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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8월4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덕을 세우는 관계. 徳を立てる関係。
본문 갈1:18~24
갈1:18 ○삼 년 뒤에 나는 게바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나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 밖에는,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말은, 하나님 앞에 맹세코 거짓말이 아닙니다!) 21 그 뒤에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22 그래서 나는 유대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는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23 그들은 다만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그가 전에 없애버리려고 하던 그 믿음을 전한다" 하는 소문을 들을 따름이었습니다. 24 그래서 그들은 나를 두고 하나님께 줄곧 영광을 돌렸습니다.
18. それから三年後、ケファと知り合いになろうとしてエルサレムに上り、十五日間彼のもとに滞在しましたが、19. ほかの使徒にはだれにも会わず、ただ主の兄弟ヤコブにだけ会いました。20. わたしがこのように書いていることは、神の御前で断言しますが、うそをつい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21. その後、わたしはシリアおよびキリキアの地方へ行きました。22. キリストに結ばれているユダヤの諸教会の人々とは、顔見知り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23. ただ彼らは、「かつて我々を迫害した者が、あの当時滅ぼそうとしていた信仰を、今は福音として告げ知らせている」と聞いて、24. わたしのことで神をほめたたえておりました。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도록 하나님께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고 체감하게 하시는 것이 계시임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계시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는 그 나타나는 방식으로 분별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회로 주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모습을 ‘계시’하시는 그 시간과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 나라를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음이 채워져 믿음이 자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의 노력이나 실력으로 얻은 자격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였지요. 심지어 예수님의 선택을 받은 사도들의 명예에 의존하거나, 자격을 요구하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아라비아로 내려가 3년을 지냅니다.
그리고 바울은 18절에 보시는 것처럼 게바, 즉 베드로를 방문하기 위해서 3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고백하는데요. 여기서 베드로를 방문하겠다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영적인 일치를 위해 교제하기를 원했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는데도... 굳이 예루살렘의 베드로와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살아 계실 때 그 육성을 들으며 사도의 직분을 받았던 경험도 참으로 놀라운 경험일 것입니다. 마찬가지 다메섹 도상에서 갑자기 나타난 빛 가운데 임하신 예수님의 계시를 귀로 듣고 사도로 부르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경험도 매우 특별하고 놀라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없었고, 육신으로 소명을 받은 사도들보다 부족하다는 의식이 전혀 없을 정도로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지요. 하지만, 3년 동안 혼자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배우면서 혼자서 사역을 하는 것은 그다지 덕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3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베드로를 만나, 영적인 일치를 확인하고 지속적으로 소통을 이어 가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물론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이 누누이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듯이 이는 사람의 권위에 의존하거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인정받기 위한 방문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오로지, 육신으로 살아계실 때 제자들을 부르셔서 사도로 삼으신 예수님과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나타나신 분이 동일하신 분임을 확인하고 또한 소통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만났던 것이지요. 마침내 그와 함께 15일을 함께 교제하며 그 하나됨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연합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133:1-3)
이처럼 성경은 우리가 연합하고 하나되는 것을 무척이나 바람직하고 아름답게 여기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된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1)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베드로를 방문하여 15일을 지냈다는 것은 무척이나 의미 깊고 역사적이며 영적인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도를 다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베드로와 주님의 형제 야고보를 만난 것은 바울과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되고, 영생하는 가족의 관계로 맺어진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만남은 우리가 이 땅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사귀고, 또한 관계를 형성할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성경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2:19)
여기서 권속은 가족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영생하도록 함께 연결되도록 맺어진 가족인 것입니다.
