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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 아담으로부터 들어온 죄
로마서 5:12-21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롬 5:12-21 / [아담과 그리스도]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 죽음을 불러들였듯이 온 인류는 죄로 늙고 죽어 갑니다. 13) 원인이야 물론 아담에게 있겠지만 사람들은 모세에 이를 때까지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는 심판을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지도 않았고 또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시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14) 그러므로 그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담처럼 금단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특별한 법을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앞으로 오실 분의 표상이었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시기로 된 그리스도와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15)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 사이에는 얼마나 큰 격차가 있습니까! 아담은 자기 죄로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많은 사람에게 용서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16) 아담이 저지른 한 번의 죄가 많은 사람에게 죽음의 형벌을 가져다 준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값없이 많은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생명까지 주십니다. 17) 아담이란 한 사람의 죄로 죽음은 모든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용서와 무죄 선언이라는 선물을 거저 받고 모두 생명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는 것입니다. 18) 그렇습니다.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에게 형벌을 가져왔으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어 길이 살게 하신 것입니다. 19)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많은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20) 십계명을 받은 결과 모든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죄가 깊다는 것을 알게 될수록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더욱더 깊이 깨닫습니다. 21) 과거에는 죄가 모든 사람을 지배하여 죽음을 가져왔지만 지금은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성은 죽음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 부한 자와 가난한 자, 권세자와 눌린 자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의 권세 앞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죽음이 온 세상에서 왕 노릇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죄(12-14) 바울은 인간이 처한 현실을 죄와 죽음으로 규정합니다. 죄란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는 곧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생명과의 단절은 죽음입니다.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그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아담 때문에 우리가 죄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아담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왕 노릇(15-19)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오고 죽음의 심판을 당하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많은 죄가 용서받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담으로 인해서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나라가 이제 생명의 나라로 변한 것입니다. 생명의 나라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근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의로운 사람이 아닌 것처럼 지금 실제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생명 나라에 들어갔다고 인정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가된 것, 즉 덧입혀진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생명의 빛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을 뿐입니다. 생명과의 완전한 일치는 마지막 종말의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망이 아니라 생명이 왕 노릇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영생(20-21) 영생은 성도에게 익숙한 단어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는 영생의 뜻을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생의 뜻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사람이 생각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경험하는 것 중에서 영원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사람은 영생이 무엇인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영생은 우리가 현재 갖고 있고 경험하고 있는 육적 생명의 연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생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 존재 방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적 용 : 영생은 의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걸 믿으십니까?
우리가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목회의 정신은 자기 죽음의 목회입니다. 죽음, 목회자의 자기 죽음에서 시작하는 피목회의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입니다. 그러나 오늘, 조국 교회에서는 이러한 피목회의 정신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목회는 그가 일생 동안 부른 토혈의 노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신 길이 그러했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땀을 흘리고 눈물을 쏟으며 피 뿌리신 생애였습니다. 성경책의 모서리가 순교자의 피 흘림을 상징하는 붉은 색에서 금박으로 도금되는 상황은 세상적인 성공으로 각광받는 상징이 아닌지 염려됩니다. -이지현-
< 설 교 >
선장이 죽어야 배가 산다
세월호 침몰 사건은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당시 제일 큰 배였고 제일 호화로운 배였던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날과 같은 날 침몰되어 관심을 모았습니다. 1912년 당시 타이타닉호는 제조되고 첫 출항이었습니다. 2,200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당시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은 승객 중 어린이, 여자, 노인 그리고 남자 순으로 탈출시켰습니다. 이성을 잃고 먼저 살려고 발버둥치는 남자를 죽이면서 질서를 유지하였습니다. 700명을 살리고 자기는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의 고향 영국 리치필드에서는 그의 업적을 그리며 동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한 말을 동상에 새겼습니다.
“Be Britsh"(영국인답게 행동하라.)
