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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과 심심함의 가치
베르너 쿠푸스(Werner Kuhfuss) / 변종인 옮김
쿠푸스는 1931년 독일 태생으로, 1956년부터 약 30년간 국공립 학교 및 발도르프 학교에서 특수교육 교사로 일했습니다. 놀이 및 동작 연구 모임 ‘칼리아스 슐레’를 설립하여 ‘치유적으로 작용하는 놀이’를 연구하면서 「정신과학의 관점에서 재조명해본 발도르프 유아교육」, 「문화를 창조하는 유치원의 기본 방침」, 「아이는 어떠한 존재인가」 같은 책을 썼습니다.
옮긴이 변종인은 스위스의 바젤음악대학에서 성악과 고음악을 전공하고 스위스 도르낙의 루돌프슈타이너사범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스위스의 도르낙음악학교 교사와 인지학연구센터 연구위원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스위스 바젤의 중증 장애인 학교 로젠보겐에서 장애 아이들과 생활하고 있습니다.
들어가는 말
여기 제시하는 글들은 그동안 유치원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처음에는 놀이 속에서 일어나는 동작을 연구하는 모임인 칼리아스 슐레(Kallias Schule)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나눠 읽는 자료로 시작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과 분량이 늘어나 책으로 엮게 되었다.
이 글은 현존하는 발도르프 유아교육과 담판을 벌이는 글이기도 하다. 발도르프 유아교육은 바꿀 여지를 거의 두지 않고 지나치게 서둘러 정형화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은 무엇보다 첫 7주년 주기의 아이들 교육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이 시각은 교육을 정형화시킨다거나 고정된 일과표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 전반에 대한 인지학적인 이해를 아이들에게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태아발달의 생물유전자적 기본 법칙에 따라 태아의 개체발생은 전 계통발생을 짧은 시간 안에 반복한다. 문화유전적 반복 또는 문화창조적 반복도 아이들이 갖고 태어나는 기본 능력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놀이 속에서 인류의 문화발달과정을 여명기부터 더듬듯이 반복하여 현재의 삶과 연결지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발달과정을 단순하게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의 놀이 가운데서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가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 속에 자연과학이 이미 씨앗처럼 들어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마르틴 바겐샤인(Martin Wagenschein)의 저서 『물리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는 아이들』(Kinder auf dem Wege zur Phisik)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 연장시키면 물리뿐 아니라 화학, 수학, 생물, 건축 등에 대한 서술도 가능할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 속에는 모든 문화적 요소가 다 들어 있다.
사실 인지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좁은 교육적 의도의 사고에서 벗어나게 된다. 루돌프 슈타이너의 가르침으로 우리 눈이 열리면 아이들의 놀이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끝없이 풍부하고 흥미로운 새로운 연구 분야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각 방향으로 넓고도 깊은 연구에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두 가지 결과가 일어난다. 한 가지는 미리 정해진 하루 일과를 채우기 위해 모든 힘을 소진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힘이 솟아나고 창조적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아이들의 온전한 발달을 저해하는 조기 인지교육의 위협을, 삶과 동떨어지게 하고 의지를 깎아내리는 지능발달이 아니라 삶과 연결짓고 의지를 굳세게 하는 창조적인 지능발달로 이겨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글들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들을 모은 것이다. 어떤 글은 불완전한 스케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스케치를 아이들의 실제 삶에서 재확인하는 일은 미래의 몫이다. 새로 탄생하는 아이들의 언제나 변화무쌍한 흐름처럼,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게 우리의 앞길을 열어줄 것이라 확신한다.
‘자유를 향한 교육’ 첫 7년 주기의 기본 방침
아이들의 모방을 염두에 둔 교육은, 어른들의 모범을 통해 세상의 진화를 위해 노력하는 어른들의 의지를 아이들이 스스로 자유롭게 따를 수 있도록 신뢰를 북돋우는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가 『자유의 철학』에서 말한 ‘자유를 향한 교육’이란 모든 상황 아래에서 아이의 의지를 자유롭게 두는 것이다. 이런 교육은, 우리가 마주하는 아이들 속에 여러 모습으로 육화(肉化, incarnation)하는 개별 인격체(individuality)가 존재하고, 그 인격체가 저마다 자기 발달에 대한 고유 의지를 스스로 깊이 간직하고 있음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옛날부터 아동교육은 아이가 속해 있는 환경의 문화적 발달 정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의식갈등,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특히 예수회의 원리) 그리고 한참 뒤 영국 청교도주의를 통해 비로소 아이들의 습관을 특정 세계관 속의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고정시키려는 욕구가 일어났다. 이러한 특정 습관을 각인시키려는 전통과 교육을 연결짓는 것은 루돌프 슈타이너 정신과학의 가치를 떨어뜰이는 것이다.
