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중의 시선을 예수께로 돌리며>
본문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의 일곱 개 설교 중에 세 번째 설교입니다. 성전 미문 곁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40년 동안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수십 년 동안 곁에 앉아 있었던 성전이 하지 못했던 일을 나사렛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치유받은 직후 사도들과 함께 했습니다. 11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라고 했는데, '붙잡는다'는 표현은 '추종한다'는 의미이며 베드로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이 남자가 고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도들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퍼지면서 일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라서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솔로몬의 행각은 예루살렘 성전 바깥뜰의 동쪽에 있었던 '지붕이 있는 주랑'(柱廊, Colonnade)이었습니다. 양쪽으로 늘어선 대리석 기둥 위에다가 삼나무로 얹어 만든 지붕을 갖춘 회랑(回廊)이었지요. 바로 이 행각에 몰려든 군중을 향하여 베드로는 세 번째 설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왜, 어떤 동기로 이들을 향하여 설교를 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12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나면서부터 못 걷는 남자가 뛰어다니는 기적을 보고서는 사람들이 크게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이 놀라운 기적이 베드로와 요한의 개인적인 권능이나 경건으로 일어난 것처럼 착각해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일장 설교를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이 놀라운 치유를 일으킨 주인공이 자기와 요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군중의 시선을 자기들에게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돌리기 위하여 설교를 했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설교든 신유의 기적이든 어떤 일이든지 간에 우리가 초점이 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여 감탄사를 발하고 우리에게 영광을 돌릴 때 조심해야 합니다. 단연 청중의 시선을 주님께로 돌려야만 합니다. 어떤 놀라운 변화나 기적도 우리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수단과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 모든 권능의 원천(source)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못 걷는 남자가 치유받은 기적은 개인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로 그렇게 된 것임을 알리기 위하여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설교는 철두철미 그리스도 집중적인 설교입니다.
한 가지 참 놀라운 것은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지만 어떤 기적이 일어난 다음 반드시 설교가 뒤따른다는 '기적'→'메시지'(설교)라는 패턴입니다. 그냥 기적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그친다면 표적만 구하는 유대인들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을 하면서 이 기적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변증하는 설교를 추가하게 될 때 기적은 말씀과 조화를 이루면서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 집중적 설교 I: 과거에 저지른 죄악들>
자, 그렇다면 베드로의 설교는 어떤 주제와 내용으로 되었습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베드로의 설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치유 이적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고침을 받은 환자와 사도들에게 시선을 집중했습니다. 이들의 잘못된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기 위하여 베드로는 먼저 이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부인했고 배신했는가를 상기시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이해하기 위하여 아주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한 약속의 성취라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continuity), 구약의 취로써의 예수 그리스도, 이것을 논증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구약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서 해석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제일 먼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유대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했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분이 아니라 영광의 구주로 영화롭게 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 때부터 대대로 믿어온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예루살렘 거민들이 이 영화로운 주님을 영화롭지 못하게, 치욕스럽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는데 특히 유대인들의 네 가지 잘못을 지적합니다.
첫째,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13절). 둘째,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기로 결의했으나 유대인들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했습니다(13절). 셋째, '거룩하고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고 살인자인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청했습니다(14절). 넷째,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15절).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생명을 박탈하는 어처구니 없는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예루살렘 유대인들이 거부했고 죽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영화롭게 하셨는데 사도들은 바로 이 일에 증인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16절은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입니다. "그 이름을[즉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하게 낫게 하였느니라." 이 놀라운 기적은 사도들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거부했고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그 남자의 믿음'으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13절로부터 16절까지 유대인들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학대했는지 그들의 죄악상을 폭로한 뒤 베드로는 이제 유대인들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앉은뱅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병고침을 받은 뒤 사도들의 제자가 된 것처럼 유대인들 역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결단과 순종을 요구하기 전, 17-18절은 베드로의 책망하는 듯 한 설교를 듣고 양심이 찔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청중들을 약간은 위로하는 듯 한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여기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잘못에 대해서 두 가지 위로하는 듯 한 말씀을 합니다. 첫째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은 무지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알고 저지르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고 무의식중에 죄를 저지를 때에는 어느 정도 면죄부를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명백히 죄가 죄인 줄로 알고 그 죄를 행할 때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17절도 이렇게 말씀하지요.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것은 알지 못하여 지은 죄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이들의 죄악은 이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유대인들이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았으므로 더 이상 부인하거나 배척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무지와 실수 때문이기도 했지만 메시아가 고난당해야 한다는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섭리론적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 집중적 설교 II: 현재의 결단과 순종→미래의 축복>
이와 같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는 양심이 찔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위로한 뒤 베드로는 결단과 순종을 요구하는 후반부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장본인들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유대인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를 남발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베드로는 직격탄을 날립니다.
19절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흉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죄씻음을 받으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죄가 아무리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면 우리의 모든 죄악은 주님께로 전가되고 흰눈처럼 양털같이 희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주님께로 돌아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면 세 가지 축복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죄 없이 함', 즉 죄사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19b). 둘째는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른다고 했습니다(19c). '새롭게 되는 날'(times of refreshing)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죄책감을 다 씻어주시고 우리의 원기를 북돋아 주셔서 새 힘을 얻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누리는 구원의 감격을 말하는 것이지요. 셋째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20). 부활 승천하신 주님은 하늘에 올라가셔서 계속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위로와 용기를 주시지만 언젠가 재림하셔서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가면 '죄사함'과 '새로움'과 '우주 만물을 회복하실 재림주 예수님'을 축복의 선물로 받게 될 터인데, 이 모든 축복의 약속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예증함으로써 설교를 마무리 짓습니다. 베드로는 특히 구약의 세 줄기, 즉 모세와 사무엘과 아브라함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킵니다.
첫째로, 22-23절은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가 예수님인데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백성 가운데서 망하여 없어질 것이라는 신명기 18장 19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둘째로, 24절은 사무엘로부터 시작된 모든 예언자 전통은 예수의 때, 즉 메시아 시대에 대해서 예언했음을 밝힙니다. 셋째로, 25절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유대인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특히 하나님께서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던 '아브라함의 언약'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결국 베드로가 강조하려는 요점은 구약의 모세나 사무엘, 아브라함 계통을 통하여 줄기차게 예언되고 약속되어온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인데, 만일 유대인들이 이 예수를 거부할 경우 자기 조상들의 신앙 전통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복을 주시기 위하여 모세나 사무엘, 아브라함 등 이스라엘 조상들의 계보를 통하여 줄기차게 약속해 오신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인데 유대인들이 그 메시아를 거부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그 메시아께로 돌아와야지만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교회 시대의 모든 설교자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설교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언제나 그리스도 집중적입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과 회개, 그리고 죄사함이 강조됩니다. 오늘 우리의 강단에서 외쳐야 할 중심 메시지도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우리 설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지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모세와 사무엘과 아브라함을 비롯한 수많은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된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결단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구원을 받고 세상에 그 어떤 것과 비길 데 없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