그 후 선장은 사고난 배에서 제일 늦게 나와야 한다는 것은 100년 전통이 되어 왔습니다. 그 후 선장들은 배가 파선하였을 때 배와 운명을 같이 하여 왔습니다. 102년 동안 배에서 도망친 선장은 두 번이었습니다.
첫 번 사건은 이태리에서 있었습니다. 타이타닉 침몰 꼭 100년 이태리 코스타 콩크르디아호 선장 프란체스코 스케티노 선장이 배가 파손되어 침몰되는 순간 300명 승객을 배에 둔채 도망쳤습니다. 당국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배에서 나왔는가?”
“간신히 탈출하였습니다.”
“도로 배로 가라.”
“가라앉는 배로 다시 들어가라는 말인가요?”
“그렇다. 가서 승객을 구하라.”
“못 들어갈 형편입니다.”
“이 새끼야. 들어가!”
기어코 그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후 세월호 선장 이 준석 선장이 두 번째입니다. 뉴욕타임지는 이 사건을 이렇게 보도하였습니다.
“공포에 질린 수백 명의 승객을 배에 두고 맨 먼저 탈출한 세월호 선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배와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선장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버렸다.
그는 혼자 육지에 무사히 발을 디뎠는지 몰라도 감옥에 내리게 되었다.”
2시간 30분 동안 배가 떠있었습니다. 만일 선장이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마음을 가졌었더라면 447명 승객도 다 살리고 자기도 살았을 것이라고 예상하였습니다.
단원 고등학교 2학년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모두가 죽어서 없어지는 한국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생겼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대통령이 죽어야 나라가 삽니다.
지도자가 죽어야 공동체가 삽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대통령이 있습니다. 대통령을 위한 나라가 있고, 나라를 위한 대통령이 있다는 말입니다.
■ 중국에서 재앙이 그친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중국에 가뭄이 계속 되었습니다. 논과 들의 농작물이 다 타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 때 왕이 기우제를 드리겠다고 공포하였습니다. 수많은 국민들을 한 자리로 모았습니다. 그리고 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드리는 기우제가 최고의 기우제입니다 그 동안 수없이 기우제를 드렸지만 소용이 없어서 마지막 결단의 기우제를 드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드릴지 제물이 발표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준비가 다 마쳐졌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죽일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 때 왕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나라의 극심한 가뭄은 왕인 내 잘못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내가 죽겠습니다. 나를 묶여 제단에 올려놓고 불을 지르십시오.”
모두가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왕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자 스스로 단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단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억수같은 비가 내려 단의 불을 꺼버렸습니다. 가뭄의 재앙이 물러갔습니다.
대통령 자리를 이용하여 명예와 돈을 쌓은 대통령이 있는 나라들은 거의 다 기울었습니다. 이집트, 필리핀, 아르헨티나, 이란 등이 그런 나라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나라만 생각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다스린 나라는 흥왕하였습니다.
2. 아버지가 죽어야 가정이 삽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양육의 책임자요 경제의 책임자요 가정의 생명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가정을 위하여 죽을 각오로 살아야 가정이 삽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10자녀가 다 죽고, 아내는 떠나고,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가정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굳굳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결론은 더 좋은 가정을 만들었습니다.
■ 동양의 노벨상은 막사이사이 상입니다. 필리핀 대통령 막사이사이가 만들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땜장이였습니다. 뒷골목에 조그마한 대장간을 만들어 놓고 땜질하여 생계를 겨우겨우 유지하여 나가는 보잘 것 없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이 된 후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그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땜장이 일을 그만 두시고 궁궐로 들어가세요. 고생하신 아버지를 편하게 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네가 대통령이 된 것이지 내가 된 것은 아니다. 나는 평생 내가 할 일을 하겠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하였습니다. 이런 아버지가 그런 아들을 만들었습니다.
