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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390. [역경의 열매] 배정희 <1-19> “낮고 낮은 인도 슬럼가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
갈 때마다 하나님 손길 절실함 느껴… 지친 이들과 함께 아버지 집 가고파
싱글 선교사로 23년 동안 인도에서 사역하고 있는 배정희 선교사. 그는 “철저한 낮아짐을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23년 전 소명을 따라 인도로 갔다. 주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그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희로애락이 점철된 삶이었다. 감사하게도 한 번도 그 길로 갔던 걸 후회해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의 음성보다 대적(大敵)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영적 전쟁터에서 살았지만, 추호라도 그분의 존재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등 뒤에 계셨고, 내 앞에서 길을 인도해 주셨다.
유엔 센서스에 따르면 2016년 11월 현재 인도 인구는 13억4100만명이다. 수도인 뉴델리가 포함된 연방직할 지역인 델리에는 1868만여명이 살고 있다. 이중 절반가량의 시민이 슬럼가에서 삶을 영유한다. 인도 사회는 빈부 격차가 극심하기로 유명하다.
델리 슬럼가를 방문할 때마다 소설가 김동인의 단편소설 ‘감자’가 연상되곤 한다. 큰 소리 나는 싸움, 위협, 도둑, 살인, 폭력, 매춘, 술주정, 본드로 취해 있는 사람들, 장애 아이들, 넝마 줍는 아이들, 구걸하는 아이들…. 더러운 물이 흐르는 개천 옆에는 오물이 쌓였고 화장터에서 뿜어나는 연기로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곳이다. 지옥이 따로 없다고 할 정도로 처참한 상태가 연출되고 있다.
‘어떻게 똑같은 세상에 삶의 환경이 이다지도 차이가 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슬럼가를 애써 외면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난 가능하면 자주 찾는다. 방문 횟수가 늘어나면서 생각도 변했다. 처음엔 처참하게만 느껴지던 슬럼가 속에서도 희로애락의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슬럼가는 그 어떤 곳보다도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한 지역이라는 생각을 한다. 허물어진 길거리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란 제목의 가스펠을 부르게 된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중에서)
내가 인도로 간 것은 낮고 낮은 마음으로, 복음의 불모지인 그곳에서 우리의 진정한 인도자는 하나님임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 가난하고 지친 인도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라도 겸손하고 낮은 마음이 절실했다. 낮아지고 낮아졌을 때, 그들은 나를 친구로 받아들였다.
싱글 선교사로 인도에 살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인도로 가는 그 길은 바로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 말이다. 나는 주님의 뜻에 따라 인도로 왔지만, 내가 가는 이 길은 영원한 본향인 아버지 집으로 가는 여정이다.
나는 사랑하는 인도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 집으로 가고 싶다. 아버지 집으로 가기 위해선 인도하심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 그분의 인도 없인 우리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내가 깨달은 바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은 철저한 낮아짐이었다. 가난하고 낮은 심령이 되었을 때에만 그분이 보이며,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이제 나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결국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나의 등 뒤에서 나를 인도해주셨던 그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정리=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 [역경의 열매] 배정희 <1> "낮고 낮은 인도 슬럼가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배정희 <2> "내 사랑하는 딸아, 나를 위해 인도로 오지 않겠니?"
* [역경의 열매] 배정희 <3> "장하다 내 딸" 어머니 축복 속 인도 사역 결심
* [역경의 열매] 배정희 <4> 힌디어 공부에 몰입… 졸업식 때 5분간 연설도
* [역경의 열매] 배정희 <5>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와 함께 교회 개척
* [역경의 열매] 배정희 <6> 개척 두달 만에 맞은 첫 성도… 부흥 물꼬로
* [역경의 열매] 배정희 <7> 슬럼가 교회로 시작 4년 만에 4개 지교회 개척
* [역경의 열매] 배정희 <8> 오직 기도의 힘으로 세운 미션센터
* [역경의 열매] 배정희 <9> 더운 날씨·오염된 환경, 각종 질병 시달려
* [역경의 열매] 배정희 <10> "우리 동네에는 예수라는 사람 살지 않아요"
* [역경의 열매] 배정희 <11> 처참한 폭우 피해 주민 끌어안고 함께 울어
* [역경의 열매] 배정희 <12> '거리의 아이'들 비참한 처지에 가슴 찢어져
* [역경의 열매] 배정희 <13> 사랑하며 살다 기쁘게 죽음 맞으리라
* [역경의 열매] 배정희 <14> 필요한 대로, 구하는 대로 채워주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배정희 <15> 사역 7년 만에 안식월…'마음의 몸살' 앓고 다시 인도로
* [역경의 열매] 배정희 <16> 성령님 아니었으면 도둑 맞을 뻔했던 큰 돈
* [역경의 열매] 배정희 <17> 현지인들의 온갖 방해 이겨내고 미션센터 헌당
* [역경의 열매] 배정희 <18> 눈물을 흘리며 뿌린 씨앗에서 수많은 결실
* [역경의 열매] 배정희 <19·끝> '좋은 소식' 전하는 길, 고단하지만 감사한 삶
약력=△1958년 서울 출생 △한세대학교 목회학과 졸업 △인도 네루대학 사회학 석·박사 △굿피플 인도지부장 △2015년 코이카 대한민국해외봉사상 수상
***[역경의 열매] 배정희 <2> “내 사랑하는 딸아, 나를 위해 인도로 오지 않겠니?”
단기선교지 인도서 무더위로 고생… 몸 찬양하는 도중 작은 음성 들려
1998년 인도 시장통교회에서 배정희 선교사(오른쪽)가 인도 현지 청소년들과 찬양하고 있다.인도로 가는 길은 멀었다. 1993년 7월 7일, 내 인생 처음으로 인도를 찾았다. 나를 포함한 여의도순복음교회 월드미션 인도선교단기팀 13명은 남인도의 첸나이를 찾았다. 직항이 없기에 중간에 경유하고 기다리는 시간을 포함, 20시간 가까이 걸려 첸나이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기장은 첸나이의 기온이 섭씨 46도라고 안내해줬다. 46도란 말에 기가 질렸다. 기내에서 나오자마자 역한 냄새가 났다. 입국 수속을 받으려 줄을 섰다. 분명 에어컨이 가동될 텐데 너무나 더웠다. 공항 천정에서 빙빙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의 열기까지 합세해 숨쉬기가 힘들었다. 우리 팀은 현지에서 사역하는 K 선교사님의 안내에 따라서 버스로 이동했다.
인도에는 3억3000만 개의 우상이 있다고 한다. 인간이 우상을 만들기에 매일 새로운 신들이 탄생하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도 신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길거리의 특별한 돌들도 신격화되고 있다. 솔직히 인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신을 만들든, 어떤 종교를 믿든, 그들이 얼마나 곤핍하게 살 건, 나와는 상관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사정이었다. 빨리 한국으로 가고 싶었다. 인도에는 인도로 부르신 특별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심한 갈증이 났다. 침을 삼키면서 속으로 절규하듯 외쳤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인도 선교사로 부르지 않아서요.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월드미션 인도팀은 사역의 일환으로 남인도 벵갈로르 지역에서 사역하는 L 선교사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방문했다. 예배 중에 인도팀원들의 몸 찬양 순서가 되었다. 우린 앞에 나와 몸 찬양을 했다. 처음엔 연습한대로, 다소 기계적으로 찬양을 드렸다. 그런데 찬양이 지속되면서 뭔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며 찬양을 드렸다. “내 목소리를 높이고, 내 손을 높이 듭니다. 당신께 우리 삶을 들여 올립니다. 당신께 바칠 제물로….” 갑자기 영어로 제물(offering)이란 단어가 심장 깊숙하게 박혔다. 그것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때 하나님이 나 외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작은 음성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내 사랑하는 딸 정희야, 나를 위해서 인도로 오지 않겠니?” 인도 땅을 밟은 지 며칠 동안 그다지도 인도를 부담스러워 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인도행을 청하셨다. 난 ‘오지 않겠니?’라는 그분의 청유형 어조에 가슴 찡했다.
하나님의 요청에 “예!”라고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며칠간 지낸 인도에서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믿음 생활을 한 이후부터 선교사 사명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호기롭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한국에선 선교 열정으로 뜨겁게 뛰었던 내 심장의 고동소리가 정작 선교 현장에서의 부르심 속에서 약해져갔다.
