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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6주년을 맞이하면서(1)
2023년 10월 8일 / 엡 4:17-24
엡 4:17-24 /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 17-18) 이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닫고 깜깜한 어둠에 갇혀 지냅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깨닫지 못합니다. 19) 그들은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불결한 생활 속에 내맡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한 생각과 무분별한 욕망에 이끌려 그런 생활을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2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21)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배우고자 한다면 22)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사람을 뽑아 던지십시오.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사람이야말로 육욕과 속임수로 가득 차서 속속들이 다 썩어 버린 지난날 여러분의 자화상입니다. 23) 이제 여러분은 태도와 생각을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24) 여러분은 전혀 다른 새 사람, 거룩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새사람이 되십시오.
10월 31일은 마틴 루터(M. Luther)가 1517년 10월 31일 로마 교황청을 향하여 95개 조에 달하는 항의문을 내걸고 개혁의 기치를 든 지 516주년이 되는 날이다. 중세 로마교회는 사도들의 신앙에서 이탈하여 교권의 남용과 교회 안에 우상적 요소를 용납하는 등 세속적이고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렸다. 교회가 본연의 목적을 망각하고 궤도에서 이탈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어 멸망의 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당시의 형편은 정치, 사회, 문화, 예술 할 것 없이 개인의 자유와 의사는 무시된 채 모두 다 로마교회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급기야 문예 부흥(Renaissance) 운동이 터지게 되고, 이어서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는 종교개혁이란 말보다 신앙개혁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이다.
둘 다 로마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이지만 문예 부흥 운동이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라면,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이어져야 한다. 개혁자 칼빈(J. Calvin)은 「개혁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종교개혁의 핵심을「말씀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이는 단순히 옛날로 돌아가는 복고(復古)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말씀에 의하여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이나 단체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새롭게 바꾸어 버리는 힘의 원천이 된다.
개혁(改革)은 궤도를 이탈하고 비정상적인 길로 가는 것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정상적인 길로 가게 만드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새롭게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이며, 교회가 지향하는 노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어느 특정한 시대에 있었던 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서 지속해서 추구하며 이루어나가는 생명적인 운동이다.
1. 마틴 루터의 구원 간증
1507년 7월 2일, 고향을 떠나 학교 돌아가는 길에서 무시무시한 폭풍우를 만났다. 천둥소리를 듣고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빠졌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다시 한번 루터 곁으로 벼락이 떨어지자 루터는 그 자리에 나뒹굴며 죽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하나님이 자신의 목을 꺾어 지옥에 던져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에 빠졌다.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해 7월 17일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발견할 수 있나?’라는 영적인 유혹 문제를 풀기 위한 기나긴 영적 투쟁의 결과였다.
젊은 수도사 루터가 고민하는 문제는 구원의 문제였다. 내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러러볼 수 있는가? 나같이 추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이 바로 루터의 마음과 생각을 억압했던 문제였다. 루터는 하나님께 열심히 고해했지만, 자신이 지은 죄를 다 고백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까 늘 두려워하였으며, 중세적인 공로 신학 체계 아래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가운데 늘 영적인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해성사함으로써 그의 담당 사제에게 괴로움을 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루터가 너무 자주 찾아오니 담당 신부는 ‘제발 죄를 모아서 한꺼번에 가져오라’라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철저하게 회개하였다. 그런데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내 죄로소이다. 내 죄로소이다.’ 젊은 신부가 수도원장 앞에서 마룻바닥에 엎드린 채 울부짖었다. ‘제게 주님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그는 애원했다. 그런데 수도원장은 ‘빈곤과 순결과 순종이 항상 너를 따라야 한다.’라고 억양을 높여가며 말했다. 독일 농부의 아들인 젊은 마르틴 루터는 엄숙하게 그러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고 나서 모직 속옷에 검정 가운을 입고, 짧은 고깔 달린 웃옷을 걸치고, 검정 벨트를 차고,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그는 얼마나 열심히 애썼던가! 한 번에 며칠씩 금식했다. 밤에 담요도 걸치지 않고 고해성사를 하여 거의 얼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또한, 마룻바닥에 엎드려 기도문을 구슬프게 외웠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만일 수도승이 수도원 생활을 통해 천국에 갔다면, 나도 천국에 갔을 것이다…. 내가 만일 좀 더 오래 밤을 새우고, 기도하며, 읽고, 노동하면서 그 상태를 유지했다면 그렇게 순교하게 되었을 것이다.’
