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제 2편): 상리 마을의 겨울 어머니들 / 김상철
그때 배달메의 우리 마을 어머니들께서만 그랬을까마는, 나 초등학교 시절 우리 마을 어머니들께서는 한겨울에도 빨래를 하실 때는 찬물 빨래를 하셨답니다. 세탁기도 없고 시골에 수돗물도 닿지 않던 그 때, 설날이 가까워지면 더욱 많은 빨래를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우리 마을은 점빵돔, 가온뎃돔, 소갓돔, 앞돔, 새갓돔 이렇게 5개 촌락으로 구성된 마을이었지요.
각 촌락마다 집들이 병아리들 마냥 오밀조밀 모여 있었는데, 어머니들께서 빨래를 하실 땐 각 촌락의 우물, 그 중 특히 물이 많고 물맛 좋은 가온뎃돔 서당집 앞의 우물가에서 더 빨랠 하셨지요. 그렇지만 빨래가 많을 땐 여름은 물론, 얼굴을 온통 얼음판처럼 만들 한겨울에도 머리 위에 똥아리를 괸 채, 빨래다라를 머리에 이고 먼 냇가까지 가셔서 겨울 빨래를 하셨습니다.
마을 뒷편 삼사백 미터 떨어진 '뒷똘' 이라는 냇가에서요.
당시 지경 소시장에서 김제방향으로 200미터 쯤 가면 '댓똘'이라는 폭 20여 미터의 매우 큰 냇가가 있었고, 그 냇가는 또한 나뭇가지처럼 옆으로 길게 뻗은 좀 좁은 냇가가 나있었는데, 그게 어찌나 길게 뻗었는지, 그 냇가는 약 2키로미터 떨어진 상리마을의 폭 6, 7미터인 뒷똘까지 이어져 있었지요.
그 냇가는 너무 그리운 우리 개구쟁이 친구와 형 및 아우들이 여름이면 신나게 멱을 감았던 곳이고, 겨울이면 썰매타기를 하다가 더우면 얼음을 송곳으로 깨 그걸 과자처럼 먹으며 신나게 놀던 놀이터였지요.
그렇지만, 우리 어머니들께는 사시사철 희생만하는 빨래터, 아니 일터인 고생 터였지요.
그 한겨울에도 우리 어머니들께서는 냇가의 얼음을 방망이로 두들겨 깨, 얼음 조각을 휘저으며 열 식구, 아니 어린 조카들이 오는 방학 때는 스무 식구의 빨래를 용사처럼 하셨으니까요.
고무장갑도 없었던 그때, 산더미처럼 쌓인 겨울 빨래를 맨손으로요.
그것도 혼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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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서 손수, 쌀겨와 양잿물을 섞어 만드신 옅은 밤색 색깔의 비누로 빨래를 하셨지요.
빨래를 하실 때는 당신의 어린자식 목욕시킬 때 비누칠을 하듯 빨랫감에 비누칠을 정성껏 하시면서, 또한 자식들에게 깨끗한 옷 입힐 걸 생각하시면서, 초가집의 굴뚝처럼 입김 내뿜으시며 한겨울에 그리 하셨지요.
머리엔 긴 수건 하나 둘러매 쓰시고, 냇가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 갈라 터져 피비치는 손가락 아랑곳없이, “까불지 마라, 안 지워지고는 못 바울 게다. 내 아들딸 깨끗이 입히련다, 이래도 안 지워질래?” 독백 하시며, 방망이로 두들기고, 손으로 비비고, 쥐어짜가며, 하셨습니다.
빠알간 넝쿨장미 꽃처럼 벌겋게 된 손 호호불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제아무리 한겨울의 차디찬 냇가물이라도 자기 고집을 포기하고 수증기를 모락모락 내뿜으며 헐덕 거린 채, 결국 항복하고는 아까시야 꽃보다 희고 예쁜 빨래가 되게 했지요.
