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무(1728__1799)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사직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금위대장, 훈련대장을 거쳐 형조 판서를 지냈다. 그가 강계부사가 되었을 적에 그 고을에 무운이란 기생이 있었는데, 용모와 재능이 뛰어나 당시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울에 사는 성 진사란 자가 우연히 강계에 왔는데 무운이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고는 애정이 매우 깊어졌다. 성 진사를 전송한 뒤로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쑥으로 뜸을 떠서 종기가 난 것처럼 하고는 몹쓸 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이경무가 부임하여 그를 불러다 보고는 가까이하려고 하였더니, 무운이 종기 난 곳을 풀어 보이며 이렇게 말하였다. "첩에게 이런 종기가 있어 감히 사또를 가까이서 모실 수 없습니다." 이경무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너는 내 앞에서 잔 심부름이나 하는 것이 좋겠다." 이 때부터 무운은 낮이면 청지기 노릇을 하고 밤이면 그의 처소로 돌아가곤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4,5개월이 지나자 어느 날 밤에 무운이 갑자기 이경무 앞에 나와서 말하였다. "오늘 밤에는 사또를 잠자리에서 모실 수 있겠나이다." 이경무가 되물었다. "네가 몹쓸 병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그런 말을 꺼내는가?" 무운이 대답하였다. "첩이 성 진사를 위하여 수절을 하였기 때문에 제가 일부러 쑥으로 뜸을 떠서 종기가 난 것처럼 하여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또를 모시고 몇 달을 지나면서 사또의 동정을 지켜보았사온데 참으로 훌륭한 대장부이십니다. 첩이 아무리 식견이 없는 비천한 기생이기는 하오나 어떻게 사또를 흠모하여 존경하는 마음이 없겠나이까?" 이경무가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네 마음이 그와 같다면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겠다." 그 후에도 여느 때처럼 대해주며 유달리 가까이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무운이 따라오기를 바라므로 이경무가 말하였다. "나에게는 본처와 첩까지 있으니 너를 데리고 가는 것은 편안하지 못하겠구나." 무운이 말하였다. "만약 그러시다면 첩은 수절을 하겠나이다." 그러자 이경무가 다소 비웃는 투고 말하였다. "네가 말하는 수적이란 성 진사를 위함이냐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이냐?" 무운이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즉시 단도를 가져다가 자신의 왼쪽 손가락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이경무가 깜짝 놀라 데려가겠다고 하였지만 그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작별하고 말았다. 10여 년이 지난 귀에 이경무가 훈련대장이 되어 성곽과 나루를 보수하고 정비하던 무렵의 어느 날, 무운이 찾아와서 뵙기를 청하므로 이경무가 기뻐하며 불러다 보고 그와 거처를 함께 하면서 밤에 그를 가까이하려고 하였더니 있는 힘을 다하여 완강히 거절하는 것이었다. 이경무가 그 까닭을 물으니, 무운이 대답하였다. "사또를 위해서 수절하기 때문입니다." 이경무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이미 나를 위하여 수절한다면 어찌하여 나마저 거절한단 말인가?" 무운이 말하였다. "그 뜻은 이미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맹세하였기에 감히 사또의 명령도 따를 수 없나이다." 1년 동안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 뒤 이경무의 처가 죽자 무운이 상중에 달려와 서울에 머물다가 장례를 치른 뒤에 되돌아갔으며, 이경무가 죽었을 때도 그렇게 하였다. 스스로 운대사란 호를 짓고 그대로 자기 집에서 일생을 마쳤다. 이경무의 시호는 무숙이다.
첫댓글 옛적에나 가능 했던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