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족후손참판 의찬
-족후손 참판 류의가 짓다.
공의 이름은 복립이고 자는 군서이며 전주인이다. 세종 때 이조참판 집현전 제학으로 호가 회헌인 류의손의 6세손이고 홍문관 부제학으로 류윤덕의 손자이며, 학봉 문충공 김성일의 생질이다. 일찍이 학봉 선생을 따라 수업을 하고 숨어서 벼슬을 하지 않고 스스로 충효에 힘썼다.
선조 25(1592)년에 왜구의 무리가 우리 경계를 침범하여 학봉공이 경상 우감사로 진주 촉석루에서 왜구를 막을 때 공은 종사관으로서
“내가 대대로 녹을 받는 신하로 의롭게 국가를 위하여 죽는 것은 당연하다”
하고 처자식을 형님 류복기에게 맡기고 진주성으로 달려가 밤낮으로 성중에서 힘을 다하여 협조하고 계책을 세워 연달아 승전 소식을 임금에게 올렸다.
이듬해에 학봉공이 병환으로 일을 볼 수 없게 되므로 군지휘를 공에게 부탁하니 공은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등과 합심하여 죽을힘을 다하였으나 학봉공이 별세하니 성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공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두 달 여를 버틴 것은 공(류복립)의 공이 컸다.
선조 26(1593)년 6월 29일 성이 함락당하니 공은 화살이 빗발치는데 날이 시퍼런 큰 칼을 들고 적에게 돌격하여 싸우다 김천일, 고종후 두 분과 함께 순절하시니 향년 36세이다. 선조 임금이 이 사실을 듣고 세금과 부역 면제의 특전을 내렸고 숙종 45(1719)년에 관찰사의 장계를 보고 이조참판에 추증하였으며, 영조 5(1729)년에 정려가 내려졌다.
조카 류우잠의 제문에 이르기를
“원혼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의골을 누가 묻을가? 촉석루 한가운데서 곡을 하고 술 한잔을 올리나이다”
라고 하였다. 임자년 가을에 내(류의)가 남해의 귀양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진주를 지나가는데 진주사람들이 길에서 공의 일로 눈물을 흘리었으니 이와 같다. 그 자손은 대대로 용인에서 산다.
[행장]
-족후손감찰숙지찬-족후손 감찰 류숙이 짓다.
공의 이름은 복립, 자는 군서, 호는 묵계이다. 전주 류씨는 보문각직제학 류극서에서부터 비로소 널리 알려졌다고 전해온다. 홍문관 응교 류빈이 있고 이조참판 류의손은 공의 5대조이시다. 참판공은 세종 때 집현전을 창설하였으며, 남수문과 권채 공과 함께 집현전 3선생이라 불리었다.
세조 때 조정에서 물러나 벼슬을 그만두셨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소와선생”이라 하였다. 증조부 류식은 홍문관 전한을 하였고 호는 서계이다. 조부 류윤덕은 홍문관 부제학을 하였으며 호는 남천이다. 생가의 부친 류성은 증사복시 정이고 부인은 문소김씨인데 학봉선생 문충공 김성일의 누님이시다.
인조 때 절행으로 정려가 내려졌으며, 공은 명종 13(1558)년 7월 20일에 태어났다. 대종가의 후사를 잇기 위하여 참봉공 류지의 양자로 입양되셨다. 어려서부터 기개와 재능이 있어 뽕나무로 활을, 쑥대로 화살을 만들고 하는 말씀이
“이것이 남아의 뜻이다”
라고 하였다.
학봉공이 이를 보고 크게 자랄 뛰어난 줄기라 하였다. 자라서 학봉공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일찍이 충효에 스스로 힘썼다. 선비의 추천으로 선조 21(1588)년에 조정으로부터 종부시 주부의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서울 집을 버리고 형님인 기봉공(류복기)의 안동 집으로 가서 임시로 머물렀다.
선조 25(1952)년 4월에 왜구가 크게 몰려와 조정과 백성이 도망하여 숨을 때 학봉공은 초유사로서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공은 개연히 큰 칼을 어루만지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대대로 국가에 공로가 있는 신하로서 국가를 위하여 의롭게 죽는 것은 당연하다”
고 하셨다.
학봉공을 따라가 공은 기꺼이 계획과 감독에 참여하여 모든 장병들과 함께 사천, 고성 등을 수복하였다. 우관찰(정보원) 직을 임명받고 진주성을 지킬 때 조종도, 이노, 박성 등 여러 분과 함께 군영에 상주하며, 일을 처리할 때 임기응변으로 정확히 처리함으로서 충성의 위엄이 더욱 우러러 보여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감복하였다.
다음 해 4월 학봉공이 병환으로 별세하였다. 군무원(군업무에 종사하는 군인 이외의 공무원)인 공은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병사 최경희 등과 회합을 갖고 서로 힘을 합하여 성을 사수하기로 맹세하였다. 3리의 고립된 성벽 위의 나지막한 담에서 당시 10만의 흉악한 왜구를 막아내길 60여 일이나 된다.
그해 6월 29일에 성이 함몰당하고 아군은 궤멸되어 김천일, 고종후, 최경희 공이 모두 강물에 투신 자결을 하였고 공은 오직 단신으로 큰 칼을 들고 적에게 달려들어 분전하다 돌아가시니 향년 36세이시다. 이 사실을 들은 조정에서 그의 집에 세금과 부역 면제의 특전을 내렸다. 진주의 촉석루 아래가 공이 돌아가신 곳이다. 진주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공의 순절을 숭상하였다.