그래서 홀태로 나락 훓기 등, 가을일 하느라 이곳저곳 갈라터진 어머님들의 손은 농한기인 이 동절기에 오히려 더욱 거칠어지셨답니다.
그렇게 냇가에서 한나절 정도 빨래를 하시면 마치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 상리마을 어머니들께서는 빨래하기 전보다 훨씬 더 무거워진 그 빨래들을 쇠다라에 되 담은 후, 그걸 머리에 이고 또다시 삼사백 미터를 걸어 집에 오셨지요. 오셔서는, 부엌처마에서 잿간처마까지 이어진 빨래 줄에 벌겋게 꽁꽁 언 장미꽃 색깔의 곱아든 손으로 빨래의 물기를 일일이 털어가며 너르셨습니다.
여름이면 제비가, 겨울이면 참새가 쉬며 자기 새끼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던 장대 위 빨래 줄에 고개를 쳐들고요.
저녁때가 다 되어 빨래를 거둘 때는, 마르다 말고 되 얼어버린 빨래 줄의 빨래들은 마치 내장을 모두 훑어내고 바싹 말린 홍어처럼 굳어버린 채, 엉거주춤 그네를 타고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 어머님들께서는 다음날 아침에도, 또 그 다음날 아침에도, 빨래가 다 마를 때까지 몇 날이고 계속 거두고 너르시고, 거두고 너르시고를 수없이 반복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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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여 그 빨래들이 모두 다 마르게 되면 어머니들께서는 그 다음 일에 따라 빨랠 따로따로 개어놓으셨지요.
다리미질할 빨래, 풀먹일 빨래, 꿰맬 빨래, 이렇게요.
다리미질 할 빨래는,
뚜껑이 없는 소 주걱 모양의 다리미에 숯불을 올려놓고 다리미질을 하셨는데, 매운 숯불연기로 목도 쐐하고,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누나와 함께 쌩 눈물 흘리시면서 공놀이 하고 돌아온 당신 아들의 다리를 주물러주듯 다리미질을 하셨지요.
풀먹일 빨래는,
물에 밀가루를 타 휘저어가며 은은한 불에 풀을 쑤시고는 그 걸 다시 체에 걸러 낸 후, 그 걸 손바닥으로 일일이 퍼서 빨래에 적셔가며 빨래에 풀을 먹였으며, 그 중 이불 호창 등, 다듬이질 할 것은 다듬이 독에 옷감을 올려놓고서 그 옛날 한석봉 어머니와 당신을 번갈아 생각하며, 밤12시 넘어서 까지 양 어깨가 빠지도록 다듬이질을 하시는 때가 많았답니다.
꿰맬 빨래는,
천년된 포도주보다 훨씬 진한 사랑의 향으로 가족들 겨울내복의 무릎 부위와 양말 뒤 금치 부위 등을 엄지손가락에 골무를 씌우고서 닭 울도록 기우시고 기우셨습니다.
바느질할 부위가 두꺼워 바늘이 잘 들어가지 않을 땐 골무 씌운 손가락으로 일일이 바늘머리를 눌러가며 하셨지요. 이따금 당신의 목 뒷덜미를 주무르며 말입니다.
그래도 바늘이 잘 들어가지 않을 때는 바늘을 당신의 머리카락에 문대 바늘에 기름칠 하며 바느질을 하셨고요.
그러한 모든 일과가 끝난 뒤에야 집에서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드시는 어머니들께서는 주무시기 전에는 이따금 뭔가를 손과 얼굴에 바르셨답니다.
시골에 제대로 갖춘 병원도, 약국도, 화장품가게도 없는 그 때 우리 어머니들께서는 5일 장날 약장수한테서 사온 '구루므' 라는 화장품을 보물단지처럼 여기며 얼굴에 바르시곤 했지요. 아껴 쓰느라, 대사 집에 가실 때나 사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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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러 가실 때만 바르셨지요.