스스로 자유롭게 발달해나가는 사람은 일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손 쉽게 파악할 수 있고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문화를 꾸리고 또 그 문화를 발달시켜 나가는 연결망 속에서 교육이 일어나야 한다. 문화적 연결망 속에 아이들을 자유롭게 둘 수 있는 것이 미래 아동교육의 새로운 청사진이다. 교육은 직접적인 문화작업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성과여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럴 때 유치원이라는 분리된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다. 대신 작업장, 화실, 채소밭, 농가 주변 또는 그 한가운데에서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모방력을 충분하고 자유롭게 발휘하게 될 것이다.
교육이란 어른들의 진정한 문화작업 가운데 들어 있는 원초적 현상이다. 교육은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지 머리를 짜서 지어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작업을 쇄신하려는 노력이 아이들을 교육시키려는 의지보다 앞서 있어야 한다. 진정한 일은 루돌프 슈타이너가 슈투트가르트 교사협의회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음악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아동교육의 기본요소는 리듬, 음악적 작업 능력을 함양하기 위한 연마다. 또 열심히 일하는 어른들과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함께 울리는 노동요를 연습하는 것이다. 미래의 아동교육은 이러한 요소를 통해 발달해갈 것이다. 오직 울림과 의지가 있는 환경만이 한편으로는 그것에 감응하는 아이들의 탐색적 놀이를 고무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 인격체들이 육화 이전에 세웠던 결심들을 이끌어내는 동기로 작용할 것이다.
기하로 설명해보자. 아이의 고유의지를 어른의 의지대로 유도하려는 아동교육이 원의 중심을 향한 것이라면, 이제 아동교육은 이 중심에서 벗어나 원의 접선을 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원둘레에서는 공동 문화작업이 일구어내는 울림이 일어나고, 그 울림의 중심에는 능동적인 자유 공간이 형성된다. 이 자유 공간 속에서 ‘자유의 씨앗’인 아이의 개별 인격체가 필요한 경우에만, 작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교정을 받게 된다. 이 교정도 모방하는 놀이의 관계 속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일의 내용만 모방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이들이 보는 가운데 문화를 일구어내는 어른들의 진지함을 아이들은 반드시 모방한다. 아이들에게 미치는 좋은 영향은 어른들의 존재 자체에서 일어나지 교육적 의도나 희망, 교육적 이상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도덕 형성은 자유롭게 일어난다. 개별 인격체는 자신의 도덕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그때 모범이 되는 것은 손으로 이루어내는 어른들의 의미 있는 행위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어른들의 내면 자세다. 이렇게 보면 아이들은 어른들 밑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작업 동료이자 감독관인 셈이다.
아이들은 무엇을 모방하는가?
현존하는 발도르프 유아교육은 하나의 ‘신념’ 위에 형성된, 실제적인 생각 앞에서는 버텨낼 수 없는 구조물이다. 전형적인 발도르프 유치원 공간이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잘 꾸며진 지금의 발도르프 유치원 공간에서 거주하거나 일하고 싶어 하는 어른을 생각할 수 있을까? 화가, 조각가, 원예사, 제과사로 일하는 사람들을 한번 떠올려보기 바란다. 이 사람들이 진짜 일을 한다면 그 공간을 어떻게 꾸릴까? 그리고 발도르프 유치원 교사를 떠올려보길 바란다. 발도르프 유치원 공간에서 제대로 작업을 해낼 수 있을까? 발도르프 유치원 교사는 정상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일까?
발도르프 유치원 교사는 ‘아이들에게 유익한’ 공간에 맞추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일부러 작게 만들어 안으로 움츠려들어야 한다. 화가, 조각가, 원예사, 제과사 같은 사람들이 발도르프 유치원 교사로 일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금속을 두드려 예술품을 만들어 내고, 식물을 가꾸고, 빵을 굽고, 그림을 그리고, 치즈와 소시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 사람들의 창조력은 작품 대신 교육학을 만들어 내야 한다. 만일 이런 활동들이 아이들에게 적합한 환경에서 제공된다면 모든 아이들이 기꺼이 경험하고 모방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유치원 같은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창조력을 발휘하기보다 교육학을 만들어 낸다. 아이들에게 필요할 거라고 사전에 생각한 것을 아이들이 따라하도록 억지로 아이들의 의지를 유도한다는 말이다.