그때 다시 성령께서 역사하셨다. 내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정희야, 넌 무엇을 위해 살겠니? 이 땅에서 집을 지을 생각이니? 그 곳은 너의 집이 아니야. 너의 집은 따로 있단다. 잠시 뒤에 넌 결국 집으로 돌아와야 해. 집으로 올 때까지 네가 할 일이 있단다. 그 일 마치고 와야지.” 나는 “집으로 가자”는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에 거꾸러졌다. 그 권유에 순복했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3> “장하다 내 딸” 어머니 축복 속 인도 사역 결심
한 달 동안 인도 전역 선교 정탐 여행… 하나님께서 지시한 그 땅이라는 확신
1995년 4월 인도 델리 근교에 있는 친구의 집 앞에 서 있는 배정희 선교사.인도단기 사역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기내에서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이 나를 감쌌다. 집에 가서 내 결단을 어머니께 말씀 드렸다. 권사님이신 어머니는 담대하셨다. “그래, 하나님이 불렀다면 가야지. 장하다, 내 딸.” 어머니는 부르심에는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면서 간절히 축복기도를 해 주셨다.
인생의 전환점은 그렇게 이뤄졌다. 1993년 12월 8일 교회로부터 인도선교사 파송장을 받고 인도로 가게 되었다. 월드미션 단기팀으로 처음 인도에 발을 디딘 이후 반년 만이었다. 인도 첸나이에 온 지 한 달 후, 조용기 목사님의 첸나이 성회가 열렸다. 인도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던 내게 첸나이 성회는 커다란 자극제가 됐다. 성회가 끝난 후 첸나이를 떠나 오직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가야 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한 달 동안 인도 전역을 배낭 하나만 메고 다니기로 했다. 선교 정탐 여행으로, 그 땅을 밟을 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야기해 주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먼저 벵갈로에서 사역하는 L 선교사님을 만나러 갔다. 선배 선교사님 부부를 만나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마음에 적었다.
“배 선교사님, 하나님의 선교에는 실패란 단어가 없어요. 그러나 부름 받은 선교사는 실패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며칠을 L 선교사님 댁에서 머물렀다. 그러다 성령께서 뭄바이로 갈 마음을 주셨다. 순종했다. 뭄바이 기차역에서 마중 나온 B 선교사님을 만났다. 인도 선교에 대한 그 분의 열정을 들을 수 있었다. B 선교사님은 영화 ‘슬럼독 밀리어니어’의 무대로 뭄바이 최대 슬럼지대인 다라비(Dharavi)로 나를 인도했다. 뭄바이는 인구 1700만여명의 대도시로 교통 자체가 볼 거리였다. 철장이 쳐진 버스에 넘치도록 탄 사람들, 인도와 차도의 경계를 아예 무시하며 요리조리 운전하는 오토 릭샤의 행렬이 거대한 행위 예술판과 같았다.
이후 푸네를 거쳐 델리로 갔다. 델리에 도착해 먼저 여의도순복음교회 안수집사이신 정영재 델리주재 한국 공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정 공사님 부부의 강권으로 그 집에서 기거하게 됐다. 델리 역시 첸나이 못지않게 더웠다. 델리 거리를 걸으며 슬며시 들어오는 마음이 있었다. ‘델리로 와야겠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가운데 소원이 생겼다면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이다. 아마도 교회를 발견하기 힘든 델리에서 거룩한 욕심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정 공사님은 델리를 떠나는 날 아침식사 중에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선교사님, 인도에 먼저 온 입장에서 세 가지를 말씀드릴게요. 첫째로 인도는 광야입니다. 광야에선 쳐다 볼 곳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세요. 둘째, 언어 공부를 열심히 하세요. 언어가 약하면 초등학생 수준의 사람들과만 소통이 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언어를 잘 배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도에서는 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인도 사람들이 마음대로 산다고 해서 우리까지 법을 어겨선 안 됩니다.” 정 공사님의 세 가지 조언을 가슴에 새겼다.
난 결국 북인도행을 결심했다. 그 곳이 하나님께서 지시한 바로 그 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4> 힌디어 공부에 몰입… 졸업식 때 5분간 연설도
살인적 더위·페스트 재앙 등 공포… 예수님 주신 ‘평강의 영’으로 극복
2007년 인도 델리 순복음교회 성도들과 함께한 배정희 선교사(두 번째 줄 중앙).1994년 6월 25일 인도 뉴델리에 다시 들어갔다. 뉴델리는 수도인데도 첸나이보다 훨씬 더 삭막하게 느껴졌다. 7월부터 뉴델리의 언어학교에 등록해 본격적으로 힌디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뉴델리의 여름은 상상을 초월할만큼 높은 기온으로 악명 높다. 연일 42도를 넘는 게 기본이다. 어떤 날은 체감온도가 47도, 심지어 50도를 넘기기도 한다. 그런 날엔 지칠 힘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인도생활에 적응돼 가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점점 인도 생활에 길들여져 갔다. 이곳의 환경이 어떠하든, 아무리 덥든, 수십 마리의 도마뱀이 한꺼번에 떨어지든, 온 몸이 벌레에 물리든 나는 이곳에서 견뎌야 한다. ‘부름 받아 나선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힌두어는 영어와 함께 1965년부터 인도의 공용어가 됐다. 인도와 네팔, 파키스탄, 피지 등에서 5억여 명이 힌두어를 사용한다. 인도에선 특히 북인도 지역에서 많이 통용된다. 남인도에서는 힌두어를 몰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난 북인도에서 주로 사역할 계획이라 힌두어를 반드시 배워야 했다.
뉴델리의 힌두어 중앙연구소에서 언어를 배웠다. 한 반에 아시아, 유럽, 미주 등에서 온 15명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학생 가운데는 한국 선교사님들도 있었다. 나름 열심히 공부해 힌두어로 작문을 할 수 있게 됐다. 2년 동안 정말 열심히 언어 공부를 했다. 졸업식이 다가왔다. 샤르마 교장 선생님은 졸업식 때 인도 교육부차관이 참석할 거라면서 내게 힌두어로 5분 연설을 하라고 했다.
처음엔 힌두어 회화를 못해 교장 선생님 앞에서 대성통곡했던 내가 교육부차관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인도에서의 나의 삶은 깊어져 갔다.
94년 10월에 뉴델리는 페스트로 초비상 상태가 됐다. 언론은 연일 페스트 창궐을 톱뉴스로 다뤘다. 페스트가 발병한 환자 숫자가 400명을 넘어서 대재앙이 우려된다는 보도였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대사관 직원 및 주재원들은 전세 비행기로 뉴델리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페스트가 인도를 넘어 인근 네팔과 파키스탄, 중국의 사천성 등지로 확산된다는 보도가 이어지자, 한국 정부에서도 주재원 및 현지 한인들을 위해 전세 항공기를 준비했다. 뉴델리의 한인들도 외출하지 않고 집에만 머물렀다.
선교사는 선교지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페스트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페스트와 같은 죽음의 기운은 사역 내내 쫓아 다녔다. 보이는 페스트만이 죽음의 병이 아니었다. 죽음을 부르는 수많은 영들과 담대히 싸워야 했다. 이 담대함과 평강이 지금까지 인도 선교를 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자주 묻는다. “선교사님, 어떻게 인도에서 혼자 지내실 수 있었어요. 무섭지 않았나요. 두려움과 외로움을 어떻게 견디셨나요.” 비결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생명의 영을 받는 것이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강의 영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
96년 2월 어느 정도 힌두어를 배워서 기본적인 말을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사역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역을,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해야 할 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는 가장 강력한 일은 기도하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5>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와 함께 교회 개척
장차 인도 교계 지도자 기르는 기회 강의하면서 먼저 나 스스로가 배워
1993년 월드미션 단기팀으로 인도를 찾아 현지 아이들과 함께 한 배정희 선교사.난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구하며 기도했다. 기도하면서 마음에 주신 감동은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라는 것이었다. 일단 과거 여의도순복음교회 대학선교회에서 강의했던 경험을 살려 인도 신학생들에게 필요한 강의를 시작하면 될 것 같았다. 계속 기도하자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북인도 신학교의 이사장인 싱 목사님은 한국 장로회신학대에서 신학을 전공하셨다. 한국인 이명희 사모님과 결혼하신 후에 인도로 돌아와 북인도 신학교를 세우셨다. 이미 친분이 있었던 싱 목사님께 강의 자리를 부탁하면 허락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왔다. 그러나 싱 목사님께 전화하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싶었다. 그저 기도만 했다. 놀랍게도 다음날, 싱 목사님이 내게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배 선교사님, 시간이 되시면 우리 신학교에서 강의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정확히 일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란 사실을 새삼 느꼈다. 하나님은 내게 북인도 신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이제 인도 선교 사역의 첫 걸음을 떼게 됐다. 강의하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했다. 지난 2년간은 힌디어(hindi language) 공부에 집중했기에 학생들을 가르치며 먼저 나 스스로가 배울 수 있었다. 가르치기 위해선 기도하고 준비해야 했다. 북인도 신학교 학생들은 모두 장차 인도 교계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영광스런 일이었다.