■ 가정을 살린 또 하나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어거스틴이 예수님 이후 가장 성결한 성자가 된 곳에는 훌륭한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암브로시우스 목사님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눈물의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라고 격려하면서 모니카의 믿음을 식지 않게 하였던 위대한 목사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 어거스틴의 아버지 패트리커스의 영향력을 결코 간과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는 정직하고 성결하게 사는 이였습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이였습니다. 당시에는 산적들이 많아 여행하는 이들이 가진 것들을 모두 노략질당하는 이들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잘못 하다가는 생명을 잃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패트리커스가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아내 모니카가 산적을 만나 다 빼앗기게 되면 비상금으로 쓰라고 옷깃 속에 금 몇 돈을 넣어 주었습니다. 산길을 가던 그는 산적을 만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가진 것 다 내놓아라.”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다냐?”
“다 내놓았습니다.”
산적들은 패트리커스의 온 몸을 뒤지더니 보내주었습니다. 조금 길을 가던 그는 산적들에게 거짓말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괴로움을 느끼며 다시 산적들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옷깃 속에 들어 있는 금을 꺼내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까 내가 가진 것을 다 내놓았는 줄 알았더니 아내가 옷깃 속에 비상금으로 금을 넣어 둔 것을 잊었었습니다. 거짓말한 것이 괴로워서 다시 왔습니다.”
산적 두목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얘들아! 산적 생활 몇 년이지만 이런 놈은 처음 보았다. 아까 빼앗은 것 도로 주어라”
이것이 어거스틴의 아버지 패트리커스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어머니 모니카와 그렇게 정직한 아버지 패트리커스 사이에서 어거스틴같은 성자가 태어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아버지가 바르게 하여야 자녀가 삽니다.
3.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
세월호 선장이 죽을 각오를 하였으면 내 생각에 자기도 살고 승객들도 다 살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여건이었습니다. 자기만 살려고 제일 먼저 배를 떠나는 배를 탔습니다. 선장복을 입지 않고 사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젖은 돈을 꺼내 말리던 모습이 기자들에게 보였습니다. 정말 한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눈물만 흘렀습니다.
안산 단원구에 있는 안산 제일 교회 당회장실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습니다. 강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족자가 꼭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고훈 목사님이 쓰신 것이었습니다.
아생교회사(我生敎會死)
아사교회생(我死敎會生)
마음에 확 각인이 되었습니다.
내가 교회를 위하여 죽어야 교회가 산다고 나는 속으로 힘차게 외쳤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죽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목사다운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희생하자, 제일 많이 희생하자. 교회를 생명으로 알고 사랑하자고 속으로 외쳤습니다.
세월호 선장 교훈은 모두의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평생 원하였던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만 모두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인도하고 자기는 가나안을 보면서 죽었습니다. 이것이 목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 잘 되게 하고 나는 죽어야 하는구나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 하는 목회 철학 그림이 있습니다.
인디안 추장이 먼 곳을 바라보는 사진입니다. 그 뒤에는 식인종들이 모두 춤추며 즐기고 있습니다. 모두를 즐겁게 만들어 놓고 미래를 구상하면서 즐거움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목사라고 생각하며 목회하여 왔습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
4. 장로가 죽어야 공동체가 삽니다.
지도자가 죽어야 공동체가 삽니다. 지도자가 자기만 위하는 이기적인 공동체는 발전하지 못 합니다. 지도자가 모범을 보이며 살아야 그 공동체가 삽니다.
기드온이 300명 용사로 메뚜기 떼같이 많은 미디안과 죽을 각오로 앞장 섰습니다.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공동체를 사랑한 농사군 기드온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장로들이 교회를 위하여 죽으려고 하면 교회가 삽니다. 지도자 한 명이 그 공동체를 살립니다.
