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역정
정 연 우
나는 TV를 즐겨 보는 편이 아니다. 더우기 연속극이나 오락프로는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고 뉴스는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알 수 있는 통로이긴 하지만 온통 불안스러운 내용과 여야의 극한적 대립,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각계 각층의 소위 진보와 보수라는 세력의 난투가 난무한 내용에 식상이 되어 고개를 돌리게 한다. 하지만 다큐멘타리프로는 열심히 보는 편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라든가 "인간극장" 등 사실적 현장을 담은 내용은 진솔하게 사람사는 모습은 볼 수 있게 해 준다. 오래전에 이것이 인생이다의 프로그렘에서 "처녀엄마" 윤석순씨의 기막힌 사연을 보면서 인간의 운명은 결코 우연이 아닌 어떤 필연적으로 예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렘 방영당시 그녀는 51세로 네명의 딸을 가진 어머니였다. 그녀가 어린시절 신들린 엄마를 할머니와 아버지가 내쫒아버려서 엄마를 따라나온 삼남매는 곤궁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한동안 아버지가 생활비를 보태주었지만 얼마 안가서 끊겨졌다. 오빠가 학교를 포기하고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가족을 부양했다. 돈을 많이 번다는 소문을 듣고 월남파병을 지원한 오빠덕분에 집안 살림이 펴지기 시작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오빠는 결혼하여 두 딸을 낳고 단란하게 살게 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오빠가 심장마비로 죽자 올케는 어린 두 아이를 남겨두고 친정으로 가버려 두 아이를 맡아기르게 되는데 형편이 어렵고 힘이 들어 큰 아이를 다른 집으로 입양 보냈다.
오빠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오빠의 일기장을 보게 되는데 거기에서 어릴적에 자기를 입양보내려는 것을 오빠가 지켜준 사실을 알고 입양보낸 조카를 생각하게 되어 찾아가보니 양부모에게 구박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데려왔다. 얼마 후 또 다른 시련이 닥치게 되었다.
여동생이 어린 두 딸을 남기고 지병으로 죽게 되자 제부가 재혼하여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죽어버린다. 재혼한 여자가 동생의 두 딸을 고아원으로 보내려하자 그 두 아이마저 데리고 왔다.
어려운 상황속에서 첫사랑의 남자가 나타나지만 결혼과 네 아이의 장래를 병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갖은 굳을 일을 해가며 네 아이를 어엿하게 길러냈다.
그렇게 오빠와 여동생의 딸 네명을 처녀의 몸으로 기르느라 30년의 세월이 지나고 네 명의 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서 큰 아이는 결혼하여 출산을 앞두고 있다. 고모와 이모가 아니라 "엄마"라고 부르는 네 명의 딸을 둔 "어머니"로서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질녀와 이질녀를 키워야 하는 운명이 되었을까? 만약 그녀가 자신의 욕심만 생각했더라면 조카들이야 어떻게 되던 조카들의 운명에 맡기고 평범하게 자기의 삶을 쫒아 결혼하여 그 나름대로의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릴 적 오빠의 각별한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고 그 사랑을 다시 오빠와 동생의 딸에게 베풀어 준 것이다. 그녀가 어릴 때 오빠가 그녀를 다른 집에 보내지 않고 지켜준 고마움을 알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기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착한 여인이어라. 지금까지의 고생이 끝나고 이제부터는 늘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기원하였다.
"하늘로 간 아들과의 약속"을 이루어낸 51세의 황순애씨의 애절한 이야기도 가슴을 울렸다.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두 아이를 키우고 있던 그녀에게 시련이 시작된 것은 남편의 도박이었다. 심심풀이로 시작된 노름이 걷잡을 수 없이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갔다. 그녀가 굳은 일을 하며 번돈을 수시로 남편이 찾아와 빼앗아 가버리고 힘겹게 마련한 가게도 날려버렸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아버지 없는 아이로 키우기 싫다고 힘들게 살아갔지만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노름에 미쳐 가정을 버린 아버지를 미워하고 증오하였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아이들은 고생하는 엄마를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하여 항상 우등생인 것을 낙으로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녀는 어릴때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국민학교 5학년을 다니다 말고 졸업을 하지 못해서 아들만큼은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열성으로 더욱 열심히 갖은 궂은 일을 하고 있었다. 큰아들이 고3학년이 되던 어느날 아들이 갑자기 코피를 쏟으며 정신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임파선 암이었다. 항암치료를 하였으나 이미 말기여서 치료의 효과도 없이 더 공부하고 싶고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이미 자신이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자기대신 공부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어버린다. 아들의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을 바닷가에 주저앉아 바닷바람에 날려보내며 오열하는 그녀의 통한이 가엾기 짝이 없었다. 남은 아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던 그녀가 직업안내일간지를 보다가 "횃불야학교"에서 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죽은 아들의 유언을 생각하고는 야학교에 들어가 국민학교졸업 검정시험을 거쳐 마침내 고등학교졸업 검정시험에도 합격하기까지 수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힘들 때마다 죽은 아들과의 약속을 생각하며 좌절하지 않고 끝내 고난의 결실을 보게 된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대학입시에 응시하여 50세의 나이에 사회복지과에 합격하였고 아들과의 약속을 지켜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작은 아들은 결혼시켜 살림을 내주고 혼자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호텔청소부일을 계속하고 있는 그녀는 큰아들의 유골이 맴돌고 있는 바닷가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앞날에 부디 행복한 여생으로 보상되기를 기원해주고 싶다.
두 여인을 통해서 인생역정에 얼마나 값진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성실성과 세상을 긍정하는 마음, 그리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끝)
첫댓글 선생님께서 자세하고 실감나게 덧붙인 사연이 더 인생극장에라이트같네요.너무 감동깊게 읽고갑니다. 감사드립니다.
돈 나와라와라뚝딱 글 나와라와라 뚝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