하루는 한 신학생이 기도제목을 나누고 싶다며 찾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실명이 됐고 생활고로 병원에 갈 수 없어 기도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의 이름은 바반 쿠마르. 나의 첫 제자였다. “한 사람의 제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쿠마르가 첫 번째의 그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바반 외에 악발과 아닐, 비젠드라, 프렘 등도 나의 제자였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 한 뒤에 나와 동역했다.
난 신학교 이사장이신 싱 목사님에게 다섯 명의 신학생이 졸업하면 함께 사역해도 좋은지 의논했다. 목사님은 쾌히 승낙하셨다. 선교지에서 이미 다른 선교사와 사역을 하고 있는 현지 사역자들에게 더 좋은 사례비를 제시하며 일종의 ‘빼내기’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런 일들을 통해 현지 선교사들끼리 관계가 악화되기도 한다. 모든 일에는 질서가 중요했다.
난 바울이 고백한대로 사역하고 싶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함이라.”(롬 15:20) 바울의 고백이 나의 선교 원칙이다. 그 원칙대로 난 절대로 남의 터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저 크건, 작건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바반 쿠마르는 신학교를 졸업한 뒤 싱 목사님의 축복 속에 나와 함께 교회를 개척키로 했다. 우린 델리에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장소를 물색했다.
1994년 델리에 왔을 때부터 주셨던 소원이 교회 개척이었다. 인도에서 초대교회 같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꿈을 가졌다. 힌디어 공부가 끝날 즈음, 96년을 넘기기 전에 교회를 개척하고자 결단했다. 당시 교회 개척을 위한 기도를 하기만 하면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가까운 시장통인 무카(Muka) 지역이 마음 가운데 떠올랐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6> 개척 두달 만에 맞은 첫 성도… 부흥 물꼬로
방과 후 영어수업 주효… 학생들 모여들어 2년 안돼 공간 부족할 만큼 성도 늘어나
1996년 12월, 인도 델리의 무카 지역 시장에 세워진 선가티순복음교회에서 설교하는 배정희 선교사.교회 개척을 위해 기도를 계속하면 인도 델리의 무카지역 시장 거리만 보였다. 무카엔 30만명이 살고 있다. 시장 주변으론 2500여명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시장을 오고 가면서 눈에 들어온 아이들의 모습이 마음에 머물렀다. 새벽에 헌 신문과 빈 병을 주워서 파는 아이들, 가게 터에서 잠을 자고 기지개를 펴는 아이들, 점포에서 일을 하는 키 작은 아이들, 넝마 줍는 아이들, 그리고 시장을 배회하는 아이들. 이들의 안쓰러운 모습이 마음에 다가왔다. 시장통에 교회를 세우고 싶었다.
시장 상가 건물을 알아봤다. 몇 군데가 비어 있었다. 정확한 장소를 위해서 기도를 거듭했다. 1996년 11월에 무카 지역 시장 내 5층짜리 건물 3층의 10평 남짓한 공간을 계약했다. 인도에 온지 2년 만에 드디어 시장통에 교회개척을 했다. 96년 12월 1일 선가티순복음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사람들은 선가티순복음교회란 이름보다 시장통교회로 불렀다. 신학교 제자인 바반 전도사가 합류했다.
창립예배를 마치고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됐다. 바반 전도사와 난 하루에 보통 4시간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늘 교회에는 둘밖에 없었다. 실망하지 않았다. 매일 새벽에 교회에서 2시간 동안 간구했다.
“하나님, 제발 사람 좀 보내주세요.”
두 달 만에 첫 성도가 왔다. 오디샤(Odisha) 지역 출신인 존슨 가족이 교회의 첫 성도가 됐다. 너무나 기뻤다. 존슨형제는 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을 돕는 일을 하는 성실한 형제로 전부터 바반 전도사를 알고 지내던 크리스천이었다. 두 번째 성도는 군인인 가브리엘 형제였다. 델리에 막 정착한 그는 물건을 사러 시장에 왔다 찬양소리를 듣고 자발적으로 교회에 들어왔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한 명 두 명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주셨다.
새 신자들은 힌두교, 이슬람교에서 막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도,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독교 신앙생활을 했던 존슨 가족과 가브리엘 가족을 먼저 교회로 보내주신 것이었다.
우린 의자 없이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성가대도, 주보도 없었다. 그러나 우린 초대교회처럼 가족이었다. 지체가 진정으로 연합하는 한몸 공동체를 꿈꿨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기도하는 일 외엔 방법이 없었다. 10평 남짓한 장소에서 우린 기도를 심고, 또 심었다.
시장통교회를 시작한 지 1년 정도 지나자 주일학교 학생들만 80명을 넘어섰다. 방과 후 영어수업이 효과를 본 것이다. 1998년 중반쯤엔 장년 성도들이 80명이 넘었다. 주일학교 학생들도 지속적으로 늘어나 10평 공간의 예배당으론 자리가 부족했다.
시장통 교회가 부흥하면서 일꾼과 조직이 필요했다. 97년 6월 북인도신학교의 제자인 프렘과 악발이 전도사로 동역했다. 바반 전도사에겐 장년 성도들을 맡겼다. 프렘 전도사는 청년사역을 책임졌다. 악발 전도사는 어린이 사역과 찬양 리더로 섬겼다. 현지인 사역자들은 나를 믿고 잘 따라 주었다.
교회에선 살아 있는 간증이 넘쳐났다. 쏟아져 나오는 간증은 평범했지만, 진심으로 드리는 간증이라서 마음을 흔들었다. 물이 정확한 시간에 나옴을 감사했고, 배가 아프지 않아 교회에 제 시간에 나올 수 있던 것도 감사하며 간증했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7> 슬럼가 교회로 시작 4년 만에 4개 지교회 개척
전임 사역자 파송된 제자들 헌신… 선가티 본교회와 완벽한 팀 사역
1998년 12월 인도 사하드 지역 영광순복음교회 성도의 아이를 안고 있는 배정희 선교사.학교수업이 끝난 후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개방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난한 부모 밑에서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영어와 함께 말씀도 가르쳤다. 당시는 칠판이 없어서 나무판에 까만 페인트를 칠해 사용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120여명의 아이들은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을 즐거워했다.
아이들에겐 마음을 함께 할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거리에서 노는 것보다 교회에 나와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영어공부 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아이들로 인해 전도된 어른들도 많았다. 영어 학교와 더불어 유치원 사역도 시작했다.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은 선교 제한 국가인 인도에서 교회가 사람들과 교류하는 접촉점이 됐다. 어린이들을 통해 어른들이 점점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를 받아주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힌디어 설교를 했다. 부족했지만 힌디어로 설교를 하자 성도들이 더욱 말씀을 친숙하게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내게 지교회를 개척하라는 믿음을 주셨다. 하나님이 어떠한 마음의 소원을 주실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래서 마음에 든 생각은 실행해야 했다.
우린 98년 10월 3일 델리의 외곽 슬럼가인 사하드(sahad) 지역에 지교회인 영광순복음교회를 개척했다.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슬럼가에 하나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졌다. 주변의 가난하고 어려운 성도들이 한 둘씩 모여들었다. 처음엔 세 명의 전도사들이 돌아가면서 말씀을 전했다. 악발 전도사를 정식으로 영광순복음교회 전임 사역자로 파송했다. 교회는 시장통 선가티순복음교회와 완벽한 팀 사역을 펼쳤다. 99년에는 청년 사역을 맡고 있던 프렘 전도사가 교회 개척을 위해 펀잡 지역으로 떠났다.
2000년에는 아닐과 비젠드라 전도사를 이슬람권인 사란(saran) 지역으로 파송했다. 이 지역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한 곳이다. 우린 이 지역에 지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1년여 동안 기도하며 준비했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 아닐 전도사는 니겔순복음교회를, 비젠드라 전도사는 벧엘순복음교회를 개척했다.
때때로 핍박이 있었다. 두 전도사는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가서 16시간이나 조사를 받은 적도 있고, ‘예수 영화’를 상영했다가 몰매를 맞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부흥했다. 살아있는 교회는 반드시 증식하게 된다. 난 시장통교회를 개척할 때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를 꿈꿨다. 그 꿈대로 개척 4년 만에 4개의 지교회를 개척, 사랑하는 제자들을 전임사역자로 파송했다.