루터가 속해 있던 지역의 어거스틴(Augustine)파 수도회 수장인 존 슈타우피츠 박사가 그를 도와주려고 애썼다. ‘그리스도는 곧 죄 사함이다.’그가 젊은 수도승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너를 도와줄 수 있으려면 네가 실제로 지은 죄의 목록이 있어야 하지.’
루터는 자기 죄를 열거하려고 애써 보았지만, 그것은 평안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찾기 위해 라틴어로 된 붉은 가죽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
1508년 어느 날, 그는 수도원 탑의 작은 방에서 로마서를 읽고 있었다. 1장 17절에 이르렀을 때, 그에게 최초의 섬광이 비쳐왔다.
롬 1:17 / 이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 곧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인정해 줄 자로 만드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진실하게 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살 수 있다(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입니다(합 2:4).
그는 마음속으로 그 말을 자꾸자꾸 되뇌어 보았다. 믿음만으로 충분할까? 그는 과연 그러한지 의심스러웠다. 그러고 나서 수도원장으로부터 그가 다른 수도승과 함께 어거스틴파 수도승 중에서 대표로 개혁을 호소하기 위해 로마로 가도록 선정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루터는 그 소식을 듣자 가슴이 마구 뛰었다. 틀림없이 그 거룩한 도시에서 마음속으로 그토록 갈망해 왔던 영적 평안을 찾게 될 것 같았다.
루터는 그 도시를 처음 보았을 때, 땅에 엎드려 부르짖었다. ‘오, 거룩한 로마여!’ 그는 면죄를 받기 위해 그 도시에 있는 성당은 모두 찾아갔다. 마침내 그 유명한 상크타 상크토롬(Sancta Sanctorum)에 왔다. 그 안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빌라도의 심판석까지 밟고 올라가셨다는 28개의 높다란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루터는 교황 레오 4세가 지정된 기도문을 외우면서 그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는 순례자에게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9년 동안의 면죄를 약속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루터는 닳아빠진 계단을 기어오르면서 기도문을 읊조렸다. 기도문 사이사이에 그는 마음에 떠오르는 죄를 하나하나 자백했다. 그런데 갑자기 탑 속에서 읽은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진리는 그의 내면 자아를 흔들어 놓았다.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벌떡 일어나서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빛은 밝아 왔지만, 영적인 어두움은 여전히 그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었다.
독일로 돌아와서 루터는 성경 말씀을 좀 더 깊이 탐구했다. 그는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몇 시간이고 묵상했다. 엄숙한 의식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그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것은 그에게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박사가 되었을 때도 아직 빛을 보지 못했다.’
그는 시편에 대해서 강의한 다음 로마서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다시 한번 새롭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교리와 씨름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라는 문구를 아주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는 데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만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갑자기 빛이 쏟아져 들어와 그의 어두운 마음을 구석구석 밝혀 주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것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 하심을 선포하시는 수단임을 알았다.’
‘나는 내가 새로 태어나는 것을 느꼈다. 모든 성경 말씀이 다르게 보였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의를 미워하는 대신 몹시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루터가 탄생하였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설교로 전 유럽에 불을 붙였다. 선행과 수행으로써 자기를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거짓 교리에 빠져 있던 루터를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는다는 올바른 진리로 인도한 것은 바로 로마서 1장 17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선행과 열심을 통해 해결되지 않는 자신의 죄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솔직한 심정으로 나아왔던 루터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올바른 진리로 인도하신 것이다.
