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시 23편)가 아닌,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맹수이자 원수로 묘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고집스럽게 거역하는 유다가 경험하는 하나님입니다.
1,2절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막대기로 보살펴주시지만(시 23:4), 하나님을 멀리하며 거역하는이는 막대기(매)로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신실한 사람은 사망의 움침한 골짜기에 있더라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시 23: 3,4), 불순종하는 사람은 부유할지언정 어둠 속을 헤매는 인생을 경험합니다.
3-6, 10-14절 불순종한 유다 백성을 고통으로 몰아가셨습니다. 구원하시던 손으로 그들을 치셨고, 그들의 존재 전부(살, 가죽, 뼈)를 괴롭게 하셨으며, 고통과 수고를 돌려 그들을 포위하심으로 죽은 것과 진배없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맹수같이 그들을 찢으셨고, 길을 잃게 하셨으며, 그들을 과녁으로 삼아 활을 쏘셨습니다.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고 고통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7-9절 유다 백성을 속박하고 그들의 길을 막으셨으며, 구해달라는 그들의 기도도 외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유다의 처지는 숨 막히기 그지없게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은 말씀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면 자유로이 탄탄대로를 달릴 줄 알았지만, 결과는 부자유와 고립뿐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15-18절 자기 백성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 좋은 꼴을 먹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안식과 만족을 안겨주시던(시 23:2)분이 유다 백성에게 쓴 것이나 돌을 먹이시고 그들을 재 위에 내팽개치셨습니다. 그 일로 유다는 평안과 복과 소망을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는 길에서는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전체 자신이 겪는 고난이 하나님이 드신 분노의 매 때문임을 고백하는 사람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자기 죄를 인식했으며 자기 운명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음을 인정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망각했던 하나님을 오늘 기억했으니, 그의 내일은 분명 어제와 다를 것입니다. (매일성경, 2024.09/10, p.158-159, 하나님의 분노의 매, 예레미야애가 3:1-18에서 인용).
① 선지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시 23편)가 아닌,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맹수이자 원수로 묘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고집스럽게 거역하는 유다가 경험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막대기로 보살펴주시지만(시 23:4), 하나님을 멀리하며 거역하는이는 막대기(매)로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신실한 사람은 사망의 움침한 골짜기에 있더라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시 23: 3,4), 불순종하는 사람은 부유할지언정 어둠 속을 헤매는 인생을 경험합니다.
② 불순종한 유다 백성을 고통으로 몰아가셨습니다. 구원하시던 손으로 그들을 치셨고, 그들의 존재 전부(살, 가죽, 뼈)를 괴롭게 하셨으며, 고통과 수고를 돌려 그들을 포위하심으로 죽은 것과 진배없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맹수같이 그들을 찢으셨고, 길을 잃게 하셨으며, 그들을 과녁으로 삼아 활을 쏘셨습니다.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고 고통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③ 유다 백성을 속박하고 그들의 길을 막으셨으며, 구해달라는 그들의 기도도 외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유다의 처지는 숨 막히기 그지없게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은 말씀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면 자유로이 탄탄대로를 달릴 줄 알았지만, 결과는 부자유와 고립뿐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④ 자기 백성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 좋은 꼴을 먹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안식과 만족을 안겨주시던(시 23:2)분이 유다 백성에게 쓴 것이나 돌을 먹이시고 그들을 재 위에 내팽개치셨습니다. 그 일로 유다는 평안과 복과 소망을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는 길에서는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⑤ 자신이 겪는 고난이 하나님이 드신 분노의 매 때문임을 고백하는 사람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자기 죄를 인식했으며 자기 운명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음을 인정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망각했던 하나님을 오늘 기억했으니, 그의 내일은 분명 어제와 다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