이때 아이들은 무엇을 모방하게 될까? 교사가 원하는 것을 아이들이 하도록 유도하는 마음 자세를 모방한다. 교사는 빵을 구울 때도 교육적 의도 아래 굽고, 인형을 만들면 아이들에게 좋을 것이라 생각해서 만들고, 그림도 교육적 동기 아래 그린다. 발도르프 유치원에서 일하는 교사들은 자기 자신의 완성을 추구하는 창조적 인간이 아닌 듯 보인다. 자신들이 봉사, 헌신해야 한다고 믿는 신념을 따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 ‘믿음’에 복종하는 어른의 내면을 모방한다. 발도르프 유치원 공간은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내면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부응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생각한다면 정말 단순한 문제이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사람은 먼저 손을 쓰는 어떤 일을 배운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조각을 배웠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작업실을 꾸릴 것이고 그 작업실에서 일을 하고 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 사람의 관심은 흙, 돌, 연장, 작품이다. 이들 예술가, 원예사, 제과사, 금속공예가 옆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삶의 현장에 홀로 섰을 때, 아이들에게 좋을 것이라는 일방적 ‘믿음’에 따라 짜여진 발도르프 유아교육을 받았을 때보다 더 역동적인 의지를 갖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작업의 목적에 맞고 편리하고 모범적인 다용도 작업실이 인지학에 바탕을 둔 유치원의 모델이 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어른에게 좋을 것이다. 실제 작업이 가능한 공간에서 어른은 아이들에게 진정한 모범을 보여줄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일하는 사람’ 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른의 주의력은 자신이 일하는 조건과 제품에 쏠린다. 아이들은 이런 어른의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아이들은 타고난 장인들이기 때문이다. 태아 시기에 하늘의 작업실에서 자신의 신체를 형성할 때 포괄적 기본 수업을 이미 마쳤다. 이제 그때의 수업을 이 땅의 실제 삶에서 손으로 하는 작업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유아교육은 어떤 이론을 가졌든 대부분 아이들을 어리석고 모자라다고 판단하고, 교육학적으로 지어낸 그 어리석음과 모자람에서 인위적으로 아이들을 벗어나게 해주려 한다. 진짜 어리석음은 아이나 아이와 함께 생활하는 교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활동 방식에 대한 불분명한 사고에 있다. 아이들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생각 뒤에는 인지학이 있기 오래 전에 세상에 들어온 사고의 틀이 숨어 있다. 그 속에는 정신과학으로 자유로운 시야를 얻지 못한 사람들을 비자율적으로 만들고, 그 영혼을 소유하여 멀리서도 조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만들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인지학에 바탕을 둔 다용도 작업실이 유치원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돌을 쪼고 쇠를 두들기고 나무를 깎고 빵이나 과자를 구울 수 있는 공간을 지역에 따라 다양한 소재와 방식으로 만들어 봄직 하지 않는가? 일본에서 만드는 집은 슈투트가르트나 베네수엘라에서 만드는 집과 확연히 달라야 할 것이다. 물론 제 1차 괴테아눔이나 말쉬(Malsch)가 만든 모델하우스나 루돌프 슈타이너가 스위스 도르낙에서 작업할 때 사용한 목공실과 닮은 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가 일하는 옆에서 노는 아이들을 한번 상상해보라! 슈타이너가 아이들 주변에서 일하기 위해 발도르프 유치원에서 무엇을 들어낼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심심함의 가치
요즈음 유치원에서는 잘 놀지 못하고 때로는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심심해하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마음씨 좋은 유치원 교사는 지금까지 했던 대로 아이들에게 관심거리가 될 만한 것을 이것저것 찾아서 아이에게 권한다. 악의 없고 당연하게 보이는 행동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회주의’라 부를 만한 요소가 아주 뚜렷하게 보인다. 겉보기에 비활동적인 어린 아이들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어떤 활동으로 전환시키려는 사람은 그런 행동이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아이들의 모방을 고무시키는 어른들의 모범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동기유발이 일어나는 상황은 아주 섬세해서 우리가 전혀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다. 친절하긴 하지만 약간은 가식과 강요가 들어 있는 방법으로 아이의 내면에 개입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는 새싹을 삶아서 채소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 사람에게는 맛이 있을지 몰라도 자라나야 할 식물 자체는 사라진다.