● 우리의 신앙상태는 어떤 모습인가? 자신의 선행과 종교적인 열심을 보고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라는 착각 or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의를 얻는 길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다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 사역의 완전함을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임을 올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2. 예수님 당시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성경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고전 10:31). 그러나 사람들은 이 최고의 가치를 망각한 채 자기의 욕심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모든 종교 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법과 제도를 만들고 자기를 합리화시키려 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계명보다 소위 ‘장로의 유전’이라 하는 제도로 사람들을 얽어 묶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 속한 것도 아니요, 하나님에 의한 것도 아니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라고 하시며 이들을 책망하셨다.
이들은 마태복음 23장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거의 100% 빼닮고 있었다. 이러한 아픔은 그 어느 누구가 아니 나 자신부터 그렇게 하고 있다는 비참한 사실을 깨닫고 이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본다.
■ 마태복음 23:2-7을 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예수님은 듣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뿐이고 실행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들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요구를 너희에게 강요하지만, 자기들은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시면서, ‘이들은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만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만을 찾으며, 길에 나서면 거드름을 피우며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랍비'라거나 스승이라고 불러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셨다.
말이 나온 김에 몇 가지 예를 더 들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나 자신부터 이러한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 23:23-24 /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율법에 따라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믿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무시하고 있다. 물론 십일조를 바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24) 눈먼 지도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통째로 삼키는구나.
마 23:25-26 /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은 방탕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26) 눈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으라. 그래야 잔 안팎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
마 23:27-28 /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아름답게 장식한 무덤 같아서 겉은 좋아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거룩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온갖 위선과 죄가 가득 차 있다.
마 23:29-30 / 화가 있으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너희 조상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인들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 놓고는 30) `우리는 조상들이 저지른 행동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23장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책망하셨던 것을 함께 모아놓았다고도 볼 수 있고, 아니면 이날 따라서 작정하시고 말씀하신 것 같기도 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3. 처음 먹은 이들의 마음은 아름다웠는데 … .
중요한 것은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 모두도 이렇게 되고 싶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들 나름대로 말씀을 깨닫기도 하였으며 경건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찬송가가 있었다면 285장과 더불어 288장을 계속 불렀을 것이다.
주의 말씀 받은 그 날 참 기쁘고 복 되도다. 이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이 좋은 날 내 천한 몸 새사람이 되었으니 이 몸과 맘 다 바쳐서 영광의 주 늘 섬기리, 새사람 된 그 날부터 평안한 맘 늘 있어서 이 복된 말 전하는 일 나의 본분 삼았도다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이어서 288장을 계속 불렀을 것이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4. 왕이 된 사울 왕의 실패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사울 왕의 예를 들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사울 왕의 경우는 우리에게 있어서 실례가 되기 때문이다.
사울은 본래 왕이란 게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하나님께 청원했을 때, 그 응답으로 주신 첫 번째 왕이었다. 본래 왕을 주지 않으신 것은 왕이란 제도가 저들 생각처럼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리석게도 왕을 주시면 백성이 하나로 뭉쳐 힘도 세지고, 그 힘으로 주변 민족들을 제압할 수도 있고, 현대에 만들어진 화려한 사극 같은 것을 볼 때 대중들이 그러듯이 왕이나 귀족으로 나오는 배우들을 흠모하고 열광하면서 그 시대 자체를 낭만적으로 생각하게 되듯이 …. 그런 멋진 왕이 있어야 한다고 졸라댔다. 오죽하면 당시의 예언자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왕을 허락하시면서 ‘그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너를 버린 게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다’라고까지 말씀하셨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사무엘에 의해 세워진 왕이 사울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남자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말하자면 용모가 수려하고 기골이 우람한 청년이었다. 또한, 사내답고 용감하기로는 으뜸이면서도 왕으로 선택된 잔치 자리에서 환호하는 백성들을 피해 도망칠 정도로 수줍고 겸손하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외모에서부터 정신에 이르기까지 칭찬받을 만한 왕의 재목이었다.
사무엘상 10장에 보면 그가 아직 왕이 되기 전,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으러 하인들을 거느리고 근방을 헤매고 다니다가 예언자 사무엘로부터 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사무엘이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왕으로 세우고 나서 그에게 말했다.