시장통 선가티순복음교회가 안정을 찾게 되자 본격적인 제자훈련을 시도했다. 제자들은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갔다. 훈련학교 제1회 졸업생 4명 가운데 디나나트, 하렌드라, 란지트는 주의 종이 되어 교회를 개척했고, 데이빗은 병원에서 간호사로 사역 하고 있다. 2016년 11월까지 102명의 제자가 세워졌다. 인도에서 사역하기 위해선 보혜사 성령과 동행해야만 한다. 난 매일 새벽마다 졸업한 102명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제자들을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교회가 성장하자 모두 함께 모일 더 큰 장소가 필요했다. 비좁은 곳에서 에어컨도 없이 예배드리는 인도 성도들이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서 2002년부터 땅을 보러 다녔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땅도, 돈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께 기도만 했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8> 오직 기도의 힘으로 세운 미션센터
건축비 부족할 때마다 각계서 헌금… 인도에 온지 10년만에 헌당예배
2001년 9월 인도 델리의 ‘쿠툽 미나르’ 유적지에서 제자훈련 받는 학생들과 함께 한 배정희 선교사.2002년부터 2년 동안 계속 기도하면서 인도 델리 주변의 땅을 보러 다녔다. 2004년 시장통교회 건물 주인의 아들 마이팔이 좋은 땅이 있다며 보러 오라고 했다. 경찰인 장인 소유의 땅으로 공항 근처에 있었다. 60평 정도의 부지로 상당히 좋아 보였다. 땅을 구입하려면 한국 돈으로 2000만원 정도가 필요했다. 돈이 없었다. 마이팔의 장인은 땅값은 차후에 받겠다며 명의 이전부터 해 주겠다고 했다. 한국 돈으로 약 100만원을 주고 등기이전을 했다. 난 믿음을 갖고 진행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부지 마련 및 건축을 위한 세밀한 계획을 갖고 계셨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서아세아선교회의 서영옥 장로님이 2만달러를 헌금해주셔서 매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축할 돈이 없었다. 국제교회성장연구소 이사로 있는 란짓 아브라함 목사님이 우리가 교회건축을 위해 땅을 매입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화로 약 300만원의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건축을 시작했다. 일단 공사에 착수했지만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막막했다. 란짓 목사님이 빌려주신 돈은 갚아야 하고 건축이 완료될 때까지는 자재 구입 및 시공 등 많은 재정이 필요했다.
인도 행정당국과 경찰 관계자들은 건축에 대해 이리저리 트집을 잡으며 은근히 뇌물을 요구했다. 거절했더니 온갖 방해를 하기 시작했다. 건축과정에서 심신이 피곤해져갔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밀려오는 압박감 속에 결단하며 기도를 했다. 2004년 8월 25일 밤에 난 얍복강가에서 씨름했던 야곱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제 욕심으로 이 일을 하는 게 아니란 것 잘 아시죠. 지금 전 믿음으로 시작한 이 건축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말씀을 주셨다. “믿음과 은혜로 건축해라.” “그래요, 하나님. 은혜와 믿음으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게 기드온의 표적을 보여주세요. 제 개인 은행 계좌번호를 아는 사람은 다섯 명도 안 됩니다. 내일까지 누군가가 제 통장에 1000원을 입금하면 전 그것을 기드온의 표적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믿음으로 건축을 진행하겠습니다.”
실제로 당시 내 통장 계좌번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 입금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다음날 통장을 확인해 보았다. 10만원이 들어 있었다. 절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던 그 시간에 누군가가 내 통장에 10만원을 입금한 것이다. 1000원을 구했지만 하나님은 백배 더 주셨다. 다시 깨달음이 왔다. ‘건축도 결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우리 교회는 자재비 등 외상값을 지불하지 못해 독촉을 받고 있었다. 며칠 후 경기도 파주에서 개척하신 김기식 목사님이 시무하신 교회에서 2500만원의 헌금을 보내주셨다. 놀라웠다. 난 시시콜콜한 것까지 걱정했지만 하나님은 모든 걸 계획하고 계셨다. 그는 우리의 위대한 장인(匠人)이셨다. 그 위대한 장인의 지휘 아래 건축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인도에 온지 10년 만인 2005년 1월 9일에 미션센터 헌당예배를 드렸다. 3층 건물로 예배당 뿐 아니라 지역주민을 위한 유치원과 컴퓨터실 등 다양한 용도의 공간을 만들었다. 시장통 교회 쪽방에 마련된 제자훈련학교도 더 넓고 쾌적한 장소로 이전할 수 있게 됐다. 아이들이 “새 집이 생겼다”며 너무나 좋아했다.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건축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어려움들과 고통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9> 더운 날씨·오염된 환경, 각종 질병 시달려
40도 이상 체온 오르고 인사불성… 죽음의 영이 옆에 기다리는 느낌
1997년 3월 인도 델리 시장통교회 성도 삭군트라 집사의 발가락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배정희 선교사.인도는 세계 어느 곳보다도 영적 전쟁이 심한 나라다. 다양한 사건들과 인간관계로 인한 갈등, 질병 등은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가하는 영적 전쟁의 여러 형태들이다. 이곳은 후방이 아닌 최전방 영적 전쟁터다. 셀 수 없는 전투를 치르면서 난 하나님의 강한 군사로 성장했다.
언젠가 가나안농군학교 부지구입 차 인도에 오신 허승운 목사님과 씽 목사님, 현대중공업 뉴델리 지사의 상무이셨던 안종규 장로님과 함께 차로 이동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림잡아 300㎏이 넘는 소가 갑자기 우리가 타고 있는 자동차로 달려 들었다. 순식간에 소와 차가 충돌했다. 자동차 앞유리는 박살이 났고, 차 앞부분이 완전히 구겨졌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다. 차가 그렇게 크게 망가졌는데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한 사건들은 부지기수다. 선교를 위해 파키스탄의 라호르(Lahore)로 가기 전날 가방을 잃어 버렸다. 가방에는 여권과 지갑이 들어 있었다.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두 시간을 기도하고 나니 깊은 심령으로부터 감사가 나왔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 보니 집주인 아저씨였다. 1시간 전에 어떤 남자가 찾아 왔는데 잃어버린 내 가방을 길거리에서 주워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인도에선 길에서 주운 가방을 찾아 주는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다음날 무사히 라호르에 갈 수 있었다.
비자는 제시간에 제대로 나온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예정된 목적지에 가지 못한 적은 없었다. 가끔 ‘하나님은 어찌해서 이리 어렵게 비자를 받게 하시지. 그냥 일사천리로 진행되도록 해주시면 안 되실까’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기도하라는 것이다. 선교사는 어디를 가든 해당 국가와 지역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 모든 곳이 영적 전쟁터임을 인식하고 사단의 세력을 물리칠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인도는 더운 날씨에 지역도 넓고 지저분한 편이라 환절기 때마다 각종 전염병과 풍토병이 발생한다. 2010년 8월쯤, 나는 11월로 예정된 전인도선교사대회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8월 30일 오후부터 갑자기 몸이 너무 아프기 시작했다. 열도 올랐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뎅기열에 걸렸다고 했다. 뎅기열은 뎅기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감염돼 생기는 병으로 사망확률도 높다. 다행히 치사율이 높은 뎅기 쇼크 증후군까진 가지 않아 5일 후 간신히 퇴원할 수 있었다.
뎅기열뿐 아니라 장티푸스에 걸려 의식이 흐려지고 심각한 기억력 감퇴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말라리아와 열병도 수없이 걸렸다. 체온이 40도 이상 올라가는 열병에 걸리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면서 인사불성이 된다. 죽음의 영이 바로 옆에서 기다리는 느낌이 든다. 너무 아프다보면 하나님께 살려달라는 기도도 나오지 않는다. 사실 더 살고 싶지 않고 차라리 빨리 이 땅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매번 신기하게도 며칠간 그렇게 앓다보면 다시 회복이 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님은 나로 하여금 육신의 고통을 통해 십자가를 체휼케 하신 듯하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10> “우리 동네에는 예수라는 사람 살지 않아요”
굶고 병든 사람들 하소연에 충격… 갑자기 복음이 무력하게 느껴져
1998년 인도 델리 외곽 노다지역 전도집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아주머니를 위한 축복기도를 하고 있는 배정희 선교사.1998년 여름 교회 자매들과 시골마을에서 축호 전도를 하고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길에서 소똥으로 연료를 만들고 있었다. 우린 그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아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예수라구요? 잘 모르겠네요. 우리 동네에는 예수라는 사람이 살지 않아요”라고 답했다.