여러분, 대체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누군가와 만나고 관계의 지평을 넓힐 때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기준으로, 즉 손익의 여부를 통해 결정하고 선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여전히 그런 기준과 태도로 누군가를 대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매우 가깝게 느껴지는 반면, 어떤 사람은 매우 거리감이 느껴지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과는 잘 맞는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지요. 최근에는 MBTI라고 하는 성격유형을 검사하여 자신과 잘 맞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류하는데 활용하는 모양입니다. 심지어 어떤 회사는 입사 지원자들에게 MBTI 검사를 하여 입사시험에 반영한다고 하는데요. 예전에는 혈액형으로 성격을 규정하거나, 혹은 별자리, 그리고 태어난 해의 띠를 보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헤아려보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기보다는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하여 관계의 경중과 거리를 헤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재력이나 실력으로 관계가 맺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돈을 잘 벌게 해 준다거나, 혹은 재정적인 도움을 준다고 하면 친하게 지내다가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멀어지기도 하지요. 앞서 말한 이런저런 성격유형으로 누군가 나와 잘 맞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데, 만일 그가 나에게 재정적인 유익을 준다고 하면 성격을 맞춰가며 사는 것이 세속도시를 사는 우리의 애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손익관계를 통해 단순히 좋고 나쁜 것으로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때에는 좋은 관계였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고 환경과 여건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관계로 돌변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바울이 베드로를 찾아가서 15일을 머물며 베드로와 교제한 경험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으로 하나가 되기 위한 순종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성도의 공동체가 해야 할 노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4:3)
그렇습니다. 이 말씀처럼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도가 갖춰야 할 관계의 태도는... 성령으로 하나 된 것을 힘써 지키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관계는 덕을 세우는 일이 중심이 되어야 하지요.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하라 (살전5:11)
그런 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덕목이 사랑이고, 용서인 것입니다. 그저 교리적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율법적으로 용서하고, 관용하는 척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구원과 그 복음을 근거로 주변의 모든 이들을 대하고 보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은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며,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런 복음의 삶으로 초대하는 것이 전도인 것이지요. 죄인을 용서하라고 하셨으니 문자 그대로를 복종하지 않으면 큰 흠이 있을 것으로 여겨서 울며 겨자 먹기로 되지 않는 노력으로 힘과 에너지는 낭비하는 것은 관용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뚜렷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관계가 아닙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이용하거나, 거리를 두는 관계형성도 아닙니다. 나의 기분에 따라서, 혹은 나의 성격에 근거해서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현실에서 더 친근한 사람이 존재하고, 또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모든 관계를 헤아리고 선별하는 기준은 나의 기분, 성격, 이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에 합당하게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인지를 기준으로 갖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격이 나와 맞지 않고 나를 계속 괴롭히는 사람과 억지로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노력에 노력을 더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육신이, 혹은 이 땅의 가르침이 헤아리듯이 타인과의 관계를 맺거나 끊는 행위를 결코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며, 하나님 나라와 영생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위해서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물론 자연스럽게 우리는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하게 되고, 좋은 이웃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지만… 결국은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해 가장 합당한 만남과 관계를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이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이나 욕심을 위해서 사람과의 관계를 악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결코 주변의 이웃들과 끊어진 관계로 살 수 없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는 관계를 가까이 맺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며 살아 갑니다. 다만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게 될 때, 교제하며 소통하게 될 때 그 관계 간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이 임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덕을 세우는 관계로 소통하기 위해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런 삶이야말로 복음에 합당한 삶이며,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그 안에 이루어진 관계라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주님과 하나됨을 다시금 확인하고 확신하기를 고백하는 성찬예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찬을 받으며 이미 우리와 하나 되어 주신 영생의 주인 되신 예수님과 하나된 관계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더 나아가 그저 단 한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그 어떤 이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 관계가 채워지길 소원합니다. 더불어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와 영생의 삶으로 하나되어 영원토록 함께 연결되는 관계로 맺어질 수 있기를 마음 깊이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허무하고 헛된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관계를 악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모두 자기 유익을 위해서 관계를 맺기도 하고 끊기도 합니다. 이런 행동들과 이기적인 선택은 결국 멸망에 이르는 헛된 인생으로 마감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모든 관계를 영생하는 가족으로 맺어주며,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신 능력입니다. 우리가 자기의 감정이나 기분, 혹은 유불리로 관계의 거리를 헤아리는 대신 영생의 복음으로 모든 관계를 채우기를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셔서 가장 선하고 덕스러운 만남과 관계를 맺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예수님을 바라보며 동행할 때 비로소 모든 인간관계를 형통하도록 정리정돈해 주실 주님의 축복이 임할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놀랍고 크신 은혜가 충만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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