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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지나고 나서 깨닫게 될까요? ♣
-정신과 전문의 이시형 박사-
빡빡한 나의 하루 일과에 놀란 사람들이 종종 묻곤 합니다.
"아니,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다 처리하십니까?" 그럴 때마
다 나는 대답 대신 어머니 이야기를, 그것도 아주 신이나서
꺼내놓습니다. 동생을 업고 발로 불을 때가며 손으로 파를
다듬으시던 어머니, 안마당에서 놀고 있는 우리가 다치기
라도 할까 수시로 간섭을 하시면서도 뒷집 아주머니와 담
너머로 이야기를 주고받으시던 어머니, 등에서 우는 아이
를 한 손으로는 호미질을 하시고 입으로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시든 어머이, 내 어머니이며 이 나라를 살아
온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입니다.
집안 살림에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부모님 봉양까지 세계
제일의 멀티플레이어도 그만은 못할 겁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그 부지런하고 긍정적이고 대범하며, 유쾌하
기까지 한 성격을 자연스럽게 자식에게 물러주셨
습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없는 값진 유산이지요,
값진 게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104세의 연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하루, 단 한 시간도
허투루 보내신 적이 없이 부지런한 어머니, 아흔이 넘은
연세에도 미국에 있는 아들이 보고 싶으면 주저 없이 혼
자서 다녀오시던 대범한 어머니, 옆 집에 이사 온 팔십세
노인을보며 "한창때로군!" 하시던 긍정적인 어머니, 3대
가 함께 떠난 미국여행에서 우릴 보고 마냥 부러워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던 노부부에게 "땡쿠!" 하며 환하
게 웃으시던 유쾌한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랫동안 마음을 다잡을길이 없었습니다,
길을 걷다가 어머니 닮은 뒷모습만 봐도 가슴이 뭉클
했지요, 어머니 좋아하시던 음식이 올라온 밥상 앞에
서도, 어머니 손잡고 마냥 즐거워하던 여행길에서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그리움에 목이 메고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습니다.
일일이 가시를 발라 밥 위에 얹어주시던 어머니만의 생선
맛도, 소름 끼치도록 시원했던 어머니만의 등목도, 비오는
날이면 부쳐주시던 어머니만의 빈대떡도, 배 아플 때 문질
러주시던 어머니만의 손길도 이제다시 느낄 수 없다는 현
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조금긴 시간이 걸렸습니다.3대가
함께 여행하는 걸 보고 마냥 부러워하던 미국 노부부의
마지막 말이 그때서야 실감이 났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다니는 지금 이 순간 당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당시에는 그저 핵부부화가 되어가는 그들에게 '자식과
손자까지 함께하는 여향이 부러워서겠지'라고 생각했
었지요 그런데 눈물까지 글썽이던 노부부의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왜 우리는 모든 걸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걸까요?
바람 없이, 조건 없이 베풀기만 하는 그 사랑, 어머니
살아생전 그 십분의 일, 백분의 일도 되돌려드리지
못하는 우리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철들지 않은
자식일 뿐입니다.어머니 생전에 참으로 애지중지
하시던 참기름 병이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 어머니와
함께 부엌 생활을 해온 동지였지요, 어머니 돌아가신
뒤, 부엌 한쪽에 그 병을 세워놓고 종종 들어다보았습니다.
그 병을 볼 때마다 금방이라도 어머니가 "참기름 두어 방울
넣고 맛나게 밥 비벼주련? 하시며 나타나실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는 날 그 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적이 당황하여
아내에게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청소를 하다 그만 께뜨리
고 말았다며 아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 하더군요,
그 순간의 서운함이란.....
아내에게 온갖 핀잔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건 아내가 아니라 내 자신에게 퍼부은 후회와 그리움이
뒤범벅된 회한의 핀잔이였습니다.
세월은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는걸 그때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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