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목적지는 성산이다. 제주에서 동쪽 해안도로를 향해가는 코스다. 아름다운 함덕 해안도로와 김녕 해안도로를 통과 하면서 머물고 싶은 곳이 있으면 머물러 감상하면 된다. 서둘 것도 없다. 무리할 것도 아니다. 제주 자체가 머무는 곳이 바로 우리의 여행지이니까. 그런 여행이 이 번의 주제다. 흐르는 대로 이미 상황에 따라 계획도 수정하면서 현재에 몰입하는 그런 여행, 거기에는 쉼이 있고, 사색이 필요하고, 비움이 요구 되며 서로의 호흡조절을 잘 해야 되는 배려와 미덕이 있어야 한다. 그런 편안한 일정이 되는 것이 이 번 여행의 특징이다.
드라이브 코스로 이만한 곳도 없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제주도, 그 환상의 섬을 다 돈다 해도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다. 곳곳에는 우리의 마음과 눈을 흡족하게 할 풍광들이 즐비하다. 그렇게 느끼면 되는거다. '앙드레지드의 '지상의 양식'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앙드레지드가 아프리카 여행 후에 이렇게 표현했다.
죽어가듯이 바라보고, 태어나듯이 바라보자. 현자가 되어보자.. 그런 마음으로 가고 있다. 김녕-행원 해변길따라 발걸음을 멈췄다. 명소는 사람들로 붐빈다. 사람이 들끓으면 풍광이 사라진다. 장사하는 사람과 여행자는 반대다. 어쩔 수 없다. 너무 한가하면 쓸쓸하지만 그 느낌이 가을여행의 진수다. 그런걸 기대할 순 없지만 사람들의 소용돌이에 빠지면 여행다운 여행을 할 수가 없다. 여행을 즐기기엔 제격이 아니다. 해외여행 같은 경우 어쩔 수 없이 짜여진 스케줄에 맡길 수밖에 없지만 국내 여행에서조차 그렇게 보내서야 되겠는가?
바닷 바람이 시원하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 바다를 응시한다. 바다 끝, 그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는 지점에서 멈춘다. 지구가 둥글다는 그 현실이 내게 와 있다. 바다는 들긇는 욕망을 해방 시킨다. 이해인은 '가득한 욕심 내려 놓고/빈 마음 들고 온다'라고 했다. 현실로 돌아가 다시 가득한 욕심으로 채워질지언정 잠시라도 빈 마음이라면, 그런 기회를 거듭거듭 갖는 순간, 우리는 행복할 것이다. 여행이 만들어 주는 힘이다. 그래서 여행은 살아 있는 자들의 꿈이며 가치인지도 모른다.
사진 몇 카트를 남기고 성산을 향해 출발이다.
코업시티 호텔 성산에 여장을 풀었다. 성산은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 옛적에는 성산 주변이 비교적 한산했다. 주변에 건물도 듬성 듬성 했다. 관광의 바람을 타고 성산도 북적거렸다. 성산을 찾을 때마다 이곳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일출봉에서 일출을 보는 꿈을 꾸었다. 성산 오름길은 드넓은 초원이 조성되어 낭만 가득하다. 몇 마리의 말들이 드넓은 초원을 독차지 하고 있다. 성산 일출봉 오르는 길의 시원스러움과 풍광이 좋았고, 오름길 왼편 너머의 해녀의 집에서 홍해삼과 멍게 등으로 소주 한 잔하던 그 추억이 새로워지는 성산을 생각하며 감회에 휩싸인다.
주변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성산의 밤거리를 산책한다. 성산의 밤거리는 비교적 한산하다. 제주는 11월에서 2월을 비수기로 친다고 한다. 오히려 그 여유로움이 우리에겐 너무 좋다. 너무 많은 사랃들로 북적거리다 보면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 방해가 된다.
여행을 하다보면 늘 과식을 하게 마련이다. 다른 환경과 맛집에서 이루어지는 식사량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한 30여분 산책을 하다보니 어느정도 소화가 된듯하다.
그렇게 둘쨋 날의 밤을 보냈다. 아침 일찍 일출을 보기 위해 성산을 오른다. 어둠이 사라져가는 그 새벽은 언제 어디서나 좋다. 밝음에 자리를 슬며시 양보하는 어둠의 미덕, 드 미덕에 자리한 밝음도 마찬가지로 저녁때가 되면 어둠에 자리를 내준다. 평생 변함 없는 그 순환아래 우리의 삶도 맞추어졌다. 나는 어둠이 남아 있는 새벽을 사랑한다. 평생을 함께 했고 매일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다. 어느 곳을 가든 변함이 없다. 그렇게 어둠이 남아 있는 새벽길을 걸었다. 오늘 새벽길도 그 연장 선상에 있지만 성산의 이 새벽은 더욱 아름답게만 다가 온다.
이 장면과 함께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 많다.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지만 성산은 해맞이로 그 명성이 높다. 일출에 소망을 빌고 담는다. 일출은 희망이다. 꿈이며 기대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며 삶에 대한 적극적인 표식이다. 그 자신에 대한 다짐으로 자신의 운명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싶은 의식이다. 그런 생각으로 일출을 손꼽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것인가 사뭇 설렌다.
해가 올라오는 저 동쪽 끝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과 일말의 기대로 응집되어 있다. 저 멀리 동트는 동쪽의 지평선에 깔려 있는 구름의 존재 앞에 일말의 불안감이 휩싸인다. 맑은 일출을 보기가 쉽지 않다. 매일처럼 새벽길을 걷지만 산뜻한 일출을 보는 날이 상상 외로 많지 않다. 오늘도 그런 예감이다.
꼭 일출을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표상에 나타난 현상만이 전부는 아니다. 일출은 변함이 없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구름에 가려 있는 그 보이지 않는 그 내면의 일출을 보면 된다. 그런 마음으로 구름 속에 나타난 희미한 일출을 보는 것도 얼마나 기쁜 일인가? 매일처럼 이렇게 새 날이 오고, 그 새 날 속에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자체도 축복이 아닌가? 일출의 행렬이 끝나고 사람들은 썰물처럼 정상에서 빠져 나간다. 그 한산함 속에서 우리는 동쪽 바다 끝, 해가 솟아 오르는 지점을 응시한다. 바다 끝, 더 이상 바라다 볼 수 없는 지점, 그 끝에서 태양이 솟아 오른다. 지구의 둥근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세상이 경이로운 이유는 주변에 천지다. 모든 것이 불가사의한 일들이다. 불가사의한 상황 속에서 산다. 그것은 섭리다. 그 섭리 속에 산다는 자체를 잊어버리면 불행이다. 행복은 그 섭리에 항상 감사할 때 생기는 일이다.
내려 오는 길에서 보이는 성산의 아름다움에 반한다. 같은 환경이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다. 정상에서 성산 시내를 바라 볼때와 내려 오면서 보는 느낌이 다르다. 똑 같은 상황이 어디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다면 사람도 어떤 마음과 위치에 보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가까이에서 볼 때와 멀리서 볼 때는 다르다. '인생은 멀리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 보면 비극이다'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 우리는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희극으로 살아가야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