“아, 이 동네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랍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요.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씻기고 구원받아요.”
“좋은 분이군요. 우릴 위해 돌아가셨다니. 그런데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밥입니다. 구원이고 나발이고 밥 먹여 주는 사람이 최곱니다. 난 사흘을 굶었어요. 배고파 죽겠다구요. 밥 좀 주세요.”
난 그 말에 충격 받았다. 아주머니는 사흘이나 배를 곯았다고 했다. 맨손으로 소똥을 긁어 손톱에 똥이 배어 있다. 온몸에 소똥 냄새가 났다. 그런 상황에서 복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아주머니는 소똥 냄새가 밴 손가락으로 소를 가리켰다. “여기 보세요. 이 소가 절벽에서 떨어져 등을 다쳤어요. 우리 집의 유일한 재산입니다. 저것마저 떠나면 난 죽어야 해요. 수의사한테 갈 돈이 없어 민간요법으로 약을 만들어 발라 줬어요. 예수라는 사람이 정말 있다면 이 소 다친 데를 낫게 해주면 좋겠네요.”
소 등에는 소똥과 나뭇잎을 이겨 만든 약이 발라져 있었다. 그 등에 수많은 파리 떼가 붙어 있었다. 아무리 휘저어 보아도 파리 떼는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파리 떼가 꼭 죄의 덩어리 같았다. 수많은 죄들이 이 파리 떼와 같이 우리 인생의 찌꺼기에 기생하며 떨어지려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복음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이란 사치스러운 말 같았다.
이들은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분명히 복음은 능력이고, 생명이라고 성경에 기록돼 있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이 확고하게 있으면 복음을 무력케 하는 여러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선교 제한 국가인 인도에서는 “예수 믿으세요”라고 해선 안 된다. 대신 “나 예수 믿어요”라고 말할 순 있다. 일상에서 복음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레 그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그 이후는 하나님이 하신다. 영혼의 구원 자체도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복음이 무력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소똥 냄새 나는 그 아주머니 생각이 난다. 그럼에도 복음은 능력임을 믿고 선포해야 한다. 그분도 어느 날 밥 먹는 것보다, 소를 치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더불어 선교사로서 복음과 더불어 떡도 나눠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떡이 더 중요하고, 그것이 복음을 전할 매개가 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선 떡과 복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어떤 경우에도 우린 복음을 전해야 한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만나는 인도인들마다 이 말을 전한다. “나 예수 믿어요. 예수라는 분을 믿는다고요.” 주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아는 자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그 앎으로부터 복음의 전파는 시작된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11> 처참한 폭우 피해 주민 끌어안고 함께 울어
통곡하는 라다크 현지인들에게 최고 선물은 그리스도임을 고백
2010년 9월 홍수피해를 입은 라다크 지역주민들과 함께 한 배정희 선교사(오른쪽 두번째).2010년 8월 5일 인도 잠무카슈미르 주에 있는 라다크(Ladakh)에 폭우가 쏟아져 엄청난 피해가 났다. 라다크에 살던 희정 자매로부터 긴급하게 전화 연락이 왔다. “배 선교사님, 라다크로 좀 와주시면 안되겠어요.” 델리순복음한인교회에 출석했던 희정 자매는 인도인 제임스와 결혼해 그곳에 살고 있었다.
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도움을 청한 희정 자매에게 일단 가겠다고 약속했다. ‘고갯길의 땅’이란 뜻의 라다크는 히말라야 산맥 북서부와 라다크 산맥 사이에 위치해 있다. 해발 3000m가 넘는 고산지대로 영하 20도를 넘는 겨울이 8개월 이상 지속되는 곳으로 아리아인과 티베트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비정부기구(NGO)인 굿피플의 양오현 회장님께 연락했다. 굿피플은 긴급구호팀을 보내기로 했다. 난 미리 라다크 지역 현장답사를 위해 김성준 선교사 등과 함께 8월 14일에 라다크로 떠났다. 델리에서 비행기로 약 1시간30분 정도 걸렸다.
김 선교사와 나는 제임스가 몰고 온 지프를 타고 라다크 공항을 빠져 나왔다. 쓰러진 전봇대가 즐비했다. 뿌리째 뽑힌 산기슭의 나무와 침수된 집들이 보였다. 제임스에 따르면 폭우로 700여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겨울이 다가오기에 내복과 난로, 비상식량 등이 급히 필요하다고 했다.
폭우피해는 극심했다. 군인들은 흙더미 속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찾아내 사진을 찍어 안내판에 붙였다. 도처에서 통곡 소리가 났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폭우가 이렇게 무서울 수 있구나.’ 자연 앞에 무력한 인간을 생각했다.
산을 오르면서 일일이 피해 입은 집들을 방문했다. 수재민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했다. 통역관을 대동했지만 나는 직접 손짓 몸짓 눈짓으로 그들과 소통했다. 우린 마음으로 위로와 감사를 나눴다. 허리를 다쳐 거동을 못하는 할머니가 계신 집을 방문했다. 밖에는 찬란한 햇빛이 비치고 있는데 방은 너무나 컴컴하고 추웠다. 할머니는 웃옷을 벗고 거죽대기로 몸을 가린 채 누워 있었다.
통역관에게 “할머니를 위해 기도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라”고 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절히 기도해드렸다. “하나님, 할머니에게 참된 평화를 주십시오. 비록 하반신 마비로 거동하기 힘들지만 마음 안에 깊은 평강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할머니가 생명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주님 이 어두컴컴한 작은 집에 찾아오십시오. 오직 당신만이 빛 되신 구주이심을 고백합니다.”
난 할머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가장 좋은 선물, 가장 좋은 소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이 땅을 떠난다. 라다크 할머니처럼 외관상 비참하게 살건, 한국의 부촌에서 행복한 노후생활을 보내건, 결국 이 땅을 떠나 최후심급의 골짜기에 선다. 그 때 우리를 도와줄 이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 밖엔 없다.
수재민들은 군부대 인근의 큰 텐트 안에 머물고 있었다. 자녀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은 처음 보는 내 어깨에 기대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모든 환경과 처지를 초월해 하나가 되는 방법은 매우 많다. 그 중 하나는 고통과 슬픔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 어깨에 기댄 채 눈물 흘리는 라다크 여인의 체온을 느끼며 나도 울었다. 우린 3일간의 긴급구호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델리로 복귀했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12> ‘거리의 아이’들 비참한 처지에 가슴 찢어져
박사과정 공부하며 102명 인터뷰… 인도의 문제 보며 더 열심히 전도
2001년 박사과정 지도 교수였던 인도 네루대학 간디 교수와 함께 한 배정희 선교사.하나님은 내가 인도를 더 깊이 이해하길 원하셨다. 난 슬럼가에도 자주 갔다. 거기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인도의 국가·사회적 문제점들도 점점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도 언어 공부를 비롯해 인도를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했다. 인도의 전통 문화와 종교, 사회적인 배경들을 잘 알아야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가운데 학문적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라는 성령님의 강권하심이 있었다.
결국 1996년 7월 사회학 석사 과정으로 네루대학교에 들어갔다. 인도의 첫 총리였던 네루의 이름을 딴 네루대는 세계적인 석학들과 인도 지도자들이 배출된 학교다. 네루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게 됐는데, 영어로 진행되는 학업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사역을 하면서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처음엔 너무 힘들어 ‘주님은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시지’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혜가 생기고 경험도 늘어 양쪽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병행할 수 있게 됐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이어갔다.
2001년, 박사과정(Ph.D) 담당 지도교수였던 간디 교수를 찾아 갔다. 내가 다루고 싶었던 주제는 ‘거리의 아이들(Street Children)’이었다. 간디 교수는 거리의 여자 아이들과 관련된 델리의 국내·국제 NGO 기관을 방문할 것을 권하셨다. NGO 관계자들을 만나 자료를 모으면서 여자 아이들에 관한 인터뷰를 시작했다.
내가 만난 102명의 인도 소녀들은 각각 NGO 기관에서 기거하고 있는 8∼15세 미만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인도 저변에 깔려 있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직면했다. 이 아이들을 만나면서 인도 사회의 문제의 단면을 알게 되었고, 더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가 있었다.