삼상 10:6-9 / 그때에는 여호와의 영이 당신에게도 내리 덮쳐서 당신도 예언자들의 황홀경에 빠져 그들과 더불어 춤추고 노래 부르게 될 것이오. 그 순간부터는 당신도 변화되어 새사람이 될 것이오. 7) 당신에게 이런 징조가 모두 일어나거든 당신은 더 이상 아무것도 망설이지 마시오! 당신에게 의욕이 생기는 대로 행동하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오. 8) 그다음에는 당신이 나보다 먼저 길갈 성소로 내려가서 7일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으시오! 나도 그곳으로 내려가서 주께 온전한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치겠소! 당신이 그다음에 하여야 될 일은 내가 그때에 가서 모두 알려 드리겠소!' 9) 사울이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어깨를 돌리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사울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새사람을 만들어 주셨다. 사무엘이 예고한 모든 징조도 그날에 차례차례로 다 이루어졌다.
사울은 사무엘을 떠나서 길을 갈 때, 자신이 왕으로 세워졌다는 사실로부터 새로운 마음을 얻고, 하나님의 영에 충만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삼상 10:10-13 / 사울이 종과 함께 기브아에 이르자 과연 예언자들의 무리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사로잡아 그 역시 예언자의 황홀경에 빠져서 기뻐하였다. 11) 전부터 사울을 잘 알던 사람들이 그런 광경을 보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수군거렸다. `사울이 저렇게 변하다니, 이게 웬일인가? 귀한 집에서 태어난 사울이 저 천한 예언자들과 한패가 되었다니, 어디 그게 말이나 되겠는가?' 12) 이 말을 들은 구경꾼들 가운데서 한사람이 나서서 `저 예언자들이란 본래 누구네 자식인지도 모르는 천민들이 아닌가!' 하고 응수하였다. 그래서 이때 `사울도 예언자들 패거리에 물들었느냐?'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13) 사울은 예언자들의 황홀경에 빠져서 기뻐한 뒤에 기브아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몸과 영혼에는 이제 왕으로서의 위엄과 광휘(光輝)가 휘감기게 된 것이다. 그는 있는 그 자체로 왕이었고, 왕의 권위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하여 그날부터 그에게서 신화적인 속담이 생기게 되었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이 의문은 부정적인 질문이 아니라 긍정을 역설하는 질문이다. 사울이야말로 예언자들 가운데 있느냐, 있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살다 보면 늘 그렇듯이 아무리 좋은 선택이라도 모두 다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 꼭 이의를 제기하는 무리가 있게 마련이다.
삼상 10:26-27 / 사울도 기브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스라엘의 군인들 가운데서 마음속으로 여호와께 감동받은 용감한 자들이 그를 경호하면서 따라갔다. 27) 그러나 백성 가운데는 소수의 불량배도 있어서 사울을 조롱하였다. ‘저러한 자가 우리를 외세에서 해방시켜 강대국으로 부흥시켜 주겠는가?’ 그들은 이렇게 사울을 멸시하고 비방하면서 그에게 예물도 바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울은 그러한 소리에 대하여 일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한 모욕을 하는 불량배들을 대하는 사울 왕의 모습 -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는 모습은 정말로 많은 크리스천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이런 모습을 보는 백성들 역시 사울 왕에 대하여 존경을 표하였을 것이다.
사울 왕 역시도 초심에서 떠나 교만하게 돌변한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초지일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초심에서 떠남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사울이 이스라엘을 약 2년간 다스렸을 때 감히 왕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잘못을 저지른다.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에 임하기 전에 승리를 위해서 희생제를 드려야 하는데 제사장이자 선지자인 사무엘이 일주일을 기다려도 오지 않자 자기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 방자하게도 월권을 한다. 과거 사무엘상 10:8처럼 사무엘이 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설령 약속한 시간이 지났다 할지라도 좀 더 기다려야 했다.