고양의 어느 산 어느 산기슭에 공을 장사지내었다. 완산이씨는 공의 배필로서 외아들 호를 낳았는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종신토록 고향 반곡에 숨어 사시며 슬퍼하시었다. 이것이 모두 충이 있고 효가 있음이다. 호는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괄, 절, 집, 재, 적인데 남이 버린 집에서 살면서 고인(묵계공)의 뜻을 이어갔다고 한다. 증손 이하가 많아 8, 9십 인에 이르러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아! 공이 난리로 돌아가신 날에는 지위가 처음부터 널리 알려져있지 않았다. 참모는 없었으나 창의사와 복수장이 특출하여 장군의 호령이 각계에 퍼져 의로움의 깃발이 열렬하였으며 뛰어난 명성이 조정 내외에서 떨치고 빛이 났는데 충성을 표창하고 절개를 장려하는 법제도에서 어찌하여 그 당시에는 서두루지 아니 했는가?
그 후 백여년이 지나서 나라 사람들의 여론이 오래도록 더욱더 격렬하여 관찰사 김연, 이정제, 절도사 신덕하 등이 전후로 공의 충절을 표창할 것을 계청하였고 숙종 45(1719)년 예조판서 민진후가 임금에게 복명을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류복립은 임진왜란 때 화살이 빗발치는데 날이 시퍼런 큰 칼을 들고 적에게 돌격하여 싸우다 죽었으므로 특별히 이조참판에 추증하노라”
고 하였다.
영조 5(1729)년 예조판서 김시환의 장계를 보고 임금이 즉시 정려를 명하고 그 액자에 이르기를
“난리에 뛰어들어 몸을 던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 문정공 이재가 정려문을 짓고 문에 새겼다.
이번 여름 4월에 경상도 관찰사 조진택의 장계에 이르기를
“김천일 등과 함께 류복립은 같은 날 순절한 충절이 탁월한 분으로 창렬사에 추향(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신주)를 추가로 사당, 서원 등에 모시는 것) 올리기를 청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예조에서 웃어른과 상의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아! 공은 어려서 절개를 어머니로부터 이어받고 자라면서 훈장 학봉공의 가르침을 따라 난리를 만나 절개를 굳게 지키시었다. 이는 평소에 키워오신 소양이 있기 때문이다. 공은 미관말직의 하급관리이면서도 크게 떨친 발자취가 거치른 풀밭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싸움터에서 세운 공이 어찌 그리 세찬가. 임금이 내린 증직과 표창은 영구하게 찬란히 비추리라. 역대 임금이 드높여 나타낸 바로 공으로서는 지당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일을 당한 여러분들은 제상을 차려놓고 제사를 올리는데 어찌하여 공만 홀로 참여치 못하였는가. 그를 후손들에게 기대하는 바이다. 남몰래 곰곰이 생각해보니 평상시에 공의 뜻과 하시는 말씀을 들은 사람이 분명 많이 있었을 것이나 병화 이후로 야사나 가승(족보나 문집 등 한 집안의 역사적 사실을 적은 책)에 결여되어 갖추지 않아 근거가 전해오는 것이 없어 포상(포죽은 사람의 경력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받은 다른 분들의 예를 듣고 문적에 논한 것을 지은 것이 우와 같으니 학식과 덕망이 있는 높은 이가 도리에 합당한 사실을 찾아 채택할 것을 기다린다.
선조 25(1592)년 임진왜란 때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공이 전사할 때 전주류씨 류복립 공도 같은 날 전사하였다. 전쟁 초에 학봉 문충공 김성일이 경상 우도 관찰사로 진주성을 지킬 때 류공이 듣고 크게 놀라 분개하며 하는 말이
“우리는 대대로 충성을 해 온 신하이다”
라고 하였다.
학봉공을 따라가 군에 참여하여 계책을 세워 여러 차례 승전을 거둔바 있다. 학봉공이 병환으로 별세할 때 성을 지킬 것을 부탁받아 공(류복립)은 김김천일 공과 함께 협력하여 지키기로 하였다. 성이 함락당하고는 적에 달려들어 싸우다 순절하셨는데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장한 일이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학봉의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숙종45(1719)년 공에게 이조참판이 추증되고 영조5(1729)년에 정려가 내려졌는데 정려문(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동네에 세우는 정문) 에 이르기를 “충신의 문”이라 하였다. 문정공 이재가 죽은 사실에 대한 전말을 짓고 문에 새기였다. 거기에 쓰여진 것을 이르면
“공의 모친은 학봉공의 누님이시다. 절개가 있어 정려가 내려졌다. 공의 충성은 이 아름다운 유래에서 모두 연유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철종 4(1854)년 공의 후손이 부탁하여 제가 공의 표를 지을 때 문서를 살펴보니 공의 자는 군서이고 세종 때 집현전 제학 류의손의 6세손이시며, 증사복시 정 류성의 아드님으로 참봉 류지에게 양자로 가시었다.
증조부 류식은 홍문관 전한을 하셨고 조부 류윤덕은 홍문관 부제학을 하셨다. 공은 명종 13(1558)년에 태어나시었는데 어려서부터 기개와 재능이 있었으며 자라면서 학봉공에게 학문을 배우고 선조 21(1588)년에 조정에서 종부시 주부의 관직을 제수 받으셨으나 취임하지 않고 별세하시니 향년 36세이시다. 부인 이씨는 외아들 호를 낳았는데 참판에 추증되었고 호는 5남을 두었다.
증현손 이하는 많아 8, 90명에 이른다. 아! 공의 어려운 충성과 탁월한 절개가 김천일과 고종후 공만 못하였으랴. 두 분은 제사로 대접받고 있는데 공은 빠져 있으니 때를 기다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