아이가 겉보기에 심심해하는 모습을 허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것은 유치원 교사 스스로 아이들이 심심해하는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겉보기에 심심해 보이는 것은 어른의 문제이지 아이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롭지 못한 정신, 자유를 일으키는 정신과 자유를 구속하는 정신으로 갈라진다. 어른에게 심심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아이들 모습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심심함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아이들이 실제로 느끼는 심심함과 두 번째는 바깥에서 그렇게 보이는 심심함이다. 두 종류는 서로 섞이기도 한다.
두 번째 심심함에 빠져 있는 아이들의 내면은 사실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아차릴 뿐 아니라, 내면에서는 열심히 함께 참여하고 있다. 이를테면 거리의 청소부나 들판의 농부, 대장장이(아직도 있다면)가 일하는 모습을 넋 나간 듯이 쳐다보는 아이의 내면에서는 아주 활발한 활동이 일어나고 있다. 다른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다. 겉보기에는 다른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그냥 쳐다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주 깊숙이 관여하며 함께 경험한다. 이런 아이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일 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 한층 더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로 바뀐다.
실제로 심심함을 느끼는 첫 번째 아이들은 불만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다. 두 번째 아이들은 만족하는 아이들인 반면에 불만을 느끼는 이 아이들의 내면은 분열 상태에 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이런 아이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려는 유혹에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런 아이들이 어떤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은 아이들을 스스로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자신의 내면을 탐색할 기회를 앗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활동은 미덕이고 비활동은 악덕이라는 옛 사고의 틀 속에 아이들을 규정짓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구교와 신교의 견해이며 청교도의 견해이다. 첫 7년 주기의 어린 아이들에게 근원적으로 놓여 있는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그야말로 예수회적인 월권 행위이다. 이제 처음으로 만들어지려는 자유로운 의지 표출을 방해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끊임없이 활동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활동은 모든 활동의 원천인 자신의 자아에서 출발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의 자아는 아이들 주변에서,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보여주는 어른들의 활동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어른이 아이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자신이 하는 활동에 온 힘을 쏟아 그 활동이 참되고 깊이가 있고 열정에 넘치도록 하는 일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자신의 자아 본질에서 출발해, 참되고 깊이 있고 열정이 담긴 어른의 활동을 알아차릴 수 있고, 언젠가는 아이들 저마다 개별 인격체의 기준에 따라 모방을 자율적 놀이로, 자율적 결단력으로,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꾸려나가는 능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스스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지 다른 길은 없다.
아이들은 오늘날 아이들이 탄생 전에 담았던 것을 재인식할 수 없는 문명사회에 태어난다. 아이의 부모도, 주변 공간이나 색깔들, 움직임, 언어, 냄새, 소음, 울리는 소리 어느 것 하나도 아이의 탄생 전 본질이 온전하게 발달할 수 있는 것을 담지 않았다. 따라서 아이의 인격체(personality)는 움츠려 들고 자신의 몸에서 멀리 떠나 머물게 된다. 아이의 몸은 자신의 자아와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발달한다. 심한 경우에는 각양각색의 친절한 심리학자나 치료사들이 등장하여 예리한 관찰로 아이들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고 아이에게 유익할 만한 것을 정한다.
세상이 다방면에 걸쳐 문화적 위기와 마주하게 되면 이에 비례해 심리학자와 치료사들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전 인류의 절반이 심리학자나 치료사가 되어도 이 위기에 대처할 어떤 방안도 찾지 못할 것이다. 아니 전체 인류가 심리학자나 치료사가 되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문제에 다가가는 것 자체가 오히려 위기의 징후라고 보아야 한다. 심리학자나 치료사를 통헤 문화 위기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신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 신성을 추구하는 노력, 그리고 그런 노력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을 통해서 비로소 위기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실제로 심심함을 느끼는 아이는 세상이 현재 놓여 있는 위기를 아는 것이다. 진정한 치유사는 아이의 높은 존재 자체이다. 아이 안에 내재하는 이 치유사는 주변에서 적당한 사람들을 찾을 수만 있다면(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형제자매로서 현재의 위기를 인식하고 스스로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 활로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스스로 자신을 도울 것이다. 주변에서 이런 활동이 일어난다면 아이의 높은 자아는 미래를 믿고 미래를 위해-어떤 교육적 의도가 없이-실천하는 사람들을 알아볼 것이며 그런 어른들에게 신뢰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알맞은 발달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때때로 먼 훗날 아이 자신이 인생 한가운데 섰을 때 비로소 그 길이 나타날 때도 있으므로 현재 우리의 눈에는 그 길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발도르프 도그마의 하나인 ‘정리정돈’에 대해 말해야 될 것 같다. 유치원 교사인 한 어머니가 정리정돈 시간만 되면 아들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모든 의욕이 마비되는 것 같아 치료를 받으러 가야 할 것 같다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하루일과표가 명령하는 정리’를 하기 싫어하거나 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이런 증세를 보면, 정리정돈이라는 것이 많은 경우 아이의 몸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파괴행위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정신이 이런 도그마를 만들었을까?