14세 소녀 모누의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의 폭행을 피해 동생들과 거리를 배회하던 모누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통곡했다. 학교를 다니고 싶은 꿈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형부의 동생과 선생님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모누는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 끝내 목숨을 끊었다. 모누뿐 아니라 비슷한 아픈 인생을 사는 인도의 어린 소녀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
인도 뉴델리 인근에 있는 하리야나에서 여아들은 5000루피(10만원)에 매매되는데 송아지는 2만 루피(40만원)에 팔린다는 기사를 인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여성의 지위가 가축보다 못한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낮은 계급의 가정에선 여자 아이를 짐처럼 생각한다. 인도 사람들에게는 ‘다우리(Dowry)’라 불리는 결혼 지참금이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1980년에서 2010년 사이 인도에선 약 1200만 명의 여아 낙태가 자행됐다. 또 15세 미만의 어린 소녀들이 조혼으로 여성의 정체성을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인도는 평균 20분마다 성폭력이 일어나는 나라다. 인도에선 여자 아이들이 가족이나 친족, 혹은 길거리의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땅을 덮고 있는 사탄의 그림자가 있다. 인도의 거대한 사회악이 일소되기 위해선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야 한다. 복음은 모든 죽은 것들, 죽어가는 것들을 살린다. 제2, 제3의 모누가 나오지 않기 위해 더욱 힘써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13> 사랑하며 살다 기쁘게 죽음 맞으리라
어머니 위독 소식 듣고 급거 귀국… 여러 죽음 보면서 더욱 믿음 단련
2005년 5월, 세계선교대회 참석차 한국을 잠시 방문했을 때 어머니 박봉주 권사(왼쪽)와 함께한 배정희 선교사.난 인도에서 무수한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지 생각했다. 죽음 장면을 볼 때마다 죽음으로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랑을 실천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일본의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는 “죽음은 내게 주어진 최후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나도 죽음으로써 내 마지막 사명을 이룰 수 있을까.’ 인간은 결국 하나님 집으로 돌아가 거기서 주님과 영원히 거한다. 그 순간까지 주님 사랑에 힘입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리라 다짐해 본다.
타고난 중보기도자로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신 어머니는 2012년 11월 24일 84세를 일기로 이 땅을 떠나셨다. 어머니가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자 둘째 동생 복희가 당신을 모셨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무렵 치매 증세까지 있었다. 인도에서 난 매일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고 매주 월요일 전화를 드렸다. 전화상으로 말씀을 잘하셨기에 어머니가 그리 심하게 치매를 앓는 줄 몰랐다.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조용기 목사님 초청 인도 대성회’가 열리기 7일전인 2012년 11월 20일,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니, 엄마가 지금 죽어가고 계셔. 빨리 한국으로 나와.” 대성회에 참석하려던 나는 아무 준비도 없이 급히 한국으로 왔다. 한국으로 오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잘못하면 어머니를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다. 11월 23일 한국에 도착해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봤다.
“엄마 저 왔어요.” 의식이 없었다. 난 세 마디를 했다. “엄마, 정말 사랑해요. 엄마, 정말 미안해요. 엄마, 정말 감사해요.” 난 어머니가 그 소리를 들으셨다고 믿는다. 다음 날 어머니는 편안한 모습으로 천국에 가셨다.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인도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나를 기다리며 죽음의 시간을 연기하셨던 것이다.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순간 동생처럼 지냈던 차진호 목사가 떠올랐다. 전화를 했다. “진호야. 엄마 장례식 좀 준비해줘.” “누나,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차 목사는 어머니의 천국행에 아들 노릇을 해 줬다. 차 목사를 비롯해 수많은 장로님과 권사님, 성도님들이 오셔서 위로해 주셨다. 그분들 덕택에 슬프지만 아름다운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 치른 다음 날 곧바로 조 목사님의 하이데라바드 성회에 참석키 위해 인도로 떠났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있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확고한 천국 신앙을 간직하셨다. 어머니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신 것뿐이다. 천국으로 이사 가신 어머니는 지금도 세 딸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실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내겐 천국에 갈 아주 중요한 이유 하나가 더 생겼다. 사랑하며 살다 기쁘게 죽음을 맞으리라.
그 후로도 난 인도에서 수많은 죽음과 대면해야했다. 전기선을 만져 충격으로 죽고, 부엌에서 음식 만들다 옷에 불이 붙어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아이 낳다가 죽고, 병 걸려서 죽고, 홍수로 죽고, 지진이 나서 죽고, 길거리에서 자다가 죽고…. 그 대면의 순간마다 삶은 죽음과 연결돼 있음을 느낀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싫은, 이해할 수 없는 죽음도 있다. 슬프지만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죽음도 있다. 죽음을 통해 믿음은 단련된다. 나보다 먼저 죽은 자들은 한결같이 내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단 하루도 무의미하게 살지 마십시오.”
***[역경의 열매] 배정희 <14> 필요한 대로, 구하는 대로 채워주신 하나님
자동차 등 사역 비용 헌금으로 감당… 정직·투명하게 재정운용 원칙 지켜
2008년 2월 마더 테레사 수녀가 운영했던 인도 콜카타의 ‘죽음의 집’에서 복수가 차 힘들어하는 한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배정희 선교사.23년 전 여행가방 하나만 들고 인도 땅을 밟았다. 혈혈단신 인도에 도착해 사역을 전개해 나갈 때 나를 지탱해 준 단어가 ‘인도하심’ 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나를 인도해 주셨다. 그 인도하심은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선교사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달란트와는 상관없이 재정 운용을 잘해야 한다. 내겐 재정원칙이 있었다. 모든 재정의 필요를 오직 하나님께만 고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기로 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재정을 공급해 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나가기로 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말씀은 23년간의 인도 사역에서 그대로 적용됐다.
인도에는 전 세계 빈곤층의 30%가 몰려 있다. 인구의 60% 이상이 절대 빈곤층이다. 카스트제도에 따라 가난도 세습이 된다. 이들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다는 재정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도에서의 주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에게 올바른 성경적 재정원리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특히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때, 카스트제도상의 계급을 뛰어넘어 재정적으로도 새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난 인도 사람들에게 마태복음 6장 33절의 원리가 인도에서도 적용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울타리를 치는 경향이 있다. 자신만의 울타리를 치고 그 경계를 넘지 않음으로 풍성한 하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의 영역에선 나의 생각을 뛰어넘는 그분의 역사가 분명히 있다.
인도에 온지 3년쯤 지났을 때였다. 언어과정을 마쳤기에 본격적인 사역을 위해서 자동차가 필요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다. 대학선교회에서 함께 사역했던 김기식 목사님이 무더운 여름에 운전을 하다 갑자기 내 생각을 했다. ‘인도는 한국보다 훨씬 더 더울 텐데, 우리 배 선교사님이 차도 없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자신의 차도 고장이 나서 수리해야 하지만 우선은 나에게 자동차를 후원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김 목사님은 그 해 목사 안수식에서 받은 축하비와 아이들 저금통까지 다 털어서 내게 보내줬다. 김 목사님의 사랑과 섬김이 나를 눈물짓게 했다.
처음으로 인도의 땅을 구입할 때 도움을 준 강남순복음교회 조은수 권사님도 잊을 수 없다. “배 선교사님, 귀한 사역하시네요. 선교 사역에 쓰세요.” 조 권사님은 500만원을 헌금하셨다. 100만원은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을 사는 데 써도 좋다는 말씀도 하셨다. 감사로 그 돈을 받았다. 500만원은 인도에서 큰돈이었다. 돈은 필요하지만 돈에 초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나님은 돈과 관련해선 모든 면에서 투명하고 공식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지혜를 주셨다. 서아세아선교회 회장님께 조 권사님으로부터 사랑의 헌금을 받았다고 이야기 했다.
그 뒤로도 누군가가 내게 헌금을 하면 반드시 공식적으로 보고했다. 그것은 정직과 투명의 훈련이었다. 난 선교 현장에서 뜻으로 시작한 사역이 돈으로 끝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선 작은 일에서부터 정직과 투명의 훈련이 필요했다. 조 권사님이 헌금한 돈 전액은 구 선교센터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됐다. 한 권사님의 믿음의 씨앗이 인도 땅에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15> 사역 7년 만에 안식월…‘마음의 몸살’ 앓고 다시 인도로
6개월 쉬는 동안 영국서 훈련과 공부… “하나님이 인도서 기다리신다” 응답
2009년 12월 인도 델리의 그린트리 유치원에서 성탄절 행사를 마치고 학생들과 함께 한 배정희 선교사(왼쪽 세 번째).“저, 너무 힘들어요, 목사님. 그냥 잠만 자고 싶어요.”
2000년 9월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에 마중 나온 런던순복음교회 김용복 목사님에게 난 어린아이 투정부리듯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인도사역 7년을 마친 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선교국으로부터 6개월간의 안식월을 허가 받았다.
