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숙의 「이별의 능력」감상 / 나희덕
이별의 능력
김행숙
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당신의 폐로 흘러가는 산소.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태울 거야.
당신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알고 있었니?
당신이 혐오하는 비계가 부드럽게 타고 있는데
내장이 연통이 되는데
피가 끓고
세상의 모든 새들이 모든 안개를 거느리고 이민을 떠나는데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
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헛것들을 보지. 매우 아름다워.
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
당신 머리에서 폭발한 것들을 사랑해.
새들이 큰 소리로 우는 아이들을 물고 갔어. 하염없이 빨래를 하다가 알게 돼.
내 외투가 기체가 되었어.
호주머니에서 내가 꺼낸 건 구름. 당신의 지팡이.
그렇군.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하염없이 낮잠을 자다가
눈을 뜰 때가 있었어.
눈과 귀가 깨끗해지는데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데
털이 빠지는데.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2분간 냄새가 사라지는데
나는 옷을 벗지. 저 멀리 흩어지는 옷에 대해
이웃들에 대해
손을 흔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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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 1970년 서울 출생. 1999년 《현대문학》에 시로 등단. 시집『사춘기』『이별의 능력』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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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인, 조선대 교수) 평설
그렇군요. 이별에도 능력이 필요하군요. 이별이라는 식상한 주제도 김행숙의 시에서는 돌연한 이미지들의 결합을 통해 경쾌하게 살아나네요.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고, 하염없이 빨래를 하고, 하염없이 낮잠을 자고, 하염없이 명상을 해 보아도, 좀처럼 빠져나가지 않는 얼굴이 있나요? 방에 잘못 들어온 말벌처럼 그(그녀)에 관한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나요? 그러다 어느 날 아무도 생각나지 않고 그립지 않은 순간이 온다면, 그건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렀다는 신호예요. 갑자기 시야가 투명해지고, 담배연기나 수증기처럼 가벼워진 영혼은 잠시 날아오를 수도 있겠죠. 그토록 당신을 괴롭혔던 기억을 벗어두고 잘 마른 빨래처럼 비로소 손 흔들 수 있겠죠. 누군가를 잊으려고 사래를 치는 동안 당신의 영혼이 부단히 헹구어졌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되겠죠.
장석주 시인 평설
이별에 대처하는 명랑한 자세
이별을 노래하는 시들은 많다. 누구나 이별을 겪으며 살기 때문에 이별을 노래하는 시들이 많은 건 당연하다. 그러나 김행숙처럼 노래하는 시인은 없다. 절대로 나뉠 수 없다고 믿는 것이 분리되는 고통은 어느 날 계엄령과 같이 갑자기 다가온다. 이별은 단절의 재앙을 선고받는 것, 많은 것들이 무로 환원하는 사건, 다시는 합일되지 않는 무와 무로 나뉘는 역사다. 그 액운은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마치 모래 위에 부러진 손톱 같이 아무렇지도 않다. “백사장 위에 부러진 손톱들 / 아무도 이어줄 수 없는 무와 무”(T. S. 엘리엇) 대부분의 이별은 저격수와 같이 우리 심장을 쏜다. 사람들은 이별의 총알을 맞고 쓰러진다. 금기들이 생기고 몸과 마음은 금기들이 만드는 감옥에 갇힌다. 이별한다는 것은 벽 없는 감옥의 수인(囚人)이 되는 것이다. 이별의 능력이란 먼저 이별할 수 있는 능력이고, 그 다음은 이별의 후유증을 견디는 능력이고, 마침내 자아를 살육하는 부재와 고요히 다가오는 심장마비를 극복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김행숙은 이별을 마치 즐거운 유희라도 되는 것처럼 쓴다. 이별을 감당하는 처지에 놓인 시적 화자는 스스로를 담배연기, 수증기, 산소라고 말한다. 이별을 겪어 내는 시의 화자는 어디에도 심각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이별의 아픔, 이별의 슬픔들을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에 실어 버린다. 그것들은 손에 잡히지 않고 곧 공중에서 사라져 버린다. 혼자 사라지지는 않는다.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태울 거야”라고 말한다. 이 시적 어조의 경쾌함과 명랑함이라니! 복수조차 명랑한 일에 속하는 것처럼 말한다. 시적 화자가 겪는 이별은 명랑한 이별이다. 그래서 마치 세상의 모든 이별이 명랑한 것인 양 오해될 수 있겠다.
이별 뒤에 당신은 한순간의 환각이 만든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별을 하고 빨래를 하고 당신을 담배처럼 태운다. 당신의 “비계가 부드럽게 타고”, “피가 끓고”, “내장이 연통이 되”고, 마침내 “당신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당신을 태우는 것은 당신을 식도로 삼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가 삼켜 버린 당신의 존재감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어디에도 존재감이 없는 당신과, 당신의 흔적들을 굳이 잊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무로 돌아가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미 무로 환원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2시간씩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머리에서 폭발한 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나’는 노래를 부르고, 빨래를 하고, 낮잠을 자고, 명상을 하고, 헛것을 본다. 그 시간들을 주목하자.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 “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그리고 이윽고 “헛것”을 본다. 그것들은 이별의 감옥에서 필사적으로 도주하기다. 시의 화자는 웃고 있지만 실은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이다. 노래를 하고, 빨래를 하고, 낮잠을 자고, 명상을 하는 동안은 이별의 고통에 대한 면죄부를 받는 시간이다. 이 시적 어조의 명랑성 아래에는 침묵의 무수한 울부짖음과 슬픔의 십이지장과 이별의 저격을 받고 죽은 마음의 시체들이 숨어 있다.
이별은 마음의 씨앗들을 짓이겨 버린다. 차라리 씨앗들이 짓이겨진 뒤에는 유태인 600만 명이 사라진 2차 세계대전 뒤에 태어난 베를린의 소년들처럼 천진난만할 수가 있다. 시적 화자는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 하염없이 낮잠을 자다가” 문득 눈을 뜬다. “눈을 뜰 때가 있었어”라는 구절은 ‘나’의 슬픔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내내 눈을 감고 노래를 부르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뜻이다. 눈을 뜬다는 것은 이별의 슬픔에 대해 눈을 뜬다는 것이다. 그때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데”, 그러면 시적 화자는 더욱 사랑스럽고 모호해진다. 그리하여 삶의 인습에 묶인 제 존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익명성 속에 숨긴다. 담배연기, 수증기, 냄새들이 공중에 섞이는 것처럼. “우리는 아픔 없이 잘게 부서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섞일 수 있습니다. 만두의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초대장〉) 만두는 이것저것들이 잘게 부서져 뒤섞여 만든 익명의 세계다. 개별성을 지워 버린 만두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당신은 무궁무진한 만두의 세계 속으로 흘러가 버렸다. 이별을 겪고도 씩씩함을 잃지 않은 시적 화자는 이웃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든다.