소시민적인 정리정돈이 아니라 장인들이나 예술가들이 하는 수준에서, 그런 정리정돈이 실제 작업에 필요해서,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 가볍게 마치 춤추는 것처럼 움직여야 아이들도 모방하고 함께 돕는다. 정리정돈을 할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아이들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또 아이들을 부추기지 말아야 하고 강요해서는 더욱 안 된다. 특히 좋지 않은 것은 정리정돈을 하고 싶어 하거나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또는 할 수 있고 없고를 도덕적인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발도르프 유치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정리정돈을 하는 것은 좋고, 않는 것은 나쁘다’, 이런 정의와 함께 유치원 교사는 이전에 누군가가 지어낸 카테고리 속으로 자신을 구속시킨다. 보통 장인이나 예술가들은 내일 계속 일을 하는데 필요한 정도로 정리정돈을 한다. 자유인으로서 활동적인 사람으로서 이런 정도가 작업장, 아틀리에, 농장의 청결성을 유지하는 척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어린이도 이 정도 수준에서 자발적인 의지로 유치원 교사와 함께 정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세기 초에 볼 수 있었던 소시민적인 거실의 청결성은 이제 지난 세기의 일로 남겨 두어도 좋을 것 같다.
우리 목표는 아이 하나하나 속에 탄생 전에 심어진 진실한 우주 질서가 바깥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소시민적인 정리정돈은 따분한 일이다. 그러나 내면이 정돈된 사람은 쾌활하고 창조적인 사람이다.
인지학(Anthroposophie)은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가 제시한, 일반적으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정신영역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과학적’이란 말은 누구나 같은 방법으로 다가가면 같은 결과를 얻는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자신이 직접 알아낸 정신세계에 관한 지식을 실제 삶에 적용하여 의학, 농업, 교육, 치유교육, 건축,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교육 분야의 경우 191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에서 처음으로 학교 문을 연 이후 지금까지 발도르프 또는 슈타이너라는 이름을 내건 12년제 통합학교가 950여 개, 유치원이 1500여 개로 늘었다. 우리나라에도 약 10년 전부터 소개되기 시작해 발도르프 교육을 지향하는 학교, 어린이집, 유치원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에 있고 교사양성기관도 몇 군데 생겨났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옮긴이 또한 1998년 스위스 도르낙에 있는 슈타이너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동안 발도르프 유아교사 양성기관 가운데 하나인 인지학연구센터에서 연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처음에는 나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발도르프 유아교육도 학교교육처럼 루돌프 슈타이너의 직접적인 지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 믿고 별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쿠푸스의 저서 『문화를 창조하는 유치원의 기본 방침』 을 읽고 ‘여기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구나!’ 하는 의혹이 일어났고 몇 해 동안 쿠푸스의 지적을 나름대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의혹은 쿠푸스의 사고를 더욱 아끼는 마음으로 바뀌었고, 우리나라에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할 글들은 쿠푸스가 발도르프 유치원에서의 경험에 기초해 아이들의 놀이를 연구하는 모임에서 발표한 글을 모은 책-『정신과학의 관점에서 재조명해본 발도르프 유아교육』(2005), 『문화를 창조하는 유치원의 기본방침』(2006)-에서 뽑은 것들이다. 쿠푸스의 글은 우선 서구, 특히 인지학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전제로 한 글이기 때문에 한국 독자들에게 어려운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발도르프 유아교육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뭐가 뭔지 통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심이 있으면 우리나라에도 발도르프 유아교육에 관한 책이 많이 출간되어 있으므로 참조하길 바란다.
한 가지 꼭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이 글 때문에 루돌프 슈타이너와 인지학을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넘기지 말았으면 좋겠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본인이 직접 유치원은 만들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몇몇 사람들이 루돌프 슈타이너가 남긴 글이나 강연을 참고해 임의로 만든 발도르프 유아교육은 루돌프 슈타이너와 관계는 있지만 독자적인 또 하나의 다른 교육체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옮긴이 변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