그랬다. 난 아팠다. 심한 몸살에 걸렸다. 감기 몸살이 아니라 ‘마음의 몸살’이었다. 육체적으로 탈진 직전까지 왔다. 인도에서 1994년부터 2000년까지 7년간 열심히 달려왔다. 부르심에 순종하며 인도에 갔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나 컸다. 카스트 제도라는 질긴 뿌리에 심겨진 검은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는 인도 사람들에게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들과 관계 맺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선교 제한 국가인 인도에선 내놓고 복음을 전할 수도 없었다. 모든 상황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매일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과는 판이한 문화와 생활의 현실에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했다. 질병과 자연재해도 수시로 찾아왔다. 물론 이런 상황을 예상 못한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선교사 이전에 한 명의 여성이었다. 그것도 독신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벗어나고만 싶었다. 마음이 약해져갔다. 거의 탈진상태가 됐다. 육신의 몸살은 좀 쉬면 나아졌지만 마음의 몸살은 좀체 낫지 않았다. 남모르게 ‘꺼이꺼이’ 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보통 선교사들은 7년을 한 주기로 보고 이후 재충전을 위한 안식년을 갖는다. 인도생활 7년이 지나자 나는 무조건 쉬고 싶었다. 부르심을 재차 확인해 보기 원했다. 쉬면서 다음 사역 준비를 하고자했다. 난 한국과 인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었다. 그 다른 곳으로 선택한 나라가 영국이었다.
런던 외곽의 국제YWAM(예수전도단) 베이스에서 시니어들을 위한 훈련과정인 CDTS를 6개월 동안 받았다. 전 세계에서 온 시니어 크리스천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집중했다. 말씀과 찬양 가운데 거하면서 진정한 회복이 시작됐다. CDTS 훈련을 마치고 WEC국제선교회에 가서 국제적인 리더십을 배웠다. 영국에서의 6개월이란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이제 인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전에 다시 한 번 인도를 향한 부르심을 확인하고 싶었다. 떠나기 전에 영국 교회의 집회에 참석했다. 영국 목사님이 참석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셨다. 나도 그 앞에 섰다. 목사님의 기도가 내 맘에 박혔다. “인도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도 기다리고, 인도 성도들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큰 부르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성령의 불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다시 뜨거워졌다.
‘나를 기다린다’는 말이 크게 와 닿았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거 하나로 갈 이유는 충분하지 않은가. 이제 확인은 끝났다. 뒤를 돌아 볼 필요가 없다. ‘가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다. 난 거기로 가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소명이요, 숙명이다. 그 소명에 순명(順命)해야 한다. 인도로 돌아왔다.
“시스터, 잘 오셨어요.”
인도 도착 후 맞은 첫 주일에 인도 성도들이 한 아름 꽃을 내게 안겨주며 “우리가 시스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라고 말했다. 눈물이 났다. 그것은 어느 날 천국에서 그 분이 내게 해 줄 말이었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16> 성령님 아니었으면 도둑 맞을 뻔했던 큰 돈
주변서 맡긴 돈으로 ‘건물사라’ 말씀… 한국 다녀온 사이 살던 집 도둑 들어
2016년 2월 27일, ‘비전 캠프’ 후 제자들과 함께 기념촬영 한 배정희 선교사(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2006년 선교대회를 앞두고 갑자기 제자훈련학교 호스텔 건물을 사게 된 사연도 잊을 수 없다. 미국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활동하시는 박찬길 장로님이 인도를 방문하셨다. 난 장로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진 그다지 친한 관계가 아니었다. 박 장로님은 미국으로 돌아가시면서 내게 8000달러를 맡기셨다. “박 장로님, 저를 어떻게 믿고 그 돈을 맡기세요.” “나도 사람 볼 줄 압니다. 배 선교사님은 그냥 믿음이 갑니다. 일단 맡아 두세요.”
난 박 장로님께 보관증을 써 드렸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인도에서 오랫동안 사역하다 추방된 A 선교사님이 잠시 인도를 방문했다. 선교사님은 인도의 제자에게 차를 사 주려 환전했는데 돈이 턱없이 부족해 살 수 없었다. 선교사님은 그 돈을 내게 맡겼다. 별안간 박 장로님의 돈과 A 선교사님의 돈을 맡게 되었다.
그 후 어느 날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제자훈련을 위해 호스텔 건물을 사라.” “하나님, 저에겐 돈이 없어요. 어떻게 건물을 사나요.” “너 지금 돈이 있잖니.” “무슨 돈이요.” “박 장로와 A 선교사 돈이 있잖아.” “잘 아시잖아요. 그 돈은 제 돈이 아니란 걸요.” “내 일을 하는데 네 돈, 내 돈이 어디 있니. 아무튼 그 돈으로 건물을 사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두 분에게 메일을 보내 맡긴 돈을 잠시 써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두 분은 흔쾌히 동의했다. 난 그 돈으로 청년들이 거주할 15평정도 되는 허름한 건물을 샀다. 급하게 등기까지 마무리 하고 선교대회 참석차 한국에 왔다. 그런데 인도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머물던 건물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윗집, 아랫집이 모두 도둑을 맞았다. 우리 집에도 도둑이 들어왔다. 사실 우리 집엔 도둑이 가져갈 것이 없었다. 순간 돈 생각이 났다. ‘아, 그 돈! 만일 그 돈을 그대로 두고 왔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그 돈으로 건물을 사라고 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신다. 그래서 이유를 알 수 없더라도 성령의 음성엔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난 시간이 지나 박 장로님과 A 선교사님께 빌린 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건물도 사고, 돈도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그 돈을 갚는 데도 하나님이 개입하신 스토리가 있다. 선교대회를 마치고 받은 건강검진에서 자궁에 혹이 발견됐다. 약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해 부득불 수술을 받았다. 다른 선교사님들은 모두 사역지로 떠났지만 난 수술하고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해 한국에 좀 더 머물러 있었다. 그때 서아세아선교회 사무실에서 양천대교구를 섬기시는 최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교대회에 오신 선교사님 가운데 인도 선교사님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인도선교사로선 나만 남아 있었다. 최 목사님을 만났다. “우리 교구에 육순남 지역장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새벽에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인도에 내 장막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재정을 헌금하라’고 지시하셨답니다. 우리 교구에 지정헌금을 하셔서 오늘 가져왔습니다.” 최 목사님은 내게 그 헌금을 주셨다. 그 돈으로 박 장로님과A 선교사님에게 빌린 돈을 갚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 인도 땅에 당신의 장막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통로로 사용하신 것이다.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스토리를 완성하기 위해 캐스팅된 사람이었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17> 현지인들의 온갖 방해 이겨내고 미션센터 헌당
자금 등 빈틈 없는 하나님 손길로 당초 계획보다 한 층 더 높여 건축
2015년 9월 15일 미션센터 테이프 커팅식에 참석한 배정희 선교사(중앙). 배 선교사 왼쪽은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2015년 9월 15일은 나와 인도의 동역자들에게 뜻 깊은 날이다. 그동안 기도하며 준비했던 인도 미션센터 헌당예배 날이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센터가 차세대를 위한 복음의 전초기지가 될 것을 믿고 기도했다.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힘으로 인도에서 어떻게 그런 센터를 짓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우린 미션센터가 바로 옆에 있는 실상(實像)인 것처럼 믿고 기도했다. 그렇게 8년을 기다렸다.
본격적인 건축은 2013년 11월부터 시작했다. 건축을 시작할 무렵, 신문에는 센터가 들어설 지역을 개발하려는 정부의 장·단기 미래 청사진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우리의 센터 건립과 발맞춰 정부가 이 지역을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확인해 보니 보도대로 델리 시 당국은 센터 주변을 대대적으로 개발키로 했다. 하수도 공사와 도로 확장, 지하철 공사와 고가도로 공사가 동시에 이뤄지게 됐다. 센터 지역의 개발 소식은 우리를 흥분케 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증을 하게 됐다.