■ 강 재구 소령 이야기입니다. 1965년 10월 4일 월요일 오전 10시 37분이었습니다. 힘과 신념으로 아람찬 스물아홉의 한 장교가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고 수류탄과 함께 일순에 산화했던 사건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였습니다. 맹호부대 수도사단 예하 제1연대 10중대장 강재구 이야기입니다. 후에 그 부대는 그의 이름을 따서‘재구대대’라고 불렀습니다. 3대대는 그날 홍천 인근의 부대훈련장에서 수류탄 투척훈련이 계획돼 있었습니다. 6시 30분쯤 24인용 텐트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던 강 대위는 인접 중대장들에게 지난 투척훈련 때의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의를 당부하며 훈련장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자기 중대에서 그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훈련 도중 박 해천 이등병이 던진 수류탄이 높이 치솟아 중대원 쪽으로 떨어졌습니다. 군인들 대부분이 유효반경 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모두 죽을 순간이었습니다. 지형이 평탄치 않아 손으로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발로 찰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강 재구 소령은 그 순간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쳤습니다. 강 재구는 폭음과 함께 무참한 주검으로 산화했습니다. 평소에 그는‘굵고 짧게 살자’는 말을 하였습니다. 육사 교정을 내려다보며 그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지도자가 죽어야 공동체가 삽니다.
장로님들도 내가 죽어야 우리 교회가 산다는 믿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 황해도 재령읍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정 찬유 장로님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속에 사업이 잘 되어서 주일성수도 잘 하시고 십일조도 정확하게 하시고 신앙생활에 모범이 되시는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자기 집을 2층 양옥으로 잘 짓고 있었습니다. 그 날 밤에 꿈을 꾸는 데 하나님의 책망이 있었습니다. “내 집은 양철 집으로 두고 네 집만 이층 양옥으로 그렇게 잘 짓느냐?” 밤에 자다가 이 음성을 들은 그는 벌떡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회개기도를 하였습니다. 이 음성을 듣고서야 하나님의 집이 너무나 초라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 날 밤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서 흠뻑 울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일부터 당장 하나님의 집부터 짓겠습니다.” 이튿날 그는 설계사를 데려다가 성전부터 다시 설계하고 짓고 그리고 자기 집을 완성시켰습니다. 이것이 당시 한국 최초의 성전이었던 황해도 재령 동부 교회였습니다. 장로가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어야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라.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 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되리라“(롭 5;17-19)
영국의 유명한 문호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위대한 것은 두 가지 면에서다.하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금이나 은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없어질 것들일 뿐입니다.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중국 어느 곳에 선교사가 파송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가 오기 전에 이곳에는 크리스천이 한 명도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비크리스천이 한 명도 없었다.”
예수님 한 분이 죽으심으로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 한분이 죽으심으로 온 세상이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장이 죽어야 배가 삽니다. 대통령이 죽어야 나라가 삽니다. 지도자가 죽어야 공동체가 삽니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 장로가 죽어야 공동체가 삽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 인류가 삽니다.
■ 이 현주의 동화 “알게 뭐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도로위에 나란히 두 트럭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한 트럭에는 밀가루가 다른 트럭에는 시멘트가 실려 있었습니다. 두 트럭 운전기사는 나란히 차를 세워 두고 차에서 내려 소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트럭에 올라 운전하다 보니 차가 바뀌었습니다. 두 운전기사는 똑같이 외쳤습니다. “알게 뭐야? 내 것인가?” 시멘트 운전기사는 공사장에 트럭을 세웠습니다. 공사장의 인부들은 밀가루인 것을 알았지만 “알게 뭐야? 내 집인가?”하면서 밀가루로 집을 지었습니다. 세멘트 트럭 운전기사는 제과점에 차를 세웠습니다. 제과점에서는 시멘트인 것을 알면서도 “알게 뭐야? 내가 먹을 것인가?”하면서 시멘트로 과자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부러지는 소리가 두 곳에서 들렸습니다. 집이 무너져서 그 안에 있던 아이의 등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과점에서 손님들의 이빨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운전기사들은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돈을 벌어 달 나라에 땅을 샀습니다. 정부로부터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국토를 넓히는 데 공헌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게 뭐야’ 하면서 자기만 생각하면 그 사회, 그 공동체는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에 우리가 살았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내가 죽어야 저 사람이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