여기저기 갈라터진 손가락과 거북등이 된 손등에는 고작 맨수리다마나 빨간 옥도정기 약을 아끼고 아껴가며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만병통치약처럼 늘 바르시고 주무셨고요.
그러시느라 집에서 가장 늦게 주무시는 우리 어머니들께선 다음날 아침 일어나는 것도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셨답니다.
그리고는 부엌에 나가셔서, 아궁이에서 당그래로 재를 퍼내 30여 미터 떨어진 잿간에 갖다놓은 후에는 아궁이 앞에 하얀 어미 토끼처럼 앉아 사자표 성냥으로 지푸라기에 불을 붙이신 뒤, 부지깽이로 지푸라기를 찬찬히 조심스럽게 젓고 저어가며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때까지 계속 불을 지피셨습니다.
그러면 데워지지 않으려 얼음처럼 차갑게만 굴던 가마솥은 끝내는 그런 어머님의 정성에 감동돼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는 결국 윤기가 번지르르한 밥이 되도록 협조했지요.
또한, 거의 식은 방바닥도 다시 따끈해져 잠결에 요 밑에 들어가 새우처럼 자던 어린 아들은 다시 요위로 올라와 큰 대 자로 허릴 펴고 잤고요.
살강에서 이 반찬, 저 반찬, 반찬을 꺼내 상을 차리시다가
찬이 부족한 듯 하면 바위바람, 송곳바람 부는 그 겨울 새벽에 부엌 뒷문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열으시고 장독 옆의 텃밭 땅 한쪽에 예수님 눈처럼 다정하게 박힌 황소 배떼기 만한 큰 항아리에서 여름철의 아이스깨끼 같은 동침지를, 고드름처럼 얼어버린 손가락 호호 불며, 까만 투가리 그릇에 가득히 담아오셨습니다.
국을 끓이실 땐 가마솥 아궁이에 곁들여 걸어놓은 양은솥을 이용 국을 끓이셨는데, 그땐 늘 아궁이에 고구마도 함께 구워 주시면서 목젖도 덩달아 따라 넘어갈 시래기 국을 끓이셨답니다.
시래기 국을 끓이실 때는 아궁이에 짚을 넣으시면서도 이따금 팔뚝만한 국자로 국물을 떠 "쩝쩝" 간을 보셨는데, 어느 때는 갑자기 "앗 뜨거!" 하시는 통에, 때로는 식구들을 간 떨어지도록 놀라게 하셨던 어머님이셨고요.
또한 그 당시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상은 반찬이 거의모두 채소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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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찬이 그리 많은지, 우리 어머니들께서는 모두가 밥상을 늘 무지개 색깔로 차리시는 기술자들이셨지요.
아아, 그 당시는 겨울철이면 서캐와 이도 어찌 그리 많은지,
상리 우리 어머님들께서는 이 계절만 되면 새로 생기는 그 일감 때문에도 농한기인 겨울엔 오히려 쉴 틈이 더 없었답니다. 그걸 없애려면 탁구선수처럼 손과 눈의 순발력도 매우 좋아야 했지요.
장난기 있는 남자 꼬마들은 "툭! " 하고 터지는 소리가 신이나 장난삼아 엄지손톱으로 풍선 터치기 작전을 썼지만, 우리 어머니들께서는 그와 함께 경륜을 살려 이음새나 골 위주로 맥아더처럼 찬찬히 수색작전에 들어가신 뒤, 하얗게 줄지어 있는 중대나 연대를 발견하면 그걸 등잔불에 대고 쭈욱 지지는, 지지기 병법을 썼지요.
그러시다 어느 땐 당신의 앞 머리카락을 그슬린 적도 있으시고요.