그럼에도 어려움은 이어졌다. 인도 건축업자의 음해와 속임수, 경찰과 건축 담당자들의 불의한 압박 등으로 우린 심리적·감정적으로 피로해져 갔다. 한 번은 건축현장에 누가 들어와 지하수를 건물 가득 차도록 흘려 놓았다. 막 건물 내부 전기선을 연결한 뒤였기에 우린 마음을 졸이며 일일이 물을 퍼냈다. 전기연결에 문제가 없기를 밤새워 기도했다. 건축업자들의 방해 공작들은 심했지만 우린 그들에게 더 큰 선을 베풀며 대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리어 우리는 재정적인 손실 없이 건축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센터를 건축하는 과정에서 여러 놀라운 일들을 겪었다. 당초 우리 계획은 센터를 5층 높이로 세워 맨 위층을 예배 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확보된 건축 재정으로는 4층 높이 밖에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빈틈없이 정확하시다. 갑자기 인도 현지 화폐 가치가 급락했다. 달러환율이 올라가는 바람에 그 차익으로 건물 한 층을 더 세울 수 있는 재정이 마련됐다. 한 층을 더 올리기로 결정한 후 알아보니 델리의 건축법이 일주일 전에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모든 것이 짜 맞춰진 것처럼 정확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에서 건축허가를 받기란 결코 쉽지 않다. 더구나 외국인 주도로 이뤄진 건물에 대해선 허가해 주기보다는 불허 하는 경우가 많았다. 2014년 12월 16일, 우린 인도 신문을 읽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힌두권 국가인 인도의 일간 신문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게재됐다. ‘2014년 이전에 건축을 시작한 건물은 어떤 구조로 세워졌든 정부에서 허가를 해 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정말 우리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우리는 이 예기치 않았던 선물을 통해 미션센터 건립을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인도 사람들은 우리가 정부의 배려를 받았다며 운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꼭 누가 우리를 돕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린 그 말을 듣고 씩 웃었다. ‘그렇지요, 우리에겐 너희들이 모르는 물주가 계시지요. 그 분 이름은 조물주이지요. 정부의 배려가 아니라 조물주이신 하나님의 배려로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된 거지요.’
***[역경의 열매] 배정희 <18> 눈물을 흘리며 뿌린 씨앗에서 수많은 결실
‘시장통 교회’ 창립 20주년 맞아 2558명의 성도들 영적 군사로
2016년 12월 4일 ‘교회 창립 20주년 감사예배’ 후 제자들과 함께 한 배정희 선교사.난 울보였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 울었다. 죽어가는 사람들 옆에서 울었다. 몸과 마음이 아파서 울었고 지쳐서 울었다. 제자들이 속 썩여서 울었고 모함을 당할 때는 억울해서 울었다. 울고 나면 시원했다. 하나님께서 “이제 시원하니”라며 다독거려 주시는 것 같았다. 그런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기에 난 울면서도 후퇴하지 않고 변함없이 씨를 뿌릴 수 있었다. 참으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란 말씀은 진리였다. 세월이 지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많은 결실을 보게 됐다.
지난 4일 우리 교회는 창립 20주년을 맞아 감사예배를 드렸다. 성전을 꽉 채운 700여명을 바라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20년의 시간이 어느새 흘러 다시 하나님 아버지의 비전을 위한 새 출발하는 시간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고 송축하고 영광이 되는 예배를 드렸다. 주일학교에서 성장한 청년들이 찬양과 드라마로 예수님을 증거했다. 제자 목사들은 인도 전통옷을 입고 찬양과 기도를 했다. 그레이스 밴드는 목소리를 높여 주님을 찬양을 했다. 감사 예배를 드릴 때 20년 전 추억의 사진들이 한 장 한 장 넘겨지는 것 같았다. 그 때마다 우리들의 모습이 변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커졌다. 우린 비전을 이루가고 있으며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감당하는 영적 군사들이 됐다.
한치완 총회장님께서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전해주셨다. 20살이 된 우리는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결단을 했다. 먼저 우린 추수감사절의 첫 헌금을 중동 선교를 위한 씨앗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다. 또 2024년까지 악발, 아닐, 비젠드라 목사가 각각 100개 교회를 품고, 그들의 제자들과 함께 300개의 가정교회를 세우겠다는 결단을 했다. 1억명의 영혼들이 곳곳에서 함께 예배드리면서 장차 주님 오실 날까지 영적 군사의 사명을 감당하기로 했다.
20년 전 시장통교회에서 한 사람의 제자 전도사와 개척을 했는데, 지금 2558명의 성도들이 하베스트(Harvest)의 공동체에 몸을 담고 영적 군사의 신앙으로 무장됐다. 이제는 복음을 위해 무서운 것이 없도록 단단히 사탄과 싸울 장비도 든든히 준비됐다. 우리는 이제 너무 뜨거워져서 복음의 증인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됐다. 지난 시간은 감사 그 자체였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님, 이영훈 목사님, 성도님들 그리고 선후배와 동료들이 함께 뛰었던 인도선교였다. 제자들과 함께 케이크를 자르면서 ‘그동안 함께 있었기에 감사하다’는 말을 눈물로 대신했다. 나는 행복한 선교사다.
시장통교회 20주년을 맞아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하나님은 보너스로 내게 여러 선물까지 주셨다. 2010년 전인도선교사대회를 마치고 한 달간의 휴가를 받아 한국을 방문했다. 달콤한 쉼을 마치고 인도로 들어가기 전에 동생 집에서 이메일을 점검하니 기쁜 소식이 있었다. 내 박사학위 논문이 독일에서 출판됐다는 것이다. 함께 공부했던 친구의 남편은 인도 하층민인 달리트들을 위한 인권연구소 연구원이었다. 내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친구의 남편이 독일의 한 출판사를 연결해 주었다. 힘겨운 인도 소녀들의 문제가 국제적으로 부각되기를 원했던 나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영문으로 출판돼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었다.
***[역경의 열매] 배정희 <19·끝> ‘좋은 소식’ 전하는 길, 고단하지만 감사한 삶
눈물을 기쁨으로 바꿔주신 주님… 생명의 말씀 전파할 책임감 느껴
2008년 2월 인도 콜카타 지역의 마더 테레사 수녀가 운영했던 ‘죽음의 집’에서 한 할머니의 얼굴을 만지며 눈물 흘리는 배정희 선교사.2015년 9월 미션센터 건축 마무리를 위해 바쁘게 지내는 내게 국제 NGO인 굿피플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수상자로 추천됐다며 필요한 서류를 보내달라고 했다. 대한민국 해외봉사상은 한국을 대표해 현지인들에게 헌신적인 봉사를 한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된 상이었다.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이뤄진 인도 사역이었다. 특별히 상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돼 주저했지만 결국 주변의 강권에 따라 지난 22년간의 인도 사역을 정리해서 보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얼마 후 굿피플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코이카 해외봉사상 수상자로 최종 확정됐다며 왕복 비행기표까지 보내줬다. 그 해 11월 25일 코이카 본부에서 열린 제10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수상식에 참석했다. 함께 했던 수상자들의 빛나는 이력을 보니 내가 설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울보였던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손길을 느꼈다.
코이카 수상을 계기로 지난 사역을 뒤돌아 볼 수 있었다. 교회 개척과 선교 외에 빈민촌 아이들 교육, 의료캠프, 나환자촌 봉사 등 민간외교사절 활동을 했다. 주님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과분한 관심을 받게 하고 상까지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내 눈물을 기쁨으로 바꿔 주셨다. 재 대신 화관을 씌워 주셨다.
윌리엄 캐리 선교사의 초라한 묘비에 쓰여 있는 글을 떠올려 본다. ‘가엾고 비천하며 연약한 벌레 같은 내가 주님의 온유한 팔에 안기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 그는 진정으로 낮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의 환호를 받기보다는 하나님의 주목을 받는 벌레가 되길 더 원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했다.
난 인도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인도 땅에 왔다. 좋은 소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엔 없다. 주위를 돌아보면 모두 주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다.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누구나 주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생명의 주님을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우리에겐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할 책임이 있다.
지난 23년간 기갈 속에 허덕이는 인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진력했다. 그들을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 자체도 내 힘으론 할 수 없다. 나에겐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할 아무런 힘이 없다. 사실 만군의 주이신 그분은 나 없어도 자신의 구원 역사를 이뤄갈 수 있는 능력의 분이시다. 나는 오직 그분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기쁨만을 누릴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윌리엄 캐리 선교사는 스스로를 가엾고 비천하며 연약한 벌레로 칭했을 것이다.
이 글을 마치면서 좋은 소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난 주 예수님께 인생을 걸었다. 주님의 사역에 조금이라도 동참할 수 있었기에 의미 있는 나날들이었다. 인생은 한 번 사는 것. 이 단 한 번의 삶을 영원한 가치를 위해 투자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우리 인생에 좋은 소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분이 우리를 보고 계신다. 이제 함께 그분 집으로 가자. 내 사랑하는 주님 계신 집으로…. 역경의 열매의 지면을 허락하신 국민일보에 감사드리며, 영광은 하나님께 올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