삼상 13:8-9 / [제사장 노릇을 하는 사울] 사울은 여전히 길갈에 남아 있었고, 그를 따르던 군인들은 사기를 잃은 채 공포에 빠져 있었다. 사무엘은 본래 사울에게 길갈에서 7일 동안을 기다리고 있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아주 위급해져 가는데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남아 있던 군인들마저 사울을 버리고 떠나기 시작하였다. 9) 그래서 사울은 할 수 없이 번제와 화목제에 쓸 짐승들을 가져오게 한 다음에 제 손으로 제물을 바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삼자의 관점에서 사울 왕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의인인 체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자신 스스로 입을 다물어야만 한다. 사울 왕이 처한 상황에 내가 놓여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사울 왕처럼 잘못을 저지르고 말 것이다. 사울 왕의 잘못은 우리에게 있어서 구경거리가 아니다. 앞에 함정이 놓였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이다.
고린도전서 10:11-13로서 나 자신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고전 10:11-13 / 그들에게 일어났던 이러한 일들은 모든 사람에게 경고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기록됨으로써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12) 그러므로 조심하십시오. 누가 언제 같은 죄를 범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13) 여러분에게 파고드는 악한 욕망은 새로운 것도 별다른 것도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많은 사람도 여러분보다 앞서 같은 문제에 부딪혀 싸워 왔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유혹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물리칠 수 없을 만큼 강한 유혹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약속해 주셨고 또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실행하십니다. 유혹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실 하나님을 믿고 여러분은 인내로써 그 유혹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울이 막 번제를 드리고 나자 사무엘이 도착하였다. 사울이 그를 맞으러 나가 인사를 하자, 사무엘은 대뜸 ‘왕은 어째서 그토록 제멋대로 행동하였소?’하고 책망하였다. 사울이 길게 변명하였다. ‘블레셋 족속이 이미 믹마스에 와서 진을 치고 있는데, 우리 군인들은 놀란 나머지 산지사방으로 도주해 버리고 그나마 따르던 군인들도 점차 떠나가는데, 제사장님마저 약속된 시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여호와께 번제를 드려 도와 달라고 빌기도 전에 적군들이 길갈로 내려와서 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히 번제를 직접 드렸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을 향해 여지없는 심판을 선언하였다.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하오. 어째서 그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않았소? 아무리 위태로운 처지에서라도 그 명령만 지켰더라면 여호와께서 그대와 그대의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영구한 왕조를 약속해 주셨을 것이오. 그러나 그대가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대한 약속을 놓치고 말았소. 여호와께서는 이미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서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정해 놓으셨소.’(삼상 13:10-14)
이것은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나타내는 것이다. 엄연히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왕이 할 일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급한 마음에 사울 자신이 방자히 행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사무엘은 왕에게 따져 묻고 크게 질책을 하게 된다.
사울 왕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사무엘 선지자의 책망으로 끝나지 않고 왕권까지 박탈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는다. 그는 사람들, 즉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두려워 떠나가는 것을 보고, 민심이반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서슴없이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왕의 자리를 내어놓아야 하는 형국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사울은 자의적인 겸손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복종하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어린 신앙의 때에 그렇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계속 경건의 훈련을 했더라면 이렇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회개를 통해서 즉시 용서를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사울 왕은 뉘우침은 있었는지 몰라도 진정한 회개는 없었다. 다짐하면서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라는 결단이 없었다. 사울 왕의 잘못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삼상 15장).
삼상 15장 하나님께 버림받는 지도자 / 매일말씀묵상에서
1.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1). 그 말씀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원수인 아말렉을 칠 것이며,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완전히 진멸하고 남녀와 소아, 젖먹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었다(2-3). 사울은 보병 20만 명과 유다 사람 일만 명을 데리고(4) 아말렉을 쳤다. 하지만 사울과 백성들은 칼로 모든 아말렉 백성을 진멸하면서도, 왕 아각과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은 진멸하기가 아까워서 남기고, 그저 하찮은 것들만을 진멸하였다(8-9).
2.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사무엘에게 임하였다(10).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는 말씀이었다(11). 사무엘은 이 말씀을 듣고 밤새도록 하나님께 부르짖었다(11). 사무엘이 밤새도록 기도한 내용을 우리는 알지 못하나, 사울을 다시 한 번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지 않았을까? 사울을 향한 사무엘의 연민을 느낄 수 있다. 사무엘 선지자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심이었다.