또한, 밤에 머릴 긁적거리는 어린 딸을 본 엄마는 역시 전기불도 없는 등잔불 밑에서 참빗을 이용, 딸아이의 머리에 있는 머릿니와 서캐를 잡아주셨는데, 그때 참지 못하고 자주 움직이는 딸아이를 나무라시다가도 나중엔 안쓰러운지, 당신 자신이 고개가 아프다거나 팔이 저리시다며 긴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펴시고는 내일 훤한 대낮에 잡자 말하시면서 다음날로 미루시기도 했지요.
그놈의 자식이란 게 뭔지, 실상 알고 보면 별것 아닌 게 자식인데,
이렇게 나이 먹었어도 별로 해드린 게 없는 게 바로 자식인데 상리 우리 그 어머니들께서는 그렇게 사시다 가셨습니다.
지경 장날 사 오신 생선도 당신은 가시만 드시고, 고기는 자식한테만 발라주시던 우리들의 그 어머니, 겨울철 화롯불 보다 따뜻하고 강철보다 강하신 그 거룩하신 그 어머니들께서 다시는 뵐 수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초등 2학년 어느 겨울, "왜 흐르는 물은 얼지 않나요?" 물었을 때 바가지에 물을 떠오면서까지, 서툴지만 애타며 학교선생님보다 더 자상히 알려주시던 어머니께서 말입니다.
지금의 젊은 엄마들도 저 상리 마을의 어머니들처럼 자녀와 가정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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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희생정신이 있으시기를 난 두 무릎 꿇고 소망합니다. 남편들도 그렇
게 하기를 소망합니다.
요즈음 젊은 엄마들은 옛 어머니들과는 너무 달리, 희생심 없이 물질로만! 돈으로만! 자녀를 쉽게, 쉽게 키우려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옛 어머니들의 자식사랑과 가정 사랑을 조금만 더 본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비위만 맞춰 주지 말고,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그때그때 즉시즉시 바로 지적 하는 것도 잊지 말기를 또한 소망합니다.
그것도 자녀 사랑이니까요. 그러면 자녀들이 도리와 배려를 지금보다 더 잘 익히게 돼, 후엔 그 가정에 모범 자손이 더 많이 나오게 되고, 부모님께도 효도를 제대로 더 잘 할 거니 말입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장래까지도 저절로 더 밝게 될 거니 말입니다.
그러면 그게 일류대 들어간 것보다, 고시 합격한 것보다, 더 행복하게, 더 인간답게, 살게 되는 체험을 하실 거니까요.
난 현재 나이 70대인데도, 외롭거나 내 맘을 몰라주는 폭폭한 일들이 생길 땐 생전에 너무 고마웠던 우리 어머니(새어머니)와 우리 상리마을의 어머니들이 너무 생각나고 그리워, 하늘의 해달 별들이 깜짝깜짝 놀라도록, 하늘을 바라보고 수사자처럼, 때론 어린애처럼, 울부짖으며 왜 여태 안 오시느냐고 우리 새 어머니와 마을 어머니들을 부르면서 여쭤본답니다.
어머니, 지금 어느 하늘에 계십니까. 왜 여태 안 오셔요~ ~ ~
*위에서,
배달메: 전북 군산시 대야면(지경)의 옛 지명(고려말까지의 지명).
-돔: 지붕이 半球形으로 된 걸 뜻함.
똥아리: 표준말은 똬리(물동이 등을 머리에 언질 때 괴는 물건)
다라: 놋쇠나 양은 등으로 만든 지름 60cm 정도의 원형 그릇.
구루므: 우윳빛 색깔의 묽은 화장품(지금의 로숀 화장품과 비슷).
맨수리다마: 살결이 틀 때 바르는 묽은 약(지금의 안티푸라민과 비슷)
당그래: 표준말은 고무래(재나 곡물을 잡아당기는 괭이 모양의 물건)
옥도정기: 아까정끼 라고도 하며, 상처에 바르는 빨간색의 물약,
살강: 설거지 한 그릇을 놓는 곳(후에, 오늘날의 찬장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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