램이나 유모어를 지닌 사람이 크게 환영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유모어나 코미디가 없어도 이 세상 전체가 바로 거대한 코미디의 현장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게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에서 시작하여,
크게는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우리에게 더욱 많은 코미디를 제공하는 것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해프닝인데,
분명한 눈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것이 코미디라는 사실을 모른다.
분명한 눈을 가진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온통 코미디로 가득하다.
이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크게 웃을 수밖에 없다.
“붓다는 세포 하나하나까지도 웃는다” 또는 “붓다는 웃음 없이 웃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겉으로 웃지 않아도 늘 웃고 있다는 말인데, 이는 몸 전체에서 번져 나오는 웃음으로
외적인 즐거움에서 오는 웃음이 아니라, 깨달음에 따른 내적인 즐거움에서 솟아나는 웃음이다.
주로 우리나라 불상(佛像)들의 입가에 번지는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웃음이야말로 전체가 개체를 통하여 웃는 우주의 웃음이요,
세상의 웃음이며, 온 몸이 웃는 진정한 웃음이 아닐까?
✍【 含笑 斷想 】
첫댓글 울음보다 웃음이 많아야
좋은 세상일것같습니다.
어릴적은 멋모르고
그져 싱글벙글댓는데
요즘은 웃을일이
거의 없어진것같습니다
성난것도 아닌데.
기분 나쁠일도 없는데
웃음끼도 사라져버린 일상입니다
누가 말하길 거울을 보고 매일
미소 짓는 연습을 한다더군요.
크게 웃을 일이 없는 일상일지라도
잔잔한 미소는 얼굴에 피어나는
한 송이 장미꽃이 아닐런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