3. 사무엘이 이튿날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사울에게 가는데, 사울이 승전을 기념하려고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길갈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12). 사무엘을 보자 사울은 사무엘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행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13). 그러자 사무엘이 양과 소의 소리는 무엇이냐고 지적하였다.
4. 그제야 사울은 구차한 변명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좋은 것을 남겼다는 것이다(15절). 사울은 백성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21, 24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실제로 아각과 양과 소의 좋은 것들을 남기는 결정은 백성들이 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사울과 백성이’ 한 일이었는데 말이다(9). 후에 다윗이 선지자의 책망을 들었을 때 곧바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모습이다.
5. 사무엘은 구차한 변명으로 하나님을 속이려는 사울에게 간밤에 임한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17-23). 이것은 사울을 버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최종 선고였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이유가 무엇일까? 사울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사울이 하나님께 드리려고 남겨놓았다고 변명하는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22). 순종하지 않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우상숭배와 같은 죄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에게 말씀하신다(23). 하나님께서는 이런 왕을 버리실 수밖에 없었다.
6. 얼마나 많은 변명과 핑계를 늘어놓고, 책임을 회피하고서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까?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다는 말씀을 듣고 나서야 사울은 자기가 범죄했다고 드디어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늘어놓는다(24). 하지만 이런 회개는 그의 지은 죄보다 더 악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백성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그의 회개라는 것도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회개일 뿐이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그저 자신의 왕위가 끝나는 것뿐이었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7. 그래서 사울 왕은 사무엘에게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면서 자기와 함께 돌아가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해달라고 간청한다(25). 여전히 백성들 앞에서 자기 이름, 자기 왕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3절). 사무엘은 돌이켜 사울과 함께 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지만, 사무엘이 사울을 따라간 것은 사실 아각을 처형하기 위한 의도였다. 사무엘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즐거워하는 아말렉의 왕 아각을 하나님 앞에서 죽였다(32-33). 그리고 사울과 사무엘은 각각 자기의 길로 갔고(34), 이후 사무엘이 죽기까지 사울을 가서 보지 않았는데, 이는 사울로 인한 슬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기록하였다(35).
8. 본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지도자의 특징들을 보여준다. ❶ 그에게 순종의 기준은 ‘자기 나름의 적당히’였다. 그는 온전한 순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순종했다고 사무엘에게 항변하였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자신들의 한 일을 가지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자들을 하나님은 모른다고 말씀하셨다(마 7:22-23). ❷ 하나님께 버림받은 지도자 사울이 보여주는 태도는 ‘자기를 위해서’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렵지 않게 본다. 자기의 이름을 위해 사역하고 소위 목회를 하는 많은 목사는 이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어야 한다. ❸ 그는 자기의 책임을 인정하는 대신, 백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15, 21, 24). 정직하게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대신 씌울 거리를 찾았다. ❹ 하나님께 버림받은 지도자가 하는 일은 복음적 회개가 아니라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회개였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가 받을 벌이 무서워서 하는 회개가 율법적 회개였다. 눈물을 흘리지만, 마음을 돌이키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이야기는 오고 오는 시대의 모든 지도자들, 특별히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서 쓰신 경고장이다.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새겨야 할 말씀이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다.
결론을 1차로 이렇게 내리고 싶다.
종교개혁 506주년을 맞이하면서 /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첫사랑을 회복하자는 말이다.
계 2:1-5 /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보내라. '이는 교회를 순회하며 오른손으로 그 교회의 지도자들을 붙들어 주시는 분의 말씀이다. 2) 나는 네가 선한 일을 많이 한 것을 알고 있다. 나를 위해서 수고하고 인내해 온 것도 보았다. 또 네가 믿음의 형제인 척하며 죄짓는 자들을 눈감아 주지 않고, 사도라고 스스로 떠들어대는 자들을 주의 깊게 살펴 그들이 가짜인 것을 가려낸 사실도 알고 있다. 3) 너는 나를 위해 고난을 견디었으며 낙심하지 않았다. 4) 그러나 너를 나무랄 일이 하나 있다.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5)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